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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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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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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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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The Destroyer.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마이크 리바가 아트디렉터 빌에게 손짓했다.


“디렉터에게 보여 줘.”


빌이 냉큼 콘셉트 아트를 펼쳐 보였다.

폭격에 쑥대밭이 된 보스니아의 한 마을이다.

그림 왼쪽은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아 잔해만 남아있다.

오른쪽에는 3층짜리 건물이 반파되어 있다.

그 사이로 하늘이 펼쳐져 있는데, 불길한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땅에는 콘크리트 파편과 부서진 가구 같은 쓰레기가 곳곳에 널려있다.

콘크리트 잔해에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철근들은 반파된 건물의 비어있는 곳을 향해 구부러져 있다.

마치 이 암담한 상황을 벗어날 수도 있는 출구를 가리키는 것 같다.

건물 잔해 너머로는 희미하게 탱크가 보인다.

탱크 위에는 파란색 아디다스 추리닝 상의를 입은 블라르코 부코비치(대적자)가 저격총을 겨누고 있다.

그 가운데 레모 윌리엄스가 그림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등을 지고 우뚝 서있다.

그는 녹색의 옷을 입고 있다.

전체적으로 레모 윌리엄스가 사면초가에 빠진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시퀀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네요.”


류지호의 감상대로다.

무수히 많은 암시와 상징들이 콘셉트 아트 한 장에 들어가 있다.

레모 윌리엄스는 반파 된 건물을 약간 등진 채 시선은 탱크 쪽을 향하고 있다.

늘어뜨린 두 팔은 무기력해 보인다.

그런데 두 주먹은 굳게 쥐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레모 윌리엄스가 포위된 것처럼 보이지만, 반파된 건물 방향으로 움직이면 안전할 것처럼 느껴진다.

레모 윌리엄스가 숨통을 틔워주고 있는 오른쪽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임을 류지호는 알고 있다.

레이먼드와 스펜서 두 사람 역시 레모 윌리엄스가 탱크를 향해 달려들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폐허와 절망을 암시하는 회색과 검은색.

두 개의 색이 섞여있는 콘크리트 건물과 잔해들.

생명, 성장을 암시하는 녹색.

그런 색상의 의상을 입고 있는 레모 윌리엄스.

비정, 건조, 차가움을 상징하는 파란색 추리닝을 입은 악당.

먹구름이 낀 하늘과 반파 된 오른쪽 건물 쪽에 살짝 보이는 노란색까지.


‘디테일의 끝장을 보여주네.’


콘셉트 아트가 아니라 하나의 시퀀스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술작품 같았다.

이 같은 일러스트레이션은 아이디어 전개와 상황 연출을 하기 위한 사전 예술 단계다.

영화가 개봉한 후에는 하나의 상품이 되기도 한다.

콘티북 출판물에 삽입될 수 있고, DVD 부록에 포함될 수 있으며, 독립된 하나의 일러스트북으로 판매될 수도 있다.

사실 마이크 리바의 콘셉트 아트는 과한 면이 없지 않다.

이 정도 섬세한 일러스트레이션은 SF영화나 애니메이션 혹은 광고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이니까.

그럼에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감독이 다른 누구도 아닌 류지호이기 때문에.

<The Killing Road>에서 보여준 것처럼 류지호는 풍부한 레퍼런스 활용과 강박적인 디테일 추구를 하는 타입이다.

당연히 마이크 리바도 그 부분을 잘 알고 있다.


펄럭펄럭.


마이크 리바가 10장 정도의 콘셉트 아트를 보여주었다.

두 장 정도는 너무 나간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 콘셉트 아트에 치운이 묘사되어 있다.

눈이 내리고 있는 광활한 벌판이다.

사방에 전투불능이 된 탱크들이 널브러져 있다.

다른 탱크들과 비교해 체급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 탱크 한 대가 야수처럼 포효하는 것 같다.

치운은 한복을 연상시키는 하얀 도포를 입고 있다.

검붉은 폭발과 검회색의 포연들.

하얀색은 보통 순결, 순수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 콘셉트 아트에서는 흰색 한복을 입은 치운이 흰색 눈보라와 함께 검붉은 폭발을 집어 삼키고 탱크마저 날려버릴 것 같은 기세를 보여준다.

치운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탱크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눈 폭풍을 떠올리게 한다.


“명도와 채도를 너무 많이 떨어뜨려서 탁하고 우울하네요.”

“좀 더 선명하고 깨끗했으면 좋겠나?”

“네.”


마이크 리바가 사진첩을 꺼내 펼쳐보았다.


“히에로니무스 보쉬 그림이네요?”


영화감독들이 색에 대한 영감을 얻을 때 자주 참조하는 화가들이 있다.

대표적인 화가가 피카소다.

마이크 리바가 제시한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은 그로테스크하고 사악하거나 탐욕스러운 분위기의, 범죄적이며 종교적인 장면에서 많은 영감을 주는 화가로 유명하다.

영화 <Se7ven>>을 보다 보면 이 화가의 그림들이 절로 떠오른다.

대중들에게는 마이키 잭슨의 ‘Dangerous’ 앨범 커버가 떠오를 수도 있다.

현란하고 키치적이고 또 묘하게 불길함을 선사하는 앨범 커버에는 히에로니무스 보쉬 그림들을 패러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류지호의 수준으로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을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영감을 얻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치 수수께끼 같으니까.

그림 속 상징과 은유를 궁리하며 얻게 되는 이미지와 아이디어들이 쏠쏠 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여주실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 더 난해한 그림을 보여주시네요.”

“그림의 해석은 집어치우고, 색과 톤만 봐주게.”

“알겠어요. 레이도 콘셉트 아트 다 봤죠?”


레이먼드 쿤디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 리바가 콘셉트 아트를 보여준 첫 날 이후 류지호는 만사를 제쳐 두고 <Remo : The Destroyer>의 톤 앤 매너(Tone & Manner)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주일이 흐르고 주요 헤드스태프들을 모아 톤 앤 매너 회의를 진행했다.

딱딱한 사무실이 아닌 LA 북쪽의 대표적인 휴양지 산타바바라의 리조트에서 진행했다.

초호화판 프리프로덕션이라고 부러워 할만 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또는 A-List 감독에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감독에게 5성급 호텔 스위트룸을 제작기간 내내 제공하기도 한다.


“여기 그린과 블루가 있어.”


마이크 리바가 가리킨 곳에는 헤어로니무스 보쉬의 그림이 걸려 있다.

‘세속적 쾌락의 정원’이란 그림이다.

트립티크(Triptych)라는 참나무 패널에 3개의 그림이 서로 맞붙은 세 폭짜리 그림이다.

왼쪽 패널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아담과 이브가 메인인 낙원을 보여준다.

중앙에 가장 큰 그림은 성욕, 식욕 등 온갖 지상의 쾌락의 정원이 펼쳐진다.

오른쪽 패널은 죄인들이 고문과 징벌을 받는 지옥도가 묘사되어 있다.

왼쪽 패널에서 오른쪽으로 챕터를 이동한다면, 낙원에서 타락으로 마지막으로 지옥으로 마무리되는 여정을 보여준다.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지옥도는 결국 인간의 쾌락과 죄의 결과라는 의미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사실 그림 자체만 보면 엄청 산만한 그림이다.

온갖 메타포가 범벅된 정신 사나운 작품이다.

때문에 필요한 것만 취할 수 있는 영리함과 상상력이 요구됐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Remo : The Destroyer>의 톤 앤 매너 회의를 진행했다.

중간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 산타바바라 시내를 산책하기도 하고,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산타바바라는 그 이름처럼 스페인풍의 도시다.

몇 군데 관광명소를 둘러보기도 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헤드스태프들과 톤 앤 매너에 대해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영화에서 색은 시공간적 배경과 전달한다.

또 캐릭터를 정의한다.

감정, 무드와 분위기, 심리적인 면까지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색채 설계는 매우 섬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저 강렬한 색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매우 낮은 수준의 프로덕션 디자인이다.

비주얼이 뛰어난 감독들은 색으로 이야기를 한다.

색이 지닌 고유한 상징을 이용하고 또 변형한다.

실력 있는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아트 디렉터들은 절대로 색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영화 한 편마다 사용되는 색의 '팔레트'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만 색을 사용한다.

아카데미 미술상 부분에 여섯 번 후보에 올랐으면 두 번이나 수상했던 리치 실버트 같은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딕 트레이시>를 작업할 때 원작 코믹북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원색을 주로 썼다.

그는 7가지 색 가운데 메인 색상을 정하고, '딕 트레이시 레드' '딕 트레이시 블루' '딕 트레이시 옐로우' 등의 색을 따로 지정해 그 안에서만 작업했다.

마이크 리바 역시 마찬가지다.

크게 4개의 메인 색상을 정했다.

그 안에서 명도와 채도를 조절해 <Remo : The Destroyer>에서 사용하게 될 색의 넘버를 붙였다.


“Remo No. 1... 8...21."


물론 색채 이론이 영화 작업에 백퍼센트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에 색이 사용될 땐, 기본적이며 일반적인 의미 작용이 분명히 존재한다.

대략 따뜻한 색은 부드러움과 휴머니티를, 차가운 색은 감정의 메마름이나 소외된 느낌을 혹은 권력과 힘을 상징하고, 뜨거운 색은 섹슈얼리티, 분노, 열정 등을 의미하고, 밝은 색은 행복이나 기쁨 혹은 경솔함을 나타내며, 모노(단색) 톤으로 이뤄진 영화는 단조로움, 통일감, 감춰진 감정 등을 보여주며 회색은 삶의 공허함을, 검정색은 죽음의 현존을 의미한다.

극단적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 흰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색과 디자인은 그 시대의 트렌드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실내 세트에 텔레비전이 놓여있다고 치면, 제품의 색상과 디자인이 몇 년도 식인가에 따라서 그것이 정보가 되고 상징이며 은유가 된다.

등장인물의 성격, 관심사, 정체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실 영화에서 색을 명확하게 규정지을 순 없다.

감독마다 또 영화마다 색이 어떤 의미나 상징을 위해 사용되는지 그 경우의 수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웰메이드 영화일수록, 엄격한 색의 설계 속에서 창조적인 컬러의 사용을 보여준다.

게으른 영화일수록 색의 설계와 사용이 평범하다.

톤 앤 매너를 결정하는 과정은 촬영감독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감독, 미술과 합의한 색을 토대로 조명을 설계하기 때문이다.

Timely와 AC 코믹스의 수많은 캐릭터들의 유니폼 색상에도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다이하드>에도, <타이타닉>에도 심지어 디맨션 필름에서 제작하는 비디오 영화에도.

어떠한 영화에도 색상 이론이 프로덕션 디자인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연출하는 사람은 스토리 전달 뿐만 아니라 빛과 색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파격도 할 수 있다.

빛과 색감을 무시하고 영화를 찍는 거장들은 그들만의 철학이 확고했다.

날것.

리얼리티라고 주장하는 영화적인 가짜.

그 자체가 현실의 어떤 메마른 결핍을 상징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몰라도 된다.

그저 느끼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라고 전문가들이 대신 지식과 재능을 영화에서 발휘하는 거다.

그냥 찍어서 보여주는 걸 돈 내고 볼 이유가 없다.

지식과 철학을 가진 예술가가 현실을 가공하고 또 의미를 부여해 찍어서 보여주니까 돈 내고 볼 가치가 생기는 거다.

암튼 류지호와 헤드스테프들이 치열하게 톤 앤 매너와 콘셉트에 대해 토론했다.

산타바바라에서 철수하기 전날 최종적으로 정리가 됐다.

이후로 류지호가 할 일은 없다.

각자 구체적인 설계안을 가지고 찾아오면 류지호가 검토하고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영화감독은 한 편의 영화를 작업하면서 세 번의 OK를 받아야 한다.

첫 번째는 제작사로부터, 두 번째는 투자자로부터.

최종적으로는 관객으로부터 선택 받아야 한다.

그 외에 모든 영화와 관련 된 선택권은 감독에게 있다.

그 과정은 매우 어렵다.

고통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2시간짜리 영화적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결과물에 따라 천상과 나락을 오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 ❉ ❉


덩~따다 쿵덕쿵.

덩덩 쿵덕쿵. 덩덩 쿵덕쿵!


UCLA의 로이스 홀에서 신명나는 한국의 풍물 장단이 흘러나왔다.

풍물패 학생들이 무대에서 사물놀이 공연 리허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4월 초중순 UCLA에서는 한국과 관련한 연례행사가 열린다.

‘UCLA 한국문화의 밤(UCLA Korean Culture Night)‘이다.

류지호가 입학했던 1990년에 한국유학생 중심으로 풍물패 동호회가 결성됐다.

그때부터 시작된 이 행사가 벌써 8회를 맞이했다.


“초창기에는 소박한 장기자랑이었는데....”

“지호형이 복학하고부터 확 커진 거 아니었어?”

“그 형이 후원하면서 학교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까.”


풍물패 후배들이 쑥덕거린 내용들이 대체로 맞았다.

류지호가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유학생과 한인교포 학생들의 갈등이 해소되었다.

한인회 내부의 갈등요인이었던 일부 말썽꾸러기들을 류지호가 치워버리기도 했고, LA폭동을 겪으며 한국계끼리 편을 가르는 것에 대해 반성도 있었다.

한국 문화유산과 전통문화를 미국사회에 알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어울리는 파티 같은 공연으로 기획되었다.

그 취지에 공감해 류지호가 후원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한국문화의 밤 행사에 참여하는 여러 클럽들은 모두 UCLA 학생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올해는 프로그램이 많이 늘었네?”


행사 브로셔를 보던 류지호가 묻자 송문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는 한국의 밤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현재 UCLA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다 네 덕이지 뭐.”

“올해도 사물놀이는 한국유학생들만 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렇지. 우리 애들은 정말 열심히 준비하는데 여기 애들은 반 취미생활이니까. 실력차이가 많이 나서 무대에 올릴 수 없어.”

“여러 인종이 어울려서 꽹과리도 치고 장구를 치면 좋겠는데.... 조금 아쉽네.”

“그래도 미첼이라고 무용 전공하는 애가 부채춤을 추고, 경제학과의 리처드가 상모를 돌릴 거야. 처음 한국유학생 동아리 장기자랑 같던 것에서 참 많이 발전했지.”

“브레이크 댄스 공연에는 다른 나라 출신들이 제법 섞여 있겠네?”

“주로 아프리카계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처음 행사를 시작할 때만해도 풍물패 공연위주였다.

현재는 연극 공연과 한국 전통춤 공연, 브레이크 댄스, 한국가요 및 팝 커버댄스 공연 등으로 레퍼토리가 풍부해졌다.


“유학생이나 교포 학생들은 한국 아이돌 안 좋아해?”

“십대의 승리, 걸그룹으로 E.S.S가 가장 핫 할 걸.”


'20년 후라면 K-POP 커버 댄스팀들의 공연을 볼 수 있겠지. 아마도....'


여담으로 ‘UCLA 한국 문화의 밤’은 해를 거듭할수록 미국 내 가장 큰 한인 학생 이벤트로 성장하게 된다.

매년 1,800명이 넘는 관객들이 공연을 즐기게 된다. 전적으로 UCLA 한인학생회의 노력 때문이다.

류지호는 그저 금전적으로 약간 거들 뿐.


“공연보고 바로 가니까 나 찾지 마.”

“뒤풀이 안 하고?”

“선약이 있어서. 웨스트우드 다운타운의 클럽 통째로 빌려놨으니까 후배들하고 재밌게 놀아.”

“고맙다.”


공연시간이 가까워졌다.

류지호가 만사 제쳐두고 UCLA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40대 중반의 호리호리한 체격의 백인 남자를 만났다.

<타이타닉>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영화음악가 로이 호너(Roy Honer)다.

27살에 처음 영화 음악에 참여해, 올해까지 20여 편의 영화음악 작업한 베테랑이다.

80년대 <스타 트랙Ⅱ·Ⅲ>, <코만도>, <에일리언 Ⅱ> 등 다수의 액션영화 음악에 참여하고, 90년대에는 <딥 임팩트>, <아폴로 13> 같은 블록버스터부터 <가을의 전설>, <브레이브 하트> 같은 문제작은 물론 <쥬만지>, <랜섬> 같은 영화까지 작업했다.

영화장르를 불문하고 한창 재능을 뽐내고 있다.

올해는 류지호의 <Remo : The Destroyer>와 <마스크 오브 조로>를 작업하기로 했다.

로이 호너는 신디사이저를 웅장하게 활용하는 액션 영화 음악 뿐 아니라 아일랜드 전통의 서정적인 선율을 살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오리지널 필름 스코어뿐만 아니라, 보컬 곡에도 적극적이다.

이미 <타이타닉>에서 증명했듯 보컬 곡으로 주제가를 만들어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에도 능했다.


“아마추어들의 공연이라 스킬 부분에서는 미숙할지 몰라요.”

“걱정 마. 충분히 감안하고 공연을 즐길 테니까.”

“내가 보낸 준 CD와 비디오테이프는 확인해 봤어요?”

“흥미로웠어.”


<007 시리즈>의 건배럴 시퀀스 컨필레이션, <미션 임파서블>의 메인 테마.

류지호는 그 같은 인상적인 테마 곡을 원했다.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Remo : The Destroyer>의 테마음악에 대한 다양한 레퍼런스를 로이 호너에게 보냈다.

펫샵 맨의 ‘It's a sin'을 류순호가 파워 메탈로 편곡해 연주한 곡(감마레이 스타일)과 김득우 사물놀이패의 풍물공연 실황 비디오테이프도 보냈다.

‘아리랑’은 물론이고 <서편제>의 ‘천년학’을 비롯한 다양한 한국 전통음악 연주곡들도 함께 보냈다.


“치운의 테마는 코리안 재즈풍으로 마구 영감이 분출되고 있지.”

“코리안 트레디셔널 뮤직입니다. 로이.”

“필링이 비슷한 면이 많아서.”

“85년 오리지널 영화에서 사판이 작업했던 곡들은 들어봤어요?”

“사판이 사용한 한국의 타악기가 뭐지?”

“아마 꽹과리와 장구였을 겁니다.”

“캘거리?”

“로이스 홀에서 사물놀이를 보면서 내가 설명해 줄게요.”

“내가 졸업한 대학에는 한국 전통음악 수업이 없었어.”


로이 호너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류지호로서는 다행이었다.

일부 유명 아티스트 중에는 꽉 막힌 이들이 많았으니까.

류지호가 짐짓 자랑을 늘어놨다.


“로이가 잘 몰라서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타악기를 다루는 많은 음악가들이 꽹과리나 장구 하나는 다 갖고 있어요. 미국 대학에도 한국 전통 음악 수업이 많이 생겼지요.”


사물놀이만 놓고 보면 1984년 영국 더럼대학 음대에서 정식과목으로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서 사물놀이팀이 만들어졌다.

2010년 즈음에는 전 세계 50여 개국에 사물놀이패가 만들어진다.

미국 대학만 해도 200개가 넘게 된다.

그 시기가 되면 사물놀이를 전공으로 하는 외국인 교수가 나오고, 그 제자들도 배출되기 시작한다.

미국에서는 K-POP 이전의 한류는 태권도와 사물놀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다른 레퍼런스들은 일관성이 없죠?“


로이 호너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펫샵 맨도 웃겼지만, 힙합의 탱크클랜, 헤비메탈의 발 좀비와 마릴린 찰스먼로, 메탈 판테라까지. 하하.”


류지호가 레퍼런스라고 보낸 음악들은 두서가 없었다.


“웃어서 미안. 비웃은 것은 아니야. 디렉터가 설명한 캐릭터들과 대입해보면 의도는 충분히 전달됐어.”


샘 잭슨이 연기하게 될 콘 맥클리(Conrad MacCleary)를 설명하기 위해 힙합크루 탱크클랜의 음반을, 그린베레 출신의 레모 윌리엄스를 설명하기 위해 헤비메탈 밴드의 음반을 참고하라고 보냈다.

영화 전체의 레퍼런스가 아니었다.

캐릭터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함이었다.


“디렉터의 동생이 음악을 한다고?”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있어요.”

“'It's a sin'은 동생이 연주한 거야?”

“혼자 악기들을 각각 연주해서 믹싱했더라고요. 아마추어니까 너무 심한 말은 참아줘요.”


저녁 7시 정각이 됐다.

본격적인 한국문화의 밤이 시작됐다.

1,800석의 객석 모두를 채우진 못했다.

그나마 1층 객석은 얼추 채운 것 같았다.

민요공연, 부채춤, 장구춤 공연이 순서대로 이어졌다.

류지호는 로이 호너를 공연 내내 곁눈질했다.

혹시나 지루해하지는 않을까 싶어서다.


“오오! 굿잡~”


로이 호너는 학생들의 무대가 끝나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시작된 사물놀이.


덩기덕 쿵 더러러... 덩기덕 쿵덕.


꽹과리, 징, 장구, 북.

흔히 꽹과리 소리는 천둥, 징 소리는 바람, 장구 소리는 비, 북소리는 구름에 빗대어 말하곤 한다.

농악의 기본 네 악기를 사용하는 사물놀이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사물놀이의 대부 김득우를 주축으로 70년대 말에 시작됐다.

명맥이 끊겨가던 농악을 타악 4중주로 새롭게 만들어낸 음악이 사물놀이다.

전통적이지만 새롭게 창안된 음악이다.

그렇다 보니 사물놀이패는 관현악단과 협연하거나 재즈 밴드와 함께 공연하는 등 다양한 퓨전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와서 새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통으로부터 꽤나 유연하고 자유로웠다.


챙챙챙....


느리고 잔잔한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다가....


덩더러러러....


북과 장구가 들어오고..


괭~


징이 합세했다.

무대 위에 겨우 네 개의 악기로 보이는 물건을 지닌 네 명의 학생이 무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다지 품위가 있어보이진 않는다.

로이 호너는 처음에는 별다른 기대감을 갖지 않았다.

불과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그를 포함한 모든 청중이 네 악기가 내는 소리와 리듬에 빠져들었다.

한국의 어르신들이라면 어깨를 덩실거렸을 흥이다.

로이스 홀에 모인 청중들은 고개 짓을 까딱거리나 목과 상체를 흔들었다.

리듬이 빨라졌다 잦아들었다 장단을 넘나들면 그에 호응했다.

당연히 원조 김득우 사물놀이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신명나면 장땡이지....!’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즐겼다면 사물놀이 공연은 성공한 것이다.

브레이크 댄스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로이 호너가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한국문화의 밤에 발걸음을 한 이유는 부채춤과 사물놀이 공연을 라이브로 경험하기 위해서다.

목적을 이뤘으니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류지호는 로이 호너를 데리고 베벌리힐스로 갔다.

단골이 된 회원제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와인을 즐겼다.


“<Remo : The Destroyer>는 원작소설과 코믹 북이 있는 영화야. 솔직히 나는 원작을 썩 좋아하지 않아.”

“원작은 신경 쓰지 마세요. 퓨전판타지 성격이 강한 영화가 될 거예요. 관객에게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몰입도가 중요하죠. 당연히 음악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어요.”


관객이 <Remo : The Destroyer>가 보여주는 판타지에 동의하려면 현실과 괴리된다는 의문을 지워낼 만큼 작품 그 자체에 흠뻑 빠져야 한다.

스토리텔링, 뛰어난 영상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음악에 기대는 부분이 매우 크다.

<007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은 다소 느슨한 장면이 이어지다가도 시그니처 테마곡이 나오면 관객들은 절로 기대감을 갖는다.

테마음악과 함께 다음 장면에서 뭔가 보여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007>, <미션임파서블>, <터미네이터>의 유명한 테마곡은 재즈 오케스트라를 기반으로 한다.

<007> 시리즈는 후속편에서 원곡을 그대로 사용(녹음은 새롭게)하지만, 다른 두 편은 편곡을 다르게 해서 시리즈별로 차별점을 준다.

편곡이 다르다고 해서 시그니쳐(signature) 혹은 아이덴티티(identity)가 훼손되진 않는다.

프랜차이즈 시리즈는 같은 주인공이 나오고 설정도 공유할 경우 같은 주제음악을 사용했을 때 관객이 받아들이기 쉽다.

시리즈 영화는 아무리 빨라도 1년 단위로 개봉한다.

매 시리즈마다 같은 테마곡을 쓰게 되면 그 시간적 간격으로 오는 분절의 느낌을 잊게 만들어줄 수가 있다.

<Remo : The Destroyer>의 오리지널 영화 주제곡을 기억하는 관객은 없다.


‘로이 호너가 첫 번째 편에서 그 어려운 것을 해내야 하지.’


그래야 시리즈로 이어졌을 때 관객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 테니까.


❉ ❉ ❉


류지호의 집으로 반가운 인물들이 방문했다.

주인공은 트라이-스텔라 출신으로 Timely Entertainment 옮겨 간 사람들이다.

최고경영자(CEO) 샘 리버먼.

재무책임자(CFO) 래리 킴.

최고운영책임자(COO) 데니스 스캇.

Timely Studios 기술지원 총괄 버나드 휴즈.

쟁쟁한 임원진 사이에 끼어있는 백인 청년에게 대뜸 류지호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개빈.”


개빈이라 불린 청년이 얼른 손을 맞잡았다.


“아, 네. 영광... 아니 만나서 반갑습니다.”


20대 중반이지만 곧 시원하게 머리가 벗겨질 것이 확실해 보이는 넓은 이마 때문에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청년이다.

벌써부터 듬성듬성한 머리숱을 자랑하고 있는 청년의 이름은 개빈 페이지(Gavin Page).

이전 삶에서 Timely Cinematic Universe를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몇 년 앞 서 Timely Entertainment의 일원이 됐다.


“저녁식사가 막 준비가 끝났어요. 들어갑시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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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The Destroyer. (13) +7 22.12.10 4,149 145 26쪽
362 The Destroyer. (12) +9 22.12.10 3,783 127 26쪽
361 The Destroyer. (11) +9 22.12.09 3,925 146 28쪽
360 The Destroyer. (10) +9 22.12.09 3,758 124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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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The Destroyer. (7) +9 22.12.07 3,944 144 25쪽
356 The Destroyer. (6) +10 22.12.07 3,830 131 25쪽
355 The Destroyer. (5) +9 22.12.06 4,094 141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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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Destroyer. (2) +7 22.12.05 4,025 121 25쪽
351 The Destroyer. (1) +12 22.12.03 4,349 146 26쪽
350 위험으로 내몰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마.... +8 22.12.02 4,311 137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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