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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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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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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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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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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The Destroyer. (8)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액션!”


와이어를 달고 있는 스턴트 더블 트래버가 힘차게 몸을 띄웠다.


“지금이야!"


동시에 스턴트팀이 와이어를 당겼다.

여기서도 문제가 있었다.

할리우드에서는 와이어를 FX팀이나 그립팀에서 다룬다.

아시아권에서는 주로 스턴트팀이 맡는다.

FX팀에서 와이어를 다룰 것인지 스턴트팀에서 맡을 것인지를 두고 말이 많았다.


“홍콩에서 와이어를 충분히 다뤄본 경험이 있는 초이가 특효팀을 지휘하도록 합시다.”


류지호가 나서서 분란(?)을 정리했다.


“3. 2. 1. 당겨!”


트래버가 뒤돌려차기를 하는 동시에 최영웅이 지휘하는 팀이 와이어를 잡아당겼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와이어에 도움을 받은 트래버는 공중에 몸이 뜬 상태로 돌려차기 속도를 조절할 수가 있었다.

그를 통해 상대에게 발차기가 닿기 직전 속도를 살짝 늦췄다.

간발의 차이지만 상대가 가짜 태가 나지 않게 멋지게 받아서 리액션을 펼쳤다.

트래버가 힘을 빼고 발차기 속도를 순간적으로 죽였기 때문에 상대 스턴트맨이 실제로 얼굴에 발차기가 닿게 되더라도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 터.


꽈당.


나가떨어진 상대는 벽에 등짝을 부딪쳤다.

튕기듯이 바닥에 떨어졌다.

상대 배우 역시 와이어를 달고 있었다.

당연히 리액션도 박진감이 넘쳤다.

홍콩영화계에서 격투액션을 찍을 때 쓰는 기법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Remo : The Destroyer>의 액션은 할리우드 액션이 아니라 아시아 액션을 많이 받아들였다.

다만 공격하는 동작은 담백하고, 리액션을 화려하게 디자인했다.

홍콩영화나 한국영화는 대체로 공격하는 쪽까지 설레발이 심하다.


“더블은 빠지고 윌리 분량으로 넘어갑시다!”


스턴트 더블이 빠지고, 와이어도 걷어냈다.

실제 배우들이 출연할 차례다.


꾸욱.


바닥에 엎어져 있는 러시아 요원의 머리를 레모가 발바닥으로 밟아준다.


퍽.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다른 러시아 요원의 얼굴을 레모가 무릎으로 가격하는 커트도 따로 촬영했다.

그 장면을 찍을 때도 윌리 워커의 무릎이 얼굴에 닿는 순간, 스턴트맨이 힘을 빼면서 고개가 젖혀지면서 벽에 뒷머리를 부딪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벽과 충돌한 후에 살짝 튕기는 느낌을 줬다.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장면에서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세련된 방식의 디테일이다.

모니터를 보던 최영웅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이런 방식은 참 재밌는 것 같아.”


헨리 깁슨을 비롯해 Vic & Jay 소속 스턴트맨들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별 것 아닌 디테일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대형스크린에서 보면 임팩트가 꽤 있어.”


미래에도 자주 쓰는 방식은 아니다.

얀쯔단이나 일본 야쿠자 영화에서 액션의 리듬감을 주거나 타격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간간이 쓰던 디테일이다.

특히 일본의 하드코어한 액션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류지호는 워낙 영화를 잡식으로 섭렵하다보니 자신의 전공도 아니었던 액션영화의 소소한 기법까지도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물론 아직 일본 액션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디테일이다.

본래는 10년은 지나야 써먹는 액션 디자인이다.


“R등급이니까 가능한 거야. PG-13부터는 못 써먹을 걸?”

“왜?”

“일종의 확인사살 같은 거잖아.”


어차피 <Remo : The Destroyer>는 R등급으로 제작되고 있다.

어지간한 폭력묘사는 다 가능했다.

그렇다고 사지절단이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장면을 묘사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응용은 다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방사룡 형이 자주 쓰는 거야.”


최영웅의 진가는 다양한 와이어의 사용에서 드러났다.

레모가 로우킥을 먹이는 순간, 러시아 요원이 앞으로 자빠지는 커트가 있다.

러시아 요원을 연기한 스턴트맨의 신발에 와이어를 연결해 킥이 닿는 순간 잡아 당겼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 스턴트맨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훨씬 실감나는 리액션 장면을 얻을 수 있었다.

안전장치로 와이어를 쓴다고 해도 부상의 위험은 늘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류지호와 스턴트팀은 부상위험을 감수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CG가 만능도 아닐뿐더러, 그것으로 만들어진 영상과 직접 연기한 화면은 리얼리티와 생동감의 차이가 분명 존재했다.

다행인 점은 미술지원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격투 시퀀스를 촬영한 골목의 벽과 바닥에 미술팀이 미리 작업을 해 두었다.

스턴트맨들이 날아가 부딪치거나 고꾸라지는 벽과 바닥은 실제로는 스티로폼과 충격흡수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

게다가 스턴트맨들이 몸에 부착하고 있는 각종 안전장치도 가볍고 튼튼했다.

제작비가 넉넉하니 부릴 수 있는 호사(?)다.


“좋았어!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리허설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러쿵저러쿵 토론과 의논이 없는 촬영현장이다.

스턴트 디자인에 따라 미술팀이 현장을 완벽하게 만들어놓았고, 그립이 미니 크레인과 스태디캠 등을 대기 시켰다가 상황에 맞게 즉각 운용했다.

프리비주얼까지 준비한 류지호다.

그것을 토대로 현장에서 재현만 하면 되었다.

물론 누워서 떡먹기라든가 하는 쉬운 촬영은 아니다.

현장에서 헤매거나 의견충돌이 없었다는 것 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디렉터는 짧은 커트로 빠르게 편집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영화의 속도감이라는 것이 커트 길이와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속도감의 액션영화가 나오겠어.”


액션 디자인에서 한국, 홍콩, 미국 등 삼국을 혼합한 스타일이 나왔다.

일본식 고어(Gore)한 디테일도 간간이 섞었다.

치고, 막고, 반격하고, 막히고, 얻어터지는 복잡한 합은 배제했다.

최대한 시원시원한 액션을 추구했다.

잔인한 리액션도 많다.

벽돌 벽에 머리가 박살날 정도로 처박힌다던가, 날카로운 파편에 목이 뚫린다던가, 팔다리가 90도로 꺾인다던가 하는.

편집에서 커트 길이를 조절하겠지만, 1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 관람할 영화는 아니다.

물론 성적이면서 다소 화장실 유머스러운 대사와 욕도 많긴 하고.

암튼 1차로 공략해야 하는 관객이 북미를 포함한 영어권 관객이다.

화려하고 허세로 가득한 <007>시리즈와 달리 날 것 느낌이 물씬 풍길 예정이다.

세대를 앞서 영화를 내놓으면, 비평에서 칭송을 받을 수 있다.

관객이 못 따라오거나 납득하지 못하면 대중상업영화로는 실패다.

그래서 류지호는 힘을 뺐다.

고상한 척 우아를 영화에서 떨지 않기로 했다.

류지호는 영화 안에서도 효율을 중시하는 편이다.

액션영화를 찍으면서도 그런 자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 여기저기 늘어놓는 액션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에 물량과 아이디어를 쏟아 붓길 원했다.

액션의 강도와 스펙터클이 클라이맥스로 향할수록 에스컬레이터를 타듯 부드럽게 증폭되어야 하는 것만 놓치지 않도록 신경 썼다.

골목 액션도 훨씬 풍부하게 디자인할 수 있었다.

총알 피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액션 시퀀스를 구성했다.

총알 피하기는 <Remo : The Destroyer>의 시그니처다.

다만 <매트릭스>와는 다른, 영화적 리얼리티를 살리는 것에 집중했다.

인간이 손가락 관절을 움직이는 찰나를 간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걸 예측해서 반박자 빠르게 움직여 총알을 피한다는 것도 엉터리다.

그런데 <Remo : The Destroyer>의 세계관의 규칙과 배경이 충분히 영화에서 전달된다면 관객들은 그럴듯하게 느끼고 이해를 해준다.


‘그런 것을 핍진성(verisimilitude)이라고 한다든가?’


무협영화가 허황되다는 것을 관객들은 안다.

그럼에도 그 세계관을 인정하고 즐긴다.

Timely와 AC Comics 세계관 역시 마찬가지다.

류지호가 빅키 햄휴즈에게 물었다.


“아쉽지 않아?”


그는 <매트릭스> 작업을 마치고 호주에서 곧바로 동유럽으로 날아왔다.


“나는 스턴트를 사랑해.”


스턴트맨은 제2의 연출가이자 배우다.

액션 시퀀스에서만큼은 스턴트 코디네이터가 감독이다.

빅키 햄휴즈는 류지호와 <레니게이드>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이후로 할리우드에서 다양한 액션영화를 경험했다.

류지호의 단편영화부터 최근 졸업작품까지 협력을 해오고 있다.

빅키 햄휴즈는 액션영화역사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꿰뚫고 있는 유일한 감독이 류지호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무술가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온갖 무술까지 다 알고 있다.

베트남의 전통무술인 녓남(Nhất Nam)까지 알고 있을 정도니....말 다했다.


“그렇지만 단순히 스턴트를 뽐내기 위한 장면 연출은 싫어.”

“......”

“스토리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스턴트가 가미되어야 영화의 맛이 살지.”


류지호가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마음이 놓이네.”

“스턴트 시퀀스를 짜는 것은 난제를 푸는 것과 같아. 위험천만하거나 관객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장면을 탄생시켜야 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반복이 가능하고 안전한 스턴트를 짜는 것은 그런 것들보다 훨씬 복잡해.”

“영화 연출도 비슷해. 물론 스케일이 훨씬 커지지만, 본질은 같아."

“<매트릭스>의 CG 장면을 경험보고, 네 영화에 합류했어. 다시 한 번 느꼈지만, 인간의 눈은 정확해. 컴퓨터 그래픽이 과하면,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질 수밖에 없어.”


스턴트맨들의 공통적인 연출 특징을 꼽자면, 액션을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과 특수효과를 사용하는 추세와는 정반대다.

이들이 가진 스턴트와 영화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열정이 조금은 투박할지언정, 자존심과 긍지만큼은 어떤 대감독 못지않았다.


“직접 액션영화를 연출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어?”

“내게 기회가 올까?”

“글쎄. 모르지.”

“만약 나 같은 스턴트맨들이 연출자로 전향하려면 성공한 감독들이 진두지휘하는 현장을 수백 시간 동안 지켜보면서 배워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좋은 감독을 만나는 운 역시 중요하겠지.”


류지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번 영화에서 촬영장에서 사람들을 존중하는 방법과 내가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을 네게서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기대하진 마. 나도 처음으로 블록버스터를 찍는 초짜니까.”


빅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곧바로 반박했다.


“넌 준비된 감독이야.”

“고마워. 함께 잘 해보자고.”


언젠가 빅키도 스턴트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다.

그를 위해 자신의 일만 해서는 안 된다.

좋은 감독들이 스태프들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영화라는 매체가 무엇을 담아야 대중들에게 좀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을지, 배우고 경험해봐야 한다.

수많은 작품을 경험해 봤다고 해서 잘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가 만만한 것이 아니기에.


✻ ✻ ✻


할리우드 영화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현장진행이 상당히 빠르다.

유독 류지호의 촬영팀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감독인 류지호부터 프리프로덕션을 강박적으로 철저히 준비한다.

스토리보드에 이어서 프리비주얼도 류지호만의 작업 스타일이 될 것 같았다.

스토리보드를 활용한다는 것은 편집에 필요한 쇼트만 촬영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컨대 A와 B라는, 두 사람의 1분짜리 대화 장면을 찍는다고 치자.

일반적인 할리우드 현장에서는 먼저 와이드 앵글로 A와 B를 한 화면에 담아서 전체를 연기하는 1분짜리 마스터 쇼트를 찍는다.

그런 다음 인물 A를 중심으로 카메라를 옮긴 뒤 해당 장면을 다시 전부 연기하며 또 1분을 찍는다.

다음에는 인물 B를 중심으로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런 식으로 같은 연기를 앵글만 바꿔가며 여러 번 찍은 뒤, 편집할 때 감정과 리듬에 따라 각 쇼트를 자르고 붙여서 1분짜리 장면을 완성한다.

NG가 한 번도 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촬영 분량은 최소한 3분(3개의 쇼트) 분량이다.

필름 값만 따져도 3분 분량을 찍는데 수십만 원이다.

류지호가 스토리보드를 활용해서 같은 장면을 찍는다면, 비용이 최대 절반으로 줄어든다.

두 인물이 1분 동안 대사 몇 마디를 주고받는데, 각각의 대사에 어떤 앵글과 구도를 사용할지를 미리 정해 둔다면, 현장에서는 정해진 앵글에서 필요한 대사만 연기하면 된다.

역시 한 번도 NG가 안 난다고 가정했을 때 촬영 분량은 몇 개 쇼트로 나누든 다 합쳐서 2분을 넘지 않는다.

1분 분량을 얻기 위해 2분 안팎 분량의 편집본을 만드는 것이므로 비용이 상당히 절감된다.

아주 단순하게 계산했을 경우다.

배우의 감정과 호흡에 따라 분량은 늘어날 수 있다.

제작비가 넉넉하면 필름 걱정 없이 카메라 여러 대를 다양한 위치에 배치, 단 한 번 연기로 한꺼번에 촬영할 수도 있다.

한 번 세팅해서 한 번 촬영으로 끝나니 비용은 더 절약되고, 편집에 쓸 촬영 소스는 더 많아지고, 모든 촬영 소스에 담긴 연기도 완벽하게 일치한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는 대체로 그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

특히 해외 로케이션의 경우 회차가 늘어나면 제작비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기 때문에, 더욱 스토리보드와 멀티카메라 시스템(Multiple-camera setup)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앨리나, 트레일러에 있지 않고, 왜 이곳에 있어?”

“내가 디렉터 뒤에 앉아있는 게 신경 쓰여요?”


앨리나 와츠는 굉장히 열성적으로 영화에 임했다.

보통 촬영 셋업을 바꿀 때 배우가 위치할 곳에 대역(Stand-In)이나 촬영 2nd가 서 있다.

조명 세팅과 노출, 포커스까지 모든 준비가 끝이 나면 대역이 빠진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후에야 배우가 카메라 앞에 선다.

할리우드 거의 모든 촬영장에서 일반적인 풍경이다.

그런데 앨리나 와츠는 호출하기 전부터 이미 현장에 나와 있다.


“춥지 않아?”

“히터가 있잖아요.”

“그래도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트레일러에 가 있도록 해.”

“괜찮은데.... 디렉터의 지시니까 따를게요.”


그녀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다.

테스트 촬영할 때였다.

그땐 보통 어떤 필름을 쓸까, 어떤 필터를 쓸까, 조명 콘셉트는 어떻게 잡을까, 하면서 미술팀이나 의상팀까지 아울러 시각적 콘셉트를 확인한다.

그러면 배우는 의상과 메이크업을 끝내고 카메라 앞에서 촬영감독이 ‘자, 정면이오, 옆면이오’ 그러면 정면으로 몇 초, 측면으로 몇 초 그렇게 포즈를 취해준다.

보통 테스트 촬영 때는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현장 스태프들도 여기저기서 말을 많이 한다.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다.

그럴 때도 앨리나 와츠는 마치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서 연기했다.

테스트 촬영마저 숙연한 분위기가 조성될 정도다.

그녀의 열성적이고 진지한 태도에 스태프들도 자연스럽게 동조하게 되었으니까.

샘 잭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 춥거나 쉬고 싶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류지호의 근처에서 대기했다.

류지호가 함께 모니터를 보자고 하면, 신나서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아 말을 걸었다.

물론 단순한 수다가 아니다.

자신이 연기한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듣기 위함이다.

류지호로서는 첫 상업영화다.

그럼에도 모든 배우들이 촬영현장에서 감독과 친밀하게 소통하는 것은 아니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언제나 감독과 배우가 화기애애한 것만은 아니다.

계속된 야외 촬영에서 스태프들이 추위에 굼뜰 수밖에 없다.

콜 타임에 따라 크리스 워컨이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처 촬영준비가 끝나지 않았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무척 화를 냈다.

심지어.


“아마추어들 같으니라고!”


모욕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게 되면 스태프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원래는 감독도 찔끔해야 한다.

준비가 제대로 안 된 것에는 감독의 책임이 없을 순 없으니까.

류지호는 배우들의 기에 눌리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다.

할리우드에서의 위상 때문이 아니다.

영화감독으로써 자신감 때문이다.

샘과 크리스, 오순탁 같은 중견배우들은 류지호에게 매우 살갑게 대했다.

짜증 한 번 안 내고 촬영에 임하고 있다.

류지호는 몰랐지만, 그들끼리는 독립영화와 실험영화를 만들던 감독을 자신들이 잘 대해주고 보호해주어서 결국에는 좋은 결과물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말을 맞췄다.


- 처음으로 Jay와 작업을 해보고 있는데, 감독으로 썩 믿음이 가는 구석이 많다고 하대.


샘 잭슨이 했다는 말이다.

격려차 전화를 건 쿠엔 태런티노가 귀띔해줬다.

그렇다고 류지호에게 스트레스가 없을 순 없다.

그 중에서 투자·배급사의 피드백이라 쓰고 간섭이라 읽는 행위는 꽤나 성가셨다.


- 지난 일주일치 촬영 분량은 모두 확인해 보았어. 편집 소스가 모자라지는 않을지 우려스러운데, 좀 더 다양한 쇼트를 찍을 순 없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모리스 메타보이의 목소리는 평소의 장난기를 쏙 뺀 말투였다.


“제 영화의 러쉬 필름을 왜 Moe가 확인하는데요?”

-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당연한 걸 가지고 왜 그러냐는 투다.


“문제가 있지요.”

- 말해보게.


메이저 스튜디오와 작업할 경우 임원 3명이 영화마다 관여한다.

매일 촬영한 모든 테이크를 다 체크한다.

그런 후에 요구사항이나 개선사항을 정리해 감독에게 전달한다.

대중들은 스튜디오 간부들이 매일 밤 파티에 다니고, 미녀와 잠자리를 하며,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면서 한량처럼 생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는 엄청난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전문적인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사사건건 지적하고 요구한다.

피드백이란 명분하에.

그렇다고 해서 다 옳은 얘기만 하는 건 아니다.

감독과 취향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그럴 때마다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창작자인 감독으로서는 짜증나는 시스템이다.

모리스 메타보이가 류지호에게 캐롤코 픽처스를 분리·독립시킨 이유가 있다.

류지호는 대체로 감독의 입장을 꽤나 많이 반영해 준다.

그러니 모리스 메타보이 입장에서는 그를 트라이-스텔라 시스템에서 제외시킬 필요가 있었다.

캐롤코 픽처스로 독립해서 류지호 마음대로 지저 먹든 찜 쩌 먹든 상관없고, 트라이-스텔라 시스템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도를 류지호가 모를 리 없다.

순순히 따라주었다.

스튜디오 통제 하에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시스템은 기업가에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다.

영화감독의 폭주나 일탈의 리스크를 최소화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제작자이기에 앞서 감독인 류지호 입장에서는 상당히 짜증나는 환경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인수합병 등을 통해 복합기업 형태로 굳혀지면서 그 같은 기조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많은 감독들이 할리우드 입성을 바란다.

실제 와서 작업하면 숨이 턱 막히는 간섭꾼들의 지옥이다.


“JHO Pictures는 제 영화사입니다.”


간섭하지 말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 투자·배급은 트라이-스텔라가 하지. 자네 영화가 잘 못 되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거야. 언제나 감독들은 독선과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으니까. 자네가 스튜디오의 오너라고 해서 그런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어.

“이번 주 촬영한 분량 가편집한 걸, 다음 주면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것 보고 다시 이야기 해봐요.”

- 촬영을 진행하면서 편집을 하고 있단 말인가? 왜?

“적당히 하기 싫으니까요. 확실하게 하려고요.”

- 허... 그것 참.


류지호는 모리스 메타보이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 그렇단 말이지?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어.

“Moe나 나중에 딴 소리 말아요.”


처음에는 트라이-스텔라의 리포트가 3일에 한 번씩 오스트리아로 전해지는 것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류지호는 결국에는 좋은 접점을 찾기로 했다.

시스템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도 연출자의 몫이니까.

할리우드는 현장에서 감독이 갖고 있는 힘을, 스튜디오·제작자·주연 배우 등이 똑같이 나눠가지고 있다.

뭔가 하나를 결정하려면 그 사람들을 다 설득해야 한다.

사전에 논의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스태프를 설득해야 할 뿐 아니라 제작사에도 전달하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할리우드는 철저하게 계산된 시스템 속에서 운신의 폭이 제한된 데다 촬영 회차는 한국의 절반가량이다.

류지호가 경험한 충무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감독이 가지고 있는 영화적 비전과 미학적 견해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함께 고심하고 지원하는 가족 같은 스태프들과 일하면서 자신만의 색을 입히고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시스템이다.

그것에 제작자의 입김이 들어갈 여지가 적은 편이다.

이런 현장에 익숙한 한국 감독들에게, 현장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그 자리에서 반영하는 것은 물론 카메라 앵글이나 렌즈를 바꾸는 일조차 어려운 할리우드 시스템은 적응하기 결코 쉽지 않다.

충무로 스태프들은 정말 성실하다.

그런데 할리우드 현장이 충무로보다 훨씬 바쁘게 돌아간다.

한국에서 100회 차 찍을 내용을 할리우드에서는 그 절반 회차에 찍어야 한다.

감독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초 단위로 진땀을 빼야 한다.

그 압박감은 경험해 보지 못하면 절대 알 수 없다.

이전 삶에서 한국인 감독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해 영화를 찍었지만, 명성에 비해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할리우드에 진출했던 선배 감독들을 향해 좋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겨우 그 정도 영화를 찍기 위해 할리우드에 갔다는 것에 대해서.

재능낭비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이젠 그 선배들을 옹호해 줄 것 같다.

그들이 창작의 어려움 외에 어떤 압박감이나 문제들과 싸웠을지 알게 됐으니까.

충무로 방식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할리우드 시스템이 매우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후발주자들은 앞서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진 시스템을 따라 할 수 있다.

좋은 것만 선별해서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럼에도 좋은 것 대신 나쁜 것을 주로 가져온다는 것이 문제지만.


‘산업을 주도하는 것이 대기업이고. 그들은 이윤추구가 지상최대 목적이니까.’


암튼 류지호는 프로덕션이 모두 종료될 때까지 가편집본을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헌데 모리스 메타보이를 비롯해 트라이-스텔라 임원들의 압박이 예상보다 거셌다.

하는 수 없이 가편집본 일부를 트라이-스텔라 임원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따라서 휴식일마다 호텔에 틀어박혀 스펜서 베어디와 가편집 작업을 했다.

두 번에 걸쳐 유럽에서 촬영한 분량을 가편집해 전달했다.

그 결과 3일에 한 번씩 류지호에게 전해지던 리포트가 뚝 끊어졌다.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은 물론 트라이-스텔라 임들은 류지호의 작업 방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듀서의 장점과 창작자로서의 고집을 동시에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류지호가 트라이-스텔라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대신 공동프로듀서 앨런 포스터와 잭 워든이 류지호의 몫까지 시달려야 했다.

누군가는 스튜디오의 의견과 피드백을 영화에 반영해야 했고, 그것이 할리우드가 돌아가는 시스템의 일부였기에.


❉ ❉ ❉


오스트리아에서 모두 2주 간 촬영하고, 주말 휴식일을 이용해 슬로바키아로 이동했다.

슬로바키아는 알프스산맥 동쪽 끝인 타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국토 대부분이 해발 750m 이상의 산지로 구성된 나라다.

해발 2,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도 많다.

계곡도 많고 아름다운 호수도 여럿 있다.

대륙성 기후에 속해 있어 기온 차이가 심한 편인데, 기후와 자연조건만 보면 한국과 비슷한 데가 많았다.

<Remo : The Destroyer>을 촬영하는 현재는 겨울이라서 몹시 추웠다.

슬로바키아의 수도는 브라티슬라바다.

첫인상이 한적하고 다소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웠다.

비엔나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했는데, 해질녘에 브라티슬라바 시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한 가지 이채로운 점이 눈에 띄었다.

한국인만 느끼는 거다.


“길거리에 대유차가 꽤 많네.....?”


대유자동차가 동유럽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더니 실제 그런 모양이다.

촬영팀이 묵기로 한 아카디아 호텔은 브라티슬라바 도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1300년대부터 운영된 유서 깊은 호텔이다.

르네상스 건축과 현대적인 편의 시설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었는데 나름 5성급 호텔이다.

외관부터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 호텔을 JHO Pictures에서 한 달 간 통째로 임대했다.

<Remo : The Destroyer> 제작진이 호텔에 도착하자, 호텔 직원들의 열렬한 환영이 이어졌다.

총지배인부터 거의 모든 직원이 나와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어주었다.

겨우 영화촬영팀일 뿐이다.

그럼에도 열렬한 환영이 이해가 갔다.

현재 동유럽의 경제상황은 최악이다.

심각한 경기침체와 날로 심각해지는 실업률까지.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정도였으니 오죽했을까.

복도에서 감격에 겨워하는 벨 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이제 부자야....”


누군가 벨 보이에게 꽤 많은 팁을 준 모양이다.

류지호가 호텔 객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도널드 제이콥이 들어왔다.

어제 오스트리아에 입국한 도널드는 류지호와 함께 슬로바키아로 넘어왔다.

연말 결산을 보고하기 위해서다.

류지호가 영화촬영을 할 때는 비서실 직원들이 따로 수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의전비서 제니퍼 허드슨에게 휴가까지 주었다.

영화촬영 시에는 두 명의 프로듀서와 경호팀이 손발이 되어 주기 때문에 의장비서실 직원까지 번잡스럽게 몰려다닐 필요가 없었다.


“피에스티로 움직이실 시간입니다.”


도널드 제이콥만 대동하고 경호원과 함께 옆 도시 피에스티로 향했다.


작가의말

리메이크 하는 과정에서 영화 제작 에피소드를 압축해 보기도 했습니다. 제 스스로 너무 미주알고주알 쓴 것이 아닌가 해서 또 습작에서 그런 지적이 있기도 했습니다. 

너무 소소한 것까지 묘사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도 계시고, 그런 부분을 이 소설의 장점처럼 보시는 분도 계신 것 같고. 저로서는 두 관점을 모두 충족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영화제작 에피소드는 계속 같은 묘사톤을 유지할 것 같습니다. 다소 지루하시다면 빠른 스크롤 혹은 스킵을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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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The Destroyer. (12) +9 22.12.10 3,783 127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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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The Destroyer. (10) +9 22.12.09 3,758 124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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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Destroyer. (8) +14 22.12.08 3,769 132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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