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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lbetter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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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lbetter
작품등록일 :
2022.07.2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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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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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7,641

작성
22.08.0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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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12화: 그것(3)>

DUMMY

브리아레오스는 느긋이 내 대답을 기다렸다. 마치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고요한 황금빛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오직 영겁을 살아온 존재의 권태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솔직히 이건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멸세탑에서 나는 늘 혼자였기 때문에 이런 선택에 놓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번에는 내가 알고 있던 멸세탑의 지식에 기댈 수는 없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판단에 의한 결정을 내려야했다.


냉철함의 효과 때문일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까 다짐했듯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것]을 손에 넣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면 결코 영광의 탑의 마지막 층까지 등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말 한마디면 지금 당장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댓가는 나를 신뢰하는 수백 명의 목숨이었다. 이곳에서 브리아레오스의 권능은 구석구석까지 두루 영향을 미친다.

누구도 그의 허락 없이는 무사히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지금 내 결정에 그들 모두의 목숨이 달려있었다.


거신의 처소 밖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나에게 어떤 종류의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들의 나에 대한 믿음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최정윤, 한후람, 척예리 등 일행들은 나를 믿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건 믿음이라는 신뢰였다.

커제 등 중국 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기를 통해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그건 내가 약속한 것이었다. 그것은 계약이라는 신뢰였다.


지금 브리아레오스는 그들을 인질로 삼고 내게 선택지를 내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면, 모두의 신뢰를 배신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신뢰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딜레마였다.


하나의 신뢰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의 신뢰를 배신해야 했다.


나의 냉철한 이성이 속삭인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때로는 냉혹하더라도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 법이라고.

감상에 젖어서 모든 일을 망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모두 맞는 말이었다.


항상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말은 달리 해석하면 가끔은 원하는 걸 모두 가질 수도 있다는 말도 된다.

그렇게 하나를 포기하며 다른 하나를 얻는 방법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언젠가는 더 이상 포기할 것이 없어지는 때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는 늘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는 답을 최선을 다해 찾아왔다. 물론 늘 성공한 건 아니지만 가끔은 원하는 걸 모두 얻기도 했다.


이번에 난 그 답을 반드시 찾아낼 생각이다.


위기는 기회였다. 이럴 때 답은 늘 가까운 곳에...


잠깐.


불현듯 번뜩임이 뇌리를 스쳤다.


브리아레오스의 신뢰를 선택하는 건 동시에 그의 신뢰를 잃는 일이었다.

제우스에게 배신을 당한 그가 내게 신뢰를 배신하라는 요구를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어쩌면 이건 또 다른 시험이었다.


여기서 꼭 양자택일할 이유는 없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의 신뢰를 잃기 때문이다.

즉 브리아레오스가 내게 기대하는 답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나를 신뢰할 수 있는 제3의 선택지를 찾아야 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만약 내가 틀리면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이건 일생일대의 도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결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살아가는 순간순간의 모든 게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건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두근! —두근! ―두근!


냉철함에도 불구하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나의 대답이 그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난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나는 차분히 브리아레오스에게 대답했다.


"나는 둘 다 선택하지 않겠다."


【그거 실망이군. 그건 잘못된 대답이다. 너는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내 조건이다. 예외는 없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이번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자, 너의 선택은 무엇이냐?】


생사의 기로였다.


브리아레오스의 서릿발 같은 으름장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가 내게 또 한 번 선택의 기회를 줬다는 건 아주 긍정적인 신호였다.

나는 멸세탑에서 수없이 그를 대면하며 그의 괴팍한 성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면 아까 그 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거신들은 투박하지만 올곧은 성품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이제 그가 납득할 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나는 다시 그에게 말했다.


"실망은 오히려 내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제우스에게 배신당한 당신이 내게 배신을 종용하는 건 그 자체로 모순이다. 게다가 내가 동료들을 배신한다면 과연 당신이 나를 믿고 그것을 넘겨줄 수 있을까? 아니겠지. 애초에 당신이 제시한 선택지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즉 당신은 처음부터 내가 어떤 선택을 하건 그것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야. 그러니 당신에게 실망했다는 말이다. 진지하게 거래를 하러 온 상대를 그렇게 기만하는 것이, 영겁을 살아온 당신의 지혜인가? 내게 답하라."


브리아레오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권태로 가득차 있던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잔잔한 이채가 어려있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대는 지혜롭군. 그 점은 사과하겠다. 다른 변명은 하지 않겠다. 이제 그대는 내 시험을 모두 통과했다. 그것을 그대에게 양도하겠다. 그런데 아직 내 조건은 살아있다. 그대가 선택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브리아레오스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그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건 멸세탑에서도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어쨌든 그의 말은 정당했다. 이번에는 무리한 요구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당신의 조건을 들어주겠다."


【나는 그대가 가장 신뢰하는 자와 계약을 맺고 싶다. 그 정도는 무리한 요구는 아닐 것이다.】


확실히 그의 요구는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어떻게 보면 볼모를 잡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그 정도면 많이 양보를 한 것이다. 제우스에게서 그 수모를 당하며 지켰던 보물이었다. 아무런 담보도 없이 그냥 내준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이건 아주 공정한 거래였다. 무려 신화 속에 등장하는 거신 브리아레오스가 나를 동등한 거래 상대로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좋다. 하지만 그건 당장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 그 전에 나도 당신에게 요청할 것이 있다."


브리아레오스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엇인가?】



***



거신의 처소 앞마당에 포탈이 일렁이고 있었다.

중국 플레이어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서둘러 포탈 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브리아레오스가 그들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요청으로 그는 중국 플레이어들이 이곳의 포탈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다.

포탈로 빠져나가는 행렬을 지켜보던 커제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브리아레오스를 한 번 일별한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내게 말했다.


" ......고맙습니다. 저희가 당신께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아까는 당신 같은 영웅을 몰라보고 저희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그에게서 '대국'의 거만한 태도와 말투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잔뜩 주눅이 든 얼굴이었다. 사실 이건 아까 내가 정확히 기대했던 그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저렇게 풀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좀 딱해 보이기도 했다.

중국 플레이어들은 내가 아니었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여기를 나가는 포탈 포인트가 거신의 처소에만 있기 때문이었다. 즉 브리아레오스의 허락이 없다면 이곳을 영영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내게 유물 점수를 모두 양도하고도 이렇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유물 점수를 양도받고 지금 내 랭킹은 3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아까 했던 약속만 지켜 주세요. 그게 당신들이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가는 조건이었으니까요."


"물론입니다. 오늘 본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밖으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입이 매우 무겁습니다. 그건 제가 보장합니다."


과연 그럴까...?


멸세탑에서도 중국만큼 소문이 빨리 퍼지는 커뮤니티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설령 커제는 진심일지 몰라도, 수백 명에 달하는 그의 부하들을 일일이 다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였다.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그들의 상상력이 덧붙어 카더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눈부신 속도로 퍼지며 전설이 될 것이다.

그 전설은 거신을 굴복시킨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물론 이건 사전에 브리아레오스의 동의를 구하고 입을 맞춰 놓은 것이었다.

굳이 이런 쇼를 기획한 이유는 영광의 탑에서 있을 어떤 이벤트 때문이었다. 커제 등의 중국 플레이어들은 그때를 위한 중요한 포석이었다.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 전까지 나와 그 전설은 별개였다. 영상 따위가 없으니 내가 직접 등장하기 전까지는 실체적 연결 고리는 없었다.

나는 필요한 때 그 전설의 주인공으로 대중 앞에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영광의 탑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큰 사건이 될 것이다.


나는 커제에게 말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가시죠. 저는 일행들과 여기서 마무리지을 일이 좀 있어서요."


"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


커제는 도망치듯 포탈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커제 등 중국 플레이어들이 모두 사라지고 푸른빛으로 일렁이던 포탈이 닫혔다.


이제 이곳에는 거신 브리아레오스와 우리 일행만 남았다.


최정윤은 그를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브리아레오스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척예리는 한후람의 등뒤로 숨어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브리아레오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수십 명의 괴한들을 욕설 하나로 압도하던 당찬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어쩐지 좀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그리고 한후람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브리아레오스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뜻 내게 말했다.


"내가 그와 성약을 맺겠다."


이곳에 오기 전에 전음으로 얘기가 어느 정도 된 터라, 일의 사정은 다들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브리아레오스를 올려다 봤다. 그는 조용히 한후람을 내려다보며 내게 물었다.


【그대가 신뢰하는 자인가?】


"물론이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내 등을 내어줄 수 있다."


【좋다. 나도 왠지 그가 마음에 든다. 그럼, 이제 그대에게 '그것'을 건네 주겠다.】


—스팟!


눈부신 섬광과 함께 브리아레오스의 가슴팍으로부터, 오색찬란한 빛무리가 천천히 내 손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성유물(聖遺物), '판도라의 상자'를 획득했습니다.]


—파스스스슷...


손바닥 위에 있던 오색찬연한 빛무리가 이내 안개처럼 비산하며 내게로 스며 들었다.


[특성(히든), '가설(假說)'을 획득했습니다.]


드디어 [그것]을 손에 넣었다.


이제 이걸로 천마가 사용하던 [전설의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알 수 없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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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5화: 최후의 만찬(2)> 22.08.04 200 6 15쪽
15 <14화: 최후의 만찬(1)> 22.08.03 216 6 13쪽
14 <13화: 그것(4)> +1 22.08.02 243 8 13쪽
» <12화: 그것(3)> +1 22.08.01 251 8 13쪽
12 <11화: 그것(2)> 22.07.31 259 7 14쪽
11 <10화: 그것(1)> +1 22.07.30 278 9 15쪽
10 <9화: 낚시(4)> 22.07.29 291 10 16쪽
9 <8화: 낚시(3)> 22.07.28 286 10 14쪽
8 <7화: 낚시(2)> 22.07.27 301 10 14쪽
7 <6화: 낚시(1)> 22.07.26 324 9 15쪽
6 <5화: 한강 대교(2)> 22.07.25 378 10 15쪽
5 <4화: 한강 대교(1)> 22.07.24 403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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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화: 히든 스테이지(2)> 22.07.23 506 14 13쪽
2 <1화: 히든 스테이지(1)> 22.07.23 590 15 13쪽
1 <프롤로그> 22.07.23 678 1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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