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종종 혼자 이런 질문을 하고는 했다.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뮬레이션이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허상과 실체를 구분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 세상에 실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통조림 속의 뇌]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봤던 것처럼 뇌로 전달되는 전기신호를 실제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게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토록 맹신하는 현대 과학조차 내 말에 신빙성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가령, 직선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곧고 반듯하게 뻗어있는 1차원의 그 직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그 곧은 직선은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계에서 직선의 정의는 두 공간 사이의 빛이 진행하는 최단 거리로 정의한다.
하지만 중력에 휘는 공간의 특성상 빛은 절대로 곧게 진행할 수 없다. 즉, 모든 직선은 실제로는 구불구불 휘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직선의 개념을 알고 있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마치 선천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비단 직선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열거가 가능했다.
그런데 그건 매우 이상한 일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말을 배우거나 경험하지 않았는데 말을 하는 아이를 말이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들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세계들은 게임, 만화, 소설, 영화 등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지금도 계속 재생산되며 만들어지고 있었다.
서두가 너무 장황했다. 지루했다면 양해를 바란다.
내가 이런 따분한 얘기로 서두를 꺼낸 이유는 실제로 그런 일이 현실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느날 갑자기 도심 한가운데 탑이 생겨났다. 그 탑의 이름은 [영광의 탑]이었다.
그 안에는 우리가 공상으로만 접하던 수많은 세계관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성좌, 드래곤, 제국, 무림, 마도국, 그 밖에 제3세력 등등.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로 솟은 탑과 함께 우리가 알던 세상은 한순간에 멸망했다.
예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 미증유의 사태 앞에 인류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을 찾으며 절규했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의 도래라고 체념했으며.
극소수의 사람들은 기시감에 전율했다.
그 극소수의 사람들은 어떤 게임의 고인물이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그 게임의 이름은 [멸망한 세계의 탑]이었다. 이하 멸세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조차 탑의 절반도 오르지 못한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층까지 등반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유일하게 영광의 탑의 마지막 층까지 등반한 멸세탑 최후의 고인물이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아카식 레코드 블록과 내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니, 내용이 부분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은 너그럽게 양해바란다.
그럼 멸세탑이 현실이 된 그날의 얘기부터 시작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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