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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lbetter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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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lbetter
작품등록일 :
2022.07.23 17:16
최근연재일 :
2022.08.11 18:00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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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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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글자수 :
147,641

작성
22.07.2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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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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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1화: 히든 스테이지(1)>

DUMMY

섬광이 번쩍였다.


—파스스스슷...


이내 비산하는 먼지와 점멸하는 빛무리 사이로 음성이 들려왔다.


【아득한 몽상의 꼭두각시여. 이것은 끝이 아니다. 이 순간은 그저 무한의 편린이자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니...... 】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말이었다. 나는 방금 전 영광의 탑 마지막 층의 최종 보스를 쓰러뜨렸다.

그런데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이라니. 설마 이것도 개발자의 떡밥인가라는 생각을 하는 그때였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최초로 '영광의 탑'의 마지막 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당신에게 「최후의 보상」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드디어 끝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뒤이어 방송 채널로부터 수많은 간접 메시지들이 뒤따랐다.


[성좌, '이글거리는 불꽃검의 수호자'가 당신의 위업을 축하합니다.]

[성좌, '뇌전의 매드사이언티스트'가 당신에게 엄지를 척 세워 보입니다.]

[무림(13), '검의 무덤에 군림하는 자'가 자신의 라이벌을 바라봅니다.]

[익명(141), ‘나만 전설이다’가 당신에게 브라보를 외칩니다.]

[익명(9132), ‘반지하의 제왕’이 당신을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


[다수의 시청자가 당신의 믿을 수 없는 업적에 경의를 표합니다!]


채널이 떠들썩했다. 그런데 채널에 있는 시청자들은 실제 플레이어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멸세탑의 등장인물들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동시 접속자 수: 1]


물론 저 1이란 숫자는 나였다. 즉, 게임에 접속한 실제 플레이어는 현재 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뭐, 그래도 아주 가끔 동접자가 2~3을 오고 갈 때도 있다. 물론 다시 1로 바뀌어 버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 추억 때문에 잠시 접속했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로그아웃하는 것이리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게임의 이름은 ‘멸망한 세계의 탑’이다. 이하 멸세탑이라고 한다.

멸세탑의 주요 컨텐츠는 [영광의 탑]이었다. 탑은 수많은 세계관이 중첩된 멀티버스로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업적을 쌓으며 등반한다.

탑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업적을 실체화시켜 무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업적을 무장이라고 부른다.

무장은 종류와 등급에 따라 그 효과와 위력이 천차만별이었다. 가령, 전설급이나 신화급의 무장은 성좌의 권능에 필적한다. 따라서 어떤 업적을 얻는지가 탑의 공략에 직결된다.


탑의 마지막 층에 도달한 자는 [최후의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궁극의 [원망기(願望機)]였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진 바는 없었다.

멸세탑의 개발자는 그것을 획득하는 플레이어는 신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야말로 원망기라는 취지에 잘 부합하는 보상이었다.


방대한 세계관과 자유도, 거기에 원망기를 향한 열망까지 겹치면서, 멸세탑은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난도로 인해 그 열기는 빠르게 식어갔다. 드래곤, 거신, 고대종 등이 등장하는 80층대부터는 플레이어들의 무덤이라고 불렸다.

그 층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전설급이나 신화급의 무장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등급의 무장은 최소 90층은 가야 획득이 가능했다. 즉 애초에 공략이 불가능하게 설계가 된 것이다.


게임을 출시한 지 겨우 3년 만에 수백만 명이었던 동접자가 100명대로 감소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난 뒤 동접자는 한 자릿수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시간을 투자해도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전혀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멸세탑 최후의 고인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층에 도달했다. 잠시 후면 나는 원망기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신이 된다라...


솔직히 아직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영광의 탑의 운영권이라도 준다는 것일까...?


그런 힘을 손에 넣으면 뭐부터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동안은 오로지 탑을 공략하고 등반하는 것만 생각했다. 다른 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간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누가 그랬더라. 나무를 베는데 한 시간이 주워진다면, 도끼를 가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겠다고.

멸세탑의 공략도 이와 비슷했다. 수많은 불가능이란 단어 앞에서 꿋꿋이 개발자가 숨겨 놓은 단서를 찾고 공략법을 고안했다.

실제 공략에 든 시간보다 그 단서를 찾고 공략법을 개발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리고 고안해낸 공략법들을 수정하며 될 때까지 반복했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을 하루같이 지냈다.


혹자는 밥도 안 먹고 게임만 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결론만 말하면 밥은 먹고 게임을 했다. 단, 그동안 밥 사먹을 돈은 벌지 않았다.

그럼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금수저에 골방에서 게임만 하는 오타쿠라고 말이다. 그것도 절반은 맞는 말이었다. 금수저라는 단어만 빼면 말이다.


나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로 근근이 들어오는 일로 먹고사는 보통 사람이었다. 대학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고아였기 때문에 군대도 면제받았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빠르게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즈음에 웹사이트 제작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리고 보수로 비트코인 20개를 받았다.

그때 비트코인 시세가 하나에 500원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 당시 사장님이 딱 3년만 들고 있으면 수만 배가 될 테니 잘 가지고 있으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말은 내 기억의 성지가 되었다. 그 이후로 잠시 잊고 지냈던 비트코인이 정확히 3년 뒤에 10만 배가 뛰었으니 말이다.

그때 받았던 비트코인들의 가치는 10억이 되었다. 나는 비트코인을 처분해 배당주에 재투자했다. 그렇게 매년 수천만 원씩 나오는 배당금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를 얻었다.

만약 그 돈이 없었다면 나도 5년 전쯤에 멸세탑을 접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현실에서의 기연 덕분에 나는 본격적으로 멸세탑의 공략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얼마나 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탑의 기라성 같은 강자들을 꺾고 수없이 지옥 같은 관문들을 뚫고 등반하던 어느 날이었다.


난 깨달았다.


지옥은 더 이상 내게 지옥이 아니라는 걸.


이글거리는 지옥의 열기는 따뜻했고.

절규에 찬 비명은 감미로웠으며.

교활한 악마들은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영광의 탑의 마지막 층에 도달했다. 고1 때부터 27살이 된 지금까지 무려 십여 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멸세탑은 내게 챗바퀴 같은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세계였다. 이곳에서 나는 늘 흥미로운 모험과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갔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이제 그 끝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허탈한 마음과 함께 만감이 교차하는그때였다.


[스트리밍 채널이 오프 상태로 변경됩니다.]


[성좌, '이글거리는 불꽃검의 수호자'가 퇴장했습니다.]

[성좌, '뇌전의 매드사이언티스트'가 퇴장했습니다.]

[무림(13), '검의 무덤에 군림하는 자'가 퇴장했습니다.]

[익명(141), ‘나만 전설이다’가 퇴장했습니다.]

[익명(9132), ‘반지하의 제왕’가 퇴장했습니다.]

......


[방 「내 고인물 경험치 1,692,824,237,592」의 모든 시청자가 퇴장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모든 절차가 일시 중지됩니다.]


" ...음?"


—파츠츠츠츳!


허공에 거센 스파크와 함께 새카만 기류가 소용돌이치며 뭉치고 있었다. 이윽고 그 기류가 사람의 형태를 이루며 음성이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이은태 플레이어님. 처음 뵙겠습니다.]


내게 말을 건넨 존재는 검은 로브를 머리까지 덮어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일렁이는 그림자로 가려져 있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저는 운영자입니다. 편하게 '어비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어비스...?


그건 개발자가 게임 내에 숨겨놓은 자신의 닉네임 중 하나였다.

물론 이건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아니었다. 게임 곳곳에 숨겨진 히든피스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내가 스스로 알아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운영자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개발자와 운영자가 동일인이었다는 것인가...?


그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운영자의 존재는 익히 알고 있었다. 탑의 질서를 유지하는 최고관리자들 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초월적 존재.

혹자는 운영자는 최고관리자조차 넘어서는 권능을 지녔다는 둥. 또 혹자는 그저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 힘 없는 뒷방 늙은이라는 둥.

그에 대해서는 항간에 여러 소문이 떠돌았지만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접촉이 없다가 이렇게 마지막에 나타나다니.


그게 의미하는 것은...


이건 마지막 [이스트에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온 이유가...?"


[당신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저는 지금 당신에게 선택권을 드리러 왔습니다.]


"선택이요...?"


[그렇습니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당장 '최후의 보상'을 받고 신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여정은 바로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것이 예상했던 결말이겠죠.]


그의 말을 듣자마자 확신이 들었다. 역시 이건 개발자가 숨겨놓은 이스트에그라는 것을 말이다. 아까 말했다시피 영광의 탑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략이 불가능 하도록 설계되었다.

탑을 공략하려면 개발자가 곳곳에 숨겨 놓은 이스트에그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공략을 해야 마지막 층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멸세탑의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이스트에그를 숨겨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어비스에게 물었다.


"다른 하나는 뭐죠?"


[최후의 보상을 포기하고 히든 스테이지로 진입할 기회를 얻는 겁니다.]


재밌었다.


십여년 동안 공략한 게임의 마지막 보상을 포기하라니. 게다가 그 대가로 고작 히든 스테이지에 진입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거절할 수 없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도대체 그는 히든 스테이지에 무엇을 숨겨 놓은 것일까...?


사실 최후의 보상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걸 노리고 게임을 시작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난 멸세탑을 공략하는 과정 그 자체를 즐겼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어비스에게 담담히 말했다.


"최후의 보상을 포기하죠."


[역시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정말 최후의 보상을 포기하실 건가요?]


역시 그렇다라...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한 대답이었다. 이건 낚시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덥썩 물어주는 게 프로 고인물의 자세였다.


"번복은 없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히든 스테이지로 진입할 수 있는지 알려주시죠."


[확고하시군요. 좋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6시간이 지나고 히든 스테이지가 열립니다. 당신에게는 최후의 보상을 포기한 대가로 세 가지 특전이 지급될 예정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시야 한켠의 시간을 봤다.


[AM 03:00]


지금으로부터 16시간 후면 오늘 저녁 7시였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뜨끈한 국밥 한그릇 먹으면 그쯤 될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특전이라니 그게 뭔가요?"


[미리 알면 재미가 반감되는 법이죠.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 잠시 후면 알게 될 겁니다. 히든 스테이지는 실전입니다. 부디 즐거운 여정 되시길 바랍니다.]


—파스스스슷...


어비스의 신형이 검은 안개로 비산하며 흩어졌다. 그의 마지막 말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실전이라... "


나는 내가 서 있는 영광의 탑 99층의 정경을 슥 훑었다.

군데군데 커다란 크레이터와 쑥대밭이 된 공간들이 보였다. 모두 이곳에서 내가 치른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이었다.


십여 년에 걸친 대장정의 대미를 장식할 결말을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조금 미뤄질 듯했다. 그런데 오히려 설레는 것은 왜일까.

히든 스테이지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이 되면 그 윤곽이 들어날 것이다.


"하암... "


갑자기 급피곤함이 몰려왔다. 일단은 좀 쉬어야 할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로그아웃을 하고 VR기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모션슈트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후 쇼파에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일단 좀 자자... "


나른함이 몰려오며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이때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했던 단 한 번의 선택이 내 인생의 장르를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는 걸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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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7화: 세레나데(1)> +1 22.08.06 168 6 14쪽
17 <16화: 최후의 만찬(3)> 22.08.05 185 5 15쪽
16 <15화: 최후의 만찬(2)> 22.08.04 201 6 15쪽
15 <14화: 최후의 만찬(1)> 22.08.03 216 6 13쪽
14 <13화: 그것(4)> +1 22.08.02 243 8 13쪽
13 <12화: 그것(3)> +1 22.08.01 251 8 13쪽
12 <11화: 그것(2)> 22.07.31 259 7 14쪽
11 <10화: 그것(1)> +1 22.07.30 279 9 15쪽
10 <9화: 낚시(4)> 22.07.29 292 10 16쪽
9 <8화: 낚시(3)> 22.07.28 287 10 14쪽
8 <7화: 낚시(2)> 22.07.27 301 10 14쪽
7 <6화: 낚시(1)> 22.07.26 324 9 15쪽
6 <5화: 한강 대교(2)> 22.07.25 378 10 15쪽
5 <4화: 한강 대교(1)> 22.07.24 403 13 14쪽
4 <3화: 히든 스테이지(3)> 22.07.23 448 14 15쪽
3 <2화: 히든 스테이지(2)> 22.07.23 507 14 13쪽
» <1화: 히든 스테이지(1)> 22.07.23 591 15 13쪽
1 <프롤로그> 22.07.23 679 1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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