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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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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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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31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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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7화. 붉은 먼지(4)

DUMMY

"보기보다 꽤나 대처가 빨라. 엘라인, 그 X이 만든 걸 너무 믿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해."

"하하. 그래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저주를 교묘하게 심어놓을 줄은 몰랐어. 많은 것을 느꼈네, 주앙. 세상은 넓고 고인물은 썩는다는 걸 말이야."

"굴라송. 자네가 그런 말까지 할 정도면, 그 집단은 꽤나 실력이 있나 보네? 천하의 굴라송이 그리 혀에 침을 바르는 걸 보는 것이 흔치 않을 텐데 말이야."

"주앙. 물론 우리 쪽이 몇 수는 더 뛰어나네. 감히 제국이 대신 손을 써주겠다는데 겨우 한 명으로 우리의 돌발 행동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그쪽은 또 은근히 멍청한 면이 있어."


금으로 만들어진 지지대 위에, 옅은 청백색을 띠고 있는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리잔 위로 자신이 아끼던 와인을 쫄쫄 따른 굴라송은 그 잔을 수정구에 살짝 부딪혔다.

'탱-'하는 소리와 함께 안의 내용물이 출렁이며 유리잔의 벽에 포도색의 파도를 그렸다. 곧 있으면 어차피 떠날 곳이었지만, 이오니아까지 와서 지내는 머나먼 타지 생활 중 유일한 낙이 되는 것이었으니.


이리 볼품없는 나라에도 괜찮다 평할 것은 있었다. 손재주가 뛰어나 맛있는 술이나 안주거리를 만들어낸다는 게 과연 국가간의 경쟁을 상대로 무슨 이점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또 술을 마시는가? 곧 있으면 본국으로 돌아올 텐데 그러다간 내가 주는 술도 마시지 못할 거야."

"흥. 주앙, 자네가 주는 거라면 내 또 다른 위장을 준비해두지. 좋은 술이나 준비해 두게."

"말은 고맙게 하는군. 그래서, 그 엘라인이라는 여자만 자네와의 회담에 나오던가?"

"아까 말했지 않나. 아무래도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모양이야. 그 위의 사람을 데리고 오라 다그쳐봤지만 소용이 없었네. 피르미니와도 호각을 다툴 정도의 실력자이긴 했어."

"그런 검객이 저주 쪽에도 일가견이 있다라. 아무래도 그 검은 조직이 규모가 크군. 혹시 우리네 반역자들의 움직임에도 관여할 정도일까."

"그럴 지도 모르네. 하지만 그건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 어차피 내사야 주앙, 자네가 관리하는 것이고 나는 국외만 열심히 돌면 되니까."


손에 와인이 묻자 굴라송은 자신의 손수건을 찾았다. 그러나 곧, 그는 엘라인을 마지막으로 보낼 때 향수를 적셔 그것으로 코를 틀어막았던 것을 떠올렸다.


"맥스."


그의 부하 중 한 사람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다가왔다. 슬쩍 내민 손에 잡힌 건 곱게 접어진 새로운 손수건이다.


"색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쁘진 않군. 가봐."

"...네, 굴라송 님."


새로 받은 린넨 손수건으로 슬쩍 손을 쓸어낸 굴라송은 탁자의 어딘가로 손수건을 멀리 던졌다. 구겨진 천 쪼가리가 탁자를 굴러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그래서 원하던 것은 찾았나? 신형 함선이었지? 어서 돌아와, 황제 폐하께서 자꾸만 나를 쪼아대시는 통에 굴라송, 너까지 사라지니 내가 두 배로 혼이 나고 있잖냐."

"정확히 말하자면 가브리엘이 돌아와야지. 무사히 잠입했다는 것 까지만 들어서 알고 있어. 확실히 이쪽 마탑이 연구는 기똥차게 잘한단 말이야. 주앙, 제국 내 방첩 조사가 끝이 되면 마탑이나 털어보지 그래. 무려 세 곳이나 있는데 그 자식들은 이런 결과물도 내놓지 못하고 있어."


황제 폐하가 친히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하는 곳이 셋이나 되는데 이들은 전혀 그 산실을 내놓지를 않았다. 어찌 대륙의 변두리에 위치한 왕국에서 오히려 이런 것들을 턱턱 내놓는단 말인지. 굴라송은 하해와 같은 황체 폐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 여겼다.


"어차피 건선을 하려면 꽤나 예산을 써야 할 텐데, 이오니아의 수준으로는 그 많은 자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단지 허상에 불과한 이야기겠지. 허나 타국의 국방력이 높아지는 건 두고 볼 사안은 아니니."

"그렇기에 굴라송, 자네가 가지 않았나. 그런데 그 치들이 바보는 아닐 터인데 어떻게 탈출할 생각인가? 성문은 굳게 닫히고 선박의 출입 또한 전부 통제된 상황이라고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굴라송은 남은 와인을 벌컥 마셨다. 이 또한 휙 던져버릴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손을 멈췄다.

전리품으로 가져갈까. 손수건은 질이 별로였지만 유리잔은 나름 괜찮았다. 나중에 친우인 주앙과 술잔을 기울일 때 써먹으면 딱이다 싶었다.

깨지지 않을 정도로 툭 탁자에 잔을 내려놓은 그가 주앙에게 답했다.


"다 생각이 있네. 금방 끝날 것이야."


* * *


"처음 부분은 이해가 가겠어. 정화 의식의 실패도 양초에서 일어난 불꽃이 폭발하며 붉은 먼지가 비산했다 했었지. 불꽃에 직접 닿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기에 화장을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 요청한 거군."

"웬만하면 그냥 묻는 편이지만, 역병이 일어난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여태까지 일어났었던 대부분의 역병 사태에서, 사후 감염의 모체가 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가장 처리하기 쉬운 방식이 바로 화장 아니겠습니까."


주술학과 전임강사 칼 힐베르트가 비교적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만들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사각을 정말 잘 노리고 만들었습니다. 그 점만큼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시체를 태우기 위해 불을 붙이는 즉시 폭발적인 감염이 이루어진다. 또한, 병자들은 불을 사용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점도 위험한 요소입니다."

"그렇군요, 힐베르트 씨. 누군가가 도움을 주지 않는 이상, 혼자서는..."


린튼이 정확한 부분을 짚었다. 가족, 친척, 지인들을 돕기 위해 함부로 불을 사용할 수도 없었고, 떨어진 체력에 곡기마저 끊길 우려가 있다니.

사람을 말려 죽이기엔 정말 효과적인 처사가 아닌가.

태고부터 인간이 유용하게 써왔던 불을 빼앗겨 버리자,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그 당시로 퇴보해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원래 불꽃은 모든 부정한 것을 태워버리는 정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더군다나 정화 의식에 사용되는 양초는 절대로 부정을 타지 않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미네바 측의 한 사제가 입을 열어 의문을 표했다. 다행히 저번의 구호단에 포함되지 않아 감염의 화는 피했지만 적어도 물자를 준비하는 것에는 같이 참여했노라 그는 말했다.


"그 죽어버린 여인의 이름이 무엇이죠, 장현우 학생?"

"엘라인이라 들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일컫더군요."

"엘라인... 이름 만으로는 출신을 알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혹시 과일 가게(Fruits shop)를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닐까요? 왜 죽기 직전이라 턱이 잘 움직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힐베르트 선생,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F와 S 발음을 헷갈릴 수 있나요? 하지만 추론에 일리는 있습니다."


그 때, 사망한 겔레 할머니의 임종을 마무리하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웠던 스발라 알린이 회의장으로 돌아왔다.


"아, 스발라 씨. 혹시 시신의 처리는."

"지금 화장을 할 수는 없잖아요? 조금 전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위험하니까요. 저도 그 정도 돌아가는 머리는 있거든요? 다른 마법사 분들의 도움을 받아 시체를 차갑게 유지만 해놓고 있습니다. 여름이라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하여 마법사들이 계속해서 빙결 마법을 걸어주는 것도 힘드네요."

"왜 그렇지? 미네바 수산 조합이 보유한 얼음 마법사는 10명 정도 되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관리청이나 해군에서도 수산 조합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평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다른 분들이 알려주셨어요. 일반인에 비해 마력이나 오라, 성력을 보유한 자들은 역병에 훨씬 오래 버티지만, 체내의 그 균형이 깨지게 되면 가차없이 쓰러진다 합니다."


좌중을 둘러보며 그녀는 나름대로 머리 속에서 셈을 끝냈다.


"애석하게도 얼음 마법을 쓰던 수산 조합의 마법사들은 이미 퍼진 상태인 사람들이 많았고, 이중에서도 그들과 같은 위험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감찰단장님."

"잘 알겠습니다, 스발라 알린."


조나단과의 대화를 끝낸 스발라에게 현우가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자리를 비우느라 아직 엘라인의 유언을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엘라인은 필시 무언가 단서를 남겼을 것이다. 여태까지 그녀의 증언과 기록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 이를 증명했다.

조직의 계획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보다는, 배신당한 도리아 쪽 사람들에게 실패란 오물을 뿌려버리고 싶겠지.


"스발라 씨. 혹시 '수르츠 솝'이란 단어를 아세요?"

"그건 어디서 나온 말인가요?"

"엘라인, 이번 역병 모의에 가담한 국제적 범죄 집단의 일원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에요. 어떤 암호나 단어일지 몰라 계속 고민 중이었습니다."

"...아마 이름을 들어보면 여성인 것 같은데, 혹시 그녀가 북쪽 출신이었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최소한 그녀가 코린티아 출생인가 하는 이야기에요."

"맞아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스발라와 현우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진행되었다. 짜증을 이기지 못한 케인이 어쩔 수 없이 조금 큰 소리를 내어 말했다.


"저기, 후배님? 장현우라고 했나?"

"네."


어째 혼이 날 분위기였다. 말하는 어투하며, 그의 표정이 이미 그가 충분히 화를 머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하나만 말해둘게요. 대책을 마련하는 회의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다 말하는 게 좋아요. 알겠어요? 그 엘라인이라는 사람의 유언도 그렇고, 그녀에 대한 정보도 그렇고. 누군가 툭툭 말머리를 던질 때마다 튀어나와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또 숨기고 있는 게 있나요? 어떤 거라도 좋습니다. 정보들을 다 털어놔 봐요."

"그, 그게."


아직 위에서의 다그침과 쪼아댐에 익숙지 않은 현우였다.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은 그리 고압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았고, 에블린과의 수업은 비교적 평등한 관계였으며, 현우보다 명백히 위였던 시어도어나 루크는 그에게 이리 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만 두게나, 케인."

"볼티모어 교수님."

"유일한 증인을 그리 거칠게 압박하면 그에게서 올바른 증언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칫 앙심을 품고 그가 증언에 거짓말을 섞어버린다면, 그대는 사과 무더기 중 단 하나의 썩은 것을 골라낼 자신이 있는지 궁금하구만."

"죄송합니다."

"장현우 학생, 심호흡을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게나.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말일세."


시어도어의 유도에 따라 현우는 목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눈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찔렀던 엘라인의 마지막. 그 강렬했던 충격 너머로 그녀가 가진 정보들을 찾아야 했다.


"어깨 쪽인가에 찔린 상처가 있었고, 그로 인해 역병에 걸린 것 같았습니다. 도리아 쪽에 배신당했다 그녀가 직접 말했었고, 냉기가 흐르는 오라를 써서 저와 대치했었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이게 정말 제가 그 자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고생했네. 회의에서 물러나 쉬어도 좋을 듯 하이."


정말 쉬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미 꽤나 그와 부대낀 적이 많아 노인의 의중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완전히 낫지 않은 이상, 자신 혼자만 편히 쉴 생각은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아앗!"

"왜 그런가, 스발라 알린."

"제가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요. 너무 타지 생활을 오래해서 이미 물들었나 봅니다. 어우..."


콧대 양쪽의 얼굴을 살살 긁으며 그녀가 자신을 타박했다.


"무얼 알게 되었습니까?"

"수르츠 솝. 어떤 암호나 그런 게 아닙니다. 코린티아 제국 공용어 중에 하나에요."

"코린티아? 그러고 보니 저 마법사의 증언에서도 그 여자가 북쪽 출신이라 했지."


도리아 제국과의 마찰이 이미 뇌리에 박혀서일까. 새롭게 나타난 제국의 이름에 사람들은 긴장을 숨기지 않았다.


"저 혹한의 제국도 우리를 건들인 것인가. 하, 우리만 알고 있을 사항이 아니군 그래."

"아닙니다, 융 서기관님. 단순한 단어에요. 그러나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하느라 다른 분들께 말씀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코린티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유일했다.

이오니아의 위에는 미아가 돌아간 엘리안 공화국이 있었고, 공화국을 제외해도 코린티아와는 마수림과 저주받은 사막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해로가 아닌 이상, 육로로는 코린티아 제국과 소통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기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견식이 부족한 편이 아님에도 북방을 호령하는 제국의 언어나 문화에 대해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게 무엇을 뜻하는 말이지? 어서 말해보게, 스발라 사제."

"솝은 버섯을 뜻하는 코린티아 말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수르츠 솝은 매우 희귀한 버섯의 일종이에요. 수르트의 버섯(Surtr sopp)이라는 녀석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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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화. 붉은 먼지(4) 19.10.31 60 1 13쪽
96 96화. 붉은 먼지(3) 19.10.30 64 1 13쪽
95 95화. 붉은 먼지(2) 19.10.29 51 1 14쪽
94 94화. 붉은 먼지(1) 19.10.28 56 1 13쪽
93 93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3) 19.10.25 65 1 13쪽
92 92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2) 19.10.24 64 1 13쪽
91 91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1) 19.10.23 150 1 13쪽
90 90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4) 19.10.21 65 1 13쪽
89 89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3) +1 19.10.18 84 1 13쪽
88 88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2) 19.10.17 55 1 13쪽
87 87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1) 19.10.16 55 1 14쪽
86 86화. 아웃브레이크(3) 19.10.15 62 1 13쪽
85 85화. 아웃브레이크(2) 19.10.14 55 1 13쪽
84 84화. 아웃브레이크(1) 19.10.11 58 1 13쪽
83 83화. 항구도시 미네바(3) 19.10.10 61 1 14쪽
82 82화. 항구도시 미네바(2) 19.10.09 56 1 13쪽
81 81화. 항구도시 미네바(1) 19.10.08 65 1 14쪽
80 80화. 호향에서(3) 19.10.07 76 1 13쪽
79 79화. 호향에서(2) 19.10.04 86 1 13쪽
78 78화. 호향에서(1) 19.10.03 7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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