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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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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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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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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5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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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3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3)

DUMMY

어느새 차갑게 굳어버린 엘라인을 바닥에 눕힌다. 근처를 두리번거리던 현우는 그녀의 방으로 추측되어지는 곳의 문을 덜커덕 열었다. 덮을 것을 가지고 온 그가 엘라인의 위로 살포시 천을 떨어트렸다.


그것으로 약소하게나마 인사를 대신한 현우는 탁자 위의 서류 뭉치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숲에서 제대로 된 목재를 찾기도 전이었다. 그 표식을 알려줄 엘라인이 이미 세상을 뜬 이상, 나무를 베어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가 유일했다.


"후우."


심호흡을 몇 번 한 현우는 의자를 끌고 자리에 앉아 위에서부터 서류를 훑기 시작했다.


"미네바 수산조합 가입 안내문, 제껴. 조합 가입 감사장, 월간 소식지... 아, 찾았다."


가장 유력해 보이는 종이 한 장, 척 보기에도 그 재질부터가 다른 것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이 감촉을 기억하고자 애를 썼다.

분명히 다른 서류들 또한 이와 같으리라, 그런 확신을 가지고 더욱이 종이 뭉치에서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한 그의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해가 미네바를 가득 비추고 있을 때, 비로소 일차 작업이 끝난 그가 의자에 기대어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손에서 일렁이는 바람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솟아난 땀을 식힌 현우가 몇 십장으로 줄어든 종이 뭉치를 탁탁 탁자에 쳤다.


"좋아, 이제 시작이야."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기 위해 두꺼운 책들을 뒤지는 것처럼, 현우는 그대로 서류의 내용에 몸을 던졌다.

엘라인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집단에게 보고하기 위해 정리를 해둔 문건이었던 것일까, 외부자인 현우가 보아도 대강 요지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꽤나 자세히 요약이 되어있었다.


아직 첫 장밖에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엘라인의 말이 허투루 흘릴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여기에 도리아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도리아 제국의 구 이오니아 령쪽 인물이 우리에게 먼저 접촉, 최근 들어 다시 그 세가 강해지고 있는 이오니아 왕국과 국경을 맞닿아 있는 입장에서..."


손가락을 빠르게 밑으로 내려가며 굵게 쓰여진 글씨만을 읽는다. 과제와 시험으로 단련된 학생의 한 수였다.

강조하는 문구만으로 문맥을 파악하는 것, 솔직히 빽빽하게 쓰여져 있는 것들을 전부 읽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자꾸만 현우의 눈에 어른거리는 일행들의 모습이 그의 등을 떠민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고, 그저 미네바에 혼란만 일으키길 원했다. 무고한 희생자를 많이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언행에 회의를 거친 결과, 루소와 리는 이에..."


* * *


어제 새벽에 벤과 알렉스를 비롯한 이들이 누워 있었던 곳에는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나무 판자 위로 몸을 뉘였다.

크고 작은 신음 소리가 천막을 울리고, 아직 병의 정도가 낮고 거동이 가능한 이들은 사제의 인도에 따라 물이나 음식을 날랐다.


"물은 무조건 끓이세요. 어떤 부정한 것이든, 불로 정화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예, 사제님."

"그리고 마튼 씨?"

"네?"

"마튼 씨는 이쪽으로 와서 이 분을 봐주시고, 조금 있다가 깨어나신다 싶으면 묽은 죽을 먹여주세요. 방금 성력을 사용해 병세를 완화시켰으니 곧 깨어나실 겁니다."


수많은 인파에 치료술을 가진 이는 사제 혼자.

아이들을 위한 동화나 기적을 기록한 교단의 문헌 등에서 보면 이럴 때에는 막대한 신성력을 가진 이가 한번에 모두를 치료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포리아 님이 말했다. 이곳의 모두가 아그룬 님의 품에 안기니, 대양의 따스한 품이 모두를 받아들이라. 그의 외침과 함께 쏟아지는 푸르디 푸른 물결이 휩쓸고 지난 자리엔 어느새 병색이 완연한 이들도 생명의 기쁨으로 충만하더라.]


알렉스가 읽었던 이포리아 행전에 나왔던 일화였다.

그 분처럼 조금 더 능력이 뛰어났더라면, 이 많은 이들이 이토록 고통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아그룬의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으니, 결국 부덕한 것은 자신이었다.

신이 사람들에게 내린 성력은 그 권능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충만해진다.

알렉스는 알고 있다. 성력은 결코 기적을 바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이들에게 베풀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그러나, 점점 침범해오는 병마에 신음하며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들을 눈 앞에 둔 채 어찌 마음에 불어 닥치는 풍랑을 가만히 잠재울 수 있을까.

부족한 능력의 한탄에 빠진 사제는 그렇게 서서히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집중하세요!"


누군가의 외침에 알렉스를 끌어올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기서 꺾이면 아그룬 님께도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알렉스 님. 일어나세요."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시죠? 아."


이들이 그가 생각한 사람들이 맞다면, 한 차례 있었던 회의의 내용 또한 들었으리라.

미네바에서 알렉스는 꽤나 이름이 퍼진 사람이기도 했고, 회의에서도 언급이 되었으니 그녀가 그를 알고 있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지만,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상징은 알렉스, 그도 몇 번 보았던 것이었다.


"에야르 교단의 분이신가요."

"어, 에야르 님을 알고 계시다니, 이것 좀 놀라운 걸요?"

"성국에도 에야르 님을 믿는 분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원래 에야르 님은 깊은 산악 쪽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까."


원래는 대륙의 북부 쪽에서 많이 믿는다곤 하는데, 이곳까지 교세가 뻗칠 줄은 몰랐었다.

성국 내의 아그룬 교단이 마련한 숙소에 지낼 때, 가끔 지나가다 만난 에야르 쪽 사람들의 행색을 그가 떠올렸다.

이런 말을 하는 것, 그 자체를 넘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부덕에 속하겠지만, 그들은 결코 행색이 말끔하고 부유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옷과 대화에서 드러나는 기품은 알렉스가 만났었던 그들과는 사뭇 차이가 났다.

그의 눈빛을 읽은 에야르의 사제가 가뿐히 그 무언의 물음에 답했다.


"에야르 님을 모시는 사제, 스발라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 오신 것 같은데, 이오니아 어를 잘 하시는 군요."


충분히 물을 법한 질문이었다. 알렉스 또한 이오니아 언어를 배우기 위해 부단 노력했었고, 적어도 자신이 아닌 에야르의 사제들 중에서 그녀와 같은 이는 없었으니.


"아, 저는 군종사제에요."

"군종...을 하신다고요?"

"이래 보여도 이오니아 해군에 소속되어 있는 몸입니다. 그러니 이오니아 언어를 잘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여성의 몸으로 거친 바다를 이겨내며, 군선이라 한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이들과 어떻게 부대끼며 지내는 것인지.

자세히 보니 그리 단련된 몸도 아니었다. 호리호리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병들마냥 두터운 근육으로 몸을 두르는 것도 아니니.


"대단하십니다. 저보다 배를 더 잘 타시겠어요."

"북쪽의 것에 비하면 이쪽의 해풍이야 널널한 편이기도 하고, 에야르 님은 전쟁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 자리를 맡게 되었지요. 아그룬 님을 모시는 사제이시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스발라 님께서 오셨다는 건."

"네, 맞습니다."


그녀의 뒤로 목책을 건너오는 수십 명의 사람들. 그들 중에 백색이나 완전히 검은 색의 옷을 입은 이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알렉스나 스발라 같은 신을 믿는 이들이 꽤 섞여 있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해군과 관리청 간의 연계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제대로 지원이 들어올 거에요."


그녀는 적어도 이오니아 제 2함대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듯 했다.

최소한 이번 지원에서 책임과 지휘권을 이양 받았는지, 그녀의 지시에 따라 긴급 구호 물자와는 다른 종류의 물품들이 척척 쌓였다.


"군수용으로 비축했던 것들입니다. 조금 오래 전 식량들이긴 해도, 철저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들이라 오염될 염려는 없지요. 그 전에 사제단에서 정화를 거치기도 했습니다."

"대단하시군요."

"알렉스 님은 거동이 가능하신가요? 이토록 많은 분들을 홀로 돌보셨으면 지금은 잠깐 쉬시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만."


물론 그도 쉬고 싶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스발라의 권유에 고개를 저어 거절의 의사를 정중히 표했다.


"아닙니다. 저도 한 팔을 보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간 제가 짧은 시간이지만 치료를 맡은 것도 있어, 제가 옆에서 다른 분들께 알려드려야겠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비록 믿는 신은 다르지만, 에야르 님의 축복이 알렉스 님에게도 함께하기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그룬 님의 보살핌이 스발라 님 또한 어루만지기를."


두 사제가 서로를 축복한 뒤, 그들은 서둘러 정화 작업을 위한 채비에 몰두했다.

스발라를 비롯한 구호 인력들이 가져온 장작과 성수, 축성한 향료까지.


서로 믿는 이들은 다를 지라도, 병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는 이미 하나로 뭉친 지 오래였다.


* * *


"이건 뭐야."


욕지거리가 목 위까지 차오른다. 겨우 침과 함께 다시 쓸어 내린 현우가 거칠게 서류 덩이를 던졌다. 그러다가도 다시 냉큼 주워 종이를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현우가 내던진 종이는 그가 처음 봤었던 문서와는 차이를 보였다.

종이의 재질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엘라인이 속한 집단이 아닌 외부자인 현우가 어떻게 흩어진 보고서를 규합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욕을 내뱉을 뻔한 문제는 다름아닌 쓰여진 문자에 있었다.


"도저히 모르겠어."


적어도 이오니아 왕국, 그를 넘어 구 이오니아 제국령에서 쓰여지던 글자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림이나 조각 같은 데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장식과도 같아 보이는 글씨는 요상한 점과 기호가 어울려 도저히 그로서는 읽기 힘들었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까막눈 신세가 된 현우는 이마를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코린티아에서 쓰는 글자인가."


엘라인, 그녀가 말하기로는 코린티아 출신이라 했으니, 그녀가 전에 익힌 표기 방식이라 하면 코린티아의 것이 아니겠는가.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다시 생각해보니 적어도 보안에 있어서는 꽤나 구색이 맞아 들어갔다.


코린티아 출신이거나 그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게 단순한 끄적거림이나 암호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해 허비하는 시간 등을 고려한다면, 괜찮은 보안 체계가 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내용을 알 수 없음을 현우는 깨끗이 인정했다

때로는 빠른 인정과 끊음도 필요한 법이니. 그러나 그는 주위를 둘러 종이를 묶을 끈을 찾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약 이 일이 잘 흘러간다면, 혹여 최악의 사태로 전개되더라도 어찌 마무리가 된다면 이 문서들은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임을 알았다.

더불어 마드라드 테러 사건을 일으킨 그 배후 집단에 대해서도 알 중요한 기회였다. 종이를 말아 몇 장 단위로 묶고, 다시 말린 종이뭉치를 한번에 묶어 풀어지지 않게 꽉 묶었다.


마치 장작 더미를 손에 이고 가는 것마냥 현우의 한 손에 몇 십장의 종이 두루마리가 들렸다.


"이곳을 다시 찾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완전히 집을 나서기 전, 현우는 문 한쪽에 마력을 불어 표시를 새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겠지만, 적어도 오늘 내일 동안은 근처에서 마력으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자신의 마나를 이런 용도로도 활용할 만큼 성장했다는 생각에 잠시 뿌듯해질 찰나, 어디선가 맡아본 것만 같은 향긋한 연기가 현우의 코를 찔렀다.


"으읍!"


갑작스레 달아오른 오카리나가 현우의 가슴을 따갑게 때렸다.

급히 옷 안쪽으로 손을 넣어 악기를 다시 꺼낸 그가 그것을 바라보았다. 나무로 만들어졌음에도 어떻게 달아올랐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날린 경고에 현우는 엘라인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죽으면 절대로 화장(火葬)하지 말고, 관을 밀봉해서 묻어버려.]

[열기든, 고온의 바람이든 상관 없어. 하지만 절대로 불꽃에 닿아서는 안돼.]


향긋한 내음은 금방 사라지고, 매캐한 연기가 다시 현우의 콧속으로 들어온다.

연기가 났다는 건, 어딘가에 불꽃이 일어났다는 것과 같았다.


"불..."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

연기가 흐르는 길을 찾아 현우는 급박하게 발을 내질렀다.


현우의 입이 들썩이고 마력이 요동친다. 바람이 그의 걸음을 인도하며 연기를 찾아 길을 안내했다.

이제는 정말 익숙해진 대구 거리에 현우가 발을 내디딘 순간,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아비규환, 그것을 넘어선 비명과 절규의 향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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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96화. 붉은 먼지(3) 19.10.30 64 1 13쪽
95 95화. 붉은 먼지(2) 19.10.29 51 1 14쪽
94 94화. 붉은 먼지(1) 19.10.28 56 1 13쪽
» 93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3) 19.10.25 65 1 13쪽
92 92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2) 19.10.24 64 1 13쪽
91 91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1) 19.10.23 150 1 13쪽
90 90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4) 19.10.21 65 1 13쪽
89 89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3) +1 19.10.18 84 1 13쪽
88 88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2) 19.10.17 54 1 13쪽
87 87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1) 19.10.16 54 1 14쪽
86 86화. 아웃브레이크(3) 19.10.15 62 1 13쪽
85 85화. 아웃브레이크(2) 19.10.14 55 1 13쪽
84 84화. 아웃브레이크(1) 19.10.11 58 1 13쪽
83 83화. 항구도시 미네바(3) 19.10.10 61 1 14쪽
82 82화. 항구도시 미네바(2) 19.10.09 56 1 13쪽
81 81화. 항구도시 미네바(1) 19.10.08 64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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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79화. 호향에서(2) 19.10.04 85 1 13쪽
78 78화. 호향에서(1) 19.10.03 7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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