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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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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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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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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3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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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1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1)

DUMMY

"좋아."


문을 제대로 닫은 여인은 현우를 감싸던 팔을 풀더니 창을 가린 커튼을 살짝 젖혀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혼자 왔거든요. 다른 일행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다행이군."


커튼의 틈 사이로 비친 햇살에 따라 현우는 집주인을 그나마 제대로 집주인을 볼 수 있었다.

여성 특유의 단련된 근육은 헐렁한 옷 너머로도 충분히 느껴졌다. 교류제 때 봤었던 루고의 기사들에게서나 느껴지던 그 날카로운 기세. 검을 다루는 사람이다.


"검사...신가요."

"호오."


분명히 자기가 끌고 들어온 것이지만 처음 본 사내가 자신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것에 대해 그녀는 꽤나 놀란 얼굴이었다.

이완되었던 얼굴 근육은 이윽고 찌푸려지며 경계의 태세를 보인다.


"살짝 훑어본 거 만으로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나? 역시. 네 놈은..."

"아,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던 저는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요."


무형의 기운이 그를 향해 덮쳐올 것만 같아 현우는 바로 손을 내저었다.

서로가 예민해져 있는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서도 칼부림이 일어날지 모른다.

새벽의 일과 지금까지 있었던 문전박대로 보아, 역병 격리구역에 있는 미네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강 알게 된 그였다.

현우는 다급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조금 어리게 보일지 몰라도, 저는 마법사입니다. 정제된 기운은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거든요."

"마법사라. 아옴?"

"마드라드요."


현우의 대답을 들은 여인의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비틀어 올라갔다.

단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계속해서 피가 번지는 어깨에 대한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었을까.

오직 그녀만이 아는 정답을 뒤로 한 채, 여인은 잠깐의 침묵 뒤 짧게 조소했다.


"차라리 이 편이 낫겠지."

"무슨 소리이신가요?"

"아니야. 나는 엘라인, 네가 말한 대로 검사야. 보시다시피 모종의 일에 휘말려서 지금은 죽어가는 처지지."


탁자에 올려져 있는 마석등을 킨 여인은 다시 창문을 암막으로 덮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공간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밝히는 마석등의 옆에, 두 사람은 묘하게 대치 상태를 이루었다. 그 옆에 편히 쉴 수 있는 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저기. 어깨의 그."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


다시 제대로 보니 옷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검붉게 물든 핏자국은 선명했으나 칼이나 다른 무기로 옷이 찢기며 찔린 흔적은 없다.

아마 옷을 갈아입은 것이 틀림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에 피어난 혈화(血花)는 상처가 상당히 위중함을 말해주었다.


"피습당한 건가요?"


상처를 확인하러 다가오는 마법사에게 엘라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나직이 경고를 날렸다.


"오지마. 네가 이런다고 해서 나아질 상처는 아니니까. 내가 살기 위해 뭘 해보지 않았을 줄 아나?"

"제 일행 중에 사제가 있어요. 웬만한 상처는 눈 깜짝할 새에 다 치료가 가능하신 분입니다. 저랑 같이..."

"그만."


현우의 말을 단번에 끊은 엘라인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미 글렀어."

"..."


순간 어벙한 얼굴을 보인 현우가 다시 볼을 부여잡고선 정신을 차리는 와중, 그녀는 탁자에 다가가 무엇을 찾기 시작했다.


"아니, 이번 질병은 그렇게 치사율이 높지 않다고 들었어요."

"안돼. 애초에 지금 퍼진 병은 희석된 상태였고, 제대로 활성화도 되지 않았으니까."

"네?"


엘라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은 현우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가 아는 정보로는 제대로 인과가 연결되지 않는다.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양쪽의 실을 이은 건 그녀의 다음 발언이었다.


"그에 반해, 내 어깨를 찌른 칼에 묻어있던 건 원액이었어. 어떻게든 몸을 피해 살아는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한계야."

"다, 당신의 말은."

"마법사라면서. 이런 질병이 자연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오랜만에 드러난 그녀의 말간 웃음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낙담과 비웃음 등이 섞여 온갖 감정을 떠올리게 했으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엘라인의 창백한 피부와 어울려 오묘한 분위기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건 도리아 제국의 농간으로부터 시작되었지."


* * *


"휴. 이제는 괜찮아질 겁니다."


식은 땀을 닦던 알렉스의 확신에 찬 말에 명연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가 벤의 고열을 내리기 위해 한 노력을 알기에, 그녀는 슬며시 알렉스의 이마에 솟은 땀을 천으로 훔쳤다.


"고생하셨어요, 사제님."

"벤 씨를 생각하니 아무래도 상당한 힘을 쏟으면 안될 것 같아 치료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하... 제 안위를 먼저 챙기게 될 줄은."

"그건 아니에요. 아직 관청에서 제대로 된 지원이 내려오지 않는 이상, 제 생각에는 사제님만이 이 구역에서 유일한 신관님이 아닐까요?"

"설마 그렇겠습니까? 미네바 관리청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미 모집이 들어갔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이제 겨우 이틀 내지 사흘 정도 지나지 않았습니까. 아, 윤화 씨가 오시는군요."


터덕터덕 걸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으로는 그녀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명연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들에게 다가와 남길 윤화의 말을 기다렸다.


"어떻게 되었나요?"

"일단 바닥에 깔 거는 지원을 해주겠다 하네. 관짝이라도 좋으니까 이슬 머금은 차가운 돌 바닥에서 자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했더니 건초나 나무판을 지원해주겠다 하더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많으면서 딸랑 해를 가릴 천막 하나만 주다니.

병든 환자들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며 항소하는 윤화에게 알렉스가 물었다.


"제가 요청 드린 것은 혹시 물어보셨나요?"

"네, 알렉스 씨. 오늘 정오 즈음에 일차로 구호 인력을 대거 투입한다고 합니다. 여기 대구 거리를 중심으로 해서 대규모 정화 작업을 진행한다 하더라고요."


모두들 체력이 떨어져 있다. 벤이 먼저 균형을 잃고 쓰러진 것일 뿐,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될 것이라 사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잘해야 내일 정도에 도움이 오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관리청의 대처가 예상보다 빠르지 않은가.

인력과 물품을 수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들었기에, 조금 더 면밀히 준비하기를 바라는 의견과 빨리 도움을 주길 바라는 생각이 알렉스의 마음에서 서로 충돌했다.


"사제님?"

"아, 미안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래서 치료제 개발은 멀었답니까?"

"성법으로는 어려울까요?"


사제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라며 윤화가 말끝을 살짝 흐렸다.

그녀의 말에 알렉스 또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의사를 표했다.


비록 자신도 환자 신세를 지고 자신의 수많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알렉스의 뇌리를 스치는 감각은 단순히 성법만 가지고서는 이를 마무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실제로도 그의 치료가 제이미의 가족들을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에는 실패하지 않았는가.


"물론 새로 오실 분들은 저보다 실력이 좋으시겠지요. 그래도, 왜인지 마음 한쪽이 가라앉지를 않는군요. 거친 풍파가 이는 것이 아무래도 파도가 거셀 모양입니다."


간혹 아그룬 님께서 이렇게 계시를 내려주실 때가 있다며 사제는 살짝 치아를 내보였다.


"저기, 알렉스 사제님 되십니까?"


갑작스레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에 사제가 고개를 돌렸다.


"어찌 오셨습니까? 아, 식량이 필요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식량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럼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오..."


털썩.


자신을 헤르만이라 소개한 노인은 그 말만 하고선 덜컥 무릎을 꿇었다. 다행히 사제가 급히 일어나 그를 부축하였기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어깨에 기댄 노인의 육신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제 아내, 겔레를 살려주십쇼, 사제님! 부탁드립니다! 어허어엉..."

"어르신, 말을 하셔야 제가 도움을 드립니다. 어르신!"


흐느껴 울기 시작한 노인의 어깨를 붙잡고 알렉스는 강하게 두어 번 정도 그를 흔들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헤르만에게 명연이 다가왔다.


"할아버지,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할머님이랑 같이 다시 나오시는 건 어떨까요?"

"명연 양, 그건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다 같이 병에 걸린 신세인 것도 있고, 할머님을 모시고 나오는 게 훨씬 낫잖아요. 지금 사제님은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 편이 낫겠죠, 할아버지?"

"정말 고맙네, 고마워. 이미 다 살았다곤 하지만, 겔레가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는 걸 보니..."

"저기, 알렉스 씨. 이쪽도 좀 봐줘야 할 것 같아요."


명연이 헤르만을 데리고 그의 집으로 향하는 사이, 윤화의 부름에 알렉스는 헤르만의 눈물로 젖은 옷자락을 이끌고 몸을 돌렸다.


"여기 사제님이 계시다고 해서 왔는데요."

"크, 크흠. 알렉스 씨가 여기 있습니까?"


아직 현우가 도착하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윤화와 알렉스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 일행에게 한 화려한 전적이 있는지라, 괜스레 발이나 손을 쭈뼛거리며 얼핏 보아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맙소사. 이제 시작이로군요."


아그룬 님께서 넌지시 알려준 풍파가 이것이었나. 사제의 마음이 한결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 * *


"도리아가 왜 여기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굳이 국경에서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미네바는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이오니아 왕국에서도 동쪽에 위치한 항구.

오직 성국만이 이와 국경을 맞닿아 있었다. 도리아와 국경을 마주하는 무풍지대는 이곳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글쎄. 그것까지 내게 알려주지는 않던데."


엘라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자신은 떠돌아 다니는 자유 용병이며, 도리아의 기사라 소개한 어느 누군가로부터 의뢰를 전달받아 같이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솔직히 그 말을 제가 믿을 거라고 보세요?"

"아니. 하지만 대충 죽음을 눈에 앞둔 이의 말인데, 믿는 척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니."


그녀의 말이 사실이 아닌 날조라는 것, 그리고 이가 이미 간파 당했다는 것을 두 사람 다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후로 누구 하나도 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엘라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가 아니었으니.


"그럼 그것 하나만 답해줘요. 당신, 이 사태를 만드는 데에 얼마나 관여한 거에요."

"노 코멘트."

"그럼 됐습니다. 당신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어요."


그렇게 현우는 발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멈춰."

"무슨 짓이죠."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매끄러운 소리와 더불어, 차가운 무언가가 현우의 어깨에 닿는다. 여름이라 상대적으로 얇은 옷감 너머로 서늘함 그 이상의 감촉이 느껴진다.


"나갈 수 없어."

"이봐요, 엘라인. 나로서는 지금 당신을 쳐죽이지도 않는 것만으로 당신에게 선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오라를 끌어 올렸다간 그 생이 더 짧아질 건데, 괜찮겠습니까?"


현우 또한 마력을 함부로 사용했다간 어떤 꼴이 날지 몰랐다. 오카리나가 발병을 유예시키곤 있지만, 저번과 같이 언제 그 효용이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기에.


"조금만 기다려."

"아까 전부터, 계속 조금만, 조금만! 당신은 혼자이지만, 나는 지켜야 할 동료들도 있다고요!"


현우의 손에 일렁이는 바람에 엘라인은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들고 있던 칼을 내려 바닥에 푹 꽂았다.

멍하니 그를 노려본 그녀는 다시 서류를 찾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달리, 무언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뭐에요."

"왜."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아니야, 됐어. 말리진 않을게. 가려면 가. 이대로 영영 이 사건의 해결책은 찾을 수 없을 거야."

"내일 다시 들르죠. 아까 누가 했던 말마따나, 아픈 와중에도 그렇게나 말할 체력이 남아있는 걸 보니 오늘 내일 하진 않겠네."


현우는 그들이 있던 집의 문을 활짝 열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러나, 그 뒤로 들린 엘라인의 말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이자나드 님의 농간인가. 네 녀석이 여기 있을 줄은."


단순한 독백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단어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이자나드. 엘라인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덜컥 멈춘 현우가 문을 거칠게 닫았다.


쾅!


엘라인이 고개를 돌린 자리에는 어느새 허공에 마력탄을 띄워놓은 마법사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에블린 씨와 무슨 관계입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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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97화. 붉은 먼지(4) 19.10.31 60 1 13쪽
96 96화. 붉은 먼지(3) 19.10.30 64 1 13쪽
95 95화. 붉은 먼지(2) 19.10.29 51 1 14쪽
94 94화. 붉은 먼지(1) 19.10.28 57 1 13쪽
93 93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3) 19.10.25 65 1 13쪽
92 92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2) 19.10.24 65 1 13쪽
» 91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1) 19.10.23 151 1 13쪽
90 90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4) 19.10.21 65 1 13쪽
89 89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3) +1 19.10.18 85 1 13쪽
88 88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2) 19.10.17 55 1 13쪽
87 87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1) 19.10.16 55 1 14쪽
86 86화. 아웃브레이크(3) 19.10.15 62 1 13쪽
85 85화. 아웃브레이크(2) 19.10.14 55 1 13쪽
84 84화. 아웃브레이크(1) 19.10.11 58 1 13쪽
83 83화. 항구도시 미네바(3) 19.10.10 62 1 14쪽
82 82화. 항구도시 미네바(2) 19.10.09 57 1 13쪽
81 81화. 항구도시 미네바(1) 19.10.08 65 1 14쪽
80 80화. 호향에서(3) 19.10.07 77 1 13쪽
79 79화. 호향에서(2) 19.10.04 86 1 13쪽
78 78화. 호향에서(1) 19.10.03 75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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