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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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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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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1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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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90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4)

DUMMY

"벤!"


현우가 내지른 비명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고정된다.

혹여 자신이 잘못 느꼈을까 싶은 현우는 다른 한 손으로 제 이마를 만지며 다시 벤의 체온을 측정했다.


"왜 이래..."


틀림없다. 벤의 체온은 현우의 그것에 비해 너무나도 높았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이라곤 밤에 마력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으리란 추측뿐.

당장 중요한 것은 그런 원인을 파악하는 것보다 벤의 체온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 순간에 가장 도움이 될 이를 향해 현우가 입을 열었다.


"알렉스 씨. 혹시 체력이 괜찮으시다면 벤의 진료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걱정 마십시오. 아그룬 님께 바친 몸. 육체의 고통은 다른 이들에 대한 봉사에 아무런 장애물...도, 쿠, 쿨럭!"


역시나 마법을 사용해 최대한 편안히 자려 했어도 습하고 찬 돌 바닥은 결코 좋은 잠자리가 될 수 없었다.

사람마다 병에 경중의 차이가 있는 듯 했고, 그나마 마법사와 사제는 체내에 모아둔 마력과 성력으로 버티는 듯 했으나, 벤의 경우엔 급격히 무너진 균형에 병마가 몸을 차지한 것이었다.


"괘, 괜찮으신가요."


아무리 현우가 전에 비해 마법에 좀 더 능통해졌다 한들, 질병 쪽은 전혀 그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친우가 저렇게 고통을 받는 와중임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두 손을 꽉 쥐고 알렉스가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는 것뿐.


"아무래도 저희 두 사람이 좀 질병에 취약한 가 봅니다. 하하."

"알렉스 씨..."

"열은 떨어트릴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현우 씨.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며칠을 버틸 수는 없어. 적어도 천 뭉치나 낙엽이라도 긁어서 침대 대용으로 쓰던가 해야지."

"윤화 누나..."


자신과 명연을 가리키는 윤화는 결심에 찬 얼굴이었다.


"다행히 벤의 열은 사제님이 해결해준다고 공언했으니 그건 다행이지만, 이런 차가운 돌 바닥이라면 다시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걸. 애초에 어제처럼 비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사람을 나눠서 좀 깔 것을 구해야 할까요?"

"어떻게 나누려고? 벤과 사제님은 여기에 있어야 해. 벤이 아픈 지금, 알렉스 씨와 명연이를 보호해야 할 인원은 여기 남겨둬야 하고, 그렇다고 명연이 혼자 보내기엔."

"저는 괜찮아요, 언니. 다들 아픈 와중에 저만 그렇게."

"너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눈이 돌아간 새끼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잖아? 어젯밤도 그랬으니까."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윤화의 말에 동조했다.


"그럼 제가 갈게요. 어차피 저 구호물자들 일부를 날라야 하기도 했고, 그럼 누나께 너무 많은 짐이 씌워지는 것 같긴 한데."

"괜찮아. 경비야 저기 목책 너머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을 테니까 밤과 같은 접근은 쉬이 하기 어렵겠지. 나는 저 사람들에게 요청을 할게. 장현우, 너는 사람들에게 가서 혹시나 쓰지 않는 옷가지나 다른 것들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어봐. 식량이랑 같이 있는데 매몰차게 굴지는 않겠지."

"아마도요."


일의 배분을 맡은 두 사람이 각기 할 일을 시작했다. 현우는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상자를 묶은 끈 무더기를 가득 쥐었다. 대구 거리를 떠나기 전, 그는 아직 누워있는 벤과 그의 옆에 자리잡은 알렉스와 명연을 눈에 가득 담았다. 그리곤, 이내 발걸음을 옮겨 붉은 깃발을 매달아 놓은 집들로 향했다.


적색의 기를 문 앞에 걸어놓은 곳들은 전부 미네바 관리청의 말에 따르면 심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있는 집들이다. 아직까지는 큰 증상을 보이지 않는 현우였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똑똑.


"누구슈?"

"안녕하세요, 관리청에서 위탁을 받아 구호 물자를 나눠드리러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게."


빼꼼 열린 문의 틈새 사이로 검버섯이 핀 손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문의 바깥으로 보이는 손목과 팔에는 붉은 반점이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려는 듯 손만 끄적끄적 휘적이는 노인은 다시금 목소리를 내어 현우를 찾았다.


"지금 장난치는 건가? 분명히 목소리는 젊은이였는데 노인을 놀려먹어?"

"아, 아닙니다, 어르신."


가지고 온 꾸러미 중 하나를 노인의 손에 쥐어주자 노인의 손이 다급히 줄을 낚아채고는 문 안으로 쏙 들어간다.


"저, 저기 어르신."


문과 벽의 틈새는 작은데, 상자의 너비는 그보다 커서 턱, 턱, 문에 걸리는 소리만 주기적으로 들렸다. 나무를 얇게 켜서 만들었기에 상자는 금새 모습을 잃고 부서질 듯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그."

"아, 이러면 되겠군."


문이 조금 더 열리고 상자가 현우는 보이지 않는 저 곳으로 쏙 들어간다.


쾅!


계속해서 사람은 말하고 있건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세게 닫았다. 그 소리에 현우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똑똑똑.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는 현우의 외침에 다시 문이 살짝 열린다.


"꺼지게."

"네?"

"내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이제야 민심을 잡으려 해도, 자네는 이미 글렀네."


쾅. 그 말만 남기곤 노인은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도대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생전 처음 보는 노인이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 보는 청년에게 저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민심을 운운하는 저 목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현우의 머리는 네 번째로 찾아간 집의 아주머니에 의해 조금 그 안개가 걷혔다.


"그래도 운반해주니 이야기를 해주는 거니까 잘 들어요."


무명천으로 코와 입을 싸매고 있는 여성은 자기도 모르게 기침으로 인해 튀어나오는 가래를 막으려는 듯 했다. 간헐적으로 뿜어지는 기침에 몸을 수그리기까지 하는데, 이미 많은 정기를 빼앗겼는지 그 행태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당신들, 대구 거리에 구호 물자를 쌓아놓고 있는 일행들 맞지요?"

"...네. 그렇긴 한데."

"이미 이 근방엔 소문이 쫙 퍼, 코, 콜록! 콜록!"

"괜찮으세요?"

"하. 죽을 병은 아니라 하니까 버티곤 있는데 언제 관리청에서 손을 써줄 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이미 소문이 쫙 퍼졌거든요?"


입을 막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현우를 향해 검지를 쭉 펼치는 여인, 그녀의 눈매가 여우처럼 날카롭게 찢어진다.


"일행 혼자서 그걸 다 헤쳐먹는단 소문이요."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전혀 그렇지가 않는걸요.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거에요."


자신들을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전부 구호물자를 나눠줬다는 현우의 말에도 쉽사리 한번 세워진 믿음을 쉽게 저버리지 않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분명 더크 씨 네가 그렇게 말했는데요? 밤에 찾아갔더니만 구호물자를 다 펼쳐놓고 지들 혼자만 쓰고 있더라 카던데요."

"정말 오해입니다. 바닥에 잠자리를 마련하려고 상자를 펼친 것이고, 그것도 저희 용으로 따로 분류를 해놨던 거에요."

"이봐요. 그나마 갖다 준 정도 있고, 나니까 말하는 건데."


잠시 기침이 이어지고, 천을 빨아야겠다며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은 문을 닫기 전, 현우를 보며 나지막이 몇 마디를 남겼다.


"친하게 알고 지내던 사람이 말해준 거랑,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생판 남이 이야기하는 거랑, 어느 걸 더 믿겠어요? 됐네요."

"아... 그렇다면."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에 현우의 어깨가 절로 쳐졌다.

다른 곳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입을 막고 기침을 하던 여성의 경우가 제일 온건히 그에게 다가온 편이었다.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사람들은 그대로 자신의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을 찌르기 주저하지 않았다.

몇 번의 부닥침이 있은 직후, 현우의 머리 속에서 작금의 상황이 대충 그려졌다.

범인은 필시 밤에 만났던 2인조일터. 그들이 앙심을 품고 날이 밝아 현우 일행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 미리 선수를 쳤으리라.


그들이 평소에 쌓아놓은 행실이 좋은 편이었는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우의 말을 그대로 넘겨버린다. 그나마 그가 들고 있는 구호물자 덕에 현우에게 손찌검 이상의 무력 행위를 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일차 회의 때도 봤었던 마튼의 집을 우연찮게 방문 했을 때, 실망에 이미 낙담하던 현우에게 그들은 불을 피울 때 쓰라며 장작용 나무 대여섯 개를 쥐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바다에서 돼지를 낚는 것과 같았고, 대개는 '쾅' 소리만 줄기차게 받았을 뿐, 제대로 된 도움은 받을 수 없었다.


마음이 살짝 깎인 사내가 그렇게 스물 세 번째의 문을 두드렸다.


"저리 꺼져! 우리 집에 병자는 들일 수 없다!"


역시나 비슷한 반응,


"제, 제발요. 저는 지금 거의 멀쩡한 데다가, 잠시 얼굴만 보면 됩니다. 혹시나 건초나 다른 것들도 괜찮아요. 바닥에 깔 것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이미 그 더러워진 공기를 집안으로 들이라고? 세상에나! 당신들을 도와줄 순 없어!"


당신들? 보지도 않고 누군지 알고 있단 말인가.


"저기요? 당신들이라뇨. 제가 누군지 이미 알고 계시단 말씀입니까?"

"..."


현우는 쾅쾅 문을 두드려보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의 말대답이 없었다. 명백한 축객령(逐客令)이었다.

다행히 빗자루 같은 것에 맞거나 양동이로 쏟아지는 물에 젖지는 않았으나, 이번의 집 또한 현우에게 철옹성같이 그 안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뒤로 발을 돌릴 참이었다.


"어, 어라?"


갑자기 시선에 잡힌 작은 집.

비교적 큰 두 채의 집 사이에 가냘프게 제 몸을 비집고 들어간 꼴이 지금의 자신과 닮아서인 것일까. 현우의 눈이 그 집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호, 혹시 여기에 사람이 있을까?"


창문마저 무언가로 가려놓은 터라 사람의 인기척이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아직도 안 갔냐'라며 쏟아지는 고함에 이크, 현우는 뒷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다시 그 작은 집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분명히 현우는 창문 너머로 무언가 일렁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사람이 틀림 없었다. 저리 큰 움직임이 집안에 있다면 분명히 사람일 것이라. 그가 잘못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현우의 머리 속에선 없는 것인지, 어느새 사내는 작은 집의 문 앞에 그림자를 비췄다.


똑똑.


제이미의 집을 두드릴 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반응이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지' 싶은 현우는 그대로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였다.


끼, 끼이익.


살짝 녹이 슨 경첩이 삐걱거리며 거칠게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고개를 뒤로 한 현우를 맞이하는 건 입을 벌린 작은 집이었다.


의외로 집안에는 어떠한 불도 보이지 않는다. 아침이건만 햇살이 그 안쪽까지는 제대로 닿지 않고, 창문 또한 무언가에 의해 가려진 상태였다. 어둑어둑해 사물의 형체만 희끄무레하게 인식할 수 있는, 마치 동굴과도 같은 그런 집에서 하얀 편의 팔이 뻗어 나온다.


"가, 감사... 으읍!"


미네바와 같은 수심이 깊은 항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야기지만, 사람이 충분히 잠수할 만큼 완만하게 깊어지는 곳들에 생활하는 바다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바위 틈에 살고 있는 기다란 뱀과 같은 물고기는 사냥을 할 때면 틈에만 박혀있다가, 사냥감이 앞에 등장하면 쏜살같이 그 기다란 몸을 풀어헤치며 먹잇감을 낚아챈다고 한다.


'악마의 뱀'이라 불리는 그 물고기처럼, 어둠 속에 나타난 팔은 그대로 현우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마음이 풀어져 있기도 했고,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마법사는 별다른 대처를 할 수 없었다.


현우를 휘감은 두 팔 중 하나가 현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쉬잇."


오감 중 유일하게 상대를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이 현우의 머리로 정보를 보낸다. 떨리는 감각에 콧대가 강하게 울리며 거센 숨을 몰아 쉬었다. 눈이 겨우 어둠에 적응할 때쯤에야 상대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었다.


'켁켁' 소리를 내며 목을 가다듬는다. 사내가 겨우 입을 떼어 말했다.


"누, 누구세요? 저기, 도움을 원하시는 건 잘 알겠는데, 저도 정말 급한 상황이라서."

"네가 누군지는 몰라. 하지만, 지금 내 말을 무시한다면, 으윽! 결국 아무것도 진전될 건 없을걸."

"그게 무슨 소리죠?"

"일단은 내 부탁부터 들어."

"그렇게 말해도, 저를 이렇게 꽉 붙잡고 있으면서 어떻게 제가 돕는단 말이에요."

"입이 길다니, 아픈 와중에도 그렇게나 말할 체력이 남아있나, 내 부탁을 들어줄 상대로선 제격이군."


현우는 슬쩍 자신의 입을 막았던 누군가의 어깨를 보았다.

어깨 아래로 내린 머리카락 너머로, 무언가에 찔려 검붉게 물든 옷자락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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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97화. 붉은 먼지(4) 19.10.31 59 1 13쪽
96 96화. 붉은 먼지(3) 19.10.30 64 1 13쪽
95 95화. 붉은 먼지(2) 19.10.29 50 1 14쪽
94 94화. 붉은 먼지(1) 19.10.28 56 1 13쪽
93 93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3) 19.10.25 64 1 13쪽
92 92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2) 19.10.24 64 1 13쪽
91 91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1) 19.10.23 150 1 13쪽
» 90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4) 19.10.21 65 1 13쪽
89 89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3) +1 19.10.18 84 1 13쪽
88 88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2) 19.10.17 54 1 13쪽
87 87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1) 19.10.16 54 1 14쪽
86 86화. 아웃브레이크(3) 19.10.15 62 1 13쪽
85 85화. 아웃브레이크(2) 19.10.14 54 1 13쪽
84 84화. 아웃브레이크(1) 19.10.11 57 1 13쪽
83 83화. 항구도시 미네바(3) 19.10.10 61 1 14쪽
82 82화. 항구도시 미네바(2) 19.10.09 56 1 13쪽
81 81화. 항구도시 미네바(1) 19.10.08 64 1 14쪽
80 80화. 호향에서(3) 19.10.07 76 1 13쪽
79 79화. 호향에서(2) 19.10.04 85 1 13쪽
78 78화. 호향에서(1) 19.10.03 7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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