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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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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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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7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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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88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2)

DUMMY

"제가 마법사란 건 어떻게 아시는 거죠?"

"린튼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 린튼은 여기 제 옆에 있는 마법사입니다."


서기의 옆에 서 있는 마법사가 고개를 살짝 까딱거렸다.


"마력탄으로 위협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눈에는 전혀 겁을 먹은 기색이 없다 하더군요. 마법에 익숙하거나, 그 정도 위협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겠지요."


어느새 주변의 사람들은 현우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적어도 현우에게는 이런 모함은 꽤나 익숙해졌다. 정말로 진지하게 신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고민을 잠깐 하던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서기의 물음에 친절하게 답변했다.


"말씀 그대로, 저는 마법사가 맞습니다."

"그러기엔 손에 든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요."

"저, 저 놈 보게! 저 자식이 원흉이 맞단 말이야?"


당장이라도 현우를 잡을 것 같이 으르렁대는 사람들에게 현우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우편의 절반도 안 되는 작은 크기였지만, 그것에 쓰여있는 내용은 모두의 의심을 일순간에 잠재울 수 있었다.


"...마드라드에 다니는 학생이로군요."

"네. 굳이 이것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지만요."


비록 하급 관리라곤 하나 사내는 왕국의 녹을 먹는 엄연한 관리였다. 더군다나 왕국 직할령 중 하나인 미네바에 소속되어 있는 엘리트 출신이다.

현우가 꺼낸 학생증의 배경이 어느 정도 영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마드라드에 적을 둔 마법사라면 알고 있을 텐데요, 그게 결국 당신의 신원을 보증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올 초에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후로 좀 공신력을 잃긴 했지요. 애초에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하하..."


현우는 식은땀을 삐질 흘렀다. 마드라드 출신 특유의 마도구 수납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애초에, 마드라드 테러 건을 알고 있다면 필시 낮은 사람은 아니리라. 애초에 이름만 하급 관리지, 역병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관리청을 대표해 올 사람이 정말 하급 관리일 턱은 없었으니까.


조금 시간을 들여 매끄러운 단어를 입 안에서 고른다. 현우가 서기의 말을 받아쳤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확인해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어제 안내 경보를 울리실 때 분명히 저는 들었거든요. 마드라드의 연구 인력과도 협력할 예정이라고. 그 쪽에 연락을 대신 부탁 드려도 될까요? '현재 역병의 피해를 받은 미네바 구역에 마드라드의 학생이 세 명 있다'고."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기는 이쯤에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통신을 할 마법사에게 연락하도록 하죠. 하지만 그 전까지 당신은 주요 감시 대상에 올랐음을 잊지 마시길."


마지막까지 으름장을 놓고 서기가 대화의 장에서 빠졌다. 그를 대신해 가면을 쓰고 있는 마법사가 사람들의 말을 받았다. 부엉이의 얼굴이 새겨진 가면은 그 부리가 살짝 튀어나와있었다.

굳이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보고파 하지 않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저렇게 가면을 썼을지. 현우는 순간 피어난 궁금증을 휙 털어 날려버렸다.


"연판장에 적힌 순으로 줄을 서서 배급품을 받아가시오. 작게 포장되어있는 상자엔 끈이 하나씩 묶어져 있으니 들고 다니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거외다."

"우리보고 배급하라고 하는데, 고기나 곡식은 무겁지 않소. 나 같은 노인네들은 어쩌란 말인고."

"그렇다면 당신들 먹을 정도만 가져가면 되지 않소. 우리는 구호 물자를 운반했고, 나중에 따로 이야기가 나온다면 여기 연판장에 적힌 이들을 조사할 것이니 알아서들 하시오."


가면에 가려져 있어 마법사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현우는 분명히 겨울 때의 바닷바람마냥 차갑기 그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구호 물자를 전부 일일이 나눠줄 수는 없으니 일단은 자율적으로 맡기겠다 하는데 과연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가.


물론 현우도 제 일행의 몫과 더불어 제이미 가족의 몫까지 챙겼다. 일단은 먹고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현우가 구호물품을 받으려는 찰나,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던 다른 사내가 말을 걸었다.


"마드라드에서 온 마법사 씨. 조금 전의 당신의 요청 중에 숙소가 필요하다 했는데 맞습니까?"

"네. 원래 잡아놓은 여관이 현재 관리청의 통제 구역 바깥에 위치해서요."

"알겠습니다."


가면 안에 어떤 장치를 해놓은 것인지 탁하디 탁한 목소리가 나무재질 너머로 흘러나왔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품을 챙겼고, 부엉이 가면은 고양이 가면과 상의를 거치더니 발을 돌리던 현우에게 소리쳤다.


"오늘 정오 전에 여기에 들르시오, 마법사."

"예. 알겠습니다, 린튼 씨."


제이미의 집으로 돌아온 현우는 바닥에 후드득 구호물자를 쏟았다.

자신의 것을 열어보니 검은 빵 덩어리 두어 개와 쌀이 담긴 주머니, 그리고 양배추를 절인 것(Sauerkraut)을 담은 용기가 있었다. 상점 앞에 모였던 노인이 주장한 고기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언제 먹을지 모르는 구호물품에 신선한 고기가 들어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


"저희 것도 받아도 됩니까?"


핀처 부인에 의해 등짝을 한 대 얻어맞으면서도 제이미는 현우의 의중을 살폈다. 척 봐도 구호 물자랍시고 관리청에서 준 것이 양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일부러 제이미 씨 댁의 수에 맞추어 추가로 물품을 가져왔습니다."

"양이 많은 편은 아니네."

"조금씩 많이 뿌릴 것 같아. 거기 모인 사람들 보고 다른 곳들에 날라달라 하더라고."

"어떻게 될 지 뻔히 보이는데 그래?"

"응. 서로 챙겨가려 할 것 같은데 말이지."

"그것 말고는 별 다른 건 더 없었어? 너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면서."


윤화의 재촉에 현우는 천천히 기억을 끄집어 올렸다. 서기와의 충돌이 있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어차피 마법사가 말하지 않았던가. 정오가 되기 전에 오라고 했었기에, 현우는 이번엔 혼자서 가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의 기억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각기 생각에 접어든 가운데 현우가 조심스레 벤에게 의견을 타진했다.


"그래서 이번엔 우리가 다 같이 갔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벤?"

"계속 제이미 씨의 집에서 머무르기도 그렇고, 분명히 천막 같은 걸 지원해 주기는 하는 거 맞지? 너, 그렇게 말한 거 맞지?"

"당연하지. 어쨌든 축제 같은 때에 쓰는 거라도 주지 않을까? 아, 알렉스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서기의 말을 들어보건대 아직 사제와 같은 치료 인력이 확충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알렉스의 상태가 어떤지 그쪽에서 먼저 묻지 않았는가.

이미 윤화와 같이 관리청의 의뢰를 받아 수로 청소에 힘을 보탠 전력이 있는 만큼, 알렉스는 상당한 실력을 지닌 사제였다.


아직 마드라드에 적을 두고 있는 마법사 세 명과 민간인 한 명으로는 관리청의 등쌀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 때 알렉스의 존재는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우 씨는 은근히 제가 그쪽 일행에 포함되길 바라나 봅니다."

"하하. 들켰나요? 제가 너무 속이 보이게 말을 했나 봐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도 윤화 씨께 넌지시 부탁을 할지 고민을 했습니다."


알렉스의 생각으로도 혼자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보다야 여러모로 다른 이들과 단체 행동을 하는 것이 훨씬 이로웠다.

지금은 아직 정상적으로 돌아가지만 다시 원래대로 도시가 기능하는데 며칠이 걸릴지 미지수요, 외부의 폭력 등에서 사제는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힘을 길렀다 하지만 무기를 들고 대응하는 압도적인 무력에 그가 굴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겠는가.


그가 수로 청소 때 봤었던 윤화의 실력은 상당한 축에 속했다. 아직 실력은 보지 못했어도 그녀의 후배라 하는 두 명의 마법사들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으리라. 이들과 하루 조금 넘게 어울리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성격 또한 나쁘진 않았다. 며칠 정도는 더 부대끼어 지내도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알렉스 또한 이름 모를 역병에 감염되어 있는 상태다. 성법으로 병의 진행을 최대한 막고 있으니 자꾸 소모해가는 성력을 보충할 시간이 필요했다.


두 사람 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겹치고, 알렉스는 현우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 쪽에 합류하도록 하죠."

"잘 생각하셨어요. 다른 분들도 괜찮겠지요?"

"그럼요, 오빠. 신관님이 계시니 정말 든든해요."

"일단은 현우, 네 말대로 다시 대구 거리의 그 상점으로 가는 거지?"

"응. 내 생각이 맞다면 거기서 천막을 나눠주지 않을까?"


제이미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이제야 눈을 비비고 일어난 토미의 밝은 인사를 등에 업은 현우 일행은 통신 마법이 울렸던 종탑을 끼고 이리 저리를 돌다 다시 대구 거리로 접어들었다.


난전(亂廛)이 펼쳐지던 거리는 생선과 온갖 생필품들이 가득 쌓여 사람들이 발길이 닫지 않은 곳까지 깨끗이 비워져 있어 더욱 넓어 보였다. 길가에 상인들이 가게를 차려 흥정을 할 때도 넓어 보였던 거리였건만, 한창 사람들이 북적여야 할 낮임에도 그다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더욱 공허했다.


"이제야 왔군. 그쪽의 사람들은."


나무 목책으로 서로의 거리를 벌린 채, 실드로 제 몸을 둘러싼 마법사가 현우와 다른 사람들을 맞이했다.


"제가 전에 말했던 일행들입니다. 마드라드 소속 마법사와 제 지인, 그리고."

"아그룬 님을 모시는 사제, 알렉스라 합니다."

"아."


린튼은 슬쩍 사제를 쳐다보더니 현우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당신이 말한 대로 차양막을 가지고 왔소. 원래 축제 때 쓰는 것들이라 크기가 크니 비와 햇살을 막는 대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오. 옆을 막는 군용 천막도 있긴 한데, 해군 쪽에서는 군수물자라 제공할 수 없다 하더이다."

"이 정도면야 감지덕지죠."

"거리 중간에 잘 보면 홈이 있소, 그 쪽에 나무기둥을 걸고 천을 덮으면 되오."

"정말로 저희를 오라 한 게 이것 뿐입니까, 선생님?"


사제의 말에 가면을 쓴 마법사는 뜸을 들였다.


"역시 사제님 앞에서는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렵군. 우리가 당신들에게 이것을 제공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소."

"그게 뭔가요?"


벤의 물음에 린튼이 손가락으로 아직 쌓여있는 구호물자 더미를 가리켰다. 간간이 거리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하나 둘씩 챙기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을 시킬 수도 있으나 감염의 우려가 있어 지금도 마법사와 목책 너머로 창을 들고 서 있는 말단들 이외에는 높으신 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그래, 예를 들면 그 서기 같은 이들 말이다.


"이 곳에 차양막을 설치해 당신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것에 대해 관리청에서 허가를 내렸소. 다만 그 천막은 구호물자를 보관할 장소로도 사용될 예정이오."

"그렇다는 건, 우리보고 이 물자들을 관리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저희를 그렇게 믿는 단 말입니까? 저, 저기 선생님?"

"이유를 먼저 설명하기 전에 내 소개부터 제대로 해야겠군."


가면을 살짝 벗은 마법사는 마력을 뿜어 더욱 실드를 두텁게 만든다. 샛노란 빛의 실드로 인해 가면을 벗었음에도 마법사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코와 입이 닫는 부엉이 가면의 부리 부분 안쪽에 포션을 바르며, 마법사는 현우 일행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칼 린튼, 미네바 관리청 소속의 마법사이자, 융 서기관님의 보좌를 맡고 있소. 현재 임시로 조직된 미네바 역병대책단의 부단장이기도 하오."

"융 서기관이라면."

"그쪽에 계시는 알렉스 사제님은 이미 알고 계신 사이라 생각하오."

"현우 씨에게 상황은 대충 들었지만 그 분일 줄은 몰랐네요. 이거, 차라리 아침에 제가 나갈 걸 그랬습니다."

"구호품을 격리 구역 내에 전부 일일이 돌리기엔 우리의 힘이 부족하니, 아침 회의에서는 알아서 가져가거나, 먼저 모인 사람들이 양심에 따라 운반하기로 결정했었소. 그런데, 그러기엔 저 많은 상자들을 관리할 사람들이 없단 말이지."


회의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기 전, 서기관이 자신에게 말해준 제안이라 하였다. 가면을 다시 쓴 마법사는 알렉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사람은 곤경에 처하면 다 제가 먹고 살자는 생각밖에 들지 않지요. 허나, 여기 사제님과."


이번엔 그가 고개를 벤과 윤화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날카로운 부엉이의 눈이 그들을 째려본다.


"마드라드에서 온 마법사."


린튼은 다소곳이 서 있는 명연까지 훑은 다음에서야 다시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기에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민간인까지. 전부 당신들은 미네바 바깥에서 온 외부인들이오. 적어도 내부의 정에 이끌려 허투루 물자를 뿌릴 인간들은 아니겠지."


마법으로 천막을 만들 자재를 띄워 목책으로 가로막은 격리 구역 너머로 옮기며, 부엉이 가면을 쓴 사내는 목책 너머의 다섯 명을 향해 그 날개를 활짝 펼쳤다.


"선택하시오.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니, 무엇 하나만 고를 수는 없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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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97화. 붉은 먼지(4) 19.10.31 59 1 13쪽
96 96화. 붉은 먼지(3) 19.10.30 64 1 13쪽
95 95화. 붉은 먼지(2) 19.10.29 51 1 14쪽
94 94화. 붉은 먼지(1) 19.10.28 56 1 13쪽
93 93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3) 19.10.25 65 1 13쪽
92 92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2) 19.10.24 64 1 13쪽
91 91화. 실마리는 도화선이 되어(1) 19.10.23 150 1 13쪽
90 90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4) 19.10.21 65 1 13쪽
89 89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3) +1 19.10.18 84 1 13쪽
» 88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2) 19.10.17 55 1 13쪽
87 87화. 병마는 민낯을 낳는다(1) 19.10.16 54 1 14쪽
86 86화. 아웃브레이크(3) 19.10.15 62 1 13쪽
85 85화. 아웃브레이크(2) 19.10.14 55 1 13쪽
84 84화. 아웃브레이크(1) 19.10.11 58 1 13쪽
83 83화. 항구도시 미네바(3) 19.10.10 61 1 14쪽
82 82화. 항구도시 미네바(2) 19.10.09 56 1 13쪽
81 81화. 항구도시 미네바(1) 19.10.08 65 1 14쪽
80 80화. 호향에서(3) 19.10.07 76 1 13쪽
79 79화. 호향에서(2) 19.10.04 86 1 13쪽
78 78화. 호향에서(1) 19.10.03 7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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