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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너와 나의 대결은 끝나지 않아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7.08 21:59
최근연재일 :
2016.12.25 23:33
연재수 :
68 회
조회수 :
41,275
추천수 :
493
글자수 :
552,862

작성
14.11.03 21:31
조회
682
추천
9
글자
20쪽

03화. 너와 나의 대결.

DUMMY

“벌써 열흘도 안 남았네, 대결.”

“하아…… 그래?”

심드렁하게 한 마디 하니 명인이는 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같이 달리고 있는 건 아니지만 같이 얘기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있거든.

내 말대로, 대결은 앞으로 9일 뒤. 한 달이 기한이었으니, 근 20여 일동안 명인이는 달리고 또 달렸다. 중간에 한 번 토하고 쓰러진 적도 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달린다. 오히려 그 뒤로 더 잘 달리게 된 것 같다.

체력이란 게 그리 쉽게 쑥쑥 늘어나는 게 아닐텐데, 명인이는 그러는 것 같다. 달리기를 시작한 그 때보다 훨씬 잘 달린다. 정확히 시간을 재 보지는 않았지만, 달리는 속도도 호흡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괄목상대라고 해야 할까. 내쉬는 숨결엔 조금의 여유도 있다.

“금세 잘 달리네. 체력도 는 것 같고.”

“……기분 탓이겠지.”

가만히 달리고 있는 명인이를 보고 말하니 명인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뭐, 원체 과묵한 녀석이니까. ‘지금은 달리는 데 집중하겠다’ 하는 심산인가.

“아─ 평화롭다.”

“…….”

자전거 패달을 밟으며 나아간다. 명인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뭐,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니까.

나는 본래 멍하니 집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문득 걸려온 전화. 명인이에게 온 전화. 자기 달리는데 심심하니 나오란다.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명인이가 먼저 이런 제안을 하다니, 상당히 기묘한 일이다. 위화감을 느끼고 알았다고 대답하고 나왔다. 명인이 녀석, 달리기를 많이 해서 성격도 바뀌었나.

명인이는 같이 뛰자는 의도로 말을 꺼낸 것 같지만, 사실 난 뛸 생각이 없다. 해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 자전거를 타면 천천히 밟아도 달리는 속도는 가뿐히 넘기니까. 자전거를 타고 오니 명인이는 씨익 웃는다. 운동장을 달릴 줄 알았는데 ‘나가자.’ 하고 학교 밖으로 나간다.

“근데, 웬일로 불렀어, 나를?”

“헉…… 응? 뭐가?”

“어지간하면 혼자 하지 않나, 너는?”

생각이 거기에 머물러 아예 질문을 했다. 못 물어볼 건 없지. 명인이는 달리면서 대답한다. 내가 질문하면 명인이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럼 내가 상세히 다시 질문. 뻔한 패턴이라 지겹거나 기분 나쁘지 않고 그러려니 한다.

“헉…… 보통은 그런데, 달리기는, 헉……! 왠지 네가 보고 있으면 잘, 헉, 되거든. 그래서.”

“기분이 썩 나쁘진 않네. 내가 무슨 오오라 같은 거 내뿜나?”

“헉…… 그럴지도.”

명인이는 숨을 가쁘게 쉬면서도 띄엄띄엄 말한다. 그런 거면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지. 어지간하면 명인이 달리는 걸 지켜보는데, 명인이도 조금은 그런 나를 인지하고 있나보다. 묵묵히 둘이서 달린다.

“이러니까 무슨 달리기 코치 같다.”

“…….”

느긋하게 자전거 패들알 밟으며 말한다. 명인이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달린다. 마음을 다스리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고 있는 명인이는 진리를 향해 무던히 달려가는 한 현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달려! 숨 고르게 쉬고, 앞 똑바로 보고! 넌 할 수 있어!”

“…….”

장난기가 돌아 마치 스포츠 영화에 나오는 코치처럼 옆에서 한 마디씩 지껄였다. 명인이는 마찬가지로 무시하고 묵묵히 달린다. 엄청난 집중력. 왠지 계속 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명인, 명인! 이 세상 끝까지─! 달려라 명인! 모미지, 이 나쁜 계집애. 엄마 전 달릴 거에요!”

“……조용히 해.”

“어, 미안.”

한참 텐션이 오른 나는 노래를 부르며 더욱 적극적으로 명인이를 응원했다. 아니, 응원이 아니라 전력으로 놀리는 것이려나. 명인이는 듣다 못해 한 마디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다물었다. 빠른 수긍. 다시금 조용한 상태에서 달린다.

“많이 늘었네? 예전보다 훨씬.”

“헉…… 고마워, 헉…….”

한 30분 정도 달렸을까, 명인이는 이제 달리는 걸 멈추었다. 쉬는 시간이란다. 나는 자전거 위에서 명인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늘었다. 이전처럼 죽을 것 같이 숨을 헐떡이지도 않고, 달리기 속도가 떨어지지도 않는다. 지금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힘들어 보이진 않는다. 뭐,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내 말에 명인이는 간신히 대답한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열심히 숨을 고르고 있다.

“이대로 계속 성장한다면 미지를 이기는 것도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겄어.”

“하아…… 뭐, 져도 상관 없지만.”

“하긴.”

나는 무슨 은거고수라도 되는 양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말했다. 명인이는 숨을 고르며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명인이는 패배해도 별로 손해볼 게 없지. 고기 한 번 사주면 그만이니까. 자존심이 조금 상하기야 하겠지만 뭐, 미지 그만큼 놀려먹었으니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지면, 그냥 내가 못 하는 거지. 대신 달리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고. 괜찮은 시간들이잖아, 지금.”

“……너 왜 자꾸 멋있는 말만 하냐. 짜증나게.”

“뭔 소리야. 가자.”

명인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그 말은 잔잔히 내 마음을 울린다.

나는 언제고 한 번이라도 어떤 일에 최선을 다 해 본 적이 있나. 아니, 없다. 늘 대충, 적당히. 힘들면 쉬이 그만둬버리고. 하지만 명인이는 다르다. 정말 열심히 달리고 있다. ‘최선을 다해서’라는 건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있는 명인이가 멋져 보인다. 조금만 더 멋지면 게이가 되고 싶을 정도로. 명인이라면……! 아핫, 농담이다. 예나가 푹 빠진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나와 같은 시각이라면, 예나가.

명인이는 여전히 칭찬은 부끄러운지 머쓱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시금 달리기 시작한다. 난 장난스럽게 ‘그러다 토해에? 살살 뛰어!’ 하고 말한다. 흑역사 방출에 명인이는 씨익 웃으며 계속 달린다.


‘쏴아─’

일요일 아침.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에는 드문드문 내리던 비가 이제는 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나는 투덜거리며 우산을 쓰고 터덜터덜 걸어간다. 아침 이른 때에 명인이에게 문자가 왔다.

「나 오늘도 달리기 할 건데 할 거 없으면 와서 구경해라.」

「비 오잖아? 진짜 뛰게?!」

「이까짓 비 별거 아니잖아 오기 싫으면 안 와도 돼.」

하는 대화내용.

안 와도 된 다고 안 갈 나겠냐. 다만 짜증을 내는 건 비 오니까 습하고, 자전거를 못 타니까. 오늘은 그냥 조회대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겠다. 터덜터덜 걸어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

운동장으로 들어선 나. 우중충하고 어두컴컴한 날씨. 을씨년스럽다 못해 으스스한 학교의 모습. 일요일 비 오는 학교를 대체 누가 찾겠어. 명인이처럼 정신 나간 애나 나오지. 하지만 멀뚱히 운동장을 쳐다보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 명인이가 보이질 않는다. 비옷 입고 멋지게 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운동장을 슥 둘러보던 나는 금세 눈이 크게 떠졌다.

“미친, 야, 야!”

우산을 집어던지고 황급히 달린다. 저쪽 운동장 구석에, 쓰레기마냥 널부러져 있는 검은 덩어리. 쓰러져 있는 사람이다. 혹시나,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불길한 예상은 사실이다. 쓰러져 있는 명인이.

“야 괜찮아?! 최명인, 최명인! 정신차려! 죽지 마!”

“……아, 너구나. 부르길 잘 했네.”

“이런 미친새끼……! 돌았어 진짜!”

명인이는 달리다 그대로 푹 쓰러진 모양새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놀라서 흔들어 깨우는데 몸이 차디차다. 헉, 설마 벌써……?! 명인이는 얼굴에 모래를 묻힌 체 겨우 얼굴을 들며 말한다. 이런 와중에도 드립 칠 기력은 있나. 좀처럼 명인이에게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는 나지만 지금은 잔뜩 화를 내며 명인이를 일으켜 세웠다.

“……너 안 왔으면 정말 죽었을 수도 있겠다.”

“거지 같은 짓 좀 작작해! 하여튼, 무슨 비 오는데 쓰러지도록 달려! 그러다 진짜 죽어 너!”

“……추워 죽겠다.”

“집에 부모님 계시지? 아, 하필 또 오늘 일요일이잖아. 병원 닫았을 텐데.”

명인이를 들쳐업고 허둥지둥 말했다.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업으니까 명인이, 몸이 불덩이다. 더욱 마음이 조급해진다. 명인이가 나지막이 ‘일단은 집으로, 집으로……’ 하고 말한다. 기력이 다 했는지 기절한 모양이다. 난 이 녀석이 혹시라도 잘못될까 황급히 달리듯이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빠져 나왔다. 업고 우산까지 들고 뛰자니 몹시 불편하다. 불쑥 뒤에서 ‘우산 들어줄까.’ 하고 말하는 며인이. ‘깜짝이야!’ 하고 소리쳤다. 기력이 다 하긴 개뿔, 아직 쌩쌩한 모양이다. 어찌됐든 황급히 달리고 달린다.

“에휴.”

“……고마워.”

겨우 일단의 사태 정리. 명인이네 집은 중학교 때 몇 번 놀러가 본 적이 있어 위치를 잘 알고 있다. 집에는 부모님이 안 계신다. ‘어디 가셨어?’ 하고 물으니 ‘……어제부터 1박 2일 여행…… 저녁에 오신댔어…….’ 하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때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얼른 옷을 벗기고 씻기려고 하니 명인이는 다 죽어가면서도 ‘이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하며 스스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곧 죽어도 씻김을 당하는 건 싫다, 그런 마인드인가. 명인이가 씻는 동안 뭐라도 줘야될 것 같아서 급한대로 라면을 끓였다.

“……아픈 사람한테 라면?”

“줘도 X랄이여! 몸 추우니까 따뜻한 국물 먹으라고 끓인 거야!”

“……아아. 여튼 고맙다.”

명인이는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며 말한다. 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하며 소리쳤다. 명인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털썩 바닥에 앉곤 후루룩 라면을 먹는다. 말도 안 하고 빠르게 흡입하듯 라면을 먹는다. ‘아침 안 먹었어?’ 하고 물으니 ‘응, 혼자 있었으니까.’ 하고 대답한다. 어휴, 밥도 안 먹고 비 오는데 그렇게 뛰었던 거냐. 라면을 다 먹고 명인이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나도 성심성의껏 녀석을 보살펴주려 이불을 덮어줬다.

“……속 이상해.”

“작작해! 하여튼. 어. 열 엄청 나는데. 너 괜찮은 거 맞아?”

“……아니, 사실은 죽을 것 같은데, 애써 괜찮은 척 하는 거야.”

“하아.”

한숨을 쉬며 명인이의 말을 들었다. 어째 이 녀석, 아프니까 더 정상이 아니게 된 것 같다. 그래도 평소엔 잠잠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나사가 하나 풀린 것 같은 느낌. 침대 옆에 앉아 가만히 명인이를 쳐다본다.

“어쩌다 쓰러진겨.”

“그…… 달리는데, 있잖아. 공랭식이라고 해야 되나. 오토바이가 그렇다던데.”

“뭔 개소리야. 너 어쩌다 쓰러졌냐고.”

확실히 아픈 게 맞는 것 같다. 전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열이 올라서 헛소리를 하나보다. 중증인데, 이거. 손으로 대략 온도를 가늠해보면 40℃ 즈음 되지 않나 싶다. 명인이는 씨익 웃으며 이어 말한다.

“원래는, 달리면서 몸이 뜨거워지고 힘들어야 하는데. 비 오고 바람 부니까 몸이 자동으로 식잖아. 그러니까 안 힘들더라고. 그래서 계속 뛰었지, 안 쉬고.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지 확, 몸이 뜨거워지더니 앞으로 팍.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왔어.”

“야…… 너 진짜…… 난 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겁나 멍청한 거 같은데.”

“……그럴지도.”

명인이는 띄엄띄엄 천천히 말한다. 너무 어이가 없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명인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명인이도,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 없는지 헛웃음을 지으며 내 대답에 수긍한다. 확실히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이 녀석.

‘딩동.’

“……누구? 올 사람 없는데.”

“아, 미지일 거야. 전화 했거든.”

“아으…… 너는 내 병세를 악화시키려고…… 너 스파이냐.”

“아니, 왠지 미지라면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서.”

“으으…… 더 병 난다, 걔 오면…….”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아마 미지일 것이다. 명인이 샤워하러 갔을 때 전화했거든. 나는 이런 비상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데, 미지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 하니까 잔뜩 놀라서 ‘어디야! 주소 불어! 얼른 갈게!’ 하고 흥분한 목소리였는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미지도 명인이 걱정 한다니까. 미운 정이라는 게 그렇게 무섭지. 명인이의 다 죽어가는 비아냥을 들으며 문을 열러 갔다.

“하아…… 하아…… 어딨어! 죽었어?! 괜찮아!”

“아…… 네가 더 죽을 것 같은데말야.”

문을 열자 잔뜩 젖어 있는 미지가 보인다. 한 손에는 우산을, 한 손에는 검은 봉투를 들고 있다. 우산을 들고 있는데 대체 왜 이렇게 젖은 거야. 숏컷의 애매하게 짧은 머리는 잔뜩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진다. 후드티도 바지도 꽤나 젖었다. 그래도 아예 홀딱 다 젖은 건 아니고, 머리카락만 좀 젖었을 뿐이다. 내가 뭐라 하든 미지는 나를 밀치고 문을 닫고 들어온다.

“뭐야, 미친놈아! 무슨 비 오는데 쓰러질 때까지 뛰어! 병신, 미친새끼!”

“……그렇게 됐어.”

“아오. 그렇게까지 나 이기고 싶어? 그렇게까지 그…… 진짜, 변태새끼.”

“…….”

미지는 득달같이 명인이에게 다가가 말한다. 물이 뚝뚝 떨어져 거실이고 명인이 방이고 잔뜩이다. 어유, 저거 닦아야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미지는 명인이에게 따지기 바쁘다.

미지는 꽤나 화가 난 모양이다. 확실히, 명인이의 행동은 미친 짓이긴 한데. 근데 그게 미지가 화를 낼 정도인가. 나야 명인이랑 오랜 친구니까 서슴없이 욕도 하고 화도 낼 수 있는 사이지만, 미지는. 애증의 관계이긴 하지만 저 정도로 걱정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의외로 남 생각 많이 하는 애구나, 미지.

미지는 말을 꺼내다가 멈칫 하며 명인이를 흘겨본다. 아, 저건 그런 사고단계인가. 그렇게까지 날 이기고 싶다 → 이기면 명인이의 상품은? → 그렇게까지 내 가슴이 만지고 싶어. 그런 쪽으로는 부끄럼이 있는 듯한 미지인지라 말을 하지 못한다. 명인이는 열 때문인지 상기된 얼굴로 입을 다문다. 잠시 어색한 기운이 맴돈다.

“약 가져왔어, 일어나서 먹어. 밥 먹었어?”

“방금…… 라면…….”

“미친놈아, 아픈 새끼가 무슨 라면을 먹어?! 정신 나갔어!”

“아, 죄송합니다. 제가 끓여줬습니다.”

“어휴,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미지는 검은 비닐 봉지에서 약을 꺼낸다. 오호, 그렇네. 병원은 닫았어도 약국은 열었을 수 있네. 거기까진 생각이 못 미쳤다. 명인이는 힘없이 일어나 미지의 질문에 대답한다. 나와 명인이는 도매금으로 욕을 먹는다. ……그럴만 하네. 아무 생각이 없어서.

“자, 이거, 이거, 이거. 먹어.”

“……약물의 오·남용은 신체를 굉장히 해칠 수 있는데.”

“그냥 다 처먹어. 어이, 물!”

“네네, 여기 있습니다.”

미지는 세 종류의 감기약을 하나씩 까서 명인이에게 건넨다. 명인이는 불안한 눈초리로 미지와 손바닥 위의 약을 번갈아 보며 말한다. 미지는 명인이의 의견 따위 듣지도 않고 나에게 명령하듯 물을 주문한다. 안 그래도 컵에 따르고 있었다. 약을 먹는 명인이. 한숨 쉬고 다시 눕는다.

“자, 물기 닦아.”

“아, 고마워. 이 수건 써도 되, 명인아?”

“……응.”

옷방에서 수건을 꺼내와 미지에게 건넸다. 걸레로 추정되는 바닥에 뒹굴어 다니는 걸레로 미지가 뚝뚝 흘린 물도 다 닦았고. 남의 집인데, 어질러 놓을 순 없잖아. 미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명인이에게 물어본다. 굳이 안 물어봐도 될 텐데. 미지는 수건으로 머리와 목에 묻은 물기를 다 닦는다. 그러더니 화장실에 가서 수건에 물을 적시고 쭉 짠다. 네모지게 예쁘게 개서 명인이 이마 위에 올려놓는다.

“……어째 이 수건 굉장히 찜찜한 기분인데.”

“아니야, 아무것도. 얘는, 내가 애써 빨아온 건데 무슨 무례한 말을.”

미지는 방금 전까지 불같이 화내던 모습은 어디가고 장난스럽게 명인이의 팔을 꾸욱 찌르며 말한다. 명인이는 눈을 감고 꾸욱 참는 모습을 보여준다. 참을 인 자 다섯 개 정도 마음 속에서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뭐, 약도 먹었고 했으니까 이제 괜찮겠네. 푹 자면서 땀 한 번 빼주면 되겠고.”

“……어. 고맙다.”

“응?”

미지의 말에 명인이는 순순히 고맙다는 말을 한다. 미지는 흠칫 놀란 표정이 돼 돌았던 몸을 다시 명인이 쪽으로 돌려 명인이를 내려다본다. 명인이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상기된 얼굴로 미지를 쳐다보며 말한다.

“금방 뛰어 와줘서…… 약 사들고 와 줘서…… 고마워. 걱정 끼쳐서…… 미안하고. 대결에는 지장 없게…… 금방 나을 거니까. 고맙고, 미안하다.”

“무, 무, 무, 무슨 착각을! 누, 누가 뛰어와! 난 그냥! 우산 쓰고 오다가 불편하니까 우산 접고 뛰어온 거거든! 야, 약도 대충 아무거나 사온 거고! 거, 걱정은 누가! 진짜, 착각도 유분수지! 핳!”

명인이는 잠자코 천천히 말한다. 명인이가 저만큼이나 솔직하게 말하는 모습은 거의 보기 드물다. 사실 나도 저런 진솔한 목소리로 자기 감정을 말하는 명인이는 처음 본다. 그게 내가 아니라 미지인 건 좀 의외이긴 한데. 친해진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이렇게나 달려와서 약을 사다준 게 고마워서 일까.

미지는 잔뜩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더듬거리며 말한다. 근데 말한다고 하는 말이 전부 실토하고 있다. 저만큼이나 걱정됐나. 미지도 명인이 못지않게 칭찬해주는 거에 약한 모양이다. 다만 명인이는 잠자코 넘기는 스타일이면, 미지는 저렇게 몸둘 바를 몰라하는 타입. 다시금 소녀성이 터진 미지는 몸을 홱 돌리며 새침하게 말한다. 하하, 귀여워라. 덩치하고 안 어울리게.

“몰라, 나 간다! 이제 됐잖아! 푹 쉬어, 어디 또 싸돌아다니지 말고!”

“……그래. 고마워.”

“어!”

‘철컹.’

미지는 도망치듯 쏘아 붙이고 집을 나서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걱정스런 당부를 잊지 않는다. 명인이는 잠자코 대답한다. 다시금 둘만 남았다.

“허허, 어쩐일이레 천하의 최명인이.”

“……뭐가.”

같은 패턴. 뭐, 내가 질문을 비꼬듯이 말하고 제대로 된 질문을 안 했으니까 당연한 건가.

“어쩐 일로 순순히 고맙다고 바른 말을 한데? 상대는 저 모미지인데.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사이 안 좋은 건 안 좋은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잖아.”

“어오, 왜 이렇게 멋있는 말만 골라서 해. 짜증나게!”

“……야야, 나 아파.”

단순히 고마워서 그랬단 말인가. 참, 명인이도 미지랑 지내면서 점점 애가 바뀌어 가는 것 같다. 이전에는 되게 꽉 막힌 성격이었는데. 하긴, 미지가 워낙 추근대긴 했지. 장난스럽게 명인이 옆구리를 꾹꾹 찌르니 명인이는 질색을 하며 몸을 꿈틀댄다. 명인이는 자기 몸 건드리는 걸 되게 싫어하니까.

나 또한 별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명인이랑 좀 얘기하다 집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푹 자.’ 하고 명인이의 ‘그래’ 하는 대답을 듣고 나왔다. 집까지 걸어간다. 어휴, 비 오는데 이게 무슨 난리인지.


작가의말

윈도우 태블릿이 사고 싶네요. 허허. 돈지랄이죠, 노트북이 있는데.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4.11.13 13:43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11.15 21:24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68 애상야
    작성일
    15.01.27 14:20
    No. 3

    사리를 아는 기특한 청소년이네요. 똥꼬집이라도 저런 타입의 사람은 미워하기 어렵죠. 게다가 미지는 선머슴이지만 섬세한 면이 있네요. 영일이는.. 참 남자네요. 편의점에 나가서 하다 죽이라도, 하다못해 인스턴트 미역국이라도 사서 먹이고 집에 감기약 하나쯤은 있을텐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1.27 23:25
    No. 4

    아...... 영인이의 대처는 좀 캐릭터 설계와 다르게 쓴 미스 부분이네요. 영인이 성격이라면 말씀대로 뭐라도 사다 멕이고 했어야 하는데...... 생각을 못 했네요. 큿!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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