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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너와 나의 대결은 끝나지 않아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4.07.08 21:59
최근연재일 :
2016.12.25 23:33
연재수 :
68 회
조회수 :
41,248
추천수 :
493
글자수 :
552,862

작성
14.07.08 22:03
조회
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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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글자
21쪽

01화. 징징대는 건 싫어한다.

DUMMY

사람들에겐 모두, 어느 정도의 편견이 있다. 예를 들자면, 남녀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이라던가. 남자애는 단순하고 운동을 좋아하고 수업시간엔 무조건 졸고, 여자애들은 운동하기 싫어하고 가련하고 뭔가 좋은 향기가 날 것 같고. 하지만 저 애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편견을 고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어어~ 어어~ 마이 볼 마이 볼!!!”

머리를 질끈 묶고, 종횡무진 뜨거운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여자애. 앞서 나가면서 자기에게 공을 넘기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남자애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는 하이톤으로 외친다. 공을 몰고 있던 진원이는 질린 표정으로 공을 넘긴다. 신이 나서 공을 차는 여자애. 공은 멋지게 날아가 골망을 흔든다.

“우오오오오오!!”

남자애 부럽지 않은 괴성을 지르는 여자애. 자기 팀 진영으로 뛰어가며 속도를 줄이며 무릎을 꿇고 좌아악 바닥에 끈다. 그러면서 위에 입은 축구 유니폼을 벌겋게 익은 얼굴에 쓰고 격렬한 함성을 지른다. 도저히 여자애라곤 상상할 수 없는 짓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밑에 흰 속옷 같은 걸 받쳐 입어서 브레지어만 보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아슬아슬하게 배 위까지 드러나 보인다. 의외로 흰 배는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하다.

“저런 거는, 우리 한테는 있을 수가 없어.”

“그렇지, 아무래도.”

옆자리 명인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명인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애를 보다 한숨을 쉬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보수적인 명인이로서는 당연한 반응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명인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책으로 돌린다.

활동적으로 움직여야 할 체육시간에 이렇게 시원한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애는 최명인, 나와 함께 체육시간 벤치파를 맡고 있다. 이 녀석 역시, 저 여자애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성 역할에 대해 조금의 편견을 깨야하는 녀석이다. 운동?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나처럼 실력도 젬병이고, 하는 것도 싫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명인이가 자발적으로 운동을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체육시간에도 명인이는 수행평가가 걸려 있는 게 아니라면 가만히 앉아 책을 보거나 한다.

키는 남자애 치곤 작은 편, 170은 안타깝게도 넘지 못한다. 그 점은 나랑 비슷한데. 명인이는 나보다 더 작아서, 한 164정도 되는 것 같다. 키도 작고, 거기에 마른 편이어서 몸집도 굉장히 작은 편이다. 운동을 싫어하는 데 근육이 붙어 있을 리 만무하니, 팔다리도 여자애처럼 가늘다. 피부 역시 운동 하나 안 하는 것이니 여자애만큼은 아니어도, 남자애들 중에선 흰 편. 키와 체중과 팔다리만 본다면 여자애랑 다를 게 없다.

외모는 꽤나 잘 생긴 편. 선이 굵은 남자 같은 느낌은 아니고, 둥근 눈과 오똑한 코가 고운 자태를 뽐낸다. 무엇보다 또렷한 눈빛이 매력적이다. 굳이 말하자면 ‘예쁘장한’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이목구비를 곰곰이 따지고 보면 여자애로 태어났으면 굉장히 예뻤을 것 같다.

하지만 명인이 녀석은, 성격만큼은 굉장히 보수적이면서도 남성적이다. 특히 여자애에 대한 면에서는. 마치 조선시대에서 타임워프를 해서 온 아저씨 같은 느낌이다. 치마 짧은 여자애를 보면 혀를 끌끌, 여자애가 복도에서 뛰어다니면 혀를 끌끌. 저렇게 저 애처럼 여자애가 운동을 잘 하면 그것 또한 혀를 끌끌 찬다. 하여튼, 재미있는 녀석이긴 하다. 명인이는.

‘탁.’

“이제 슬슬 갈까.”

“응.”

책을 덮으며, 명인이는 말한다. 체육시간이 다 끝나간다. 명인이는 체육시간에 책이라도 읽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잉여인지라 조금은 시간이 아깝다. 하지만 뭐, 운동 하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우리와 비슷한 녀석들이 많아 조금은 다행이다. 대부분이 여자애인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우리가 생각하는 건 대부분 편견이니까. 여자애들만 운동을 하기 싫어하는 건 아니다. 나나 명인이처럼 남자애지만 운동하기 싫어하는 애들도 분명 존재하니까.

“와, 너네는 참.”

“……?”

둘이 일어나 걸어가는데, 아까 축구를 하며 격한 세레모니를 보여줬던 여자애가 다가와 우리를 보고 씨익 웃는다. 그렇게나 운동을 좋아하는데도 꽤나 흰 피부인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모미지. 분명 여자애가 맞다. 하지만 하는 행동으로만 보면 여자애라 하기 껄끄럽다. 미지가 우선 눈에 띠는 건 키다. 여자애인데도 키가 월등히 크다. 우리반은 물론, 학교 전체에서도 미지만큼 큰 여자애는 없다. 저번 신체검사때 나온 결과가 아마, 175cm였지, 아마? 나는 170도 안 되는데…… 큿…….

키만 큰 게 아니라, 운동도 엄청 좋아한다. 아까 축구 하는 걸 봤으니 충분히 이해가 가겠지만. 운동도 좋아하고, 키도 웬만한 남자애들보다 크니까 그 실력 또한 웬만한 남자애들보다 뛰어나다. 축구는 우리반 에이스를 자처하고 있고, 다른 운동들도 다 중간 이상은 한다. 덕분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가 대단하다. 애초에 키도 크지만 팔다리가 늘씬하게 길어서 신체 비율이 월등하게 좋다. 어디 모델로 나가면 괜찮을 것 같다.

비단 여자애라도 키 크고 운동만 좋아한다고 남자애같다고 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미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머리도 거의 남자애 수준으로 짧은 숏커트로 치고, 웬만하면 축구 유니폼이나 체육복 바지를 입고 다닌다. 교복치마를 입는 건 등·하교할 때 외엔 본 적이 없다. 거기에 성격이 어찌나 괄괄한지, 아까 봐서 알겠지만 축구 하고 세레모니를 그런 걸 하고 있다. 아니, 아무리 기뻐도 여자애가 보통 웃통을 까진 않잖아. 솔직히 그 때 애들 당황한 눈치를 봤어야 하는데.

노는 것도 주로 남자애들하고 놀고, 남자애들을 팍팍 때리면서 깔깔대며 논다. 남자애들은 자기 여자애라고 못 때리는 걸 아니까 더욱 놀려먹는다. 그에 걸맞게 성격은 쿨한 편이어서, 애들에게 인기는 많다. 뭐,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외모도 저 정도면 예쁘장한 것 같고, 무엇보다 성격이 엄청 쿨하고 시원시원하니 인기가 없기가 힘들겠지. 나처럼 어둠의 다크에서 죽음의 데스를 느끼는, 혼자 구석에서 스마트폰이나 쳐다보는 타입이랑은 완전한 상극이지.

“체육시간인데 땀 좀 흘리고 그래야지! 체육복이 그대로네, 입었을 때랑.”

“…….”

미지는 싱긋 웃으며 나와 명인이에게 말한다. 미지가 애들하고 많이 친한 건 또한 이런 붙임성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별 친분 없는 애들한테도 거리낌 없이 말을 걸기에, 미지는 반 애들은 물론 다른 반 애들하고도 어지간하면 잘 노는 편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별다른 생각 없이 말을 건 거겠지.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상대는 최명인. 우리반 제일의 어그로꾼.

“왜 체육시간에 땀을 흘려야 되는데?”

“체육시간이잖아! 운동하는 시간이라구. 봐, 땀 흘리고 나면 얼마나 시원하고 좋은데. 애초에 운동하라는 시간인데, 너희도 운동 같이 하면 좋잖아!”

“흐흥.”

명인이는 미지의 말에 피식 웃는다. 나는 미지의 말을 듣고 과연 그렇다고 납득을 했다. 꼭 다른 때에 운동을 할 게 아니라, 운동 하라고 시간을 줄 때 운동 하면 참 좋은 거잖아. 뭐든 하라고 할 때 하는 게 좋은 거지. 하지만 명인이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른 가치가 있어. 운동에 별다른 가치가 없는 애들에게까지 운동을 강요하는 건 하나의 폭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의미하고 값어치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건 누구나 같은 마음이잖아.”

“왜, 운동 하면 재미있는데! 너도 좀 해라, 남자애가 팔도 가늘고 피부도 하얘가지고.”

명인이는 안경을 올려 쓰며 정연하게 말한다. 뭔가 어려운 단어와 개념도 섞어 쓰는 것 같고, 무엇보다 명인이의 태도가 너무나 지적이고 꼭 논쟁하는 논객 같은 느낌이어서 어지간한 녀석이라면 ‘어, 어…… 미안.’ 하고 물러설 기세다. 하지만 상대 또한 만만치 않은 미지. 아니, 얘는 사고방식이 확실히 여자애 같지는 않은 것 같다. 그냥 운동 좋아하고 단순한 남자애 같은 느낌. 명인이의 말에 상처받거나 기분 상하지도 않고 성격 좋게 웃으며 자기 말만 한다. 그 말 듣고 명인이와 미지의 팔을 비교하고 보니 과연, 명인이는 남자애지만 한없이 희고 가는 허벅지를 자랑하고, 미지는 여자애임에도 굉장히 탄탄한, 말벅지 수준의 찰진 허벅지를 자랑한다. 솔직히 성별이 바뀌어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미지의 말에 나는 조금의 불안감을 느꼈다. 저렇게 자기 말만 한다면 명인이는 분명히 자기 말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테고, 그렇게 되면 명인이는…….

“너, 정말 개념도 생각도 없는 애구나. 남자애가 팔 가늘고 피부가 하얘? 그런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인 성 역할을 21세기가 온 지 한참 된 지금 이 시대에 강요하려는 건가? 여성들은 남성을 그대로 따라가려 하면서, 남성은 남성의 원래의 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게 잘못된 것이고 부정한 것인가? 그렇게 한다면 결국 여성은, 남성의 의태에 불과한 게 아닌가? 처음부터 따지자면, 너 또한 여자애답지 않은 여자애잖아.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하게…… 됐다.”

“……어??”

명인이는 화가 나거나 하면 저렇게 ‘~한가?’ 하는 식으로 문어체 비슷한 식으로 말해 듣는 이로 하여금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든다. 거기에 말투도 공격적이 돼서, 듣는 사람은 어지간한 이길 명분이 없는 이상 설령 명인이 말이 틀리고 본인이 옳다 해도 ‘어…… 미안, 내가 잘못했어…….’ 하고 물러나게 만든다. 하지만, 하지만 저 미지란 여자애는…….

확실하게 이해를 못한 눈빛이다. 기분 나쁘거나, 모멸감을 느끼거나, 수치심을 받거나. 그런 느낌이 아니다, 저 눈빛은. 확실하고도 순수한 무지. 명인이의 말을 전혀 못 알아들었다. 이런 식이면 명인이 또한 답답할 텐데. 한숨을 푹 쉬는 명인이.

“됐다, 맘대로 해라.”

“어…… 화난겨? 미안해, 뭔진 모르겠는데. 내가 좀 막 말을 내뱉어서.”

시큰둥하게 말하고 미지를 둔 체 앞으로 나가는 명인이. 미지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무슨 잘못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상대방이 기분나빠 하니까 먼저 사과하는 배려심. 미지가 애들하고 친한 것은 이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최명인. 정상적인 상대가 아니잖아. 명인이는 앞서 가다 멈춰서서 몸을 돌린다. 그리곤 아니꼬운 눈초리로 미지를 보며 말한다.

“내가 딱 두 개만 지적하겠는데. 첫 번째는 여자애가 그렇게 짧은 바지 입고 다니지 말고, 두 번째는 여자애가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뛰어 다니지 말라는 거야. 이상.”

“……엉? 뭐가 뭐 어째?”

명인이는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걷는다. 굉장히 기분 나쁘게 들릴법도 한데, 정말 못 알아듣는 건지 미지는 어리둥절한 눈치로 명인이에게 묻는다. 하지만 명인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걷는다. 난 명인이를 쫓는다.

“네가 더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인 거 아녀?”

“뭐가.”

명인이 옆에 따라 붙으며 말을 걸으니, 명인이는 잔뜩 아니꼬운 목소리다. 나는 웃으며 최대한 명인이를 자극하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쟤한테는 너 남자애답지 못하고 지적하니까 잔뜩 뭐라고 하고, 정작 너 자신은 쟤한테 여성적인 거 강요하잖아. 짧은 바지 입지 말라거나, 뛰지 말라거나.”

“……역지사지라 그 말이야, 윤영인이.”

“뭐, 그렇지. 적어도 다른 사람을 꾸짖으려면 우리 쪽부터 당당해야 뭐라 해도 안 꿀릴 거 아녀.”

내 말에 명인이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은 듯 묵묵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 본다. 그러더니 이내 씨익 웃는다.

“그 말 맞어, 내 쪽도 충분히 모순적이었지. 근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참, 너도 그렇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결국 결론은 「안 돼」다. 그거야말로 가부장적이고 독단적인 예전 느낌 그대로 아닌가. 허탈하게 웃음 지으며 나 또한 흐지부지하게 결론을 지으니 명인이는 슬쩍 웃음짓는다.


뭐, 이런 녀석이다. 명인이란 애는. 굳이 키워드를 찾자면, 방금 자기가 말한 「모순」 정도일까.

방금 미지와 얘기한 것처럼, 본인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건 정색하고 맞받아치면서 정작 선머슴 같은 미지에겐 여성다움을 권고한다. 자기는 정작 몸이나 외모나 여자애처럼 선이 가는 미소년 축에 들면서, 정작 사상은 엄청난 마초에 보수적이다. 거기다 내가 지적을 해도, 자기가 모순된 건 인정하면서도 정작 고치진 않는다. 그런 녀석이다, 명인이는. 그치만 주관이 뚜렷한데다, 기본적인 생각은 ‘여자애들은 남자애들보다 떨어지므로 나쁘다’ 같은 마초가 아닌, ‘여자애들도 남자애들만큼 할 수 있다.’ 라는 긍정적 마초(?)이기 때문에 그닥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다만 바지·치마 길이랑 조신함 같은 면에선 정말 보수적인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가만히 반 애들을 쳐다본다. 어차피 이 동네는 거기서 거기니까, 같은 중학교 다니던 애들이 같이 고등학교에 올라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여자애들은 좀 다른 경우겠지만. 중학교는 남중·여중밖에 없지만,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 있으니까. 해서 보통 남자애들, 여자애들은 서로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미지처럼 친하게 지내는 녀석들은 얼마든지 남녀 구분 없이 잘 지낸다.

새학기가 시작된 지도 꽤 지나, 이젠 어느 정도 구획이 정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서로 친히 지내는 애들이 정해져 있고, 이미 서로 싸우거나 해서 사이가 안 좋은 애들도 있고. 뭐, 애들은 싸울 수도 있으니까 그러려니 한다.

나는, 나와 명인이는. 우리 둘은 둘 빼곤 그다지 친한 애가 없다. 서로간에 둘은 굉장히 친한 기분이다. 물론 명인이의 삐딱하게 말하는 태도를 다른 애들이 본다면 둘이 안 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명인이는 나한테는 약간은 다른 태도를 취하니까.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공격적인 이빨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나 역시 명인이의 높은 지식과 재치에 감탄하고 전적으로 명인이를 신뢰하고 있다. 무엇보다 녀석, 걸물이잖아. 엄청 재미있다고. 특히 말하는 게.

나야 초등학교 때부터 그런 느낌이었으니까─그런 거 있잖아, 반마다 한 명씩 있는 애들. 존재감 희박해서, 졸업하고 그런 애 있었나 싶은데 졸업앨범 보면 귀신 같이 있는 애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그런 녀석이니까. 그치만 명인이는 의외다. 공부 잘 하는 건 둘째고, 굉장히 박학다식한데다 이 녀석, 가만 보면 뭘 해도 잘 한다.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모양은 한 번도 못 봐서 모르겠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잘하는 것 같다. 게임이라던가, 악기라던가. 솔직히 얼굴도 어디서 꿀리진 않는 미소년 상이니까, 키만 크다면 참 완벽초인 한 명 등장하는 걸 텐데. 그럼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많을거야, 틀림없이.

“아, 미안.”

“어. 괜찮아.”

“……하하.”

지나가는 여자애가 툭 하고 명인이 책상 모서리에 부딪혀 들고 있던 유인물을 다 땅바닥에 쏟는다. 명인이는 책을 읽다 책상이 흔들려 눈살을 찌푸린다. 여자애가 조심스럽게 사과하자 명인이는 별다른 미동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에 집중한다. ……이런 태도라면 굳이 키가 크다 해도 여자애들한테 인기 있긴 힘들겠다. 옆에 있던 내가 다 어색해 하하 웃고 일어나 유인물을 같이 주워줬다. 여자애는 어색한 미소를 짓다 내가 주운 유인물을 받고 ‘고마워.’ 하고 방긋 웃는다. 오옷, 귀여워. 이름이, 아마 ‘강예나’ 였던가.

“좀 여자애들한테 살갑게 대해줄 수 있지 않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애들중에 하나가 여자애라고 특별취급하면서 불면 날아갈까 떨어뜨림 부서질까 하는 미친새끼들이야.”

방금 전 그 태도에 대해, 비판까진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봤다. 그러면 또, 명인이는 분명하게 ‘여자애VS남자애’의 주제로 대화를 끌고 간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건, 굳이 남자애 여자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사람이 지나가다 부딪혀서 뭘 떨어뜨리면 주워줄 수 있지 않냐 그런 뜻이었는데.

“물건 떨어뜨리면 여자애도 주울 수 있어. 손이 있고 허리가 있어. 근데 왜? 여자애들도 문제지만, 그걸 다 해주는 남자새끼들한테도 문제가 있어. 너갱이 빠진 남자새끼들 때문에 여자애들을 배리는 거야.”

“아……하하. 아니 내 말은, 그냥 사람이 물건 떨어뜨리면 주울 수 있지 않냐 그 말이야. 꼭 방금 그 애가 여자애라 그런 게 아니라.”

“……걔가 떨어뜨렸는데 왜 내가 주워.”

“결론은 그거잖아. 주워주기 싫다고.”

“……그래. 솔직히 귀찮았어.”

“아하하. 솔직하네.”

명인이랑 얘기를 많이 하다보면 대처하는 요령이 생긴다. 그 문제에서 핵심을 찌르면 된다. 명인이는 보수적인데다 외고집이지만,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긴 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인정을 해도 잘 안 고치는 고집이라는 거지만.

“명인아! 뭐해!”

“……책 봐.”

싱긋 웃으며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문득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즐거운 듯 웃고 있는 키 큰 애. 미지다. 미지는 서 있고, 나는 앉아서 보니까 키가 더 커 보인다. 위는 교복 블라우스에 조끼는 벗었고, 아래는 치마를 입고 있되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다. 블라우스는 체육복 바지에 넣었다. 우와, 환상적인 패션인데.

나만 그런가는 모르겠지만, 보통 나는 여자애한테 덥썩 이름으로 부르는 걸 꺼려한다. 나를 대하는 다른 여자애들도 그렇다. 굳이 이성 간에만 그런 게 아니라, 친하지 않은 애한테는 다들 그렇잖아. 예를 들자면, 명인이 처음 만났을 때엔 나도 명인이한테 ‘최명인.’ 하고 성까지 붙여서 말했었다. 지금은 안 그러지만. 하지만 미지는, 아까 체육시간에 처음 직접적으로 명인이랑 말한 주제에 바로 성을 떼고 이름만 말한다. 넉살 좋고 붙임성 좋은 건지, 그런 걸 아예 의식하지 않는 건지. 여튼 사람들하고 친해지는 데엔 확실히 능력 있는 것 같다.

“같이 매점 가자. 응?”

“……내가 왜 같이 가. 너 혼자 가.”

“아아! 내가 사 줄게! 응?”

“……그다지.”

말하는 것만 보면 꽤나 친해 보이는 사이다. 여러분, 이 둘, 아까 처음 말 튼 사이랍니다. 분명 어색해야 하는데, 미지의 엄청난 친화력과 명인이의 시크함이 어우러져 이런 결과를 내고 있다.

“너 때문에 바지도 입었는데! 게다가 너 같이 안가면, 천박하게 복도를 뛰어다닐 지도 몰라?”

“……하. 재미있네.”

“으흐흐흥?”

미지는 다리를 들어보이며 싱긋 웃으며 말한다. 명인이는 무표정하게 책을 읽다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러더니 책에서 눈을 떼고 미지를 보며 말한다. 마음에 든다는 눈빛으로 미지를 보는 명인이. 미지도 명인이와 눈을 마주치며 실실 웃는다. 여자애니까 긴바지 입어라, 여자애니까 뛰지 마라, 이런 식으로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었는데도 오히려 그걸 드립으로 쳐서 명인이를 웃게 만들다니.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다. 명인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다만 얻어 먹지는 않아.’ 하고 말한다. 미지는 활짝 웃으며 ‘어, 그럼 네가 사 주는 거?’ 하고 묻는다. 명인이는 삽시간에 정색하고 ‘……각자 사 먹는 거야. 누가 사 주고 그런 건 없어.’ 하고 말한다. 미지는 ‘아~ 뭐 그런 거 가지고 정색하냐~ 하여튼 남자…… 아, 미안. 이건 취소.’ 하고 말한다. 나 역시 할 짓도 없어 일어나 따라 걷는다.

뒤에서 보니까 참, 언밸런스하다. 분명하게 치마를 입고 있는 애가 여자앤데 머리 하나까진 아니어도 상당히 키가 크다. 반면 단정하게 남자 교복을 입고 있는 명인이는 미지 옆에 서니 평소보다 더 작아 보인다. 뭐, 나랑 명인이랑 키 차이가 얼마 안 나니 나도 그리 이런 말할 자격은 못 되지만.

미지는 지속적으로 명인이에게 말을 걸고 장난을 건다. 아무하고나 다 친한 미지이지만, 뒤에서 저러고 있는 걸 보면 명인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어지간한 여자애라면 명인이의 말에 상처를 받거나, ‘뭐야 저 병신은’ 하며 무시하기 마련인데. 하긴, 미지도 특이하다면 참 특이한 녀석이니까. 애초에 멘탈이 여자애 멘탈은 아니니까. 명인이는 귀찮아하며 그다지 잘 대답해주지도 않는다. 그래도 미지는 좋다고 계속 말 걸고 장난을 건다. 이것도 어쩌면 포지션이 바뀐 기분인데. 보통은 남자애가 실없이 장난 걸고 말 걸고, 츤츤한 여자애가 전부 튕겨내는, 그런 게 정상적인 느낌인데. 아, 이런 생각 하면 또 명인이한테 혼난다. 말로 했다간 정말 한바탕 크게 설교를 듣겠지. 같이 매점까지 갔다 빵을 먹으며 교실로 돌아왔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노벨 공장장(?)이 장래희망인 글 쓰는 사람 김태신입니다.

긴 시간 질질 한 작품만 끌어오다! 야심차게 준비한! 7월 신작입니다!


...야심차게 준비하긴요, 그냥 2~3일동안 아 이거면 괜찮겠다 하면서 대충 끄적이게 되는 겁니다... 라노베에 약하신 분들은 1화 보시고 안 보시면 되구요~ 보다가 좀 거시기한 부분은 가감없이 '여긴 너무 그렇다!' 하고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피드백이 되니까요!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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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80 똑딱똑딱
    작성일
    14.07.09 21:44
    No. 1

    내용이 참신하고 재밌어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09 23:25
    No. 2

    ...허헛. 진솔한(?) 의견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4.07.11 05:54
    No. 3

    값어치없는--> 값어치없게
    아 재미있어요
    저는 스스로가 무협과인줄 알았더니 아마도 라노벨과인가 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7.11 08:59
    No. 4

    ...뭔가 계열이 상당히 다른데. 무협도 써 보고 싶지만 무협은 너무 어렵습니다. 책 읽는 걸 싫어하는(?) 저로서는 익혀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4.09.16 07:35
    No. 5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4.09.16 17:47
    No. 6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68 애상야
    작성일
    15.01.27 01:58
    No. 7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네요. 2인칭 시작은 어렵지만 친한 친구가 나레션을 해준다는 점이 매력적이고 각 캐릭터가 정반대라 더욱 흥미롭습니다. 유도리와 긁어 부스럼인 이치를 모르는 반항기 가득한 남고생과 이지고잉한 성격의 여주인공. 이러한 상반되는 남녀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좋아하고 사랑해온 이야기죠. 너무나도 기대됩니다. 게다가 나래이터가 세상 굴러가는 이치를 깨닫은 포지션이라니.. 음. 첫화의 맛은 안정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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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27 김태신
    작성일
    15.01.27 07:19
    No. 8

    아하핫, 감사합니다. 이걸 처음 쓸 때에, 관찰자 시점에 재미가 붙던 때라서. '라노베'라는 장르는 1인칭이 어울리긴 하지만 쓰다보니 1인칭 관찰자시점이 더욱 맞다고 생각돼서요. 두 사람의 대결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 구도와, 그걸 중계하듯 서술하는 훼이크 주인공. 쓰는 입장에선 상당히 편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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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너와 나의 Love story. 02화 - 2 +2 15.06.12 598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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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너와 나의 Love story. 01화 - 2 +2 15.05.13 614 5 18쪽
57 너와 나의 Love story. 01화. 너와 나의 미래에 +6 15.05.09 602 7 15쪽
56 14화 - 4 +8 15.04.15 651 6 19쪽
55 14화 - 3 +2 15.04.14 586 7 13쪽
54 14화 - 2 +4 15.04.11 579 5 19쪽
53 14화. 진짜 너와, 대결. +4 15.04.07 578 5 17쪽
52 번외. 나와 너의 대결이 엉망진창이 된 것 같은데 - 4 +4 15.04.04 578 5 23쪽
51 번외. 나와 너의 대결이 엉망진창이 된 것 같은데 - 3 +4 15.04.01 687 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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