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데미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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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트린에게 있어서 리온은 단순한 주군, 왕을 넘어서는 다른 의미를 가진 존재였다.
그에게 있어서 리온은 살아있는 신이었고 태양이었으며 또 그러면서 자신이 지켜주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동성이기에 망정이지 이성이었다면 흠모의 정이 아닌 연모의 정을 품었을 것이다.
깡- 까앙!
주인이 시킨 마지막 일과를 끝내고서 데미트린은 모든 마나를 잃고 힘줄마저 끊긴 몸으로 무거운 족쇄를 끌고 돼지우리에 가 몸을 뉘었다.
차가운 기운이 땅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이 파괴되었을 모진 고문을 겪을 때 받았던 상처들이 욱씬거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제 이 고통들은 익숙하다. 아니 육체의 고통따위는 아무 필요가 없었다.
자신은 이미 그때 죽었으니까.
지금 여기에 있는 건 그저 과거에 데미트린이었던 좀비이니까 말이다.
오늘도 데미트린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런 자신이 뭐가 무서운지, 하루도 빠짐없이 저렇게 지켜보고 있다.
그게 우스워 데미트린이 혼자 이죽거렸다.
“힘을 잃은 내가 그토록 무섭다니 참으로 겁도 많은 놈들이야. 만약 그 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놀람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겁쟁이들이로군.”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직전이던 자신은 분명 강했었지만 리온에 비하면 감히 견줄 수가 없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9클래스 마스터이자 인류 역사상 최강의 인간.
리온 폰 마하라스의 강함은 그런 것이었다.
“아니 근데 저 새끼가.”
데미트린의 족쇄에는 [위치 추적] 마법과 [도청] 마법이 모두 걸려있었다. 현대의 전자발찌와 비슷한 것이라 보면 된다.
그렇기에.
지금 데미트린이 있는 대장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건너편 건물 3층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는 두 사람. 팔콘 왕국 특수정보국 소속 첩보원 둘은 데미트린이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이 임무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초짜 부하가 하는 말을 들은 베테랑 첩보원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야 됐고. 난 이제 슬슬 잘라니까 교대할 때까지 잘 감시하고 있어. BR에서 노리고 있단 소문도 있으니까.”
“B······ BR요?”
BR얘기를 듣자마자 한껏 긴장한 신입을 보며 베테랑 첩보원이 실소를 머금었다.
“왜? 무섭냐?”
그러자 신입 첩보원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대 팔콘 왕국의 영광스런 특정국원인 저입니다. BR따위의 테러 집단이 무서울 리 없습니다!”
베테랑 첩보원이 신입 첩보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 그래야지. 그 열정으로 열심히 지켜보라고, 난 잘 테니까.”
그 순간이었다.
“[잠 들어라].”
라는 한 마디가 어딘가에서 들림과 동시에 두 사람은 마법에 의해 곤한 잠에 빠져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나는 처리했고. 이제 나머지 놈들도······.”
이미 [인식] 마법을 통해 데미트린을 감시하고 있는 자들의 위치는 모두 파악을 한 상태였다.
강성우는 곳곳에 있던 방해꾼들을 모두 침묵시킨 뒤.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대장간 구석에 위치한 돼지 축사에 향했다.
꿀꿀, 꿀꿀-
뀌익- 뀌익-
돼지 네 마리 정도가 있는 축사는 돼지만 살기에도 그다지 넓어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데미트린이 돼지 똥과 건초 등의 위에서 추운지 쪼그리고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성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력해제]······.”
여운이 남는 시동어를 작게 읊조림과 동시에 데미트린의 족쇄에서 희미한 빛이 나더니 거기에 걸린 모든 마법이 일시에 사라졌다.
강성우는 자고 있는 데미트린에게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아 가만히 쳐다봤다.
183이라는 큰 키에 하얀 피부와 금발을 지닌 데미트린은 본래 ‘꽃의 기사’란 말로도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낭만을 아는 진짜 기사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얼굴의 반이 불길에 짓이김 당하고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어 푸석대고 있었다.
꼬챙이에 꿰이고.
인두에 지짐 당하고.
손톱이 강제로 뽑히고, 가죽이 벗겨지고······.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고문의 흔적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니 강성우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미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이를 갈며, 힘겨운 신음을 내며 잠을 자고 있던 데미트린의 상처들을 강성우가 가만히 손으로 어루만졌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나의 기사여······.”
그 순간 데미트린의 잠자던 표정이 편안해졌고.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하······.”
잠꼬대하듯 중얼거린 데미트린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 그리고 황급히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너는······?”
꿈에서 리온을 봤던 데미트린은 깨자마자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일전의 그 이상한 이방인이자 실망을 하며 쏘아봤다.
그를 보며 강성우가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너를 처음 봤던 때와 똑같구나. 배고파 굶어죽는 아이들을 위해, 돈 있고 뚱뚱한 상인의 것으로 대신 기부를 하는 것이 뭐 나쁜 일이냐며 나에게 대들던 때와.”
그 순간.
데미트린은 작살에 꽂힌 듯, 번개를 맞기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경악으로 한껏 치떠진 눈으로 데미트린이 강성우를 새로 봤다.
“어, 어, 어찌······ 그것을?”
데미트린이 뒷골목 출신이란 것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이야기지만. 그가 리온과 처음 만났을 때에 어떤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아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였다.
그런데 그걸 심지어 이방인이 알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미안하구나. 못난 왕을 섬긴 탓에 네가 이렇게 되었다. 나의 찬란한 기사여.”
흔들리는 눈동자로 강성우를 쳐다보던 데미트린.
그의 눈동자의 떨림이 점점 사라지더니 이내 희뿌연 습막이 어리고 끝내 물방울로 변하여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강성우가 그에게 말했다.
“내 백번을 죽어 사죄한다고 해도 너희들에게 지은 죄를 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나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겼으니 나로 인해 잘못된 것을 조금이라도 되돌리려 한다.
노예의 낙인과 흉터를 모두 치료해주마. 망가진 마나로드도 함께. 원한다면 얼굴도 바꿔주겠다. 그러니 아주 멀리,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가서 여생을 보내면 된다.
······내 해 줄 것이 이거 밖에 없어서 참으로 미안하구나.”
말이 끝나고서 데미트린은 한참 동안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우드득.
대답 대신 데미트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제 눈물 대신 핏발이 선 눈으로 강성우를 노려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강성우가 고개를 숙였다. 차마 데미트린과 눈을 마주할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었다.
데미트린 역시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대다수 죽었거나 노예가 되어 알 수 없는 곳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리라.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리온 폰 마하라스이며, 내가 섬기던 주군이란 것은 알겠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레진 경은 두 눈과 팔다리가 잘린 채 병사들에게 끌려 다니며 구경거리가 되다 죽었고, 우리 모두가 귀여워하던 유스타피 경, 그녀는 모진 고문과 함께 치욕을 당하다 쇠약사했습니다.”
더는 마모될 영혼도 없을 정도로 건조한 목소리가 전해주는 이야기.
피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강성우는 영혼이 찢길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충성스러웠던 그들의 모습을 계속하여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차라리 자신이 나은 것이었다.
그 날 싸우다 깨끗이 죽은 것이 더 행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시간이 영원처럼 지나고 사막바람을 닮은 목소리가 다시금 들린다.
“고개를 드십시오. 고개를, 들어주시옵소서.”
마지막 음성에 물기가 어려 있다.
강성우는 눈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울고 있었다.
얼굴의 절반이 화상 흉터로 흉측해진 노예가 꼴사납게도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다.
하지만 강성우의 눈에는, 왕의 눈에는 그가 예전보다 더 눈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극광의 기사로 제대로 보인다.
데미트린이 말했다.
“당신은 우리 기사들이 그 어떤 고문과 비참한 일을 겪을 때도.
한 가닥 남은 자긍심을 불태우며 죽음을 맞이하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몸은 오욕을 겪어도 왕을 향한 마음 속 기사도만큼은 모욕을 받지 않게 해주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함부로 그 고개를 숙여 당신을 위해 웃으며 죽은 기사들에게 모욕을 준단 말입니까?”
- 작가의말
좋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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