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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선티플님의 서재입니다

죽어도 살고 싶은 무림 지존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에선
작품등록일 :
2022.05.24 02:09
최근연재일 :
2022.08.26 18:15
연재수 :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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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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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글자수 :
173,027

작성
22.08.2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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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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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안한자적(3)

DUMMY

평소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런 한청천조차 귀동냥으로 들은 기억이 이 있었다.


‘100관이면 수도에 그럴싸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


1관의 정확한 수치는 몰라도, 귀족이나 상인이 아니면 감히 발을 들일 수도 없는 수도에 집을 구할 정도면 천문학적인 금액임은 틀림없었다.

심지어 한청천이 진 빚은 150관.

가족의 원수만큼이나 지독한 빚쟁이를 눈앞에 둔 한청천의 머리는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한청천이라고 인정하면 꼼짝없이 150관을 갚아야 한다. 어떡하지?’


지상 최강의 무림 고수라는 명성과 150관.

둘 중 뭐가 더 귀중한지는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동명이인임.”


한청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포기했다.

그깟 명성이 밥을 주나? 돈을 주나?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백번 말해도 안 믿어주는 정체 따위, 돈으로 바꿀 수 있었으면 진작 바꿨을 것이다.


“본인을 천마라고 자칭하고 다녔다죠?”

“사춘기라 그럼.”

“마교의 무공도 사용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독학했음.”

“고작 열다섯에 몸도 안 좋으면서 7단의 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신다고 하던데요?”

“내가 좀 천재임.”


아무리 심증이 명확하다 한들, 반송장의 어린 꼬마가 수라윤회를 모르는 이상 200년 전에 죽은 걸로 기록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즉, 대놓고 오리발을 내밀면 그만이다.

주변 사람들이 소란에 서서히 모여들자, 한청천은 가녀린 처자처럼 쓰러지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적당히 하시지요! 소인이 셈을 못 한다고 무시하는 것입니까? 150관을 다 갚기 전까지 몸으로 때우라니, 차라리 이곳에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겠습니다!”

“네?”


일부러 대문의 날카로운 부분에 닿아 옷이 찢기게끔 유도한 한청천의 모습은, 손자국이 남은 왼팔 손목과 더불어 주민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

“단주님. 왜 청천이를 붙들고 있습니까?”

“방금 몸으로 갚으라고 하던 것 같은데 설마···!”

“저, 저기 여러분.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소화는 필사적으로 주민에게 전후 과정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삿갓을 뒤집어쓰고 비단옷을 차려입은 남성이 미소년을 벽에 몰아붙인 것도 모자라 옷까지 찢은 상황은 어떤 말로도 덮을 수 없었다.

게다가 비록 천방지축이긴 했어도, 한청천이 사경을 제집 넘나들 듯 넘는 병약한 아이라는 사실은 서문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에다가 풍문으로 들리는 상단에 관련된 안 좋은 소문은 주민들이 소화를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청천은 알고 있었다.

사람에게 설득력을 안겨주는 것은 백 마디 말이 아니다.


“흐윽···.”


인상 깊은 한순간의 행동.

한청천은 가슴을 붙잡으며 계산된 눈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을 적시는 한청천의 뜨거운 눈물과 한 맺힌 흐느낌은 주민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이 비열한 놈! 피해 복구 비용 어쩌고 하더니 연고도 없는 아이에게 전부 뒤집어씌운 거였냐!”

“부모도 없이 다 죽어가는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할 셈이었냐!”

“어쩐지 비싼 물건을 마구 추천한다 싶더라니만, 이런 인두겁을 쓴 요괴 같으니!”

“썩 서문현에서 꺼져라!”

“여러분! 오해입니다! 오해!”


소화가 변명할 틈도 없이 쏟아지는 돌팔매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소화는 끅끅대며 우는 한청천과 눈이 마주쳤다.

한이 맺힌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고,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청천의 눈동자는 당황하는 소화를 올려다보면서 싱긋 웃고 있었다.


“생각보다 약은 분이셨군요. 일단은 물러나지만, 빚은 반드시 받아내겠습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굴욕을 삼킨 소화는 발에 내력을 담아 군중을 피해 달아났다.

소화가 바람처럼 사라지자, 주민들은 혼신의 연기 중인 한청천의 안부를 살폈다.


“청천아, 괜찮니?”

“하필이면 걸려도 상단주한테 걸리냐. 재수도 없지.”

“상단주가 아니었으면 저놈이 가만히 있었겠어? 툭하면 마을을 박살 내는 놈인데.”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끌려가서 무슨 꼴을 당했을지···.”


한청천은 눈물을 훔치며 존댓말을 유지했다.

연기로 소화를 쫓아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주민들의 이목이 너무 쏠려버렸다.

소화가 떠났다고 툴툴 털고 일어나면 그것대로 이상해 보일 거라 생각한 한청천은 비에 젖은 고양이 같은 눈빛을 장전하고 주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나기 힘듭니다. 잡아주시겠습니까?”

“호오, 힘이 풀렸다?”


【군사(軍師): 단창(單槍)】


“히익!”


군중 사이로 발목을 노리는 찌르기에 놀란 한청천은 폴짝 뛰어올랐다.

수많은 인파 가운데에서 정확히 한청천만을 노린 정교한 무공.

이런 무공을 펼칠 사람은 서문현에서도 손에 꼽았다.


“기녀라도 되고 싶은 거라면 단양으로 꺼져라. 반송장이 여우짓을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미는군.”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는 원용은 전날처럼 혀를 차며 한청천을 하대했다.

그러나 한청천이 누구인가?

전생은 물론, 200년이 지난 미래에도 입놀림만으로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화나게 만드는 희대의 주둥아리를 가진 인물 아닌가?

전날과 달리 공손은도 없는 지금, 한청천은 이틀 동안 참아왔던 본심을 표출했다.


“누가 여우짓을 했다고 그래? 얼굴을 검버섯 농장을 차린 댁과 다르게 태어나길 매력이 철철 넘쳐흐르는 거지. 세상은 이걸 ‘젊음’이라고 부르는데, 혹시 모르시나? 그리고 왜 나한테 화풀이야? 오늘은 은이 아가씨도 아프고, 농사짓던 할배도 없으니까 놀아줄 사람이 없어서 심심한가 봐? 그러니까 평소에 인덕 좀 쌓지 그랬어. 늙어서 혼자 살면 인망이라도 있어야지. 제삿밥이라도 얻어먹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잘 좀 해. 혹시 몰라? 지나가던 땡중이 가여워서 향이라도 피워줄지. 뭐, 그것마저 할배 몸에 있는 장신구를 모조리 훔친 다음이겠지만.”

“근본도 없는 반송장이 입은 활기차구나.”

“족보가 없는 건 사실인데, 너무 송장 미워하지 맙시다. 할배도 송장 되기까지 몇 년 안 남은 것 같은데.”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주변에 사람이 많기에 내력을 펼칠 수도 없는 원용은 이를 빠드득 갈며 지팡이를 몇 번이고 바닥에 내리찍었다.

아무리 흙바닥이기로서니 수천, 수만 년 동안 세상을 지탱하는 지면을 창호지 뚫듯 뚫어버리는 원용의 날카로운 내력에 긴장한 한청천은 슬쩍 발을 빼 도망칠 기회를 엿봤다.


“간만에 인사 드립니다. 원용 전 대장군님.”


그러나 한청천이 도망갈 곳은 없었다.

공손중의 집에서 나온 장해호가 마침 한청천의 배후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고개를 숙인 장해호의 인사에 기분이 상한 원용이 정정했다.


“전이라는 수식어는 빼라. 천나라와 금나라가 침공하면 네게 임시로 맡은 직책은 내게 돌아올 테니.”

“이미 귀가 닳도록 들으셨겠지만, 전쟁은 끝났습니다.”

“검 한번 들어본 적 없는 문관들의 바람을 너도 믿는 것이냐?”

“노인의 망상에 어울리지 않을 뿐입니다.”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고도 배운 것이 없군.”

“아무것도 잃지 않았음에도 두려워하는 어르신보단 낫겠지요.”

“멍청한 놈.”


끝없는 평행선의 대화가 무용지물이라 여긴 원용은 지팡이로 죄 없는 바닥을 푹푹 꿰뚫으며 한청천을 지나 장해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비켜라. 산책에 방해된다.”

“다음에는 단양에서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도 침착함을 유지한 장해호는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손짓으로 마을 주민들을 해산시켰다.

원용도 떠나고, 주민들도 해산했겠다, 이번에야말로 의원을 빠져나오려던 한청천은 하후윤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한참 찾았네. 어디 갔나 했더니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냐?”

“의원은 약 냄새 심해서 머리 아프단 말이야.”

“명색이 천마가 그것도 못 참아? 빨리 와. 선의께서 찾으아악! 대, 대장군님!”


한청천을 끌고 가려던 하후윤은 우두커니 서서 푸른 안광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장해호를 보고 경악하며 허리를 숙였다.


“만륜문 단원 하후윤! 장해호 대장군님께 인사 올립니다!”

“됐다. 이제는 무림맹에 속한 문파도 네가 내게 예를 갖출 필요는 없다.”

“그 뜻은···.”


하후윤을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장해호가 대답해주기를 기다렸다.

무림맹에 속한 문파가 제명당하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첫째는 반란에 필적하는 대역죄를 저질러 무림 맹주의 다수가 제명에 동의했을 때.

그리고 또 하나는.


“한성 장군이 어젯밤, 단신으로 만륜문을 괴멸시켰다.”


문파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되었을 때였다.

천 명에 가까운 문하생이 머무는 만륜문을 고작 혼자서 괴멸시켰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하후윤은 한성 장군이라는 이름을 듣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공포의 상징 홍문(紅門) 장군 한성.

비록 대국을 펼치지 못해 8단에 머물러있으나 실력만큼은 9단에 필적한다는 한성의 전투가 궁금했던 하후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더,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미안하지만 너희들과 회포를 풀 시간은 없구나. 다른 문주들이 만륜문을 흑랑이 독단적으로 괴멸시킨 건에 대해서 오늘 저녁에 회담을 열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니 지금부터 달려도 빠듯해. 원래는 한청천에게 서신만 전해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나한테? 누가?”


장해호는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한청천에게 서신을 건네고선 바람처럼 사라졌다.

지붕과 나무를 타고 시야에서 멀어지는 장해호를 시선으로 쫓은 하후윤은 아쉬움에 푸념을 늘어놓았다.


“엄청 바쁘신가 봐. 궁금한 게 산더미였는데.”

“글쎄다. 내가 볼 땐···.”


어린 시절,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한청천은 무표정한 장해호의 눈과 목소리에 서린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우는 것처럼 보였는데.”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장해호의 진심을, 오직 한청천만이 눈치챘다.


***


“죄송합니다.”


간절히 매달리는 공손은의 손을 부드럽게, 잔인하게 놓은 장해호는 식은땀에 젖은 공손은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알고 있었다.

장해호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리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랑을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타죽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따스함을 잊지 못해 뛰어드는 나방처럼.


“저를 괴롭히는 건 한은으로서의 기억이 아니에요. 당신을 향한 저의 마음이, 저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무엇보다 저를 아프게 해요.”


겨울이 오면 개구리는 동면을 취해 추위를 넘긴다.

혹한이 아무리 매섭더라도, 죽은 듯 살면 괴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찰나의 온기에 눈을 떠 버린 개구리는 다시금 동면을 취하지 못한다.

허상 같은 따사로움을 잊지 못해, 죽지도 못한 채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결코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며.


“다시는.”


수없이 곱씹었던 말.

그러면서도 절대로 내뱉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


장해호는 공손은의 부탁에 대답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그녀의 말을 경청한 장해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버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공손은은 참았던 서러움을 토해내며 구슬피 울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요. 죽을 만큼.”


공손은이 공손으로 사는 한, 그녀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통곡하고 흐느끼다가 이내 목이 쉬고 눈물이 마를 것이다.

이 많은 고통에도, 매정하게 흐르는 시간과 떠오르는 아침 해에 절망을 느낄 것이다.

공손중은 딸의 손을 잡았다.

어떤 위로와 희망도 공손은의 귀에 닿지 않을 것을 알기에, 공손중은 자신의 작은 바람을 전했다.


“살아다오.”


봄이 오지 않더라도,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헛되지 않도록.


작가의말

아프지마8ㅁ8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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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안한자적(1) 22.08.19 47 1 13쪽
24 원죄의 아이(5) 22.08.18 47 1 13쪽
23 원죄의 아이(4) 22.08.16 44 2 12쪽
22 원죄의 아이(3) 22.08.15 49 1 12쪽
21 원죄의 아이(2) 22.08.12 45 1 16쪽
20 원죄의 아이(1) 22.08.10 48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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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용과 왕(2) 22.08.05 48 1 14쪽
17 용과 왕(1) 22.08.03 54 1 12쪽
16 의로움이란 허상 아래(2) 22.08.01 83 2 12쪽
15 의로움이란 허상 아래(1) 22.07.29 54 2 13쪽
14 강호의 도리(4) 22.07.27 56 2 12쪽
13 강호의 도리(3) 22.07.26 65 2 13쪽
12 강호의 도리(2) 22.07.25 63 2 11쪽
11 강호의 도리(1) 22.07.23 73 2 16쪽
10 평화로운 서문현(2) 22.07.20 73 2 16쪽
9 평화로운 서문현(1) +1 22.07.18 76 2 14쪽
8 토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4) 22.07.11 76 2 14쪽
7 토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3) 22.07.08 80 2 13쪽
6 토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2) +2 22.07.06 101 2 12쪽
5 토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1) 22.07.04 113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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