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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선티플님의 서재입니다

죽어도 살고 싶은 무림 지존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에선
작품등록일 :
2022.05.24 02:09
최근연재일 :
2022.08.2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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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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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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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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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강호의 도리(4)

DUMMY

“침울해 보이더니 금세 얼굴 폈다?”


단급제 시험을 마친 날, 별빛과 나무 아래 수련하는 공손평에게 한청천이 물었다.


“예. 제가 태극권을 연마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닌 재밌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은 즐거웠습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서 저의 노력이 무의미하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냐? 특이한 녀석이네.”


한청천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가만히 공손평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청천이 자신을 통해 다른 존재를 투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공손평은 한청천이 추억에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그의 침묵에 어울려주었다.


“범과 인간, 나무 중에 무엇이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가끔 튀어나오는 한청천의 어르신 말투. 저 말투를 사용할 때면 까불거리던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정말로 천마 한청천 본인인 것만 같았다.

잠시 고민한 공손평은 평소 한청천의 지랄맞은 성격을 고려하고 자기 생각을 더해 답을 내렸다.


“인간이 제일 강합니다. 나무는 범과 인간 중 무엇도 이기지 못하고, 범은 인간을 이기지만, 나무를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둘 모두에게 질 수도 있고, 노력에 따라 둘 모두를 이길 수 있으니, 태어난 그대로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이 제일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너에게 강함이란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느냐로 결정되느냐?”

“네?”


예상치도 못한 한청천의 질문에 공손평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강하면 강한 거지,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느냐로 결정되냐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강함의 기준이 따로 있다는 뜻인가?


“생(生)을 빼앗는 것과 유지하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위대한가?”


한청천의 질문은 더 이상 대답을 구하지 않았다.

스스로 답을 내린 한청천은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서는 말을 이었다.


“범은 강직하다. 최강의 포식자로 태어났으나 배가 부르면 더 이상의 살생은 행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생을 늘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무는 굳건하다. 땅에 뿌리 내린 나무는 그늘과 과일을 제공하니 누구 하나 감히 나무를 해할 생각조차 가지지 않게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먹고 살기 위해 개발한 날붙이와 농기구가 순식간에 흉기로 돌변하고, 하룻밤을 따뜻하게 해줄 불씨를 통제하지 못해 몇 개의 산을 하루 만에 불태워버리지. 나름 오래 살았지만, 나는 아직 이토록 어리숙하고 잔인한 생명을 본 적이 없다.”


범과 인간, 그리고 나무.

자신의 무기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이 가장 약하다. 생을 빼앗는 것은 그토록 하찮은 행위다. 질문에 명확한 답을 말하지 않았지만, 공손평은 한청천의 한탄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서 정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만약, 한청천이 200년 전에 천마가 맞다면, 자신의 네 제자를 살해했다는 기록은 사실인가?

직접 묻기엔 두려웠던 공손평은 한청천을 짐짓 떠보았다.


“스승님은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살인을 한 적이 있으십니까?”

“녀석, 아픈 곳을 찌르는구나.”


한청천은 코웃음을 치며 잠시 뜸을 들였다.


“너는 나처럼 되지 말거라. 이걸로 대답을 대신 하마.”


이렇게 해석하기도, 저렇게 해석하기도 애매한 대답.

땀의 열기가 전부 식은 공손평은 한청천의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불과 열다섯에 수라에 심장이 얽매인 가여운 소년. 할 수 있는 거라곤 시한부에 저항하기 위해 내력을 단련하는 게 전부인 소년의 등은 그날따라 유달리 위축돼 보였다.


‘저런 아이가 정말 역사서에 나오는 천마 한청천이라 믿고 싶다면, 내가 미친 걸까?’


공손평은 고개를 흔들면서 잡념을 떨쳐냈다.

고민해서 무엇하겠는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것이 13년의 수련에서 깨우친 공손평의 유일한 해답이었다.


“야! 달라붙지 마! 네 방 가서 자!”

“제자와 스승은 물과 물고기 같으니, 어찌 떨어질 수 있습니까?”

“염병하고 자빠졌네! 하다못해 씻고 오기라도 하던가!”

“지금 허락하신 겁니다?”

“누가 허락했대? 빨리 씻기나 해!”


별이 수놓은 깊은 밤 맑은 하늘 아래.

두 사내의 소란에 잠에서 깬 공손은은 이불을 깊게 뒤집어썼다.


“진짜 독립을 하던가 해야지.”


***


【음양오행(陰陽五行)·사상팔괘(四象八卦)·태극양의(太極兩儀)】


“으아아악!”

“괴물 같은 놈. 점점 빨라지잖아?”

“벌써 백 명도 넘게 당했어!”


무아지경에 돌입한 공손평은 이미 사고(思考)를 하고 있지 않았다.

칼을 들이대면 흘리고, 창으로 찌르면 막아내고, 화살을 쏘면 피해버리니, 마치 강을 헤엄치는 용처럼 공손평은 일체의 허튼 움직임 없이 최대의 효율로 산적을 쓰러뜨렸다.

공손평의 움직임에서 빈틈을 읽으려던 소쌍을 혀를 차고 병력 사이로 숨었다.


‘움직임만큼은 두령님을 능가하고 있어. 보아하니 무아지경에 돌입한 모양인데, 지치길 기다려도 내공이 아닌 외공으로 승부하는 저 녀석한테 소모전으로 부딪치는 건 무의미하겠지. 차라리 정면에서 붙을까?’


소쌍은 막무가내로 싸우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 자신의 태도에 순간 섬짓했다.

방패와 장창의 조합. 무림에서 보기 드문 이 조합은 소쌍이 본래 흑랑 출신의 군사였기 때문이었다. 흑랑은 대(對) 무림 특화 군대. 특히 한 명의 무인을 포위하고 제압하는데 도가 튼 군대였다.

그런 흑랑에 복무했던 자신이 불살의 과업을 떠안고 있는 청년을 상대로 막막함을 느끼다니. 소쌍은 주먹을 꽉 쥐며 쓴웃음을 지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 이미 추월당한 건가.’


처음 공손평과 합을 겨뤘을 때 치명상은 주지 못해도 충분한 피해를 안겨줬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공손평의 허리는 통증을 느꼈고, 왼팔은 무아지경에 빠진 현재까지도 저렸지만, 소쌍은 공손평의 순수한 육체적 강함을 간과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청년을 상대로 병력의 사기도 차츰 떨어지는 와중, 소쌍은 등 뒤에서 들리는 북소리에 눈을 돌렸다.

부분두령을 보냈다는 신호. 곧이어 느껴지는 익숙한 내력에 소쌍은 생각을 정리했다.


‘진춘과 후헌이 오고 있다. 두령님이 보내신 건가?’


순간 장대견을 걱정한 소쌍은 정신을 바로잡고 공손평을 잡을 계책을 구상했다.


“모두 길을 터라! 진춘과 후헌, 그리고 내가 동시에 놈을 치겠다!”

“알겠습니다!”


태극권의 달인을 상대로 셋이 덤벼든다 한들 승산은 희박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첫 합.

단 일격에 끝장을 내는 것이 이상적인 구상이었다.


‘최악의 경우 빈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소쌍의 지휘 아래 공손평과 최대한 떨어진 병력의 틈 사이로 언제나처럼 선봉장 후헌이 진입했다.


“막내야! 도우러 왔다!”


【목협(木俠): 전선돌파(戰線突破)】


바람을 가르는 전선돌파는 5단 이상의 고수에게도 먹히는 후헌의 자랑스러운 무공이었다.

게다가 말의 속력에 힘입어 수풀에서 등장했으니 공손평이 도망갈 틈은 없었다.

공손평은 도망가지 못했다.

아니, 도망가지 않았다.

공손평은 흐름에 거스르지 않았다. 대신 흐름에 뛰어들었다. 후헌을 향해 뛰어든 공손평의 목덜미에 장창이 날을 세웠지만, 공손평의 눈은 이미 후헌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미 끝장낸 상대였으니.


【태극(太極): 진춘(震春)】


“헌아!”


【목협(木俠): 강능쇄유(剛能碎柔)】


봄꽃은 바람을 만나면 더욱 사납게 흩날릴 뿐 상처를 입지 않는다.

태극양의진 중 하나인 진춘은 흐름을 따르는 무공.

창으로 돌진하던, 망치로 내리찍던, 결코 닿지 못한다.


【태극(太極): 진춘(震春)】


두 부분두령을 거의 동시에 전투 불능으로 만든 공손평은 두 사람이 만든 강한 내력의 흐름 때문에 잠시 허공에 노출되었다.

소쌍이 원하던 대로였다.


【목협(木俠): 쌍두사충(雙頭蛇衝)】


부하 둘이 들고 있던 창을 던진 소쌍은 방패와 창을 들고 공손평에게 달려들었다.

무아지경은 어디까지나 공손평의 반사신경으로 돌입한 경지.

이성이 거의 없는 공손평을 반사신경으로 대처하지 못할 변수 혹은 연격만이 유일한 해법이었다.


【태극(太極): 이하(離夏)】


카캉!


봄은 흐르고, 여름은 떨어진다.

조금 전까지 흘렀던 내력을 역으로 이용해 쌍두사충을 쳐낸 공손평은 소쌍의 창을 피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목협(木俠): 귀격(龜擊)】

【태극(太極): 태추(兌秋)】


파앙!

상반신만 한 방패가 이전처럼 공손평의 허리를 노리고 가격했지만, 공손평은 오히려 소쌍의 방패 발을 올려놓은 채로 물러서지 않았다.

여름은 떨어지고, 가을은 변화하니, 귀격의 내력과 동화한 공손평은 아무 피해 없이 귀격에 안착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겨울.”

“뭐라?”


【태극(太極): 감동(坎冬)】


쿠구구구!!!!


겨울은 만물을 메운다.

공손평의 내력에 방패는 당장이라도 깨질 듯 금이 갔고, 소쌍은 바닥을 향해 낙하했다. 겨울의 압력에 압도당한 소쌍은 깨져가는 방패를 붙잡고 발버둥 쳤다.

소쌍은 공손평을 얕보지 않았다. 다만 소쌍의 최선이 공손평의 최선을 이기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기에 죽는 곳.

그것이 무림이었고, 무림에서는 살인을 머뭇거리는 자가 바보였다.


‘아버지는 그리 대단치 못하다.’

‘너는 나처럼 되지 말거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손평은 바보였다.

아버지와 스승에게 듣던 소리가 떠오른 공손평은 내력을 거둬들였고, 그 결과 한순간의 틈이 생겼다.


“천운(天運)인가? 혹은 인재(人災)인가?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큰 실수를 저질렀어요.”


【목협(木俠): 벌목(伐木)】

【태극(太極): 소강석(少剛石)】


콰과과과!!!!

열세 번째 도끼가 공손평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소강석으로 몸을 강화했지만, 무아지경이 끝난 후유증에 피로가 몰린 공손평은 도끼를 온전히 막지 못하고 가슴팍에 도끼가 꽂혔다.

나무 몇 그루를 부수면서 날아간 공손평은 도끼가 깊숙이 박히지 못하도록 손잡이를 잡고선 바닥에 쓰러졌다.

공손평은 가슴팍에 출혈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력을 집중했지만, 도끼에 심어진 내력이 공손평의 흐름을 방해했다.

이대로 끝인가? 공손평의 마음에 불안이 피어오르고,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내단환을 집어먹질 않나, 도끼에 내력을 넣질 않나. 요즘 것들은 왜 이리 쉬운 길만 가려고 해? 그렇게 잔머리 굴릴 시간에 명상을 했으면 지금처럼 처발리지는 않았을 거다.”


숲 저편에서 만신창이가 된 호일랑과 배위를 집어던진 한청천이 나타났다.

산적단에게 분리되기 전과 달리 방대한 양의 내력을 두른 한청천의 모습을 본 공손평은 묘하게 안심이 됐다.

중상을 입은 공손평을 발견한 한청천은 한걸음에 다가와 물었다.


“졌냐?”

“푸핫!”


한청천의 습관적인 비아냥에 공손평은 그만 웃음을 빵 터트렸다.

이제야 알겠다.

이 사람의 말은 타인을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독히 사회화가 안 된 노인의 통찰력이 담긴 말. 핵심만 콕 집어 말하는 한청천의 고유한 말투다.

비록 도끼가 가슴팍에 박혔지만, 공손평은 당당하게 팔을 올리며 선언했다.


“이겼습니다.”

“그러냐.”


한청천은 발길질로 내력이 담긴 도낏자루 부분을 간단히 도려내고 등을 돌렸다.

제자의 상태를 깊게 살펴보진 않는 건지,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 공손평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잘했다.”


뜻밖의 칭찬.

한청천은 무심하게 한마디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은 눈물을 흘리는 제자를 위한 스승의 배려이자, 윗사람의 추한 모습을 감춰주는 아랫사람의 예의였다.


“감사···감사합···크흡!”

“울지 마라. 도리를 걷는 자란 무릇 그러한 법이다.”


바로 앞의 적을 죽이지 못해 죽는다. 많은 사람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남의 목숨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냐고. 아무렴, 맞는 말이다. 누구든 자신의 목숨이 제일 귀하지.

그러나 무인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적어도 한목은 그렇게 말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한청천은 200년이 넘어서야, 제자의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잘 만났다. 목이의 이름을 걸고 노략질하는 양아치가 너냐?”


작가의말

이번 전투는 보여주고 싶은 부분이 많아서 빠르게 써지네요ㅋㅋ

한청천은 왜 갑자기 강해지고, 장대견은 장해랑을 두고 어떻게 온 걸까요?

그건...다음 화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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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원죄의 아이(3) 22.08.15 49 1 12쪽
21 원죄의 아이(2) 22.08.12 45 1 16쪽
20 원죄의 아이(1) 22.08.10 48 2 11쪽
19 용과 왕(3) 22.08.08 49 1 14쪽
18 용과 왕(2) 22.08.05 48 1 14쪽
17 용과 왕(1) 22.08.03 54 1 12쪽
16 의로움이란 허상 아래(2) 22.08.01 83 2 12쪽
15 의로움이란 허상 아래(1) 22.07.29 54 2 13쪽
» 강호의 도리(4) 22.07.27 56 2 12쪽
13 강호의 도리(3) 22.07.26 65 2 13쪽
12 강호의 도리(2) 22.07.25 63 2 11쪽
11 강호의 도리(1) 22.07.23 73 2 16쪽
10 평화로운 서문현(2) 22.07.20 73 2 16쪽
9 평화로운 서문현(1) +1 22.07.18 76 2 14쪽
8 토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4) 22.07.11 76 2 14쪽
7 토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3) 22.07.08 80 2 13쪽
6 토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2) +2 22.07.06 101 2 12쪽
5 토끼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1) 22.07.04 113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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