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고충의 맛을 알아?
테츠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마족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을 때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눈덩이로 인해 모든 증거가 덮여 버렸기 때문이다.
테드버드가 작전회의실로 들어왔다.
"아직 몸에서 그놈 비린내가 어휴."
뒤따라 들어온 알프레드가 말했다.
"놈의 시체는 아리스토틀에 정확히 인계했습니다."
"뭐라고 하던?"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큰일이라고···."
"에효, 눈 때문에 그 일대를 수색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군."
"교주님 당분간 테란 고원은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고 싶어도 눈 때문에 가지 못할 거야. 그런데 조금만 살펴보면 될 것 같긴 한데."
메흘린은 뒷짐을 지고 기다란 탁자 위에 놓은 지도를 봤다.
"이상한 점이 몇 개 있습니다. 첫 번째 왜 한 마리씩 꼬여 드는 것일까요? 만약 수 마리가 있었다면 교주님의 마력에 모두 이끌려야 정상이고 그들 모두가 모여들어야 이치에 맞습니다."
"그렇지 그건 나도 이상하게 생각해. 마력을 사용하자마자 파리 꼬이듯이 꼬였어. 그건 그들이 있는 곳이 멀지 않다는 이야기야. 그래서 더 아쉬워."
"자연 발생인지 어떤 다른 작용 때문에 마족이 이 세계에 나올 수 있는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테드버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에서는 그게 가장 큰 문제인데. 만약 누가 헛짓을 해서 그놈들을 끌어내는 거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말이야. 그놈의 눈 때문에 움직일 수 없으니 참으로 곤란한 노릇이군."
밖에는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면 놈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니지 하늘을 나는 놈을 보지 못했나? 하늘을 날면 못 갈 곳이 없지 않아?"
엘빈의 말에 테드버드도 할 말이 없는지 입맛을 다셨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다. 그놈들의 공격력이 대단하다는 거다. 날개 달린 놈은 입에서 이상한 빛줄기를 뿜어냈고 뱀처럼 생긴 놈은 번개를 떨어뜨리는 능력이 있어. 양쪽 모두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들이다. 무엇보다 맷집이 상상을 초월해. 천마삼검을 세 방이나 맞고도 움직였으니 오크였다면 반 토막이 났을 거다."
"루안의 강철 화살은 엄청난 파괴력이 담겨 있는데 그걸 맞고도 한쪽 눈알뿐이니 마테니의 단검은 거의 상처 입지 않고 튕겨 냈지 않습니까? 그런 놈들이 떼로 덤벼 오면···."
"대처 불가능하겠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미칠 노릇이군. 꼼짝하지 못하니."
"마테니 장로는 앞으로 제자들의 가르침을 접고 교주와 붙어 있어요."
"어이쿠 지금 나를 감시할 생각이냐?"
"감시가 아니고 지키려고 그러는 겁니다. 마테니의 제자들은 나머지 장로들이 위임하여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엥? 마테니의 제자까지 맡으라고?"
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교에서 타 장로의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물론 법적인 금지는 아니지만 장로 간에도 알력이 있기에 자신의 제자는 확실히 통제하는 분위기다. 제자들 끼리도 알력이 존재하고.
메흘린 테츠를 바라보자 테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 알겠어. 다들 마테니의 제자를 한 명씩 맡아서 가르치도록 해."
테드버드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나는 아델리오를 가르칠 거다. 아델리오는 내 것이다."
"에고, 아직 미련을 못 버렸나?"
"녀석은 암살자의 기술을 배울 재목이 아니야. 자고로 기사가 지녀야 할 품위를 앗!"
테츠가 혈적지를 튕겨 테드버드의 아혈을 찍어 버렸다.
"다 같은 내 제자다. 품위를 훼손하는 말은 서로 자제해라."
"이 같은 일은 쉬이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인류 이전의 존재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마교를 떠나 인간의 생활 터전을 위협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장로들이 이 정도 애를 먹는 놈들이라면 보통 사람들은 그들과 싸울 수조차 없을 겁니다. 지금은 내실을 다질 때입니다. 무엇보다 마교를 강하게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모든 장로는 제 마음에 드는 성과를 내주셔야 합니다."
"모두 돌아가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제자를 가르쳐야지."
엘빈이 인사하고 물러나자 다른 장로도 따라 물러났다. 작전회의실에는 테츠와 마테니 메흘린, 애시턴만 남아 있었다.
"애시턴 잠시 그들에게 가 있어. 나도 곧 뒤따라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애시턴이 나가자 메흘린의 표정이 바로 돌변했다.
"교주님은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지금 황궁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칠무신 모두가 움직이려 하는 걸 간신히 막았습니다. 황태자가 절대 마족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흥, 내 그럴 줄 알았다. 메흘린 네가 신경질적으로 구는 데는 이유가 있겠거니 했더니."
"저와 마테니의 목숨이라면 이렇게 화를 내지 않을 겁니다. 황태자를 위태롭게 했다 하여 마교인을 몰살하라는 성황의 지시입니다."
"뭐라? 그 영감이 이제 노망이 들었나?"
"성황의 입장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을 어찌 가볍게 생각하십니까? 황태자 전하는 도대체 몇 대 독자인지 아십니까? 성황의 마음을 왜 헤아리지 못하십니까? 황태자가 마족과 접촉하여 위기를 맞았다고 하는데 성황께서 가만있으시겠습니까? 어쩌면 칠무신 모두가 이곳으로 몰려 올줄 모릅니다."
"그럼 곤란해, 신성불가침 조약은 어쩌고?"
"세상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위험하다는데 성황의 눈에 신성불가침 조약이 들어오겠습니까?"
"으, 영감 그러고도 남을 만한 성격이지. 내가 어떡할까?"
"일단 진정시켜 놓은 상태입니다. 전하께서 다시는 마족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달려 있으며 여의치 않을 때는 어반마르스로 복귀하는 조항도 있습니다."
"안돼!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난 자유를 원해."
"자유를 지키시려면 최소한도의 책임의식은 가지셔야 합니다. 전하의 몸은 개인의 몸이 아닙니다. 향후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실 분입니다.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불경을 저지르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마교를 포기하시고 어반마르스로 복귀하시어 차기 황제의 승계를···."
"야!"
"···."
"너 많이 컸다? 이놈 봐라? 감히 태자인 나를 훈계하려 들어?"
마테니가 재빨리 손짓했다. 감정이 격앙되면 테드의 성격이 나온다. 성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감정이 격앙되거나 화를 낼 정도로 흥분하면 테드가 된다. 본인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늘 붙어 있는 마테니라서 테츠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고 잘 알아차린다.
"마스터, 메흘린은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메흘린이 뭐 좋다고 입에 담기 싫어하는 말을 하겠습니까? 다 마스터를 위한 일입니다."
"참 나 저쪽에서는 진버트가 잔소리하더니 이쪽에 와서는 조용한가 싶더니 메흘린이 잔소릴 해대는군."
메흘린도 순간 너무 앞서 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뉘 앞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린 죄를 물어 주십시오."
"그래? 잘못을 안다 이 말이지? 죄를 물어 달라고 했지? 네 입으로? 좋아, 벌을 준다. 주겠어."
갑자기 써늘한 기분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메흘린이다. 후회했지만 이미 튀어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요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냥 집행관으로 편안하게 살아도 되는 인생 이게 꼬인 것인지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황태자를 모시는 엄청난 위치에 서게 됐다. 마교에서 태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마테니와 자신뿐이다.
황태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마테니를 통해 야생왕에게 보고되고 그것은 곧 성황의 귀에 들어간다. 이번 마족의 사태는 당연히 황궁을 발칵 뒤집었다.
성황이 어떤 말을 했는지 마테니도 놀라 떠듬떠듬 전했다. 그 침착하고 무게감이 가득한 야생왕조차 흥분할 정도였으니.
서신에는 말끝마다 두 사람의 멱을 따겠다. 인육으로 젓갈을 담겠다. 산 채로 내장을 빼겠다는 이제는 들어도 별 감흥이 없는 수준이 됐다.
성황의 협박이란 협박은 모두 받고 있고 거기에 황태자의 안하무인 제멋대로인 행동은 결국 메흘린을 지치게 했다. 다시 마족을 보겠다고 뛰쳐나가자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말려서 될 위인도 아니고 성황과 황태자 중간에 끼어 그 스트레스로 매일매일 피가 말랐다.
"죄를 묻자. 죄를 묻자. 좋아 결정했다. 네 죄를 사하는 조건으로 이번에 잡힌 집행관 일행의 사형을 집행하겠다. 너 대신 그들이라도 죽여 화를 삭여야지."
메흘린이 깜짝 놀라 뭐라고 했으니 마테니가 즉시 제지했다.
"마스터, 그들의 목숨은 이미 군사에게 위임하지 않았습니까? 사내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내? 사내? 너도 같이 죽고 싶냐?"
그때 메흘린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더는 못 참겠습니다. 성황께서는 저희더러 목숨을 걸고 황태자를 지키지 못한 죄를 물어 저는 물론 친 혈족까지 다 잡아 죽이겠다고 하시고 저 또한 능력이 되지 않아 태자 전하를 올바르게 모실 수 없으니 살아 있을 가치도 없습니다. 저를 먼저 죽여 주십시오. 지금 상태에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성황의 보챔이 극에 달해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잠을 잔 적이 없습니다. 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차리리 죽는 게 낫겠다는 제 판단입니다. 죽일 때는 고통 없이 단칼에 목을 쳐 주십시오."
메흘린은 목부분 옷깃을 접고 엎드려 목을 내밀었다.
"쩝, 농담 좀 했기로 서니 죽자고 덤벼들어?"
"태자 전하께서는 농담이라고 하시지만, 저희 같은 아랫것들은 검으로 찔린 것과 같은 고통을 받습니다. 긴말 필요 없습니다. 그냥 죽여 주십시오."
"야, 마테니 난 아리스토톨에게 놀러 갈 테니 무슨 일 생기면 거기로 와."
테츠는 부리나케 창문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휴, 그만 일어나세요. 군사."
"제길 정말 못해 먹겠어. 내가 전생에 무슨 업보를 지었기에 이 모양이지? 집행관 시절이 그리워 질 거야."
"군사는 현명하게 잘 해내고 있습니다. 조금만 참으셔야 합니다."
"후, 테드버드 장로도 슬슬 눈치채기 시작했고 이번 일로 다른 장로들도 더욱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테일리아드의 마법사들이 카셈의 매직 오브를 순순히 태자 전하께 준 것도 의심스러워 하고 성력을 사용하여 오크 사만을 없앤 것도 궁금해해, 그리고 황제 직속의 칠무신이 마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궁금해한다고 뭘 더 어떻게 숨겨야 해?"
"이럴 때일수록 군사께서 중심을 잡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군사가 흔들리면 마교 전체가 흔들립니다. 태자 전하도 안심하고 밖으로 돌아다니시는 것도 다 메흘린 군사를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태자 전하가 부리나케 도망가는 것은 그만큼 군사님을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태자 전하를 모시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어. 문제는 성황 님이시다. 그분이 신성불가침 조약을 파기한다면 주신 제국 전체가 흔들릴 거야. 그것만큼은 막아야 해. 그것이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라고. 정말 잠자다가 한 번씩 악몽을 꿔.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야. 지옥이란 말이지. 거기다 이제 마족까지. 세상이 미칠지 내가 미칠지 누가 먼저일지 기대되는군."
"그럼 군사는 왜 그렇게 힘든 직책을 꿋꿋이 맡아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겁니까?"
"집행관의 버릇 때문이겠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의구심이 드는 게 이번 오크 사태와 시몰레이크의 행보거든 나는 그들 뒤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해. 마교의 군사로서 그리고 태자 전하를 위해 그 뒤에 웅크리고 있는 놈을 잡아 밖으로 끌어내고 싶어서 말이지. 그 목적이 없었다면···. 성황님의 서신을 볼 때마다 목을 매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지경이야."
"조금만 참아 봅시다. 좋게 풀리겠죠. 보세요. 그 개망나니라 불리던 태자가 이렇게 많은 인재를 모으고 단번에 팬텀 가드너에 버금가는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성격은 좀 그러하셔도 속이 깊은 분입니다. 저는 황태자의 성격이 그리된 것은 누군가의 저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의 황태자의 성격은 성군의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감정이 격하게 되면 이상하게 그 성격이 나오시니 저도 감당이 되지 않지만 태자 전하께서도 많이 노력하시고 계십니다. 자신의 성격이 이상하다 싶으시면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시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방금도 자신의 성격이 제어되시지 않으니 아리스토틀 핑계를 대시고 자리를 뜨신 겁니다. 그러니 군사도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속에 있는 말을 풀어 놓으니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오늘부로 태자 전하를 밀착 경호하십시오. 마족이란 존재를 알았으니 그것을 조사 하시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야 태자 전하의 능력을 믿지만 성황에는 검 한번 잡지 않은 귀한 아들 그대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곳에 칠무신이 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후,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전 태자 전하께 가보겠습니다. 조금 쉬십시오. 얼굴빛이 말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의 이런 고충을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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