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자해지
메흘린은 돌아온 테츠에게 그동안 모았던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이렇게 해서 엘빈 장로와 알프레드, 실버팽이 출발했습니다. 각 장로당 백 명 정도의 정예병이 붙었습니다."
"속도가 느려 무공의 진척이 너무 느려. 아직도 매화검법과 태청검법에 묶인 제자들이 많다니."
"두 가지 검법 다 변화가 크고 까다로운 검법입니다. 한 번도 그런 검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우리야 시간이 필요하지만, 오크는 기다려 주지 않아. 십 만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머릿수를 조금 줄여 놓을 필요가 있겠어. 꼭 나를 나서게 만들어 쩝."
메흘린은 잠시 혀로 입술을 적셨다.
테츠는 그런 메흘린을 보고 혀를 찼다.
"자네 또 그 지독한 버릇을 감추지 못하는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해. 입은 뒀다가 뭣하나?"
메흘린은 손으로 입을 막더니 살짝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성황께서 오크 십 만이 우리 쪽으로 진군한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뭐라고 하든?"
"당장 칠무신을 보내신다 합니다."
"뭐라? 그 영감이 미쳤나? 그러다 신성불가침 조약을 깨트리면 어떻게? 저번 때는 윌리엄 대공이 직접 초대해서 올 수 있었지만, 지금 영감의 판단대로 하면 골치 아파져. 급히 전갈을 띄워. 만약 칠무신 중 한 명이라도 솔라리스 땅을 넘을 시 앞으로 아들 얼굴 볼 수 없을 줄 알라고 협박해."
"벌써 그렇게 서신을 띄워 놓았기는 하지만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제길 우리가 얼마나 얕잡아 보였으면 칠무신 따위를 보낼 생각을 하나? 이번에 오크 십만을 막지 못하면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거야. 내가 나서기 전에 십만 정도는 후딱 정리해."
"엠버스피어까지 오기 전에 정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테일리아드 마법사가 엠버스피어 동쪽 지구를 원합니다. 그들은 동쪽 지구 전체를 마법사들이 거주할 구역으로 재정비하려 합니다."
"뭐, 상관있나? 허락해주고 참, 테일리아드 마법사들에게 프로이시어란 자가 어떤 마법사인지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봐 줬으면 해."
"프로이시어라면 킹덤 오브 소서러스가 아닙니까? 솔라리스 유일의 킹덤 오브 소서러스 소속 마법사입니다."
"킹덤 오브 소서러스? 마법사 단체인가?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군."
"네, 주신 제국을 통틀어 가장 강한 마법사 단체입니다."
"프로이시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 왠지 모르게 껄끄러운 놈 같아."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테니 이놈은 또 어디 갔나? 돌아오자마자 제자들에게 튀어갔군. 여하튼. 마테니 보고 제시어스 왕자를 지키는데 신중을 기하라고 전해. 이번에 아칸에서 죽인 놈이 전설의 세븐 어쌔신 중 한 명이었거든. 밤의 자매단이 완전히 뒤집혔을 거라고. 이상하게 나랑 밤의 자매단이 자주 부딪혀. 솔라리스 지부도 완전히 괴멸시켰지. 제시어스 왕자와 아그니스 공주 의뢰 건도 우리 때문에 실패했지. 아주 치를 떨겠구먼."
"알겠습니다. 제시어스 왕자의 경호를 더 신경 쓰겠습니다."
"분명히 엠버스피어에 시몰레이크의 인커전도 들어와 있고 밤의 자매단 끄나풀도 있을 거야. 그들 모두를 잡아내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목표물을 최대한 안전하게 지키는 것뿐."
***
"어휴, 찾았다. 저기 있네."
세렌은 언덕 위 나뭇등걸에 기대에 있었다. 제럴드는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세렌을 향해 달려왔다.
그 뒤로 브라이트와 크림슨, 로이드, 바실이 뒤따랐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세렌이 손을 휘저었다. 그것은 제럴드도 잘 아는 수신호다. 근처에 적이 있다는 신호다.
제럴드는 달리는 걸음을 멈추고 최대한 조용히 세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헉!"
오크 대군이다. 그것도 긴 행렬이다.
"저들이 엠버스피어로 진군하는 오크들입니까?"
세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겨우 따라잡았네. 제럴드 저놈들 행군 속도로 엠버스피어까지 얼마나 걸릴까?"
"쉬지 않고 행군한다고 했을 때는 2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 하지만 저 정도 대규모 병력은 먹지 않고 행군할 수 없는 법이죠. 잘 보세요. 놈들의 군장은 형편없습니다. 저 말은 비상식량도 없다는 뜻이지요. 즉 먹을 것을 구하면서 이동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십 만이라는 대군이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데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죠. 누가 저들을 움직이는지 모르지만, 솔직히 미친 짓입니다. 오크도 생명체입니다. 사고도 하죠.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다른 짐 마차나 그런 것이 따로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십 만의 오크가 배불리 먹지 못합니다. 놈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최대한 빨리 엠버스피어를 점령해 약탈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군. 지금 오크들은 굶주림에 지쳐 있어 이때 흔들어 놓으면 제격이지 않을까?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대규모 군단을 어떻게 흔든단 말입니까?"
"꼬리 잡기 들어가야지. 마침 잘 됐다. 너희도 솔라리스 군인이잖아? 이럴 때 군인 정신 한 번 발휘해봐."
"무얼 말씀입니까?"
"내게 생각이 있어. 기다려 봐."
제럴드는 섬뜩한 미소의 세렌에 온몸이 움찔했다.
세렌 일행은 이틀에 걸쳐 오크의 행군을 감시했다. 십만 병력의 행군 이틀 만에 마지막 꼬리를 드러냈다.
제럴드는 또 뛰었다. 오크의 마지막 꼬리에 화살을 하나 날렸더니 수십 마리의 오크가 고함을 치고 따라붙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타난 세렌에 의해 모조리 나가떨어졌다.
"뭐야? 이거 겨우 스무 마리야? 능력 좀 발휘해. 최소 백 단위는 끌고 나와야지. 어이 너희들도 거들어."
세렌의 강압에 못 이겨 제럴드 일행은 오크를 유인하는 미끼로 활약했다. 세렌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다 보니 거절하지 못하고 위험의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제럴드 일행의 뒤로 백 마리의 오크가 따라붙었다.
"제럴드 이러다 정말 죽는 거 아니야? 아무리 세렌이 강하다 해도 혼자란 말이야. 이건 미친 짓이라고!"
"말할 시간이 있으면 뛰라고! 달려 죽기 싫으면!"
"제길,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데?"
브라이트와 크림슨은 냅다 달리면서 투덜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세렌이 서 있었다. 그녀는 우아한 모습으로 바이올렛을 들고 웃고 있었다.
"저거 봐. 완전히 맛 간 여자라고. 미친! 우리가 왜 저 여자를 따라다녀야 하는 거지?"
바실은 죽어라 뛰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들은 이윽고 세렌을 지나쳤다. 제럴드는 뒤를 돌아보며 고함을 쳤다.
"이번에는 숫자가 너무 많아요. 도망쳐요."
그 소리를 분명 들었겠지만, 세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오크의 고함이 뒤통수를 때렸다. 제럴드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검을 뽑았다.
"이판사판이다. 모두 그녀를 도와 오크와 싸우자."
"제럴드."
브라이트가 고함을 질렀으나 제럴드는 세렌을 향해 달렸다. 막 세렌이 오크와 전투를 시작했다.
검, 검, 검, 검, 검.
그녀는 계속 무엇을 중얼거렸다. 테츠와 똑같은 검법이다. 그녀의 재능은 천마수라검을 완벽히 구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지만 늘 테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테츠가 그녀에게 가장 어려운 검법인 천마수라검을 가르친 이유는 그녀의 살심을 억누르기 위해서다. 천살궁은 무언가에 집요하게 빠져드는 성격이다. 그녀에게 천마수라검을 가르쳐준 이유는 그녀를 정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다.
세렌에게 지금 살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천마수라검의 진정한 오의(奧義)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살인보다 검에 더 집중하였고 대상인 오크를 찾기 위해 방랑하는 것보다는 아예 십만 오크 대군을 직접 노리는 편이 효율이 높을 거로 생각한 것이다.
끊임없이 연습 상대를 공급받기에 이상적이다. 하지만 세렌은 혼자다. 잘못 건드려 오크가 너무 달라붙으면 좋지 않았다. 적당한 양을 적당한 순간에 적당히 공급받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러기 위해서 제럴드 일행을 부려 먹는 것이다.
제럴드 일행이 적당히 오크를 유인해 오면 세렌은 그놈들을 대상으로 천마수라검을 연습했다.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모든 것이 실전이다. 검을 완전히 자신 것으로 만들지 않은 이상 진정한 위력은 나오질 않아. 네 검을 찾아라. 내가 네게 주는 첫 번째 과제다. 해결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하지 말아라."
그리고 세렌을 엠버스피어에서 쫓아냈다. 그렇다. 세렌은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쫓겨 나온 거였다. 그동안 수많은 오크를 베었다. 베고 또 베어도 검은 늘 같았다. 항상 같은 느낌대로 초식대로 휘두르는 검일 뿐이었다.
다만 검을 사용할 때마다 내공이 조금씩 늘고 검의 깊이는 늘었다. 제럴드가 느낄 수 있듯이 세렌의 천마수라검은 점점 완숙미가 붙어 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테츠가 펼치는 천마수라검의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테츠가 사용한 내공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2성의 내공이었다. 같은 내공으로 펼친 천마수라검의 위력은 판이하였다. 정교함, 파괴력, 정확도 그 모든 것이 테츠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다. 천마수라검으로 똑같이 대련했을 때 같은 일 초식을 펼쳤음에도 테츠의 천마수라검은 세렌보다 훨씬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그 차이를 줄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 검을 찾을 수 있다는 거지? 도대체 뭘 더 어떻게 죽여야 그런 검이 나오냐고"
세렌은 오크 무리 속에 뛰어들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오크는 백이 몰려와도 세렌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우와 저 여자 완전 사신이야."
"마교의 사람은 다 정도로 괴물인 거냐?"
"소드 마스터가 울고 가겠네. 사람이 어떻게 저런 괴력을 낼 수 있는 거지?"
"가냘픈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냐고."
그때 세렌이 고함이 들려왔다.
"재료가 떨어져 간다. 뭣들하고 있는 거냐? 어서 더 몰아 와."
"브라이트 이거 우리가 계속 이 짓을 해야 하냐?"
"몰라, 제럴드 팀장이 단단히 저 여자에게 빠진 것 같은데?"
바실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브라이트 어쩔 수 없잖아? 그녀는 우리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그녀가 아니었으면 우린 그날 밤 모두 죽었어. 목숨을 구해준 값어치는 해야 도리가 아니겠어?"
"어휴. 할 수 없는구먼. 이번에는 확실히 모아 와야지. 자 다들 죽지 말고 열심히 뛰어 보자고."
제럴드와 일행은 다시 오크의 꼬리로 접근해서 난리를 쳤다.
"으아, 달려라."
브라이트는 고함을 치며 다시 달렸다.
"제기랄 이번에는 너무 많아. 너무 많이 붙었다고!"
제럴드는 화가 나서 고함을 쳤다.
"이 미친놈들 적당히 해야지 너무 많잖아!"
"달려 달리라고 많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도망치겠지."
이번에는 제대로 뿔이 난 오크가 수백 마리 이상 달라붙었다. 계속 치근대는 것이 귀찮았는지 거지는 오백에 가까운 숫자가 한꺼번에 쫓아 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세렌은 아예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제럴드는 고함을 쳤다.
"이번에는 안돼요. 너무 많아요. 도망쳐야 합니다. 숫자를 봐요."
세렌은 오히려 바이올렛을 더욱 움켜 쥘 뿐이다.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좋아. 그래야 내 검이 무엇인지 알아 낼 수 있어."
"저런!"
브라이트와 크림슨은 뛰다 말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일인이 상대할 수준이 아닙니다."
이미 세렌의 검은 오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눈앞의 오크를 쪼개버린 세렌은 마음 목표를 향해 날았다.
수많은 오크의 무리. 역겨운 입 냄새. 분노에 찬 새까만 눈동자들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손에 들린 무식한 도끼가 바람을 일으킨다. 누군가 세렌을 향해 녹슨 도끼를 던졌다.
피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날아오는 도끼를 바이올렛으로 쳐냈다.
"와라"
궤적이 어지럽고 난해하다고 생각했다. 우아하고 아름답고 선이 고운 검법이 아니다. 추악하고 추잡스럽고 어지럽고 난해한 검이다. 오크는 베이는 것이 아니고 찢기고 있었다. 검을 휘둘러 베는 것이 아니고 난도질해대는 것 같다.
제럴드는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그렇게 느꼈다. 점점 그녀 주위로 오크가 밀려들어 왔다.
그녀의 검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이제는 오크의 검과 같이 느껴졌다. 격식도 없고 궤적도 없었다.
그녀는 무의식에 가깝게 검을 휘둘렀다. 아니 의식은 완전히 천마수라검에 잡혀 있었다.
"제길, 그녀가 위험해 도와줘야지 뭣들 하는 거야?"
제럴드는 검을 뽑아 들고 세렌을 포위하고 있는 오크들의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내공도 숙달된 검법이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오성의 오라 블레이드로 오크를 내려지는 것뿐이다.
"제럴드 팀장이 자살하려는 건 아니겠지? 저런 미친 짓을!"
네 사람은 입만 떡 벌리고는 오크 무리 속에 홀로 뛰어드는 제럴드를 바라만 봤다.
"돌았나? 혼자서 수백을 어떻게 상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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