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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탕 님의 서재입니다.

자수성가 했는데 빙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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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탕
작품등록일 :
2024.02.21 15:08
최근연재일 :
2024.04.0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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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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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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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9. 얼어붙은 장미

DUMMY

#039화






한 달 전.


“이상, 극지에서 온 지원요청입니다.”


언제나처럼 암막으로 가려놓아 어두운 헤렌디아의 알현실.

그곳에서 보좌관은 황제 라이오넬 헤렌디아에게 극지에서 날아온 서신을 보고했다.

그리고는 황제를 바라본다.

언제나처럼 왕좌에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라이오넬 헤렌디아.

이미 2대째 황실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 특유의 무감정한 모습은 전대 황제인 제 아버지와 똑 닮았다.

분명 어렸을 적엔 좀 더 밝고 혈기왕성했지만,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고 제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제 아비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전대 왕들이 그랬듯 세계의 가호를 받아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얼마 안 가 대륙 최강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검으로나 마법으로나 그를 당할 자가 없는 것이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자신을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쯤 일도 아니겠지.

대륙 최강쯤의 괴물이라면 오히려 감정의 고저가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저런 자가 모든 일에 일일이 감정의 기복을 보인다면 지금쯤 이 황실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테니까.


“그 서신을 보낸 자가 누구라 했지?”

“라스테일의 후계자, 이든 라스테일입니다.”

“이든 라스테일?”


황제의 눈썹이 까딱인다.

보좌관은 내심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무료하게 보고를 듣던 라이오넬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것이다.


“백 년, 벌써 백 년이 되었나. 지난번엔 루테란의 개가 어련히 알아서 막아낸 모양이다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라이오넬.

보좌관은 라이오넬이 극지에 백만의 마물이 남하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밖으로는 꺼내지 않는다. 그의 행동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지원을 보내도록 하라.”


게다가 이 말도 안 되는 요청에 응해주는 라이오넬 헤렌디아.

보좌관은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의 말에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그러면 200만의 병력을···.”

“아니, 20만이다.”

“···예?”


보좌관은 이번에야말로 참지 못하고 의문을 표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다.

마주치는 무감정하고 차가운 눈.

보좌관은 이내 화들짝 놀라며 다시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20만이라니.’


물론 극지에 백만이나 되는 마물이 내려올 거라는 허무맹랑한 소리에 지원병력을 보내주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원병력을 보낸다는 것은 이 보고를 믿는다는 것.

그렇다면 최소한 상대 전력의 두 배인 200만의 병력은 보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1할밖에 안 되는 20만을 보내라니.

보좌관은 황제의 어중간한 대응이 의아했다.

극지의 병력과 합쳐도 마물의 군대는 세 배나 된다.

이런 병력차라면 극지는 결국 무너질 텐데···.


“마물은 남하한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보좌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깟 극지, 무너져도 그만이지.”


무너져도 그만이라니.

백만의 마물이 밀고 들어오면 아무리 강대국인 헤렌디아라도 손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국내가 혼란스러워질 것이 자명했다.

황제는 절대 우둔하지 않다.

검과 마법은 물론 역사와 지식, 통치에 관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극지가 무너질 경우 발생하는 손실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보좌관은 조용히 숨을 삼킨다.


그는 어디까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짐은 흥미가 생겼노라.”


보좌관 제 귀를 의심하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모든 일에 무료해하던 황제의 입에서 흥미라니.


그리고 이번엔 제 눈을 의심했다.

항상 무표정으로 고수하던 황제의 입가가 스산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번에 알 수 있겠지. 시간 속에 스러져가는 무수한 범인 중 하나일지, 세상을 뒤틀만한 인재일지.”


***


“황실에서 파견된 병력은 기마병, 중장보병, 궁병, 창병, 보병, 마법병 15만, 교황청에서 신관 5만을 포함해 총 20만의 병력 지원을 명하셨습니다.”


작전회의실에서 겁나 번쩍거리는 금빛의 갑옷을 입은 남자가 절도 있게 지원 내용을 보고한다.

차분한 금발의 머리칼, 나보다 몇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남자.

아직 젊은 나이지만 사자가 새겨진 황금색 흉갑은 황실 기사단을, 어깨 갑옷에 매여진 붉은 견장은 그 기사단장을 의미한다.


“고맙습니다, 카르보 경. 큰 힘이 되겠어요.”

“아닙니다. 마리 공녀님. 공녀님 같은 아리따운 여걸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아··· 예···.”


황실 기사단장 카르보는 느끼한 멘트와 함께 과장된 제스처로 마리에게 답한다.

마리는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히며 난색을 표한다.

하지만 익숙한 듯 마리에게 윙크를 날리는 카르보.

마치 버터 사이에 마요네즈 바른 치즈를 끼워 먹는 기분이다.


“아무리 그래도 20만은 너무 짠데. 난 200만까진 아니어도 100만 정도는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든, 그게 무슨 무례한 태도냐.”


나는 마리의 핀잔에 볼을 긁적이며 창밖을 바라본다.

카르보처럼 금빛의 갑옷을 걸치고 있는 황실 기사들을 포함해 20만의 병사들이 각자 정비를 하고 있다.

물론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시기에 외면해 버린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게 병력을 지원해 준 건 고맙지만 20만은 너무 짜다.

솔직히 반역자로 낙인찍혔던 아르웬의 시체를 넘겨준 적이 있으니, 지원군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20만이라니,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카르보, 황실 기사단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반갑구나!”

“브라이언님! 이럴 수가! 라스테일 공작령에 계실 줄 알았는데 극지로 오셨군요!”


그때 회의실로 뒤늦게 들어온 브라이언이 카르보와 반갑게 인사한다.

으흠, 생각해 보니 서로 아는 사이일 수밖에 없구나.


“십여 년 전 저와 함께 이 극지에서 마물을 토벌하던 수습기사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했는데, 지금은 황실 기사단장까지 되었군요.”

“카르보 경이 극지에요?”

“네, 그렇습니다. 설원의 꽃처럼 아름다운 마리 공녀님. 물론 제 의사는 아니었고 제 스승님께서 저를 수련시키기 위해 끌고 왔던 거지만 말이죠. 이렇게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롭군요!”


역시 과장된 몸짓으로 눈썹까지 까딱이며 대답하는 카르보.


“그러고 보니 티리안은 아직 소식이 없나?”


브라이언의 질문에 방금 전까지 텐션이 높았던 카르보의 표정에 그늘이 진다.


“예, 그렇습니다. 스승님께서 반역이라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렇군. 괜한 걸 물어봤네.”

“티리안이라면 설마 그 검제 티리안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유리가 상기된 표정으로 일어나며 묻는다.

그런 유리를 바라보는 카르보. 얼굴에 졌던 그늘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예, 맞습니다. 제가 바로 검제 티리안의 제자, 카르보입니다. 아리따운 숙녀분. 혹시 존함을 여쭈어도 될런지요?”


카르보는 유리에게 다가가며 부담스러운 제스처로 답한다.


“아, 네, 저는 이든 라스테일님의 호위기사 유리예요.”

“호위기사? 오오, 이 가냘프고 여린 손으로 힘겹고 고된 검의 길을 택하시다니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흘겨보는 카르보.

뭔가 그 표정이 복잡 미묘하다.


“네? 네! 감사해요! 제가 존경하는 검제, 티리안님의 제자라니! 반가워요!”


검의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어도 이 대륙에 사는 사람이라면 검제 티리안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다.

소드마스터이자 대마법사의 칭호를 갖고 있는 황제조차 검만으로는 티리안을 이길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 스승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건 위험합니다, 레이디. 반역자가 되어 쫓기고 있는 신세이니까요. 게다가 오른팔이 잘렸으니, 아마 더 이상 검제라는 이름도 과거의 영광으로만 머물겠죠.”


씁쓸하게 대답하는 카르보.

그럴만하다.

검제 티리안은 황제의 유일한 핏줄인 황태자를 납치한 죄로 현상수배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고, 티리안은 오른팔이 잘린 채 황태자와 함께 행방불명.

물론 황실에서는 황태자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티리안님의 제자인 카르보께서 합류했으니, 앞으로 닥칠 전투에 대한 걱정도 한 시름 덜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것에 대해 여쭤볼 게 있는데, 정말 극지에 백만의 마물이 남하할 거라는 게 사실입니까?”


카르보의 말에 마리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몇 개월 전부터 마물이 급증했고, 두 달 전엔 3만의 마물 출현. 게다가 그 후 10만의 켄타우로스들을 전멸시켰다고요?”


카르보의 얼빠진 표정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마리공녀님.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전략까지 뛰어나시군요!”

“저, 저는 한 게 없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표정으로 양손을 휘휘 내젓는 마리.


“하하하! 겸손하시기까지 하시군요!”

“저, 정말입니다. 전 켄타우로스 토벌 작전에 조금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카르보는 마리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마리 공녀님이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소식을 들어서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 작전은 누가···?”


그러자 마리가 나를 바라본다.

카르보의 시선은 마리의 시선을 따라 나에게 꽂힌다.


“이, 이든 라스테일님···?”

“예, 그런데요?”


카르보의 표정은 ‘저 망나니가 작전을 세웠다고?’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든이 망나니라는 사실은 헤렌디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눈치는 있는지 굳이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는 듯했다.


“아무튼, 지금 병력은 지원군이랑 저희 병력까지 합쳐 30만이 안 되는 상황이네요.”


나는 천천히 일어나 카르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마 곧 내려올 병력은 저희가 켄타우로스를 선제공격해서 그 수를 줄였다 해도 90만일 거예요.”


게다가 그 마물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까지 있으니 여전히 불리한 건 변함이 없다.


“아마 다른 귀족들은 지원이 올 것 같지 않고···. 불리한대로 전투를 치러야 할 상황인 것 같네요. 어쨌든 저는 저희가 가진 것들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입니다.”


나는 그 수적인 불리함을 어떻게 대처할지 지도를 보며 설명했다.


“첫째, 기마병들의 기동력을 최대한 살려 게릴라전을 펼칠 겁니다.”


한 달 뒤까지 최대한 마물의 수를 줄여보자는 판단이었다.

속도전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켄타우로스가 전멸했으니, 기병들을 활용하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을 터였다.


“둘째, 극지 성벽 앞에 거대한 성벽을 또 올릴 거고요.”


물론 그냥 성벽을 건축하는 건 한 달로 턱없이 부족하지만, 로즈를 포함한 마법사들이 힘을 합친다면 시간 안에 얼음으로 된 장벽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 전투에서 어떻게 이를 이용할지에 대해 설명했다.

필요한 건 훈련뿐이 아니다.


‘나는 공작령을 출발하기 전부터 이 때를 위해서 준비해 왔다.’


피터에게 맡겨둔 포션 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물자를 끌어올 수 있었다.

식량은 물론, 전투에 필요한 마공학도구를 아이론포트에서 수입해 올 수 있었다.

다행히 내 작전 브리핑이 끝난 후, 딱히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지휘관인 마리가 수긍하니 모두들 별말 없이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계획이 진행되고, 마지막 한 달이 지났다.


***


특별할 것 없는 개인 집무실.

나는 지금까지의 계획이 잘 진행되었는지 자리에 앉아 검토 중이었다.

현재 병력은 극지의 병력, 자원병, 황실의 지원군까지 합쳐 총 30만이 되었다.

한 달 동안 극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게릴라 전을 통해 몬스터의 수를 줄여나갔다.

로즈의 마법과 꾸준히 상인 길드를 통해 공급받고 있는 마공학 폭탄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며 꽤 많은 몬스터들을 죽였다.

아마 계산대로라면 상대의 병력은

80만이 조금 안 되는 수까지 줄었을 것이다.


‘게다가 임시 장벽도 완공됐고···.’


로즈와 황실 마법병들의 마법으로 얼음벽을 쌓아 올린 것이기에 ‘완공’이란 말이 맞지는 않지만, 어쨌든 기한에 맞춰 세울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내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리하다.

수적인 차이가 지나치게 컸다.

이 병력을 뒤집어엎으려면 내가 세운 작전들이 모두 잘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운도 따라줘야 했다.

어쨌든 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했다.

이젠 내가 만든 세상과, 그럼으로 인해 알고 있는 지식을 믿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른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본다.

루테란을 상징하는 세계수 가지 문양이 새겨져 있는 금색 반지.

이 반지는 할리의 일기장 옆에 고이 놓여 있던 것이다.

잠시 내가 빌려도 되겠냐는 부탁에 다행히 로즈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아이템 정보

<희생의 고리>

◇ 아이템 구분 : 아티팩트

◇ 등급 : S

◇ 아이템 설명 : 대현자 스론이 제작한 마법이 깃든 반지. 시전자의 생명력을 마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근력과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듯, 마법도 이론과 지식이 뛰어나도 마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결국 반쪽짜리라고 할 수 있다.

로즈를 키워왔던 할리는 이런 부류의 열등생이라 볼 수 있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뛰어나지만 스스로가 품을 수 있었던 마력의 그릇이 일반인보다도 못했으니까.

그토록 재능이 없던 할리가 백 년 전 마물의 대군 대부분을 홀로 격파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희생의 고리 덕분이다.

완성되지 않은 대마법을 보다 큰 규모로 펼쳐야 했으니 막대한 양의 마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할리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관건은 로즈가 할리의 대마법을 완성시키는 것에 있다.

물론 100년 동안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로즈는 혼자 대마법을 펼칠 역량이 안된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


끼익.


그렇게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집무실로 들어온다.

내 방에 노크도 하지 않고 그냥 들어오는 사람은 이 극지성에 한 명밖에 없다.


“로즈. 무슨 일이야?”

“공기, 수상해. 마력, 움직이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즈를 바라보았다.

로즈는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할아범 반지, 쓸 거야?”


로즈의 말에 반지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금방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반지를 쓸 일은 없어.”

“응, 안돼. 그 반지, 나, 싫어.”


로즈는 이 반지가 없었다면 할리가 혼자 몬스터에게 맞서는 무모한 일을 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절대선의 성향인 할리라면 반지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맞섰겠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 역시 이 반지를 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목표는 멸망을 막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든, 여기서 계속 살아가든, 내 귀한 수명은 단 1초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쪽은 어때? 마법, 완성시킬 수 있겠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든의 이야기, 도움이 됐어.”


라크리모사의 탄생 비화를 말하는 것 같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래도 가닥을 잡은 것 같아 다행이다.


***


장벽으로 올라가 분위기를 살핀다. 대부분 병사들은 굳은 얼굴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진짜 몬스터들이 올까?”

“난 윗분들 생각을 잘 모르겠어. 정말로 백만이나 되는 몬스터들이 내려온다는 게 사실일까?”

“그래도 얼마 전 켄타우로스 때를 생각하면···.”


물론 개중에도 아직 이 반신반의하는 병사들도 있는 모습이었다.


“아직 움직임은 없나?”

“아, 이든. 그런 것 같다.”


장벽의 한쪽에서 마리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평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우리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본다. 마리는 여전히 지평선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그도 그럴게, 옛날의 넌 엉망이지 않았는가. 그런 부분에서 네가 후계자의 그릇이 못 된다고 생각했지.”

“으흠, 그러셨고만.”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딱히 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너를 보고 있으면 그냥 이대로 네가 후계를 이어받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엥? 무슨 소리야?”


예상치 못한 마리의 말에 잠시 나의 귀를 의심한다.


“지금껏 가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다. 전략 전술은 물론 지휘 통솔에 관해서 열심히 공부했지.”


이제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나를 바라보는 마리.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 호위기사를 잃던 그날, 네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그와 함께 전사했을 것이다. 아니, 살았더라도 더 이상 이곳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아닐걸?”


나는 마리를 안다.

마리는 몰려오는 백만의 마물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병력을 통솔하다 장렬히 전사한다.

자신은 아직 모르고 있는 듯 하지만, 마리의 전략과 전술은 그 과정에서 빛을 발한다.

고작 일만도 되지 않는 병력을 이용해 그 20배에 달하는 마물을 사살한다.

그녀의 입장에서 백만의 몬스터 남하는 예기치 못한 사고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만한 활약을 보이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나는 입장이 다르다.

아르웬의 유지를 잇게 된 이후 줄곧 이 몬스터 남하를 위해 준비해 왔다.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활용해 반년 가까이 준비해 온 입장이다.

물론 갑자기 나타나서 모든 일을 착착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마리로선 회의감에 들 수도 있겠지만, 라스테일의 후계자는 마리가 되어야 했다.

전쟁을 바로 앞에 둔 지금, 마리에게 큰 심경의 변화를 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 함구했지만 아무래도 미리 말을 해줘야 할 것 같다.


“사실 할 말이 있어. 내가 예언자 아르웬을 넘기는 대신 황실과 거래한 게 있거든.”

“거래?”

“응, 그게 뭐냐면···.”


댕! 댕! 댕!


그때, 비상 상황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나와 마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지평선 위로 자욱이 올라오는 새하얀 눈먼지.

그 위로 무수한 하얀 물체가 비행하고 있다. 하얀 피막의 날개를 펼친 저 비행물체는 아마도 겨울 박쥐일 것이다.


“정말··· 시작됐군.”


마리의 목소리가 떨린다.

지평선으로 수많은 몬스터 떼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평선을 덮는 검은 마물의 군세.


‘거대한 해일.’


인간이 세운 성 따위는 단번에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로 마물들은 재해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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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60. 가짜 신 24.04.05 7 0 14쪽
60 59화. 가짜 신 24.04.04 8 0 12쪽
59 58화. 가짜 신 24.04.03 12 0 13쪽
58 57화. 가짜 신 24.04.02 12 0 12쪽
57 56화. 해적 소탕 24.04.01 14 0 13쪽
56 55화. 해적 소탕 24.03.31 10 0 13쪽
55 54화. 해적 소탕 24.03.31 12 0 12쪽
54 53화. 어비스 24.03.30 12 1 12쪽
53 52화. 어비스 24.03.30 11 1 12쪽
52 51화. 어비스 24.03.29 16 1 14쪽
51 50화. 어비스 24.03.28 11 1 12쪽
50 49화. 어비스 24.03.27 12 1 15쪽
49 48화. 어비스 24.03.26 12 1 16쪽
48 47화. 나를 죽여줘 24.03.25 13 0 13쪽
47 46. 나를 죽여줘 24.03.24 12 1 13쪽
46 45. 나를 죽여줘 24.03.24 16 1 15쪽
45 45. 나를 죽여줘 24.03.23 18 1 12쪽
44 44. 폭풍 날개 용병단 24.03.23 15 1 14쪽
43 43. 폭풍날개 용병단 24.03.22 16 1 13쪽
42 42. 얼어붙은 장미 24.03.21 16 2 13쪽
41 41. 얼어붙은 장미 24.03.20 16 1 12쪽
40 40. 얼어붙은 장미 24.03.19 15 1 13쪽
» 39. 얼어붙은 장미 24.03.18 19 1 19쪽
38 38. 얼어붙은 꽃봉오리 24.03.17 17 1 12쪽
37 37. 얼어붙은 꽃봉오리 24.03.17 17 1 17쪽
36 36. 얼어붙은 꽃봉오리 24.03.16 20 1 14쪽
35 35. 미인의 계략 24.03.16 22 1 13쪽
34 34. 미인의 계략 24.03.15 21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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