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에필로그
화양강 변 빌딩 55층.
최도민은 러닝머신의 속도를 늦추고 유리벽 너머에 펼쳐진 화양강의 저녁 정경을 바라봤다.
아침에 한바탕 비가 내린 덕에 하늘의 구름은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다.
이곳에서 멋진 노을을 제법 봤지만, 오늘 노을이 가장 멋질 거 같은 예감이 든다.
옆의 러닝머신에서 걷고 있는 여자가 힐끔 쳐다본다.
운동하는 시간이 겹쳐서 안면이 꽤 있는 여자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쯤? 오늘은 탱크탑 나시에 레깅스를 입어 유난히 몸의 굴곡이 보기 좋다.
최도민은 여자가 딱 기분 좋을 만큼의 빈도로 한 번씩 쳐다봤다.
오늘 저녁은 스케줄이 없지?
대기하고 있는 차 실장은 보내고, 이 여자하고 저녁이나 먹을까?
‘H테크 대표이사 최도민’이라고, 찍힌 명함을 건네면서 말을 걸면, 대개의 여자들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거린다.
이 여자도 분명 그럴 거 같은 예감이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벨소리에 여자가 슬쩍 눈을 돌려 쳐다본다.
여자에게 들릴 만큼의 소리로 받았다.
“차 실장, 무슨 일인가?”
- 사장님, 저 차 실장입니다. 저기 ······ 제가 잘못 판단한 거일 수도 있는데 말씀입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 방, 방금 경찰이 온 거 같습니다.
“뭐! 경찰?!”
- 차 두 대에서 대여섯 명이 쏟아져 내렸는데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얼굴이 하나 있습니다.
“아는 얼굴, 누군데?”
- 일전에 크리스탈 호텔에서 사장님께 무례하게 굴었던 형사 기억하십니까, 그때 무슨 경제 범죄 수사팀에 있다고 했던.”
최도민의 머릿속에서 총소리가 났다.
“알았어, 끊어.”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여자의 눈을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비상구로 향했다.
아니지!
그 자리에 멈칫 섰다.
경찰이 무리를 지어서 왔다는 건 확실한 물증을 잡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왔다면 도주로는 이미 봉쇄됐을 것이다.
헬스클럽에서 체포되다니 꼴사납게 되었군.
이 모습을 찍는 자도 있겠지?
어쩔 수 없어.
하여튼, 추하지 않게, 내 신분에 맞게 의연하게 ······.
두리번거리는 눈에 자판기 앞 테이블이 보였다. 차가운 음료를 느긋하게 뽑아서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꼬았다, 손목에 찬 삼천만 원짜리 시계가 실내 조명에 반짝반짝 빛나게 내놓고.
캔을 따서 음료 한 모금을 넘겼을 때였다.
“아, 총!”
외마디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나는 최도민.
그 순간, 파란색 락카 키가 신의 계시처럼 옆 테이블에 있다. 누군가 테이블에 앉았다가 두고 간 것이리라.
잽싸게 파란색 락카 키를 낚아채 락카 룸을 향해 달렸다. 복도에 서 있는 여자가 놀라서 피했다.
신발을 신은 채 락카 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락카 룸에는 아무도 없다.
손목에 찬 자신의 락카 키로 8번 락카를 여는 최도민의 손이 급했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경찰이 도착한 모양이다.
8번 락카 문이 열렸다.
다짜고짜 락카 안에 있는 검정 스포츠 백의 지퍼를 잡아챘다.
- 찌이익
열린 지퍼 사이로 최도민이 손을 넣어 꺼낸 것은 검정 파우치. 금박으로 테두리를 두른 가죽 파우치로 정중앙에는 역시 금박으로 영문자 H가 새겨져 있다.
바지 주머니에서 방금 자판기 테이블에서 가져온 파란색 락카 키를 꺼냈다.
95번!
“제기럴.”
자신의 락카와는 정반대 출입문 쪽 락카다.
검정 파우치를 팔꿈치 사이에 끼고 락카들 사이로 뛰는데,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한층 가까워졌다. 금방이라도 락카 룸 문이 벌컥 열릴 것만 같다.
95번 락카에 키를 꽂아서 돌렸다.
열린 락카 문 뒤에 누구 것인지 모를 셔츠와 청바지.
개켜져 있는 청바지 밑으로 검정 파우치를 급하게 밀어 넣었다. 파란 색 락카 키를 안에 던져 넣고 락카 문을 닫는데, 거의 동시에 출입문이 열렸다.
- 벌컥,
"락카 룸은 제가 조사하······."
출입문을 연 자와 최도민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옆머리를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 남자다. 스포츠머리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잠시 능글능글 쳐다보더니 입가를 손등으로 쓱 훑었다.
스포츠머리가 몸을 돌려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용의자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
“H테크 최도민 사장님 맞으시지요?”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스포츠머리를 따라서 남자 서넛이 락카 룸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인상이 형사스럽다.
형사들을 헤치고 키 크고 마른 남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차 실장이 알아본 자다.
“이렇게 또 뵙습니다. 저번에 소개 드린 화양경찰서 경제 범죄 수사팀 조현일입니다. 최도민 씨를 횡령과 배임 및 폭행 교사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
최도민은 팔짱을 끼고 조현일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옷 갈아입을 시간은 있겠죠?”
“원하시면 샤워할 시간도 얼마든지.”
“샤워까지는 뭐. 땀 나는 운동 전이라서.”
최도민은 신발을 벗고 락카 룸 안쪽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온 스포츠머리가 8번 최도민의 락카가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최도민이 옷을 갈아입는 내내, 락카와 최도민을 번갈아 보며 의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세미 정장으로 갈아입고, 락카 룸 밖으로 나온 최도민을 형사들이 에워쌌다.
헬스클럽 복도와 카운터, 운동 기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힐끔거렸다.
최도민은 눈을 들어 CCTV를 찾았다. 복도 천장 구석에 있는 CCTV가 락카 룸 출입문을 비추고 있다.
손목 시계 바늘은 7시 5분.
95번 락카를 사용하는 자가 파우치 안에 든 총을 발견하겠지.
총을 경찰에 신고할까?
그러지 않길 바랄밖에.’
“저, 잠깐만요.”
카운터 여자가 어색한 미소로 최도민 일행을 멈춰 세웠다. 최도민이 깜빡 잊었다는 제스처로 8번 락카 키를 여자에게 건넸다.
“수고해요,”
락카 키를 받아드는 카운터 여자의 손이 유난히 하얗다.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최도민은 돈을 늘 넘치게 주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어렵게 구한 총인데, 한 번 쏴보지도 못했네, 제길.
아니지 ······
총을 발견한 자가 신고하지 않고 몰래 가지고 나간다면?
내가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경찰에게 들키지 않는 거고,
CCTV를 확인해서 쫓으면 총을 되찾을 수 있는 거 아냐?
유난히 옆에 바싹 붙어있는 스포츠머리에게 최도민이 물었다.
“저기 하나만 물어봅시다. CCTV 녹화 기간은 대개 얼마쯤 됩니까?”
“CCTV 녹화 기간? 끌려가면서 그게 왜 궁금하실까? 이유를 말하면 내가 알려주지.”
“별 것도 아닌 걸 같고, 비싸게 굴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스포츠머리가 최도민의 등을 신경질적으로 밀쳤다.
- 작가의말
영진의 락카에 총이 들어있었던 이유....
감사합니다. 행복한 나날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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