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발포
와인 냉장고와 술 냉장고에 고급술이 빼곡하게 들어있는 방.
그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힘없이 앉아있던 진주가 벌떡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사내가 쓰윽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내의 목덜미와 어깻죽지에 그려진 뱀 문신.
진주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혀로 내 뺨을 핥았던 자다.'
다가오는 뱀 문신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의자 뒤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사내는 빙글빙글 웃으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훔쳤다.
“표정을 보니까 나를 알아본 거 같네?”
진주는 몸서리를 쳤다.
“내가 뭐라고 했어. 조만간 또 볼 거라고 했지.”
앉았던 의자의 모서리를 단단히 잡았다. 여차하면 뱀 문신을 의자로 막아야 하니까.
“구면인데 반갑지 않은가 보네. 제길, 나만 반가운 거야?”
육봉은 똥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진주의 모습이 귀여웠다. ‘으헉!’, 하고 소리치면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을 게 분명했다. 비실비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맥주 한 병을 더 가지고 올 걸. 창고에 갇혀 있어 잔뜩 목이 마를 테니 맥주를 주면 많이 고마워할 텐데.'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목소리가 너무나 절절했다.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그러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
“뭘 해 줄 거냐고?”
육봉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진주를 이곳에서 빼 줄 힘도 의사도 전혀 없으면서.
그걸 알 리 없는 진주의 눈이 희망에 흔들렸다.
“당장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나중에 꼭 보상해 드릴게요.”
“나중에?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원하시는 게 있어도 여기서는 드릴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나가서 꼭 해 드릴게요. 약속 드려요.”
“글쎄 ······.”
말끝을 흐리며 육봉이 천천히 다가갔다.
진주는 의자 모서리를 집고 있던 손을 떼고 뒷걸음질쳤다.
“근데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건 꼭 나중에만 줄 수 있는 건 아니야. 여기서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거야.”
“여, 여기서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여기서도 줄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너라고.”
진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솔직히 너 같은 여자, 강제로 하는 게 뭐가 어렵겠어. 근데 강제로 하면 울고불고 시끄럽고 영 재미가 적더라고. 그걸 즐기는 놈들도 있지만 난 별로였어. 어때, 적극적으로 해 주면 내가 여기서 꺼내줄게. 내가 약속해.”
“미, 미쳤군요.”
겁에 질려 떠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육봉은 진주를 안고 싶었다.
진주의 뒷걸음질이 술 냉장고에 막혔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여자 자존심, 그딴 거 개나 줘 버려. 자, 생각을 해 봐. 넌 어차피 나한테 당하게 돼 있어. 강제로 당하느냐 아니면 나랑 즐기느냐. 이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근데 나하고 즐기면 내가 틀림없이 여기서 널 빼 준다니까.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당신도 사람이야?”
증오와 조롱이 섞인 진주의 말에 육봉의 표정이 굳었다.
순간, 육봉의 커다란 손이 진주의 가녀린 목을 잡았다.
진주의 머리가 술 냉장고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럼 사람이지. 니 눈엔 내가 뭘로 보이는데?”
잡은 손으로 힘껏 목을 조이면서, 육봉은 진주의 얼굴에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주는 두 손을 들어 목을 조르는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 컥!
호흡 곤란에 울컥 경련이 일었다. 눈앞이 빙글 돌았다. 버둥거리는 두 손에 힘이 쭉 빠졌다. 숨이 모자라 얼굴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마침내 진주의 눈이 흰자위를 보이며 풀리는 순간, 육봉의 손이 조르고 있던 목을 놓았다.
스르르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는 진주의 몸을 육봉이 받쳤다. 축 늘어진 진주의 몸을 육봉이 품에 안은 것이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진주의 향기에 또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수많은 여자들을 품에 안았지만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울렁거림.
육봉은 무조건 이 여자를 가져야겠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진주의 목에 입술을 비볐다. 연하고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살의 감촉이 좋았다.
“으악!!!”
숨이 돌아온 진주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다리 수백 개 달린 벌레가 목에 기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주의 몸을 안고 있는 육봉의 몸은 강철이었다.
“흐흐흐흐 ······.”
기괴한 소리를 내며 육봉의 입술이 목덜미를 지나 아래로 아래로 진주의 봉긋한 가슴을 더듬었다.
“으아아악!!!!”
안간힘을 쓰며 육봉의 몸을 밀쳐냈지만, 욕망에 달궈진 입술은 젖가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려는 진주의 처절한 몸부림과 육봉의 육체적 탐욕이 뒤엉켰다.
그 모습이 육봉의 뱀 문신 때문에 마치 진주가 뱀에게 휘감긴 것 같았다.
“으아악!!! 제발!! 제발!!!!”
진주의 절규,
- 쾅!!!
동시에 창고 문이 큰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이 새끼들, 들어오지 말라니까!”
육봉이 진주의 젖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떼며 휙 고개를 돌렸다.
‘응? 뭐야?’
창고 문을 막아선 자가 낯설었다.
육봉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 더러운 몸뚱아리 당장 치워.”
영진의 섬뜩한 목소리가 창고 안에 울렸다. 손에 들고 있는 총으로 당장이라도 육봉을 쏠 듯이 노려보면서.
“여, 영진아!”
진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황을 파악한 육봉이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아하, 이 여자 구하겠다고 온 거야? 아주 뒈지려고 작정을 했구만.”
“움직이지 마. 이걸로 널 죽일 수도 있어.”
“말하는 걸 보니까 가짜 총은 아닌 모양이네. 그렇게 탐나는 걸 넌 어디서 구했대?”
“마지막 경고야. 여자에게서 떨어져.”
“병신 새끼. 총 쏠 용기는 있냐? 너나 그 총 내려 놔. 새꺄. 이년 살리고 싶으 ······.”
육봉의 손이 다시 진주의 목을 낚아채는 순간,
- 피슉!
허공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
“악!!!!!!!!!!”
뼈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시뻘겋게 달궈진 쇠가 다리를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육봉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으아아아아아 ······”
육봉이 피가 솟구치는 다리를 붙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넋이 나간 진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그 광경에 벌벌 떨었다.
“학생! 빨리!”
열린 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신철이 영진을 향해 소리쳤다.
영진이 진주에게 뛰어갔다.
“진주야, 이제 괜찮아. 여기서 나갈 거야.”
놀라서 턱까지 떨고 있는 진주의 두 손을 영진이 감싸쥐었다.
진주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걸을 수 있겠어?”
진주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흥건한 피를 피하며 영진이 진주를 데리고 나갔다.
육봉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창고를 울렸다.
“괜찮아. 괜찮아, 진주야.”
영진이 진주의 어깨를 감쌌다. 신철이 쓰러뜨린 깡패 둘을 보고 진주가 움찔했기 때문이다.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꾸물거리는 깡패 둘을 피해, 신철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주차장으로 나가 차를 타고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서두르라는 신철의 손짓에 계단을 내려가는 영진과 진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문에 달린 도어 록이 눈에 들어왔을 때,
“거기 서!!!!”
그 소리에 세 사람이 동시에 계단을 올려다봤다.
계단 중간에 서서 남자 둘이 소리치고 있었다.
신철이 재빨리 몸을 돌려 도어 록 버튼을 눌렀다.
- 1, 8, 3, 7.
- 띠리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먼저 나가서 차에 타!”
신철이 건네는 차 키를 받아든 영진이 진주의 손목을 끌었다.
신철이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남자 둘을 힐끗 보고 낫 모양 무기를 치켜들었다.
- 깡!!!
쇠와 쇠가 부딪치며 스파크가 번쩍였다.
단 한 방에 도어 록 버튼이 깨졌다.
“거기 서!!!”
마지막 계단을 내려온 남자 둘이 몸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신철이 주차장 문을 꽝 닫았다.
- 띠리링.
문 잠기는 소리.
다행히 도어 록 버튼만 깨지고 잠금 장치는 작동이 되었다.
- 쾅, 쾅, 쾅, 쾅, 쾅 ······
문 뒤쪽에서 부서져라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철문은 견고했다.
신철이 검정 에스유브이의 운전석에 뛰어 올랐다.
풀 액셀.
바닥을 미끄러지는 타이어 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 끼이익, 끼이익.
검정 에스유브이가 출구를 향해 급커브를 돌아 달렸다.
신철은 물론 보조석에 앉은 영진, 뒷자리의 진주의 몸이 좌우로 심하게 쏠렸다.
출구 팻말을 지나 지상으로 주차장 통로를 올라가는 엔진 소리가 요란했다.
- 와아아앙 ······.
좁은 오르막길인데도 신철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타이어 마찰음.
느낌 상 주차장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
“앗!!!”
- 끼이이이이익!!!
반사적으로 신철이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았다.
갑자기 차가 서는 바람에 진주가 앞좌석 시트에 몸을 부딪쳤다.
검정 세단 두 대가 주차장 출구를 가로로 막고 있었다.
그 주위로 늘어선 조폭들 ······.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즐거운 일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