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무와 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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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으로 조금 넘어갈 뻔했지만, 아직은 내 복수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여전히 어린 노아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침대까지 따라와서 엉겨 붙는 노아를 진정시키고, 며칠을 폐인처럼 같이 뒹굴 거리면서 보냈다.
드디어 나의 작위 수여식의 날이 밝았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늦은 아침, 나는 늦잠 자고 있는 노아를 깨웠다.
“노아. 일어나야지..”
“무으으읏! 알고 있느니라.”
늦잠꾸러기 노아가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그리고, 까다로운 노아의 코디를 받은 옷을 입고 마차에 올랐다.
“떨리는 게냐? 고룡과도 맞서 싸운 녀석이?”
“하나도 안 떨린다.”
하지만, 내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작위를 받는 것이 아니라, 드디어 적들의 실체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어서였다.
“후훗~! 좋느니라! 본 녀도 녀석들의 낯짝을 보고 싶은 게야!”
노아는 실종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동안, 노아가 죽었으니 가주를 바꿔야한다고 감놔라 배놔라했던 공작들이 있는 곳으로 우리는 가고 있는 것이다.
흰색 타일과 금색 장식으로 빛나는 궁전에 도달했을 때, 나는 그제야 떨림이 멎고 현실이라는 것을 마주보기 시작했다.
“···이에 하늘의 신들과 땅의 신, 그리고 그 대표인 나 국왕 제임스 칼라힐 3세의 이름으로 그대들의 서임과 승작을 공표하노라.”
근엄한 국왕이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승작식을 대주교의 입회하에 진행했다.
50대의 비교적 젊은 국왕 제임스. 금색의 수염과 금발이 어울리는 그야말로 왕이라는 외모의 인물이었다.
왕가는 수백 년전 영웅 칼라힐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작은 도시 국가들의 연합으로 출발했었다. 지금에 와서는 왕가가 군림하는 구조이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도시 국가 가문들의 잔재로 인해 왕권은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대들도 알겠지만, 지금 본국은 마물들의 발호로 인해 어지러운 상황이라네. 그대들의 작위수여식은 향후 마물들의 제거에 더욱 힘써달라는 본 왕의 요청이 들어있으니 앞으로도 힘써주길 바라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같이 승작된 세 명 중, 가장 좌측에 있던 몽테뉴 백작이 우리를 대표해서 국왕에게 다짐을 했다. 몽테뉴 백작은 최근 치러진 제국과의 분쟁에서 대승을 거두어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된 자였다. 몽테뉴 백작은 멋들어진 하얀 수염을 가진 걸출한 무인으로 보였다.
승작식이 끝나고 피로연을 겸한 다과회가 궁전의 연회장에서 치러졌다. 노아는 오랜 부재 후에 귀환해서인지 귀족들에게 끌려갔고, 나 또한 새로 승작된 세 명과 함께 귀족들에게 둘러 싸였다.
“길란 준남작경. 그대의 영웅적 행동은 나 또한 듣고 감명 받았다오.”
백발에 하얀수염을 가진 강골의 귀족 몽테뉴 백작은 여러 귀족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화를 이끌어갔다. 하필 그 대화주제가 나였기에 나는 곤란해 하고 있었지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맞습니다. 지금처럼 마물이 왕국 전체를 삼키려고 하는 때에, 길란경은 백성들과 귀족 모두에게 희망입니다. 수백 마리의 고블린 떼에 홀로 대처해서 모조리 전멸시킨 업적은 저 또한 흠모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같이 승작된 크리스토 자작까지 한술 더 뜨고 있었다. 크리스토 자작은 모험자를 조직해서 작은 마을 몇 개를 삼킨 마물 집단과 도적을 사냥한 공으로 승작한 케이스였다. 노아가 실제 보고를 조금 더 부풀리는 바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지만, 세간에 나도는 소문은 더 한 모양이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오우거 같은 녀석들도 수십 마리를 단칼에 해치우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전 잠시···”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점점 더 부풀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자리를 피해 도망 나왔다. 그렇게 피해 나온 아무도 없는 테라스에는 이미 해가 지면서 드리워진 저녁놀이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다.
“후우··· 귀찮네.”
생각보다 ‘칭찬’을 너머 ‘칭송’을 받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사실 여부도 문제였지만, 그러한 것을 받는 것에는 가슴 깊이 저항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주받은 마물일 뿐이니까···”
나지막이 말하고 있는데, 노아가 옆으로 다가왔다.
“기분이 별로인 게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원래 귀족의 가장 큰 무기는 세치 혀인 게다. 달콤한 말로 구슬리고 뒤에서 푸욱! 하고 찌르는 게 귀족인 게야! 어느 녀석인 게냐? 내 반려의 기분을 상하게 한 녀석은? 단칼에 처형인 게야!”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화를 표현하는 노아를 보고는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아냐, 괜찮아. 그냥 마음이 무거웠던 것뿐.”
노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옆에 있어주었다.
“노아 넌 역시 귀족이더라?”
나는 노아가 귀족들을 상대로 화려한 화술과 언변으로 압도하는 모습에서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귀족 생활을 하루 이틀 한 게 아니니까 당연한 게야.”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가장 가깝게 지낸 노아의 다른 면에 조금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곁에서 보면 아이 같은 외모에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노아였지만, 귀족으로서 노아는 또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수관과 기사단장은 상당히 특이한 것 같더라?”
나는 작위 수여식에서 가장 이질감이 느껴졌던 시선을 보여준 두 명이 기억이 났다.
“나도 그 놈들이 껄끄러운 게야. 게다가 가장 의심스러운 놈들인 게지.”
수관의 시선은 마치 먹잇감을 노려보는 포식자의 눈이었고, 기사단장의 눈은 강렬한 적의로 불타고 있었다. (수관은 총리같은 모든 왕국의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
“기사단장이야 임무 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수관은 확실히 그 놈들과 한패인 것 같은 느낌이던데. 어때 노아? 녀석들을 조사하는 건가?”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 쪽엔 내 충직한 수하들이 염탐 중인 게야. 아직까지는 아무런 결과도 없는 게지만, 길란 너는 할 일이 따로 있는 게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그 추종자들과 싸우기 위해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날 밤 노아는 트리스탄에게 끌려서 자기의 저택으로 갔고, 나는 나의 저택으로 와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출정인 게야!”
노아는 손에 출정명령서를 들고 트리스탄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흠··· 명령서라는 말이지?”
트리스탄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노아의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노아는 트리스탄을 힐끗 보면서 나에게 명령서를 내밀었다.
“마물의 소탕과 영지 복원, 그리고 음?”
“영지 위탁 및 장기 대여인게다! 100년짜리!”
“대여?”
트리스탄이 미소 띈 얼굴로 내 말에 답했다.
“그 지역은 왕국의 서북부 지역으로 원래도 마물의 침입이 많았던 지역이었습니다. 위치는 지난 번 고블린이 대량 발생한 곳으로부터 말을 달려 4일거리입니다. 백작가문을 중심으로 세 개 가문이 지키던 곳이었지만, 이번 마물의 대거 등장으로 마을은 파괴되고 그에 맞서 싸우던 백작가문이 지리멸렬한 상태라고 합니다. 물론, 고룡도 때려잡으신 길란경이라면···”
“쓰읍! 그건 비밀인 게다!”
노아의 제지에 트리스탄이 살짝 말을 멈췄다가 말을 이어갔다.
“숫자는 많지만, 고룡에 준할 정도의 마물은 없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미 마을은 버려지고 그곳의 영주들도 도주 또는 실종 상태이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길란경에게 100년 정도 위탁을 빌미로 해결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흠··· 혼자서는 아니겠죠?”
나의 말에 트리스탄이 대답했다.
“공작가의 군사를 일부 지원 드리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입은 무거운 자들로 추천하고 대책을 세워드리겠습니다만, 손실은 없게 해주셔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용병은 현지고용하시면 될 듯하니, 그 부분은 대출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살림꾼다운 얼굴로 나에게 다짐을 받아낸 트리스탄은 출정 준비를 하겠다고 노아를 끌고 사라졌다.
“본녀도 같이 가고 싶은 게야!”
“가주님은 할 일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밀린 일이 산더미이십니다. 죄송하지만, 길란경이 돌아오실 때까지 가주님은 제가 맡겠습니다. 3일 뒤 출정부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징징대는 노아는 트리스탄에게 끌려서 사라졌다.
나도 힐버트에게 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채비를 갖추었다.
적어도 반년 정도는 걸릴 정도로 예상하고, 먹을 것과 장비, 소모품을 갖추고 보니, 마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는 되었다.
“가즈,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아닙니다. 가주님. 저희의 가장 기본 업무는 가주님의 시중을 드는 것입니다. 저도 간단하게 자기 몸은 지킬 수 있고, 이 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즈와 두 메이드 제인과 엘렌이 일행으로 따라가기로 되었기에 나와 힐버트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 저택에서 출발하기로 되었다.
사흘 뒤, 열 명의 사병차림의 인물들을 공작가의 집사인 앨런이 인솔하고 나의 저택을 방문해왔다.
“앨런, 공작가의 군사들인가요?”
복식이 제각각인 그들은 하나의 군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각각의 제식을 가진 복장이었기에 사병출신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가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공작가의 사병에서 쓸 만하고 입무거운 자들로 선별해서 왔습니다.”
‘흠···숫자는 좀 적은 것 같지만, 다들 꽤 숙련된 자들인 것 같군. 아, 한 명은 좀 어려보이는데, 선별했다고 하니 믿을 만 하겠지.’
나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앨런의 도움으로 사병들의 소개를 받았다.
“이쪽은 케일이라고 합니다. 공작가의 분가 집안 출신으로 지난 고블린 전투에도 참여했던 녀석입니다. 가장 경험이 많은 녀석입니다. 출정 중에는 이 녀석을 통해 명령을 내리시면 될 겁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통해 인사를 나눴다.
“다시 뵙습니다. 길란경. 클라트경과 함께 뵈었는데 기억하시는지요?”
노아 발렌베리의 전령을 수행하던 얼굴이 기억이 났다.
“그 전령의···”
“맞습니다. 그 재수 없던 전령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싱긋 웃는 케일은 상당한 미남이지만 사악한 느낌의 음영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흠흠···”
앨런이 말조심하라는 눈치를 주었지만, 케일은 피식 웃고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재수없는 전령은 어찌되었죠?”
나는 케일과 악수하면서 물었다.
“아마, 고블린의 뱃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공작님을 쫓아 후퇴했지만, 그 자식은 우릴 버리고 도망갔거든요. 파견 왔던 귀족이라서 그런지 참···”
그 소식은 조금 기쁜 소식이었다. 다시 한 번 앨런이 케일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케일은 못들은 척했다.
“이번 원정 저희 생환을 책임져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금발의 가장 어린 사관으로 보이는 라이스는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면서 물었다.
“노아 공작님께 그렇게 약속드렸습니다.”
“저희의 생환은 걱정하지 마시고 임무에 충실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도 길란경을 따라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의욕 가득한 라이스는 다른 사병들이 조금 제멋대로인 느낌인 것과 대조되었다.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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