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땅에서 점점 발이 떨어졌다.
랄이의 꽁지깃이 점점 커지더니 공작이 깃털을 펼친 것만큼 거대해졌다.
오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랄이의 꽁지깃이 크게 살랑일 때마다 오로라처럼 아름답게 일렁이는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삼촌! 이것 빠! 이것 빠! 랄이 꼬리 대따 커어어어!”
보라는 그 와중에 웨건 안에서 하나비와 먹꾸를 양팔에 하나씩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산타 할배가 내 소원을 들어 준 게 분명하다냐···. 랄이가 루돌프가 됐다냐!>
하나비는 감격한 얼굴로 보라에게 머리를 기대며 가는 울음소리를 냈다.
생각해 보니 어젯밤에 하나비가 손을 모으고 한참 동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고양이라도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한가 싶어 방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더 많은 까까나무를 가지게 해달라는 소원을 비는가 보다 하며 내 멋대로 상상하고 피식피식 웃었다.
추측이 완벽하게 빗나갔다. 하나비는 랄이를 위해 소원을 빌었던 것이다.
<나는 랄이가 해낼 줄 알았다옹! 랄이 정말 대댜나다오옹···.>
먹꾸는 울먹거리더니 보라의 무릎에 고개를 푹 묻었다.
“대기야! 여기 좀 봐봐! 와하하! 와하!”
밑을 슬쩍 내려다보니 형은 길 위에 덩그러니 서서 밝은 얼굴로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안경에 김이 가득 서리는 바람에 형의 눈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도 형은 휴대폰을 잡고 뿌연 시야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삼촌 나두! 나두!”
“응! 보라도 삼촌이 찍고 있어!”
태어났을 때부터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그런 이유로 안개지대에서 발견된 아이들의 ‘과’라든가, ‘강’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인간의 기준으로 분류된 것이고, 명명 또한 인간이 지어준 것이다.
랄이는 개새.
개새의 명명은 원래 ‘견조(犬鳥)’.
‘개과’에 속하면서 동시에 공중행동에 유리한 몸, 그러니까 꼬리가 짧게 퇴화한 ‘조강’에 속한다.
전해지는 전설이 있기는 했다.
인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견조가 하늘과 땅을 지키고 있었고,
인간에게 최초로 노래라는 것을 알려준 존재가 견조.
꼬리가 한지붕 밑에 있는 가족을 모두 덮어줄 만큼 거대했고, 자개와 닮은 오색의 빛으로 아름다움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고.
그 아름다운 꼬리는 힘이 워낙 강해서 어떤 새보다도 높이 날아오를 수 있고, 장정 백을 들 수 있을 정도였다는 그런 전설.
녹색 안개지대 동굴에 남아 있는 벽화에서 시작된 전설이다.
누군가 재미로 그려놓은 그림일 수도 있지만, 마수를 좋아하고 그중에서 개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랄이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오오오!”
그런데 랄이가, 높아봐야 우리집 천장 주변을 푸드덕거리던 랄이가 오색의 꼬리를 우아하게 흔들며 5미터 정도 높이로 날아올랐다.
주마등이 스치듯 랄이와의 첫 만남이 번뜩 떠올랐다.
그 연약했던 랄이가 알고 보니 전설 속에서 전해지던 견조였다니.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랄이가 목청을 높여 부르는 루돌프 사슴코를 듣고 있으니 자꾸만 시큰해졌다.
음정과 박자가 모두 제멋대로였지만 말이다.
견조의 아름다움과 비행 실력은 전설 그 이상이었지만, 인간에게 노래를 가르쳐준 존재라는 부분은 설득력에 어려움이 있었다.
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이나, 그림으로 전해지는 전설은 언제나 일부분은 맞고 일부분은 틀리기 마련이니까.
“랄이 사슴 코는! 매우 빤짝이는 코!”
보라가 랄이를 따라 노래하기 시작했다.
루돌프 사슴코를 들어본 적 없는 보라는 랄이가 부르는 대로 엉터리 음정을 따라 불렀다.
<루돌푸 사슴코뉸 매우 반쨔기는 코!>
하나비도 뒤따라 함께했고,
<많일 내가 봤다옹! 불붙는다 했겠다옹!>
마지막으로 먹꾸도 힘을 보탰다.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개새의 목소리와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고양이들이 “야옹, 야옹!”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루가 지날수록 아이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익숙해지다 보니 어떤 순간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이 특별한 순간에 아이들의 노래를 그대로 들을 수 있음에 감사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랄이는 10분 정도 비행을 한 후에 우리가 처음 날아올랐던 그 자리에 사뿐히 내려왔다.
짝짝짝, 짝짝짝짝짝!
착지하자마자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창문을 열고 구경하던 몇몇 동네 사람들,
파티 도구를 쇼핑백에 한가득 넣고 집 밖으로 나서던 자매 둘,
막 주차를 마치고 내리던 앞집 아저씨,
마지막으로 우리처럼 고양이를 데리고 산책 나온 외국인 한 명.
처음 보는 이웃이다.
아무튼 우리의 순간에 함께하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때마침 내리고 있던 함박눈도 소복하게 땅 위에 쌓였다.
<냐아?>
하나비가 고양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록색 하네스를 멘 회색 고양이가 눈 위로 톡톡톡 자국을 남기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부츠도 신고 있다.
녀석은 내가 입은 것보다 몇 배는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패딩도 입고 있었다.
우리 애들보단 아니지만, 우리 애들만큼 귀여운 고양이였다.
“깜짝 놀랐어요. 정말 쌔나 클로스가 온 줄 알고요.”
하네스 손잡이를 손에 쥐고 있는 외국인이 완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며 활짝 웃었다.
“진짜 대단했어요. 저 이번에 이사 왔어요. 여기 앞에, 장미 맨션. 어? 선생님?”
그는 형을 보고 매우 반갑게 인사했다. 둘은 구면이었다.
외국인 이웃은 자신의 이름을 ‘브랜든’이라고 소개했다.
고양이의 이름은 ‘더스티’. 먼지와 닮은 회색이라 그렇게 지은 듯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얼마 전 브랜든이 더스티를 길 위에서 구조해 보람 동물병원으로 데려왔다고. 더스티는 형에게 중성화 수술을 받고, 자신을 구조해 준 브랜든과 함께 살게 됐다.
브랜든은 사거리 어학원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다며 간단한 자기소개도 덧붙였다.
“환영해요. 우리 동네 정말 좋아요. 이제 아이들 산책하면서 종종 뵙겠네요. 저는 여기가 바로 집이에요.”
“이웃이네요. 이웃사촌.”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외국인 이웃과 악수를 했다.
형은 더스티를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이렇게나 예뻐진 걸 보니 듬뿍 사랑받고 지내는 것 같다며 칭찬을 건넸다. 브랜든은 더스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뿌듯한 얼굴을 했다.
<너도 고양이냐아? 털 색이 나랑 똑같다냐!>
하나비가 브랜든의 붉고 풍성한 수염을 보며 고개를 요란하게 갸웃거렸다.
“삼촌, 지쨔 하나비 말대루 아저씨 고양이 같아!”
브랜든은 보라의 말을 듣고 크게 폭소했다.
그러고는 웨건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하나비와 자신의 수염을 번갈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저씨 고양이처럼 치즈색 수염이야.”
그 말이 커다란 호감으로 작용했는지 보라가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브래드 아저씨! 저는 연보라예요!”
“노 브래드(Bread). 브래드는 빵. 나는 브랜든이야.”
“브랜든!”
“옳지! 잘했어요!”
<아빠, 저거 사람이냐, 고양이냐?>
하나비가 끈질기게 묻자, 나는 조용히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하나비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반가워! 반가워!”
하나비가 웨건에서 내려 내 품으로 안기자마자, 랄이가 주변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주위의 강아지들이 랄이 주변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너도 반가워! 너두! 다 반가워어!”
랄이는 친절하게 모든 강아지들의 머리와 볼을 핥아주었다.
강아지들은 랄이의 꽁무니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자기들과 다른 것을 확인하고는 냄새로 얻는 정보수집은 포기하는 듯했다.
그래도 끝까지 랄이와 “헥헥!” 소리 내며 천사 같은 미소로 서로를 반겨주었다.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거의 끌려오다시피 반강제로 랄이 주변에 서게 됐다.
다들 즐거운 얼굴이었다.
패딩과 부츠를 신은 회색 고양이가 놀라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녀석은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자세히 보니 먹꾸와 좀 닮은 것 같기도.
그때였다.
<엄마옹?>
먹꾸가 웨건에서 내리더니 더스티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그러자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 새초롬하게 딴청을 피우고 있던 더스티가 털을 쭈뼛 세우며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경계가 아니었다. 놀란 것처럼 보였다.
“워, 워. 더스티 진정해.”
브랜든은 말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더스티에게 “워, 워!” 하고 외쳤다.
<막내냐웅?>
더스티가 먹꾸와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다옹! 엄마 맞다옹! 나 막내다옹!>
그때 하나비도 내 품에서 내려와 더스티 주변을 서성였다.
<잘 살고 있었구냐웅! 막내야웅! 우리 막내야웅!>
더스티는 부츠 하나가 벗겨질 만큼 제자리에서 목놓아 울며 먹꾸 등에 꼬리를 얹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모, 나다냐! 나는 몰라 보겠냐아?>
하나비도 옆에서 가냘프게 울음소리를 냈다.
<씩씩한 셋째구냐웅!>
더스티는 하나비와도 아는 사이인 듯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리를 모으고 서로 머리를 사정없이 부벼대는 녀석을 우리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는 사이인가 봐요. 오랜만에 만난 것 같네요.”
나는 내 능력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기보다는 이 상황에서는 적당히 녀석들의 시간을 바라보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혹시 내가 물어봐도 될까요? 애들 어디에서 입양했는지? 혹시 스트릿?”
브랜든이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집에 차쟈와써요!”
보라가 나 대신 씩씩하게 대답하자, 그제야 브랜든은 모든 게 이해된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는 사이일 수도 있어요. 우리 더스티도 스트릿이 고향이니까, 어쩌면 엄마와 아기 이런 관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정확하게 아이들의 관계를 맞춘 브랜든을 보고 더스티가 편하게 지내겠구나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스티는 아이들에게 붙이고 있던 꼬리를 푸르고 제일 먼저 내 앞으로 다가와 기지개를 켜듯 앞다리를 쭈욱 뻗었다.
패딩이 뒤로 당겨지며 쌓인 눈이 목 부근에 닿아 차가웠을 텐데,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아가를 잘 키워줘서 고맙습니다웅···!>
나는 양파를 썰 때처럼 눈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새로운 이웃 앞에서, 그것도 외국인 이웃 앞에서 다 큰 성인 남자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질질 짜면 체면은 물론이고 선입견을 심어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침을 꼴깍 삼키며 감정을 목 뒤로 눌러 넣었다.
“고마워. 고마워.”
그리고 더스티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너의 소중한 아기를 내가 더 사랑해주면서 잘 돌볼게.”
더스티는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을 꿈뻑거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을 알아듣는 겁니까옹?>
나는 고양이처럼 눈짓으로 애정표현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스티는 내게 고맙다는 인사와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며 형에게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조금 전과 동일하게 또 앞다리를 쭉 뻗으며 형에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웅!>
형은 더스티의 머리와 꼬리 앞을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마지막 순서는 보라.
<우리 아기랑 잘 지내주세웅! 인간 아기냐웅!>
고양이가 보기에도 보라는 아기인 모양이었다.
“아라써! 먹꾸랑 하나비는 내 동생이야!”
보라는 축축하게 젖은 더스티의 목을 닦아주며 머리에 애정을 담아 뽀뽀해주었다.
더스티는 살포시 눈꺼풀을 내리며 갸릉갸릉 목을 울렸다.
나는 이렇게 헤어지고 우연을 기약한 만남을 기다리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이웃이 된 것도 인연인데, 언제 한번 저희 집에서 식사하실래요? 초대할게요.”
브랜든은 더스티를 품에 안아올리며 기쁜 얼굴을 했다.
“좋죠. 맛있는 음식 사갈게요!”
우리는 그렇게 새해 전날에 만나서 식사시간을 가지기로 약속했다.
당연히 더스티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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