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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밀크

드루이드 삼촌은 매일이 즐거워

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완결

커피밀크
작품등록일 :
2023.10.20 10:20
최근연재일 :
2024.01.09 22:25
연재수 :
68 회
조회수 :
245,377
추천수 :
10,059
글자수 :
428,500

작성
23.12.01 23:25
조회
3,787
추천
161
글자
20쪽

가족

DUMMY

벽거울에 비스듬히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영락없이 난감한 얼굴이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보라를 타이를 적당한 말을 찾기 위해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골똘해 보였는지 보라가 다시 한 번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치카푸카 내일 열심히 하고 오늘은 안 할래.”


찾았다.

보라를 설득할 말.


“그럼 보라 내일 아침밥은 점심에 몰아서 먹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보라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그건 안 돼···. 그럼 배가 계속 꼬르르륵 울어. 배가 많이 울어서 불쌍해져.”


양치질도 귀찮다고 생략하면 치아 건강이 불쌍해져.

나중에 나이 들어서 고생하게 된단다.

귀찮아서 미룬 건 결국 후불제로 한 번에 몰려오더라.

삼촌이 겪어봐서 다 알아.

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러지는 않았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치카치카는 내일로 미루고, 밥은 안 미루는 거야?”

“밥은 중요한 거니까······.”

“치카치카도 중요해.”


나는 함박스테이크를 잔뜩 먹어 볼록해진 보라의 배를 콕콕 건드리며 말했다.


“치카치카 안 하면 나중에 이렇게 맛있는 밥도 못 먹게 될 수 있어. 그래도 괜찮아?”


보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치카치카를 열심히 하면 치약천사들이 보라 이빨을 지켜주는데, 만일 치카치카를 귀찮다고 안 하면 세균악마가 나타나서 보라 이를 썩게 하거든.”

“앙마? 그럼 내가 혼내 줘야겠다!”


보라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래봤자 주먹밥처럼 동글동글한 귀여운 주먹이었지만.


“그 녀석들을 혼쭐내줄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 치카푸카야.”


나는 앉아 있는 보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일어나서 삼촌이랑 치카푸카 하러 가자.”


보라는 쥐고 있던 주먹을 펼치고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보라야. 오늘 할 일은 오늘 해야 하는 거야. 뭐든지 해야 하는 때가 있어. 미루는 건 나쁜 버릇이야.”


내 말에 작은 고개가 힘차게 끄덕였다.


“알겠어, 삼촌! 치카치카 열심히 해서 세균앙마 다 없애버릴 거야!”


욕실 문을 넘어서기 전.


“근데 삼촌, 나 치카치카 하니까 내일 아침에 밥 먹는 거지?”


참나.

나는 웃음이 가볍게 터져 나왔다.

귀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어찌 됐든 보라는 내가 해주는 요리가 좋다는 거니까.


“응, 그럼. 보라가 치카치카 안 미뤘으니까 아침밥도 아침에 딱 맞게 먹어야지.”


자그마한 칫솔모에 치약을 가지런하게 짰다. 보라의 시선은 치약을 따라 움직였다.


“원래 하나 미루면 다른 것도 자연스럽게 밀리는 거거든. 근데 보라가 안 미뤘으니까 아침밥도 아침에 먹는 거야.”

“좋아!”


키가 작은 보라는 욕실 거울을 보기 어렵다.

그래서 임시로 손거울을 하나 걸어놓았다.

손거울치고는 큰 편이라 보라가 모습을 확인하는 데엔 그럭저럭 괜찮았으니까 훌륭한 임시방편이었다.

보라는 손거울 앞에서 평소보다 더 열심히 양치질을 했다.

나는 욕실 문 쪽에 등을 대고 서서 보라를 보며 흐뭇해하던 중이었다.


“음?”


내 방에 설치된 캣타워 겸 랄이의 쉼터.

뭔가 이상했다.

고양이들이 쉴 수 있도록 만든 해먹이 약간 낯선 모습이다.

하나비나 먹꾸가 올라갔다면 축구공을 넣어놓은 것처럼 불룩 밑이 불룩 나오기 마련인데 그의 반절 정도 되는 불룩함이다.

랄이구나.


나는 랄이가 있는 곳에 가까이 다가갔다.

녀석은 잠이 밀려오는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랄이 졸렸구나?”


내가 손을 뻗자 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를 뒤집었다.


“알겠어, 알겠어. 배 긁어줄게.”


랄이는 몸의 대부분의 털이 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얼굴과 배만 강아지와 비슷한 보드라운 털이다.

그중에서 배털이 유난히 보드랍다.


“끄융······ 뀽.”


랄이가 기분 좋을 때 내는 소리 중 하나.

사람으로 치면 기지개를 켤 때 내는 소리와 비슷한 종류라 하면 되려나.

목소리를 끄는 느낌인데 주로 편안한 기분이 들 때 이런 목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보라가 양치를 끝낼 무렵까지 랄이의 배를 긁어주었다.


“근데 삼촌 나 궁금한 거 있어.”


이부자리에 눕기 전 보라가 물었다.


“뭐?”

“하나비, 먹꾸, 랄이도 이제 양치 해주자!”

“냐아아아아아!”


하나비는 헛소리 말라는 듯이 불만스럽게 울음소리를 냈다.


<불이나 꺼라냐아아아.>


그러고는 동그란 앞발을 웅크려 자신의 눈을 가렸다.


“하나비! 미루면 안 돼! 오늘 할 일은 오늘 해야 하는 거라구!”

<잠 좀 자자냐아아. 너나 잘해라냐아아아아.>


말은 저렇게 하면서 굳이 보라 옆에 가서 자리를 잡는 하나비.

그나저나 이제 하나비랑 먹꾸 칫솔도 장만해야겠구나.

일찌감치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랄이는 개새라서 양치질이 아닌 양치스낵으로 관리한다. 이 건 다주에서부터 일찌감치 해오던 거라 계속 챙겨주고 있었고.


“그래. 이제 하나비랑 먹꾸도 양치하자.”


먹꾸는 자기 이름이 불리니 나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빛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먹꾸도 이리와.”


보라가 반대편 옆자리를 툭툭 치자 먹꾸는 사뿐히 보라 옆에 몸을 웅크렸다.

알록달록한 하루가 포근한 이불 속에서 저물어갔다.


* * *


우다사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최종 선택.

한 여자 출연자의 선택을 받은 연구원.

이제 연구원이 선택을 할 차례였다.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연구원은 모든 출연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에 와서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인연들을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나가서도 인연이 계속 이어지길 바랄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리고 잊고 살았던 감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눈동자가 기대감 혹은 긴장감 혹은 설렘으로 흔들렸다.


“저는······.”


연구원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잠자리에 들면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선택을 하지 않겠습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에 불씨는 생겼지만, 타오를 준비까지는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두들 좋은 인연 만나시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연구원은 자리로 돌아갔고, 다른 출연자들이 선택을 했다.

국영수는 선택을 받기도 했고, 하기도 했으나, 엇갈려서 커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연구원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채희주는 선택을 포기했다.

우다사 안개지대 특집은 한 커플 탄생으로 촬영을 마쳤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가서 맞팔해요. 이래놓고 팔로우했는데 맞팔 안 해주시면 완전 상처.”

“우리 다 연락처는 교환해야죠.”

“나중에 ‘만계’ 나와야겠는데?”

“하루나 이틀 정도 더 촬영했으면 좋았겠는데. 시간이 너무 짧았어.”


다들 안개지대 밖으로 향했다.

커플로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좋았다.

출연진 모두 유의미한 경험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안개지대라는 촬영장소의 특성이 많은 추억을 안겨주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귀여운 마수들과 함께였으니, 웃음이 멈출 새 없었던 힐링 특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개지대를 벗어난 사람들 대부분은 휴대폰부터 꺼내들었다.

누적되어온 부재중 연락 알림 때문에 진동이 쉴 새 없었던 사람도 있었고, 한두 번 진동이 울리고 마는 사람들도 있었다.


“형.”


국영수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곧장 연구원에게 다가갔다.


“번호 주셔야죠. 말씀드렸죠? 저 진짜 연락합니다?”


휴대폰을 꺼내지조차 않았던 연구원은 피식 웃었다.


“그래요. 꼭 해요. 밥 한 끼 합시다.”


* * *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차.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남의 차를 보는 것처럼 괜히 새로워 보이기도 하고.

연구원은 차 안에 앉아 마음의 여운을 정리했다.


‘좋은 경험이었어. 나오기를 잘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연구원은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대기야, 나 촬영 끝났다. 이제 집으로 간다. 대기하고 있어라.


부르르릉. 며칠 동안 잠들어 있던 엔진이 오일을 뿜기 시작했다.


“엇.”


어느새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카메라의 초인이었다.

연구원은 천천히 차에서 내렸고, 카메라의 초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생각은 좀 해보셨습니까?”


연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한 얘기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잊고 있었습니다.”

“예?”


카메라의 초인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처음 말씀해 주셨을 때는 고민이 많이 되고, 생각이 많았었거든요.”

“애니먼이 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입니까?”


동요하는 카메라의 초인과는 다르게 연구원은 흐트러짐 없이 대답했다.


우다사의 최종 선택은 오랜 고민 끝에 포기한 연구원.

하지만 카메라의 초인의 제안에 대한 선택은 꽤 빨리 끝낸 상태였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애니먼으로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선택이니까요.”

“그렇죠.”


연구원은 카메라의 초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바뀌어야 할 이유가 제겐 없습니다.”


* * *


옥상에서 신난 보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멋지다아아아아!”


미니 온실에 설치된 편백욕조를 보고 하는 소리였다.


“그러게. 이렇게 좋은 걸 그냥 받았네.”


사다리차까지 동원해서 받은 편백욕조는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네다섯 사람이 들어가도 공간이 충분할 듯했다.


“삼촌, 이거 봐라?”


보라는 편백욕조 안에 들어가서는 차렷 자세로 누웠다.

눈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이거 보라보다 더 커!”

“이제 여기에 물 받아서 재미있게 목욕할 수 있어. 신나지?”

“응! 진짜 좋아!”


하나비와 먹꾸는 편백욕조 근처에서 한참을 경계하듯 어슬렁거리더니 결국은 가까이 다가와 모서리마다 볼을 부볐다.


“이건 너무 귀여워!”


옆에 놓인 미니 편백욕조.


미니라고 해도 보라는 몸을 푹 담글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여기서 하나비랑 먹꾸랑 랄이 씻으면 되겠다!”

“그러게. 그러면 되겠다.”


조영배가 미니 편백욕조는 ‘싸비쓰’라면서 주고 갔다.

나는 계속 거절하기보다는 깨끗이 씻은 방울포도마토 한 송이를 봉지에 넣어서 건네줬다.

새로 꾸민 온실에서 각종 채소와 과일을 키울 예정이다.

처음에는 마력을 사용해서 급성장과 신품종을 만든 다음 키우는 식으로 하면 될 듯했다.

농가들과 계약을 맺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씻는 건 내가 알아서 잘 하고 있다냐아아아아.>


하나비는 사뿐히 점프하더니 편백욕조 테두리에 뚱뚱한 새처럼 걸터앉았다.

하나비가 고양이 중에서는 날씬한 편이지만 새라고 치면 거대한 편이니까. 아무튼.


“물로 씻으면 더 상쾌해!”


보라가 몸을 일으키고 앉아 하나비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런 보라에게 항의하듯 하나비는 고양이 세수를 시작했고.


<봐라냐아아아. 나는 이렇게 매일 잘하고 있다냐아아아.>

“그래. 보라가 말 잘했네. 하나비랑 먹꾸도 조만간 한 번 씻어보자.”


하나비가 눈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봤다.


<꿈 깨라냐아아!>

“안 깰 건데? 하하하하하!”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진짜로 꿈이 이루어졌다.

아, 하나비 목욕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옥탑방 변신 끝.

남은 꿈을 위해, 앞으로 새롭게 생겨날 꿈들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지.

마음속으로 비장하게 다짐을 다지며 휴대폰을 빼들었다.


―사장님, 이따 출근할게요.


문자를 보내자마자 주다미에게 ‘ㅇㅇ’이라고 답장이 왔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형한테 온 문자였다.


―대기야, 나 촬영 끝났다. 이제 집으로 간다. 대기하고 있어라.


* * *


연구원이 서울로 돌아가는 길.


‘이상하네.’


운전을 하면서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대기의 당부 때문이었다.


―형, 집으로 바로 오지 말고 주주커피로 와. 알았지?


주주커피라면 다주 바로 옆에 있는 카페.

주다미랑 비슷한 이름. 그야, 카페 사장이 주다미니까.


연구원은 짐만 두고 가겠다고 했지만, 연대기는 거듭 당부했다.


―할 말도 있고 해서 그래. 일단 나랑 만나자.


짐이야 차에 실어두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연구원은 곧장 연대기를 만나기로 했다.


‘할 말이라는 게 뭘까?’


아직 옥탑방의 변화를 하나도 모르는 연구원이었다.


* * *


“보라야.”


손을 잡고 있던 보라가 고개를 들었다.


“응! 삼촌!”

“오늘 만날 사람이 있어.”

“알아! 사쟌님이랑 비둘기 아저씨!”

“하하하! 그치, 사장님이랑 비둘기 아저씨도 보긴 할 건데, 다른 사람이 또 있어.”

“다른 사람?”

“응. 보라의 다른 삼촌.”

“다른 삼촌!?”


보라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응. 삼촌의 형. 그러니까 보라한테는 큰삼촌이지.”


옥탑방에는 형의 방이 있었기에 보라도 존재 자체는 알고는 있었다.

대면한 적이 없으니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나도 굳이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그보다는 만나서 차근히 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형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었으니, 분명 보라도 좋아할 거라 생각한다.


“궁금해! 삼촌의 형! 큰삼촌!”


보라는 내가 알려준 호칭들을 나열하며 눈을 반짝였다.


“우리 가족이 더 많아진다! 히히히! 신나!”

“오늘 큰삼촌이랑 다 같이 고기도 먹으러 가자.”

“우와아아아아! 좋아아아아!”


보라와 손을 꼭 잡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주 매장.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둥둥 떠다니던 커다란 비둘기 머리가 내려갔다.


“어서 오세요!”


배덕기는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인사부터 했다.


“비둘기 아저씨이이이이!”


보라가 목소리를 높이자 배덕기는 “우흐흥”하고 웃었다.


“아저씨 아니라니까.”


나는 다가가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일은 좀 어때요? 할만해요?”

“아직은 기본적인 것들만 배우고 있어서······. 우흥, 열심히 해야죠.”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뭐. 사장님은 안에?”

“네, 사무실에 계세요.”


노크를 한 뒤 보라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섰다.


“어, 왔어?”


반갑게 맞이하는 주다미.


“사쟌님! 좋은 아침!”


보라의 기운찬 인사에 주다미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덕분에 좋은 아침이네.”


나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말했다.


“사장님, 이따 부탁드릴 게 좀 있는데.”

“무슨 부탁?”


점심식사 전에 잠시 보라를 맡아달라는 얘기였다.

보라와 형에게 서로를 소개하기 전, 형에게 언질은 줘야 됐으니까.


“아아, 그거야 뭐. 보라는 우리 직원인데 봐주고 말고 할 게 있나?”


주다미의 너스레에 나는 피식 웃었다.


“잠깐 카페에서 얘기만 하고 데리러 올 거예요. 같이 점심식사하고 들어오려고요. 아마 평소보다는 식사시간이 좀 더 걸릴 거 같네요.”

“걱정 마 걱정 마. 그럼 난 이따 덕기랑 시켜 먹어야겠다.”


얘기를 듣고 있던 보라가 눈을 반짝였다.


“짜장면? 햄버거?”


나는 피식 웃으며 보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고기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보라가 눈을 크게 뜨고 까치발을 들었다.


“맞다! 꼬기 먹어야지!”


* * *


“삼촌 금방 다녀올게?”


보라가 되물었다.


“큰삼촌 데리러 가는 거야?”

“응. 금방 같이 올 거야. 잠깐 여기서 열심히······.”


나는 ‘놀고 있어’ 대신 ‘일하고 있어’라고 했다.


“응! 사쟌님이랑 비둘기 아저씨랑 열씨미 일하고 있을게!”


보라는 임무를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듯이 힘차게 대답했다.

보라에게 있어서 ‘일’이란 과연 무엇인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그럼 부탁할게요.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꾸벅이자 주다미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냐.”


배덕기는 90도 인사를 했다.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매장을 빠져나와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 정문에 다다를 즈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형이 보였다.


“형!”

“어.”


안경을 쓰고 코트를 빼입은 형은 며칠 새에 살이 빠져 보였다.


“뭐야, 어우씨, 턱에 베이겠는데? 살 빠졌어?”


나의 물음에 형은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래?”

“우다사에서 밥 안 줘?”

“잘 먹었는데? 이상하다? 탄산을 안 마셔서 그런가.”

“어차피 우리 제로만 먹잖아.”

“그러네?”

“주차는?”

“너네 매장 건물 뒤쪽 식당에. 이따 거기 갈 거잖아?”

“잘했네. 단골이라서 이쪽 올 때면 그냥 말하고 대면 돼.”

“알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카페에 들어섰다.

나는 차가운 아메리카노, 형은 따뜻한 카페라떼.


“그래서.”


형이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할 말이 뭔데?”

“입술에 묻은 거품은 닦아줬으면 좋겠어. 마음이 좀 어렵네.”

“하하핫.”


황급히 냅킨으로 입을 닦은 형이 멋쩍게 웃었다.


“야, 몰랐다. 하하.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놀랄 얘기가 좀 있어.”


무슨 말부터 꺼낼지 고민이었다.

당연히 가장 중요한 얘기는 보라에 대한 것.

갑작스레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에라도 형이 보라와 함께 사는 것은 원치 않는다면?

다 큰 성인들이니 각자 살아도 문제는 없지만······.

이런 일이 원인이 되어 갈라진다면 마음에 걸릴 것 같았다.

상황적으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독단적으로 정한 일.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집에 들르지 말고 바로 오라고 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구나’하고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 말해봐.”


나는 일단 초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진짜로?”


눈을 휘둥그레 뜬 형이 거북이처럼 목을 쑥 내밀며 물었다.


“진짜야?”

“그럼 진짜지. 뒤로 가서 똑바로 앉아.”

“허··· 초인이 됐다고?”

“초인이라고 해도 뭐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등록 안 할 거니까.”

“하긴, 초인이 되면 유명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여러 가지로 불편하겠지.”


형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놀랄만한 얘기긴 하네. 깜짝 놀랐다 야.”

“아직 끝이 아니야.”

“뭐가 더 있어?”

“응.”


나는 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초인이 된 것보다 놀랄 얘기야.”

“초인이 된 것보다 더···?”


리모델링이나 다른 식구들이 생긴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응. 훨씬.”

“무슨 얘긴데?”

“조카 생겼어.”

“뭐···?”


형이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굳어버렸다.


“형···?”


잠시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온 듯한 형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든 뒤 말했다.


“그러니까, 잠깐만, 대체 지금 무슨 소리야? 너 애가 생겼다고? 너 만나는 여자 있던 거야? 대체 뭐가 언제 어떻게 된 건데? 애가 언제 태어난 거야? 아니면······.”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손짓을 했다.


“목소리 좀 낮춰.”

“아, 미안하다. 너무 놀라서 그렇지.”

“내 애가 아니야. 나한테도 조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웃음기를 싹 빼고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은 얘기를 듣는 내내 진중하고 무거운 얼굴이었다.

보라를 소개하기보다는, 어떻게 보라를 만나서 함께 살게 됐는지에 대한 경위를 얘기하는 것이다 보니 분위기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된 거야.”


얘기를 전부 들은 형은 고개를 끄덕거리다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며칠 지내보니까 어때? 괜찮겠어?”

“응.”

“그래?”

“나도 스스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아. 형도 알잖아. 나 원래 애 딱히 좋아하지 않았던 거.”

“애기들은 내가 좋아하지.”


형은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근데 보라는 원래부터 우리 가족이었던 것처럼 편하고 좋아. 너무 사랑스럽고.”


나는 그제야 보라와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형은 묵묵히 얘기를 들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아니면 긴장이 돼서인지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나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들이킨 뒤 형과 눈을 마주쳤다.


“아무튼··· 그렇게 됐어. 내 멋대로 결정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 결정이 바뀔 일은 없어. 일단 같이 점심 먹으러 가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만나본 다음에······.”


내가 말을 하던 중이었다.

형이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고생 한 번 안 했을 것처럼 보이는 형은 얼굴과는 다르게 손에는 온갖 흉터가 가득하고 손바닥도 거칠었다.


“잘했어.”


형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활짝 웃었다.


“잘했다. 대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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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다행이야 +4 24.01.04 1,090 89 14쪽
62 기적 +10 24.01.03 1,152 97 12쪽
61 사려 깊은 마음 +4 24.01.02 1,159 100 13쪽
60 내가 도와줄게 +20 24.01.01 1,206 102 15쪽
59 젊은 산타와 고양이 루돌프 +16 23.12.31 1,226 99 14쪽
58 루돌프에게도 선물을 +6 23.12.30 1,181 95 13쪽
57 착한 어린이들의 메리 크리스마스 +6 23.12.30 1,205 100 12쪽
56 흰 눈이 기쁨 되는 날 +6 23.12.29 1,284 103 14쪽
55 크리스마스 이브(4) +9 23.12.28 1,330 109 13쪽
54 크리스마스이브 (3) +5 23.12.27 1,372 103 14쪽
53 크리스마스이브 (2) +5 23.12.26 1,469 107 13쪽
52 크리스마스이브 (1) +6 23.12.25 1,571 114 15쪽
51 크리스마스이브 전야제 +7 23.12.25 1,680 110 14쪽
50 가장 따뜻한 계절, 겨울 +3 23.12.23 1,800 114 13쪽
49 형제 +5 23.12.23 1,802 113 13쪽
48 고양이의 속마음 +5 23.12.22 1,896 121 14쪽
47 가족은 강하다 +9 23.12.21 2,005 137 14쪽
46 선물 +5 23.12.20 2,025 137 13쪽
45 랄이 이야기 +6 23.12.19 1,990 142 12쪽
44 기분 좋은 상상 +6 23.12.18 2,109 122 13쪽
43 행복의 비법 +7 23.12.18 2,274 124 12쪽
42 산타 할아버지 +12 23.12.16 2,463 134 13쪽
41 대단한 친구 +5 23.12.16 2,540 119 12쪽
40 바라는 것 +10 23.12.15 2,723 120 12쪽
39 노는 날 +5 23.12.14 2,878 124 13쪽
38 포근하고 따뜻한 밤 +5 23.12.13 2,954 124 14쪽
37 이름을 지어준 존재 +8 23.12.12 3,013 134 13쪽
36 막둥이 +9 23.12.11 3,022 139 12쪽
35 새로운 식구 +7 23.12.11 3,031 143 15쪽
34 각인 +2 23.12.09 3,032 145 13쪽
33 예상치 못한 행운 +7 23.12.09 3,074 145 16쪽
32 작은 존재들의 커다란 마음 +6 23.12.08 3,119 132 12쪽
31 소원 +8 23.12.07 3,153 142 13쪽
30 착한 일 +7 23.12.06 3,280 136 13쪽
29 간택 +3 23.12.05 3,446 148 17쪽
28 가족의 의미 +5 23.12.04 3,407 144 13쪽
27 첫 외식 +5 23.12.04 3,636 144 17쪽
26 첫 만남 +6 23.12.02 3,750 169 17쪽
» 가족 +6 23.12.01 3,788 161 20쪽
24 밥심 +5 23.11.30 3,660 148 14쪽
23 효능 +2 23.11.29 3,703 144 13쪽
22 오늘의 집 (2) +6 23.11.28 3,793 155 15쪽
21 오늘의 집 (1) +3 23.11.27 3,915 153 14쪽
20 소중한 변화 +7 23.11.26 4,066 153 12쪽
19 일상을 놀이처럼 +6 23.11.25 4,244 158 12쪽
18 모락모락 +4 23.11.24 4,361 151 13쪽
17 우리 편 +8 23.11.23 4,573 160 16쪽
16 좋은 징조 +7 23.11.22 4,715 165 18쪽
15 +8 23.11.21 4,901 170 14쪽
14 신품종 +6 23.11.20 5,301 173 17쪽
13 다녀왔어요 +10 23.11.19 5,323 192 15쪽
12 마트에 가요 +8 23.11.18 5,489 191 12쪽
11 달라지는 하루 +13 23.11.17 5,807 215 15쪽
10 진짜 드루이드 +8 23.11.16 6,153 213 15쪽
9 식구와 식객 사이 +11 23.11.15 6,187 214 13쪽
8 옥탑방 고양이 +7 23.11.14 6,554 210 14쪽
7 옥탑방 강아지 +10 23.11.13 7,394 220 15쪽
6 나는 삼촌 +9 23.11.12 7,769 241 13쪽
5 선천적 애니먼 +11 23.11.11 8,195 250 16쪽
4 보라 +6 23.11.10 8,907 250 15쪽
3 동질감 +11 23.11.09 10,090 267 18쪽
2 복권 중의 복권 +9 23.11.09 11,226 280 13쪽
1 일상 속 전조 +14 23.11.06 14,823 30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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