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존재들의 커다란 마음
내가 등장해도 자세가 그대로였던 건 하나비가 유일했다.
먹꾸는 민망한지 다리를 들어 뒷목을 벅벅 긁었고, 랄이는 이 상황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푸드덕거리며 깃털을 골랐다.
“안 잔 거야? 왜 여기에 나와서 이러고 있었어. 밤바람도 차가운데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내 말에 하나비의 몽톡한 주둥이가 이리저리 씰룩였다.
그러고는 어렵사리 화분에 시선을 떨구며 마음을 내뱉었다.
<그 녀석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냐···.>
하나비가 말하는 그 녀석이란 보라였다.
“보라?”
나는 알면서도 그냥 한 번 보라의 이름을 내뱉었다.
하나비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한 번 꿈뻑였다.
“보라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
<나한테 제일 말을 많이 걸어준다냐.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곳을 잘 긁어준다냐아아.>
나는 하나비에게 가까이 다가가 너부대대하고 동그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칭찬의 의미였다.
“착하다.”
닿아있는 손에 하나비의 머리가 살짝 힘주어 닿는 게 느껴졌다.
녀석도 내 손길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나도! 나도! 나도!”
랄이는 이에 질세라 뒤뚱뒤뚱 내게 다가와서는 머리를 쑥 내밀었다.
뒤늦게 먹꾸도 내 종아리에 옆구리를 스치며 꼬리를 부르르 떨었고.
“어?”
아이들이야 원래 개성이 독특하니 그렇다 치고 어딘지 계속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했는데.
“너네들 사탕 먹은 거야?”
화분에 심어놓은 사탕이 자취를 감췄다. 정확히는 막대만 남아있었다.
<먹을 리가 없잖냐아아아! 냄새부터 맛이 없는 거다냐아아아! 이런 건 보라만 좋아한다냐!>
조금 전까지 내게 애교를 부리던 하나비는 콧잔등을 확 구기더니 급기야 털뭉치를 토해낼 것처럼 구역질까지 했다.
하긴 고양이는 단맛을 못 느끼니까.
녀석들한테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장난감 정도에 불과하겠지.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의심이 완전히 걷어지지 않았다.
온실이 따뜻하다고 해도 더운 건 아닌데.
“정말이지?”
<먹었으면 먹었다고 한다냐아! 다음부턴 보라한테 맛있는 거 심으라고 해라냐! 그러면 뭐라도 자라면 같이 먹을 수 있잖냐아! 냄새부터 별로다냐아!>
하나비는 눈을 질끈 감고 서럽게 울음소리를 냈다.
“그래도 착한 일 했으니까 들어가서 간식 줄게.”
<고맙다냐아아아.>
“차칸 일! 차칸 일! 차칸 일!”
랄이는 자기에게도 똑같이 상을 달라는 듯이 양 날개를 활짝 펴고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알겠어. 너도 줄게.”
“아오옹···.”
“먹꾸 너도.”
이로써 녀석들에게도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기로 약속하게 됐다.
* * *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왔을 땐 내가 도저히 침대 위에 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보라가 슈퍼맨 자세를 하고 사선으로 누워서는 침대 위를 완전히 점령해버렸으니까.
내가 옆에 비집고 누웠다가는 보라가 깰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뭐.”
다행스럽게도 우리집 소파는 침대로 변신 시킬 수 있는 소파베드.
<신기하다냐아··· 이 녀석 계속 자고 있었던 거냐아···?>
하나비는 소파가 넓어지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먹꾸는 일찌감치 형 방으로 들어갔고.
랄이야 어찌저찌 보라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걸 보면 하나비가 은근히 의리를 지키는 녀석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자려고. 너도?”
내가 묻자 하나비가 먼저 소파베드에 올라서서 이쪽저쪽에 볼을 부벼댔다.
<이제 이 녀석은 내 거다냐아아아. 같이 자는 걸 허락하겠다냐아.>
참나.
어이를 상실해버린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고맙다.”
생각보다 따뜻하게 잤다.
하나비는 웬일로 내 품에 들어와서 고로롱거리며 잠들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오늘도 가장 먼저 기상한 건 나.
간단히 세안을 마치고 온실로 향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아침 루틴이 된 온실 확인.
덜컥.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들긴 했다.
사탕을 심은 자리에 뭐가 자라지는 않을까 하는.
“흐음.”
그러나 당연하게도 어젯밤과 다를 바 없는 모습.
화분에는 쓸쓸하게 막대 다섯 개만이 꽂혀있었다.
“따뜻하긴 해도 덥진 않은데.”
그런데 왜 사탕이 다 녹았을까.
멍한 표정으로 막대를 바라보다가 문득 보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분에 사탕을 심고선 무럭무럭 자라라고 응원해주는 모습.
“무럭무럭 자라라.”
나는 막대를 바라보며 보라가 했던 것처럼 응원의 마음을 보냈다.
효과가 있을 리 없다 해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간밤에 털뭉치 녀석들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돌아서서 나가려던 그때였다.
뾱!
설마.
어깨 뒤에서 소리가 났다.
흡사 포장용 뽁뽁이를 터뜨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 보라의 화분을 확인했다.
“어?”
빨간색 새싹이 돋아났다.
뽁! 뾰복! 뾰보복! 뾱!
그리고 연달아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보라색 새싹이 돋아났다.
보라가 심은 사탕의 색깔들이었다.
“와하? 하하하하하하!”
<냐아! 해냈다! 자랐다냐아아아아!>
“으아! 깜짝아!”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웃음을 크게 터뜨렸는데 어느새 하나비도 옆에 다가와 함께 기뻐하고 있었다.
<자라났다냐아아! 보라한테 알려주자냐아아아아!>
하나비는 바닥에 벌렁 눕더니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대며 골골송을 불렀다.
“미리 말해주지 말고 이따 보라가 직접 보게 하자.”
<좋다냐아!>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성공이다.
내가 응원의 목소리를 내면서 나도 모르게 마력을 불어 넣어서 효과를 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마력보다 보라를 향한 가족들의 사랑이 이뤄낸 결실 같았다.
보라가 얼마나 좋아할까.
나는 그 자리에서 꽤 한참 동안 하나비와 기뻐했다.
* * *
“삼촌 나 이제 혼자서 치카푸카 지쨔 잘한다?”
보라는 간이 거울 앞에서 허리춤에 야무지게 손을 올리고 이쪽저쪽 열심히 양치질을 했다. 그리고 대단한 특기를 자랑하는 것처럼 뽐내듯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네? 이야, 삼촌보다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사실 영락없이 서툰 어린이의 양치질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하나를 하더라도 열심히 해내려고 하는 보라가 기특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삼촌도 잘해!”
보라는 치약 거품이 삐에로처럼 입 주변에 번져있는 것도 모르고 배시시 웃었다.
“입 헹구자. 치카푸카는 거품들을 다 헹궈서 여행을 보내주는 게 진짜 중요해.”
나는 배수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저나 내 머릿속에 이런 동심이 있었나.
보라가 아니었다면 생전 쓰지 않았을 표현이나 설명들.
새삼 보라 덕분에 달라진 내 언어체계가 마음에 든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보라의 찹쌀떡 같은 양볼이 이쪽저쪽 번갈아가며 춤추기를 반복하다 멈췄다.
그러고는 내게 돌진했다.
“깨끗이! 깨끗이!”
장난기가 발동한 보라가 내 옷을 수건 삼아 물기를 닦아냈다.
“으아아아, 나는 수건 인간이다아!”
나는 보라의 장난에 응수하기 위해 수건 인간을 자처했다.
효과는 최고였다.
보라가 꺙꺙 짖기까지하며 즐거워했으니까.
“근데 보라야, 너 지금 머리 모양 엄청 재미있는 건 알아?”
“응! 머시써!”
“멋있긴 해. 근데 이렇게 나갈 거야?”
“응! 사쟌님한테 자랑할 거야! 비둘기 아저씨한테도 보여주고!”
이리저리 제멋대로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는 머리카락들.
하지만 머리를 감겨주고 말리기엔 시간이 약간 촉박할 듯했다.
“갔다 와서 씻겨. 지금은 내가 머리 묶어줄게.”
밖에서 우리의 대화 소리가 다 들린 모양이었다.
형이 욕실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보라를 보고 밝게 웃었다.
“삼촌이 머리 예쁘게 해주는 거 좋아!”
* * *
아침 식사 중.
형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머리 땋기를 도전하고 있었다.
“잘 돼?”
형에게 물었다.
“조용히 해 봐. 집중하고 있잖아.”
쉽지 않은 모양이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삼촌 힘들어?”
보라는 형이 숨까지 참아가며 집중하는 모습이 마음 쓰이는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니야. 삼촌 엄청 잘하고 있어. 다 하고 거울 보면 보라 엄청 놀랄걸?”
“지쨔?”
“응, 그러엄!”
완성.
형이 해냈다.
처음 한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솜씨다.
숱이 많은 크림색 머리칼이 하나로 곱게 땋아졌다.
“우와, 보라야. 머리 엄청 예쁘게 잘 됐다! 삼촌한테 고맙습니다 해야지.”
<장난감이냐아?>
하나비는 보라의 머리가 신기한지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고맙다!”
보라는 하나비를 끌어안은 채로 형에게 우렁차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 반말로.
“고맙습니다아.”
내가 한 번 더 반복해서 가르쳐줬다.
“고맙습니다아아!”
형은 흐뭇하게 웃으며 보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식탁 위에 놓여있던 형의 휴대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깐만?”
슬쩍 보인 화면에서는 ‘까미 어머님’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자주 찾아오는 아이의 보호자인 듯했다.
현재 시간은 오전 7시 50분.
병원 문을 열기까지는 몇 시간 남은 시간이다.
“안녕하세요, 까미 어머님.”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안경 삼촌 밥 다 안 먹었는데···.”
보라가 테이블 위에 남아있는 달걀 프라이를 소심하게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라야.”
나는 나지막이 보라를 불렀다.
“응?”
“안경 삼촌이 하는 일이 뭔지 보라는 아직 모르지?”
“우리처럼 친구들 돌봐주고 가족 찾아주는 일···?”
아직 직업의 다양성을 파악하기엔 어려운 나이이기는 하다.
보라에게 일이란 우리가 하는 일이 전부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나는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안경 삼촌은 아픈 친구들을 치료해주는 일을 해.”
“아픈 친구들?”
어쩌지.
보라의 표정이 더 시무룩해져 버렸다.
“아픈 친구들··· 많아?”
그래도 보라가 알아가야 할 부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형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많아.”
“슬퍼······.”
보라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다 건강하면 좋지만 살다 보면 아파질 수도 있어. 사람도 그렇고.”
보라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가장 중요한 희망에 대해서 말했다.
“하지만 나아질 수 있어. 많은 친구들이 삼촌 덕분에 아픈 곳이 나아져서 건강해져. 멋지고 좋은 일이지?”
그제야 보라의 얼굴에 작게 미소가 피어났다.
“응. 안경 삼촌 머시써.”
그때 방에서 형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왔다.
“왜, 무슨 일이야?”
간략한 설명에 따르자면 환자는 배트캣.
일반적으로 다 큰 고양이, 그러니까 성묘의 반절 정도 되는 몸집을 가진 종이다.
박쥐의 날개를 달고 있고, 수면할 때 천장에 매달려서 자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박쥐보다는 고양이에 가까운 마수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연락을 준 환자 까미는 현재 응급상태.
얘기를 들어보니 어렴풋 기억이 살아났다.
다른 병원에서 희망이 없다고 했던 아이.
하지만 형이 끈질기게 치료해서 결국은 살려냈었지.
그 후엔 딱히 들은 바가 없다.
내가 아는 건 이 정도.
“근 2년 정도는 기본 검진이랑 간단한 케어 말고는 아파서 온 적이 없었거든. 지금 까미 어머니가 오고 있는 중이라 나도 바로 나가봐야 될 것 같아.”
형은 코트에 팔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근데 삼촌, 밥 다 안 먹었는데···.”
보라가 식탁 위를 가리켰다.
“삼촌이 오늘은 일찍 일하러 가야 할 것 같아, 보라야. 갔다 와서 맛있는 거 먹자?”
형은 보라를 다독이며 목도리를 대충 둘러맸다.
“나도!”
그때 보라가 다짐했다는 듯이 힘주어 목소리를 냈다.
“응?”
형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고.
“우리는 이따 나가면 돼. 지금 나갈 필요 없어, 보라야.”
단번에 말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다.
“오늘은 안경 삼촌이랑 일할래!”
보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형은 급하게 나가야 했고, 보라의 말을 더 들어주고 다독여줄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보라를 타이르려던 참이었다.
“나는 친구들 마음을 알아! 목소리도 들려! 안경 삼촌 도와줄 수 있어!”
보라는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말했다.
“오늘은 안경 삼촌이랑 일해! 아픈 친구들 나도 안 아프게 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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