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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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가 엘리베이터 한가운데 서서 주문을 외치듯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엘리! 침대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줘!”
순간 아차, 싶었다.
먼저 와서 기다린 사람부터 순서대로 타야 한다고 얘기해 줘야 했는데.
죄송하다며 고개를 조아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저씨는 채소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얘기해줄래?”
까치 애니먼이 다정한 목소리로 보라에게 말을 건넸다.
“네에!”
연이어 보라가 귀엽다고 연인에게 속닥속닥 말하던 여자도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운동화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넷!”
나는 거의 마지막에 엘리베이터에 타 보라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준 사람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보라는 천진하게 또 주문을 외쳤다.
“엘리! 까치 아저씨는 채소 있는 곳으로, 언니는 운동화 있는 곳으로 데려다줘!”
마지막에 타는 바람에 버튼 앞에 서게 된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층을 눌러주었다.
“보라야,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조용조용 목소리. 이렇게 조용, 조용.”
내가 보라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보라는 바로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응! 조용조용 목소리!”
속삭이기만 할 뿐 큰 목소리이기는 했다.
꼬르르륵.
그때 정적이 흐르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보라의 배꼽시계가 소리를 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또 한 번 웃음꽃이 피었다.
“어어?”
보라는 부끄러운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의 배를 달래듯 쓰다듬었다.
“보라야, 침대 보기 전에 우리 맛있는 거 먹을까?”
“응! 좋아!”
내 질문에 보라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식당가는 제일 꼭대기인 11층. 바로 아래층인 10층은 가구 코너라서 동선이 딱이다.
나는 메뉴를 고민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 * *
집.
<연대기가 없으면냐아 내가 대장이다냐.>
하나비가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하나비가 그러든지 말든지 각자 하던 일을 했다.
먹꾸는 잠시 동작을 멈추긴 했지만, 다시 열심히 세수하기에 집중했고 랄이는 원목 기둥에 매달려서 새로운 놀이를 개발하는 중이었다.
‘아빠를 따라 해야겠다냐.’
하나비는 입으로 말할 땐 연대기라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늘 아빠라고 불렀다.
녀석은 작전을 바꿨다.
방으로 뛰어가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는 플리스를 입으로 물고 내렸다.
<냐냣!>
성공.
<모하뉸 거얏?>
잠에서 깬 포가 멀뚱멀뚱 앉아서 하나비에게 물었다.
<너도 나와라냐. 우리가 할 일이 있다냐.>
하나비는 비장하게 뒤를 돌아보며 포에게 말하고는, 땅에 떨어진 플리스를 입에 물고 질질 끌면서 거실로 향했다.
포는 아기 오리처럼 하나비의 뒤를 졸졸 따라 나왔다.
다시 거실.
한복의 호건처럼 플리스를 머리에 걸친 하나비.
그랬다.
하나비는 연대기의 옷을 입으면 연대기와 비슷해 보일 거라 생각했다.
녀석은 제자리에서 몸을 서서히 일으키더니 미어캣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섰다.
<집중해라냐아아!>
“삐이!”
포는 하나비가 무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큰 목소리를 냈다.
<고맙다냐아.>
“삐!”
“집중해! 집중해! 랄이도 집중해!”
랄이는 연대기의 냄새가 느껴지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원목 기둥을 가지고 노는 것도 질리던 참이었으니 하나비의 말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마침 먹꾸도 세수를 끝냈다. 먹꾸는 선심 쓰듯 소파 끄트머리로 자리를 옮겼다.
<연대기랑 보라가 나갔다냐아. 그러니까냐 보라가 없으면 내가 대장이다냐아아.>
“아옹?”
먹꾸는 의아한 기분이 들어 반감을 드러냈지만 하나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집에서 놀기만 하고 잠만 자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냐아. 오늘은 우리가 청소를 해보자냐아아아!>
“청소! 청소! 즐거운 청소!”
“아오옹, 아오오옹?”
먹꾸는 하나비에게 물었다.
뭐부터 하면 되는 거냐고.
“랄이가 알아! 랄이가 알아!”
연대기가 간이로 청소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지만, 대청소는 아직이라 아이들이 청소 방법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집에 있는 아이들 중 그래도 청소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랄이.
왜냐하면 랄이는 다주에서 머문 기간이 이 집에서 산 기간의 몇 배는 더 길었으니까.
청소하는 주다미, 연대기의 모습을 많이 봐왔다.
“잠깐만! 잠깐만!”
호령한 건 하나비였지만 결국 랄이가 모든 걸 주도하게 됐다.
랄이는 베란다로 나가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찾았다.
“필요 없어! 필요 없어!”
잠시 고민하던 랄이는 빗자루는 팽개쳐버렸다.
쓰레받기만 야무지게 발로 쥐고 거실로 날아들어왔다.
“들어줘! 들어줘!”
하나비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랄이는 시범을 보이듯 입으로 쓰레받기 손잡이를 입으로 물었다.
<알겠다냐!>
랄이가 쓰레받기를 툭 내려놓자, 하나비가 랄이가 했던 것처럼 입으로 손잡이를 물었다.
그리고 랄이가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쳐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재미쪄! 재미쪄!>
아직 아기인 포에게는 이 모든 광경이 재미있는 놀이로 느껴졌다.
<냐도 같이 놀쟈!>
포는 점프를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땅에서 뛰어오르는 찰나 포동한 엉덩이로 땅을 일부로 스쳐 먼지를 앞으로 보냈다.
랄이가 날개 빗자루를 멈췄을 때, 포도 동시에 동작을 멈췄는데 땅에 엉덩이를 열심히 스친 모양인지 갈색 몸에서 엉덩이만 유독 짙어져 있었다.
<안 아푸냐아?>
하나비는 포의 엉덩이를 보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울었다.
<쬬끔 뜨겁땨!>
그때 먹꾸가 느리적느리적 포에게 다가왔다.
“아오옹···.”
그리고 까끌까끌한 혀로 포의 엉덩이를 그루밍해주었다.
나름대로 부재중인 연대기를 대신해 동생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먹꾸에게도 있었다.
<잘했다냐.>
<꼬먑땨!>
먹꾸는 포가 고맙다고 말해준 게 내심 기뻤다.
하나비, 먹꾸, 랄이, 포는 그렇게 자기들 나름대로 거실 청소를 끝냈다.
<다, 다음은 어떤 거 하면 되는 거냐아아아?>
하나비가 랄이에게 물었다.
“이거 해! 이거 해!”
이번에는 랄이가 푸드덕대며 식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머리로 물티슈를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이거 해!”
<나 이거는 안다냐!>
하나비는 기쁜 목소리로 “냐아아!”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고는 동그랗고 뭉툭한 앞발에서 발톱을 꺼내 물티슈 뚜껑을 열었다.
“아오옹!”
물티슈를 꺼내는 건 먹꾸가 담당했다.
먹꾸는 아이들 숫자에 맞게 물티슈를 네 장 꺼냈다.
<나는 하나 더 달라냐. 두 개로 할 거다냐!>
“아옹!”
좋은 생각 같았다.
하나비는 앞발에 물티슈를 한 장씩 받치고 질질 끌며 바닥을 닦았고, 먹꾸도 똑같이 했다. 랄이는 조금 더 능숙하게 물티슈로 바닥을 문지르듯 닦고 오므리고, 닦고 오므렸다.
“삐이!”
반면 포는 물티슈 위에서 앞구르기를 했다. 그렇게 하면 언니, 오빠들처럼 앞으로 쭉 전진할 줄 알았건만 계속 몸에 감기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괜찮다냐아. 포는 아가니까 이제 놀아도 된다냐.>
“삐이···.”
하나비는 어설프게 한쪽 앞발을 들어 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앞발에 묻은 물티슈의 물기 때문이었을까?
포의 동그란 귀 끝이 촉촉하게 젖었다.
* * *
유니버스 아울렛 식당가.
“우아아아아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보라는 크게 감탄했다.
크리스마스 시즌답게 백화점 내부는 층마다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보라는 동화 속에 들어온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중 가장 행복하게 미소 지었던 건 다름 아닌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 식당가였다.
“다 빨간 모자 쓰고 있어!”
마주 잡은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덩달아 나도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보냈던 게 언제인지.
흘러나오는 캐롤과 고소하고 달콤한 음식 냄새에 저절로 마음이 들떴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거든.”
“크리스마쓰?”
“응.”
나는 활짝 웃으며 보라의 보드라운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산타클로스라는 할아버지가 있는데 온 세상 착한 어린이들한테 선물 주시는 날이야.”
“그럼 나쁜 어린이느은?”
“나쁜 어린이는 선물 못 받지. 아, 우는 아이도 선물 못 받아.”
“우는 것도?”
보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쨔 슬퍼서 울었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위로해 줘야 되는 거 아니야아? 산타 하부지 나뿐 하부지다아···.”
아, 아앗. 이게 아닌데.
“아, 그러니까 뜻대로 안 될 때 울면서 떼쓰는 어린이는 선물을 안 주신다는 거야. 당연히 슬픈 어린이는 위로해 주지.”
“다행이다!”
그제야 보라가 다시 해맑게 웃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에 머리맡에 양말 놓고 자야 돼. 그래야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놓고 가.”
“삼촌도 양말 놓을 거야아?”
“아, 삼촌은 어린이 아니고 어른이라서 양말 놔도 안 줘.”
“어른은 힘드네···. 나는 계속 어린이 할래!”
“하하하하! 그래.”
“대신 삼촌은 내가 선물 주께!”
“그래!”
당연히 지금 떠올린 생각이겠지만, 보라가 주려는 선물이 뭘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나도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다리게 됐다.
“보라야, 우리 한 바퀴 쭉 돌고 먹고 싶은 거 고르자. 어때?”
“쪼아!”
결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게 다 맛있어 보였다.
보라는 진열된 음식 모형을 보고 예쁘다며 감탄했다.
“삼촌, 나 이거! 이거 먹고 시퍼!”
보라가 가리킨 건 시나몬 와플과 코코아 세트.
내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어서 오세요.”
인상 좋은 남자 직원이 보라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저 이거 먹을래요!”
“네. 알겠습니다, 손님. 시나몬 와플과 따뜻한 코코아요오?”
직원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주문에 대해 한 번 더 확인하듯 보라가 가리킨 메뉴를 읊었다.
“네. 그럼 저는 블루베리 크림치즈 베이글이랑 따뜻한 아메리카노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손님, 잠시만요.”
직원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어린이 손님들한테는 저희가 산타 모자를 선물로 드리고 있어요.”
그리고 계산대에서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반짝이는 비닐로 예쁘게 포장된 산타 모자를 보라에게 건넸다.
“우아아아아!”
보라는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기까지 하며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해야지. 보라야.”
내 말에 보라가 배꼽인사를 꾸벅했다.
“감사합니다아아!”
“하하하, 금방 맛있게 준비해드릴게요.”
구경하길 좋아하는 보라를 위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라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산타 모자를 썼다.
“따뜻하고 기분 좋아! 좋은 냄새도 나!”
“보라 좋겠다. 선물도 받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응! 햄보케!”
금방 음식이 나왔다.
보라는 앞에 놓인 시나몬 와플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감사합니다아!”
그리고 또 한 번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연보라!”
보라가 내 앞에 놓인 베이글을 가리키며 말했다.
블루베리 크림치즈의 색이 그러고 보니 연보라빛이었다.
“그러네? 정말 보라처럼 연보라네?”
“응! 내 이름처럼 예뻐!”
“맞아.”
나는 활짝 웃으며 보라 앞에 놓인 음식을 내 쪽으로 당겼다.
밝게 웃던 보라의 동공이 말 그대로 지진이 일어난 듯 흔들렸다.
“아, 삼촌이 잘라주려고.”
“아!”
보라는 웃음을 되찾았다.
나는 보라가 먹기 좋게 와플을 조그맣게 잘라주었다.
포크로 찢어 먹어도 될 만큼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래도.
“으으음! 마시쎠! 마시쎠! 삼촌 먹어봐!”
보라는 곧장 포크로 와플을 찍어 내게 건넸다.
“보라 많이 먹어. 삼촌 것도 여기 있어.”
“이거 마시써!”
보라의 기세로 보아 팔이 아플 때까지 권할 것 같았다.
“알겠어, 아아아아!”
갓 구운 따뜻한 와플에 시나몬과 달콤한 시럽은 정말 최고였다.
아무리 성격 나쁜 사람이더라도 이걸 먹으면 온화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도 블루베리 크림치즈 베이글을 잘라 보라의 입에 넣어주었다.
한참 맛있게 먹던 보라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삼촌, 아저씨한테 이거 하나 더 달라고 하면 안 돼?”
“그렇게 맛있어?”
“안경 삼촌도 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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