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차례다
“애들 잘 부탁해.”
집을 나서기 전 하나비와 먹꾸, 랄이를 순서대로 눈에 담으며 형에게 말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형이 장난스레 미간을 구겼다.
“얼른 가.”
“삼촌, 나 열씨미 일하구 오께! 집에서 재미께 놀구 이써!”
보라는 천진한 얼굴로 씩씩하게 말하더니 형의 다리를 작은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삐이!”
포도 덩달아 인사를 건넸다.
깨알 같은 눈이 향한 곳은 하나비였다.
<잘 다녀와라냐! 밥 잘 챙겨먹고냐아!>
하나비는 몸을 일으키고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모습이 꼭 어린 동생을 노심초사 살피는 형처럼 보여 피식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면 나는 형에게, 포는 하나비, 먹꾸, 랄이에게 배웅받고 있으니 동생들이 경제활동을 위해 집 밖을 나서는 게 맞기는 했다.
“갔다 올게.”
“잘해구 와! 잘해구 와!”
<오늘도 일찍 집에 와라옹!>
끝으로 랄이와 먹꾸의 인사까지 받고 나서 우리는 출근길에 나섰다.
* * *
출근길 내내 하나비, 먹꾸와 함께 늙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하도 쓰다듬어져서 털에 윤기가 좔좔 흐르는 하나비, 그리고 나잇살이 살짝 올라 귀여워진 먹꾸가 나와 형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함께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모습.
생각으로도 행복해지는 상상이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져도 아이들이 여전히 곁에 있다면 늙는 일조차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삼촌 계속 웃네에에? 나도 웃어야지이!”
보라는 해맑게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아랫니, 윗니가 다 보일 정도로 장난스레 씨익 웃어보였다.
그때 포가 포대기 가방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까만 코를 킁킁거렸다.
포를 자극한 향기는 다름 아닌 붕어빵 냄새.
“삼촌 저게 모야?”
보라는 나의 옷자락을 당기며 물었다. 시선은 붕어빵에 고정되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먹을까?”
<먐먀! 먐먀!>
보라가 신나하기 전에 포가 먼저 포대기 가방 안에서 방방 뛰며 행복하게 삐약거렸다.
“웅! 먹어볼래!”
이미 두 사람이 줄 서 있는 상황이었지만, 출근까지 시간은 여유로운 상황.
유성매직으로 쓴 듯한 반듯한 글씨의 메뉴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두 개에 천 원, 팥 네 개에 슈크림 세 개 삼천 원.
나는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삼천 원을 꺼내 붕어빵 사장님께 건넸다.
“손님은 어떻게 드릴까?”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붕어빵 사장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여유로운 표정과 대비되게 그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팥 네 개에 슈크림 세 개 부탁드려요.”
나는 불현듯 주다미와 덕기도 떠올랐다.
덕기는 오후 출근이긴 하지만, 그래도 붕어빵은 식어도 맛있으니까.
반대편 주머니에서 혹시나 버블호떡을 만날 상황을 대비해 쟁여두었던 삼천 원을 또 꺼냈다. 아니 근데, 왜 요즘 버블호떡은 보이지 않는 걸까. 너무 먹고 싶은데.
“똑같은 구성으로 하나 더 주세요!”
“네엣!”
순서를 기다리는 중에는 보라가 계속 붕어빵을 관찰하듯 골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기다림이 끝나고 품에 한아름 붕어빵을 안고 장소를 막 벗어났을 때, 보라가 물었다.
“삼촌, 그거 물고기 빵이야?”
“응? 물고기 빵?”
“물고기처럼 생겼자나···, 그 안에 물고기 들어 있는 거야아?”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 보라에게 슈크림 붕어빵을 건넸다.
“보라가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보라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붕어빵을 받아들고, 내 눈치를 몇 번 살피더니 한 입을 살짝 베어 물었다.
<뺘뺘! 먐먀! 먐먀!>
달콤한 슈크림 향기가 퍼지자, 포는 거의 포대기에서 떨어질 정도로 몸을 걸치고선 두툼한 앞발을 버둥거렸다.
“삼툐! 마이뗘! 온툐 마이뗘!”
“엄청 맛있다구?”
“으!”
보라가 베어 문 자리에서 드러난 슈크림이 모락모락 김을 뿜어냈다.
“삼툔도 머거! 아아아!”
“보라는 항상 맛있는 거 먹으면 삼촌한테 꼭 먹여주려고 하더라? 착해.”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보라는 기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삼촌도 하나 꺼내서 먹을게. 보라 입 데이지 않게 천천히 후후 불면서 먹어. 알겠지?”
“응!”
나도 종이봉투 안에서 슈크림 붕어빵을 하나 꺼내 맛보았다. 중간중간 열심히 식혀가며 포에게도 나눠주었다.
“삼촌! 붕어빵이라는 물고기는 이 세상에서 젤로 마싯눈 물고기같아!”
아무래도 붕어빵이 보라의 최애 간식이 된 듯했다.
* * *
옥탑방.
모처럼의 휴일이 주어진 연구원.
연구원은 일주일 전에 사놓고 여태 한 장을 넘기지 못했던 새 책을 펼쳤다.
하나비, 먹꾸, 랄이는 연구원의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그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래냐아?>
“너무 일찍 일어나서 나른하지? 그래, 그래. 조금 더 자. 그럴 줄 알았어.”
하나비의 울음소리가 애교섞인 투정이라 해석한 연구원은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내며 우쭈쭈를 해주었다.
<얼마든지 더 잘 수 있기는 하지만냐, 잘 생각은 없다냐.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냐아?>
연구원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하나비는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었다. 왜냐하면 종이를 펼치고 가만히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이 영 재미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보라와 보던 종이와는 달랐다. 그 종이에는 그림이 많았고, 무엇보다 보라 나름의 해석이 있었기 때문에 티비를 보는 일보다 즐거웠다.
<먹꾸, 네가 한 번 가서 확인해 봐라냐!>
<알겠다옹···!>
먹꾸는 침대 아래로 사뿐히 내려갔다.
그러고는 책상 옆에 있는 휴지통을 밟고 책상 위까지 가뿐히 올라갔다.
연구원은 먹꾸가 바로 옆에서 기웃기웃 함께 책을 들여다보는 줄도 모르고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보라 거랑은 다르다옹···! 그냥 지저분한 종이다옹···!>
글자가 뭔지 모르는 먹꾸.
그런 먹꾸의 입장에서는 글자가 빼곡한 책장이 그저 지저분한 종이쯤으로 보였다.
<정말 심심한 것 같다냐. 걱정이구냐아···.>
<그러게 말이다옹, 안경 아빠를 우리가 놀아줘야 할 것 같다옹···.>
“마쟈.”
랄이가 눈을 꿈뻑거리며 아이들 목소리에 볼륨을 맞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까까 집에 혼자 있어도 안 쓸쓸해 보이는데옹, 안경 아빠는 왜 혼자 있으면 쓸쓸해 보일까옹···.>
먹꾸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거는 말이다냐, 아빠는 까까 집에서 바쁘게 까까를 보살피지만, 안경 아빠는 가만히 앉아서 종이만 만지니까 쓸쓸한 거다냐.>
<그런 거구나옹···!>
“마쟈! 마쟈!”
이번에는 랄이가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서 대답했다.
연구원은 랄이를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복슬복슬한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오늘은 우리에게 중요한 임무가 생긴 것 같다냐! 안경 아빠를 재미있게 놀아주자냐!>
<좋은 생각이다옹!>
“좋아! 좋아!”
아이들은 그렇게 의기투합해 ‘연구원 놀아주기’라는 원대한 하루 계획을 세웠다.
* * *
다주.
매장 앞에 도착하자마자 멀찌감치서 헤드폰을 걸친 채 신나게 걸어오는 덕기의 모습이 보였다.
“더끼 오빠아!”
보라가 해맑게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고, 나도 곧 가볍게 손을 들어보이며 인사했다.
포대기 가방이 들썩거려서 밑을 내려다보니 포도 보라를 따라 앞발을 흔들고 있었다.
교감하는 대상의 행동을 따라 하는 모방 행동이었다.
“덕기 너 오후 출근 아니야?”
곧 우리 앞으로 다다른 덕기에게 내가 물었다.
“사장님이 어제 퇴근하면서 저도 오픈할 때 나오라고 하시던데요? 대신 오늘 평소보다 일찍 퇴근시켜주신다고 그랬어요! 우흥! 우흐흥!”
퇴근이라는 말을 하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지 덕기는 자꾸만 “우흥! 우흥!” 소리 내며 웃었다.
“그럼 우리 오늘 집에 일찍 가눈 고야아?”
보라가 포의 얼굴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내게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에?”
우리는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 불은 사무실에만 켜져 있는 상황.
“사장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다미가 겉옷을 벗지도 않고 의자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사쟌님!”
늘 그랬듯 보라는 주다미와 포옹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사는 생략, 본론으로 들어간다.”
“네?”
“우흥?”
나와 덕기가 주다미에게 되물었다.
주다미는 제일 먼저 덕기를 가리켰다.
“너, 저녁 약속 있지?”
덕기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머뭇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네에···. 어제 사장님이 일찍 퇴근시켜주신다고 말씀해 주셔서. 근데 취소할 수 있어요!”
주다미는 절도 있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 깨라고 있는 게 아니다.”
“마쟈! 약속은 지켜야 되는 구야!”
보라는 즐거운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주다미의 말을 따라 했다.
주다미는 곧바로 나를 가리켰다.
“너도, 오늘 저녁에 약속 있지?”
“네. 저는 오늘 먹꾸 엄마랑 이웃한테 식사 대접하기로 했어요. 근데 뭐, 퇴근시간 생각하고 초대한 거라 지장은 없어요.”
주다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팽글이 요란하게 반짝이는 핸드백을 어깨에 걸쳐 멨다.
“오늘은 송년회다. 제군들 사장 집으로 간다, 실시.”
“실시!”
보라는 송년회가 뭔지도 모르면서 한껏 신난 목소리를 냈다.
“네? 예약 손님 없어요? 괜찮아요?”
내 물음에 주다미는 혀를 끌끌 찼다.
“오늘은 아예 예약을 안 받았지. 매장에 있는 애들도 중요하지만, 우리도 중요하다. 올해의 마지막 날인데 우리가 사기를 충전하고 힘을 내야 내년에도 열심히 일하지. 미래를 내다봐야 해. 미래를!”
우리는 그렇게 주다미의 집으로 향했다.
* * *
옥탑방.
연구원 놀아주기 대작전에 돌입한 아이들.
제일 먼저 하나비가 자신들의 장난감 박스로 달려갔다.
뒤따라 먹꾸와 랄이도 모였다.
<어떤 걸로 놀아줘야 안경 아빠가 좋아할까냐?>
장난감 박스에 있는 건 전부 고양이 낚싯대.
사람의 시각으로는 그게 그거인 셈.
하지만 녀석들의 시선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낚싯대 끝에 달려 있는 깃털의 크기, 방울의 소리에 따라 천지 차이였으니까.
심사숙고 끝에 먹꾸는 털꼬리가 달린 낚싯대를 골랐다.
방울 소리가 가장 영롱하고, 입에 물었을 때 가장 기분 좋은 느낌이라 먹꾸에게는 최고로 소중한 장난감이었다.
<이, 이거는 먹꾸 네가 가장 아끼는 거 아니냐아?>
하나비가 가는 울음소리로 물었다.
<괜찮다옹···! 안경 아빠를 재미있게 놀아줄 수 있다면 장난감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옹···!>
“허억!”
랄이는 연대기가 놀랐을 때 내던 숨소리를 그대로 재연했다.
그 소리에 힘을 얻은 먹꾸는 좀 더 용기를 냈다.
<까까도! 까까도 양보할 수 있다옹···!>
그렇게 연구원의 의사는 묻지 않은 채, 녀석들은 양보할 수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하나비에게는 볼마사지 소파, 랄이는 노즈워크를 선택했다.
그게 연구원이 준비한 선물인지는 까맣게 모른 채.
* * *
먹꾸가 입에 물고 있던 낚싯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뿌듯한 얼굴로 연구원을 올려 보았다.
딸랑!
한참 책을 읽고 있는 연구원은 화들짝 놀라 발치를 내려보았다.
“응?”
<놀아주겠다냐! 이제 그 지저분한 종이는 내려놓고 재미있게 놀자냐!>
하나비가 내려놓았던 낚싯대를 입에 물고는 침대 위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나름대로 열심히 낚싯대를 흔들었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낚싯대 끝에 달린 방울 소리가 방 안에 맑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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