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속마음
아무리 마른 고양이라도 뱃살은 있기 마련이다.
올바른 명칭으로는 원시 주머니가 맞지만, 뱃살이 더 귀여우니까 그렇게 부르고 싶다.
아무튼 먹꾸의 첫 모습을 떠올린다면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바짝 마른 몸이었다. 고양이다운 뱃살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맙다옹! 고맙다옹! 해냈다옹!>
그런 먹꾸에게 드디어 뱃살이 생겼다.
먹꾸가 일어선 자세로 앞다리를 접고 연신 고맙다고 옹알옹알 말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동시에 옅은 회색빛 배털이 볼록하게 올라와 있는 모습이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우리는 해낸 것이다.
가족들의 사랑이 녀석을 배부르게 했다.
“이야! 이야아아! 해냈어! 정말 해냈어!”
형은 먹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꾸가 하는 말에 딱 알맞은 대답을 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좀처럼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고, 늘 차분한 형이 이렇게나 동작을 크게 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인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해냈다옹! 정말 고맙다옹! 고맙다오오옹!>
먹꾸는 형의 다리를 거의 끌어안다시피하며 갸르릉갸르릉 골골송을 불렀다.
“우리 먹꾸 정말 멋지다. 아구, 이뻐라!”
“아이, 이쁘다! 아이, 이쁘다!”
랄이도 기쁜 모양인지 곁으로 다가와 발랄한 목소리로 추임새를 넣었다.
“형, 내가 더 놀라게 해줄까?”
형은 아기를 어르듯 품에 안은 먹꾸와 눈을 맞추며 몸을 살짝살짝 흔들고 있다가, 나의 예상치 못한 제안에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어?”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먹꾸가 계속 형한테 말 걸었어, 지금. 나도 먹꾸 목소리는 처음 들어.”
내 옆에 있던 보라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자! 먹꾸 처음 말해써! 안경 삼촌한테 고맙대! 지쨔 고맙대!”
형은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보라와 먹꾸를 번갈아 보다가 내게 정말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응. 진짜로.”
<쟤 원래 말 한다냐아. 그걸 이제 알았냐앙?>
그때 하나비가 무척이나 심드렁한 목소리로 툭 내뱉더니 자신의 화분으로 다가가 꼬리를 거의 일직선으로 세우고 부르르 떨었다.
“지쨔?”
보라가 하나비에게 되물었다.
하나비는 따지듯이 “냐아아!” 하고 울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거짓말 아니다냐. 진짜다냐.>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쇼핑백 안에 들어가 요란하게 부시럭대고 있는 포를 앞발로 툭 건드렸다. 포는 그만 옆으로 굴러 밖으로 나와 엎어졌다.
“동생 좀 소중하게 대해주라.”
내가 말하자 하나비는 동그란 머리를 홱 돌렸다.
자기 딴에는 도도하게 보이려고 한 행동 같았지만 도도는커녕 귀엽게만 보였다.
포는 머리를 몇 번 도리도리 흔들더니 순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포도 아기지만 말을 다 한다냐야. 그러니까 먹꾸도 말을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냐아아?>
<맞다옹.>
먹꾸는 수줍은 듯 작은 목소리로 하나비의 말을 거들더니 “아옹···” 하고 울었다.
“다들 뭐라는 거야? 나도 통역 좀 해줘.”
형이 먹꾸를 고쳐 안으며 말했다.
“하나비 말로는 먹꾸가 원래부터 말을 했다네?”
이상했다.
나만 그랬다면 내가 문제였겠지만, 먹꾸의 말을 듣지 못했던 건 보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먹꾸는 원래 말이 많지 않다냐아. 하지만 나하고 안경 삼촌한테만 말을 건다냐.>
나는 하나비의 말을 그대로 형에게 통역했다.
하나비하고는 길에서부터 알던 사이니 편해서 그랬을 것이고, 형은 사실상 우리 집에서 먹꾸가 간택한 인물이니 그래서 유일하게 말을 걸었던 듯했다.
그나저나 하나비도 형을 안경 삼촌이라고 부르는 점이 꽤 흥미로웠다.
<맞다옹.>
먹꾸는 이번에도 수줍은 목소리로 하나비의 말을 거들었다.
“근데 왜애? 왜 오늘은 먹꾸가 나하구 삼촌한테도 말 걸어 준 거야?”
보라가 천진하게 묻자, 먹꾸는 얼굴을 보이며 말하기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형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금 세게 파묻는 듯해서 다시 얼굴을 뗐을 땐 납작하게 눌려있지는 않을까 약간의 걱정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고마웠다옹. 많이 좋아졌다옹···.>
“추운가, 먹꾸가 왜 더 울면서 파고들까···.”
형은 먹꾸가 부끄러워서 파고드는 줄도 모르고 추워서 머리를 더 세게 부빈다고 생각한 듯했다.
“형, 먹꾸 추워서 그런 거 아니야.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이제 우리가 더 좋아졌대. 그리고 고마워서 말을 걸고 싶어졌다네. 아, 형한테는 원래부터 말 걸었대.”
형이 먹꾸를 더 꼬옥 안았다.
“고마워. 내가 먹꾸가 말하는 거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먹꾸 마음을 더 알기 위해서 노력할게.”
“내가 도와주께 삼촌!”
보라가 배시시 웃으며 먹꾸를 안고 있는 형에 손 위에 작은 손을 포갰다.
<낯가림으로 유난이다냐.>
하나비는 모든 관심에 먹꾸에게 쏠린 게 약간 부러운 눈치였다.
“이리 와. 하나비도 안아줄게.”
팔을 벌리자 녀석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다가와 안겼다.
‘샘 났구나?’ 물을까 했다가 온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명치를 걷어차일 것 같아서 말았다.
“랄이도! 랄이도!”
랄이는 헥헥 웃는 얼굴로 두리번두리번 우리를 살펴보더니 날개를 펴고 보라에게 다가갔다.
“응! 나도 안아주께!”
보라의 품에 안긴 랄이는 어깨에 턱을 올리고 이보다 편안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집에서 간식 열매를 살펴보기로 했다.
나는 먹꾸의 간식 나무에 열린 열매들을 네 개 따서 쇼핑백에 넣었다.
그리고 온실을 벗어나기 전 작물들의 상태를 살폈다.
방울포도마토는 진즉 열매를 맺었던 것들도 여전히 싱싱했다.
부패가 일어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부패 속도가 늦는 건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보석사탕 나무 열매는 현재의 상태가 완벽하게 무르익은 모습인 듯했다.
점점 풍성해지는 온실이, 그리고 상상의 힘이 양분이 되는 꿈같은 공간이 더욱 소중해지는 저녁이었다.
* * *
간식의 주인은 먹꾸.
그런 의미에서 거실에 상을 폈다.
오늘 같은 날엔 뜨끈한 바닥에 도란도란 모여 앉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열어보자.”
콩깍지처럼 생긴 껍질, 그리고 그 안에 알갱이가 들어 있었다.
<아니다옹.>
먹꾸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그란 앞발을 상위에 올리더니 근엄한 얼굴로 간식 열매를 앞으로 당겼다.
<껍질도 먹는 거다옹. 좋은 냄새가 난다옹!>
나는 내 무릎에 앉아 있는 하나비의 뒤통수를 빤히 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뾰족한 귀가 살짝 움직였다.
<내 생각도 같다냐. 이거는 껍질도 먹는 거다냐!>
그나저나 하나비 취향의 간식이 아니라 먹꾸 취향의 간식을 심은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냄새는 합격인 모양이다.
“먹꾸랑 하나비가 껍질도 먹는 거래.”
내가 형에게 말했다.
그러자 형이 먹꾸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주며 미소 지었다.
“고양이가 먹는 거니까 고양이들 말이 맞겠지.”
랄이와 포는 그닥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나씩 차지하고 싶은 듯했는데 랄이는 몇 번 발로 건드리다 말았고, 포는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탄수화물, 달콤한 것이 취향인 포에게는 탈락이었다.
랄이와 포는 다른 간식을 먹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소파에 올라가서 꾸벅꾸벅 졸았다.
<먹어보겠다옹···.>
먹꾸가 오른쪽 앞발로 깍지를 잡고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자 작고 네모난 열매들이 상 위로 “도로록” 경쾌한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어? 어어?”
“우아아아아! 삼촌, 삼촌! 나도, 나도 다른 거 맛있는 거 또 하나 더 심으면 안 돼? 나도 먹꾸처럼 많이 들어있는 거 키우고 싶어!”
녀석들이 너무 맛있게 먹고 있기는 했다.
그래도 고양이 간식인데.
보라는 군침을 꼴깍 삼키기까지 하며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알겠어. 삼촌이 고민해 볼게.”
“삼촌 체고!”
보라가 나를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무릎에 앉아 있던 하나비가 나동그라질 뻔했다.
평소라면 하나비가 볼멘소리를 냈을 텐데, 녀석은 몸이 휘청이는 와중에도 정신을 잃고 먹었다.
형은 안경을 고쳐쓰기까지 하며 고양이들을 살폈다.
그리고 랄이가 팽개쳐놓은 간식 열매를 손에 들고 살펴보았다.
나도 형처럼 포에게서 외면받은 간식 열매를 손에 쥐었다.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게 자란 것 같아.”
형이 말했다.
“삼촌, 나도 같이 보쟈!”
보라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깍지 안에 연어색 크림이 잔뜩 들어 있네?”
“그거 내가 가져온 영양 츄르 색이랑 같아. 근데 차이점이 있어. 여기에는 알로에처럼 알갱이 같은 게 들어있어. 거기서 크림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아.”
형은 진지해져 있었다.
“작은 네모 알갱이는 내가 산 동결건조 참치스낵이랑 닮았는데 질감이 조금 달라. 결대로 찢어지거나 부서지는 게 아니라 살짝만 힘줘도 바스라져.”
“그러니까 좋지. 부드러운 식감 좋아하거나 씹어먹기 힘든 애들한테는 이런 게 소화에 좋으니까.”
“그렇겠다.”
간식을 다 먹어치운 하나비가 쓱 뒤돌더니 입맛을 다시며 내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거 안 먹을 거면 나 줘라냐아.>
비슷한 속도로 간식 하나를 다 먹은 먹꾸도 고개를 돌려 형을 바라봤다.
<더 먹고 싶다옹···.>
나는 피식 웃으며 형에게 말했다.
“애들 맛있나 봐. 더 달래.”
“그럼 줘야지. 우리 먹꾸 얼른 포동포동해져야 하는데.”
하나비와 먹꾸가 간식 시간을 마무리하고 난 뒤였다.
“맛이 어땠어?”
<여태까지 먹은 간식 중에 최고였다냐. 매일 줘라냐!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더 많이 줘라냐.>
<맞다옹. 맞는 말이다옹···.>
먹꾸가 말을 시작하고나서 성격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녀석은 하나비보다 살짝 뒤로 물러서서 눈치를 살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인 듯했다.
“맛있었다니까 다행이다. 그래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탈 날 수도 있으니까.”
<알았다냐! 그래도 조금 말고 많이 줘라냐!>
<많이 줘라옹···.>
나는 피식 웃으며 두 녀석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휴대폰이 상 위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네, 침대 배달 왔습니다.
기다리던 보라의 침대가 왔다.
* * *
침대가 들어올 걸 계산하고 미리 방 구조를 바꿔놓은 덕에 수월하게 놓을 수 있었다.
하나비는 내 침대와 보라 침대 사이에 살짝 떨어져 있는 작은 공간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물 밖으로 나온 생선처럼 요란한 동작으로 방바닥에 등을 비벼댔다.
<여기는 이제 내 자리다냐! 나는 여기서 잘 거다냐!>
하나비는 안광까지 내뿜으며 약간의 광기를 보였다.
<나는 원래 자리가 좋다옹.>
먹꾸는 문지방을 밟고 서서 하나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건진 몰라도 먹꾸의 눈빛에는 약간의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보라 침대 잘 샀네. 너무 예쁘다.”
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침대 이뻐! 내가 많이 이뻐해 주 꺼야!”
보라는 아직 이불을 깔지 않은 매트리스를 와락 끌어안듯이 양팔을 펼치고 엎어졌다.
“보라야, 이불 깔고 이뻐해 주자.”
“응!”
형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넌지시 물었다.
“이불 빨고 해줘야 하지 않을까?”
“이 브랜드 이불은 살균 처리하고 진공포장 돼서 오는 거라 바로 써도 된대. 아이들 브랜드라 좀 더 기준이 높은 것 같더라고.”
“세상 진짜 좋아졌다. 너무 좋네. 잘했다.”
나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도 있지!”
“있지!”
보라가 내 말끝을 따라 하며 신난 기분을 드러냈다.
“보라가 소개해줘.”
<그건 뭐냐아앙?>
하나비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작은 코를 벌름거렸다.
“이거는 하나비 이불! 그리고 이건 먹꾸! 이거는 랄이! 포 꺼야!”
사이즈에 맞게 제작된 털뭉치들의 이불.
폭신한 토퍼에 이불 테두리가 발등을 덮는 슬리퍼의 윗부분처럼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불 위엔 아담하고 낮은 베개가 앙증맞게 붙어 있다.
베개는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벨크로 형식이라서 세탁하기에도 편한 구조라 좋다.
<달라냐! 얼른 달라냐!>
<내 이불이냐옹? 나도 이불이 생긴 거냐옹···.>
“코코낸내! 코코낸내! 랄이는 코코낸내!”
“삐이! 삐이이이!”
털뭉치 녀석들도 내심 자기만의 이부자리를 갖고 싶었던 걸까.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그때 먹꾸가 내 발등에 자신의 발을 조심스레 올렸다.
“음?”
<나는 원하는 자리가 있다옹···.>
먹꾸는 앞장서서 자기가 원하는 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예상한 대로 형의 방.
그리고 형의 베개 옆이었다.
<여기가 좋다옹.>
형의 입가에 은은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먹꾸가 이 자리에 놔달래?”
“응. 먹꾸는 형이 너무너무 좋아죽겠나 봐.”
먹꾸는 맞다고 대답하듯이 형에게 머리를 성의있게 부볐다.
“아, 맞다. 잠깐만 있어 봐.”
형이 뭔가 떠오른 것처럼 말하더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뭔가를 보여주려나 보다 생각하고 잠자코 기다렸다.
부르르르
내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형이야?”
내가 묻자 형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줄 거 있으면 그냥 보여주지 뭘 또, 어?”
형이 내 통장에 돈을 입금했다.
“왜 그래? 뭐야, 형?”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바보같이 횡설수설했다.
그 반면 형은 어른스러운 얼굴을 하고 내게 말했다.
“쉬는 날 하루 종일 이것저것 보러 다니느라 고생했잖아. 보라 침대는 형이 할게.”
- 작가의말
허어어어얼 님 후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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