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잘 구워진 과자처럼 노르스름한 등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동그랗고 커다란 머리.
뾰족한 귀 끝엔 애교스럽게 하얀 털이 솟아 있다.
소파 구석에 머리를 완전히 처박고 있는 하나비의 뒷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새삼 온통 귀여운 구석뿐이구나 생각됐다.
흐뭇하게 웃는 나와는 다르게 하나비는 불만스럽다는 듯 꼬리를 탕탕 내리쳤다.
<아빠는냐야아 노는 날이라면서냐아아아 나랑은 안 노냐아아!>
하나비가 찡얼찡얼 우는 소리를 내는 와중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라니.
나한테 아빠라니.
옹알이밖에 못하던 갓난아이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러줄 때 이만큼 감동적일까.
자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혀를 끌끌 차면서 어디 애를 고양이에게 갖다 대는 거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렴 나한테 하나비는 자식이니 불만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하, 하나비? 나한테 아빠라고 불러준 거야?”
하나비가 몸을 홱 돌렸다.
동그란 눈동자가 평소보다 촉촉해 보인다.
녀석은 콧잔등을 구기며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거 봐라냐아아!>
동글동글한 오른쪽 발이 허공을 저었다.
하나비의 시선은 시계로 향해 있었다.
“시계?”
<작은 놈이 얼마나 많이 움직였는 줄 아는 거냐아아아!>
급기야 눈을 질끈 감기까지 하며 말했다.
“하나비, 집에서 계속 나, 아니 아빠 기다린 거야?”
<기다리기만 한 거는 아니다냐!>
그때 랄이가 하나비 옆으로 날아와 앉았다.
랄이는 하나비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살짝살짝 흔들며 말했다.
“청소! 청소! 깨끗하게 청소! 우와! 뿅! 우와! 뿅!”
설마.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바닥이 반짝거리는 느낌이다.
핑계가 아니라 요새는 정말이지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
그런 이유로 간이로 틈틈이 바닥을 쓸고 닦긴 했었지만 이 정도로 반짝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청소? 진짜로? 너희가 청소를 했다고?”
바로 옆에서 먹꾸와 포를 쓰다듬어주던 보라도 나를 따라 놀란 목소리를 냈다.
“지쨔? 청소해써어? 착하다아!”
하나비는 소파 밑으로 휙 내려가서는 베란다로 부리나케 뛰어나가 쓰레받기를 물고 왔다.
<으르크, 으르크, 느그 으그 믈그 음즉으믄 를으그 늘그르 믄즈 쓸으즈뜨뉴으으으으!>
“이렇게, 이렇게, 내가 이거 물고 움직이면 랄이가 날개로 먼지 쓸어줬다냐아아아아! 라고?”
하나비는 쓰레받기 손잡이를 퉤 뱉고는 대답했다.
<맞다냐! 그리고 내 말투 안 그렇다냐!>
“그럼 먹꾸랑 포는 놀아써어?”
보라가 물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냐!>
하나비는 또다시 바쁘게 뛰어갔다.
이번에는 물티슈를 머리로 밀며 내 앞까지 가지고 왔다.
<이걸로 다 같이 바닥도 닦았다냐!>
그러고는 쓰레기통으로 다가가 냥펀치를 갈겼다.
<이 녀석한테 밥으로 줬다냐. 랄이가 버려줬다냐!>
우리 집에 있는 애들이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건 내 기대를 뛰어넘는 영리함이었다.
“대단하다. 우리 하나비랑, 랄이, 먹꾸, 포한테 박수 쳐 주자. 보라야!”
“우아아아아아!”
손뼉을 부딪치자 하나비는 약간 부끄러워진 모양인지 괜히 뒷발로 귀 뒤를 벅벅 긁으며 딴청을 피워댔다.
“하나비 이리 와 봐.”
바로 올 리가 없지.
긁던 다리를 내리고 딴청을 피웠다.
“어서. 아빠한테 와 봐.”
내가 가부좌를 틀고 무릎을 탁탁 두드리자 하나비가 다리 사이로 쏙 들어왔다.
처음이었다. 하나비가 무릎냥을 해준 건.
감격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면 도망갈까 봐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마음을 누르며 녀석의 보드라운 볼을 두 손으로 쓸어주었다.
손이 스칠 때마다 성격 나쁜 아이처럼 하나비의 눈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일찍 올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늦었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하나비의 꼬리가 내 팔목을 감쌌다.
어느 누가 말하기를 고양이가 꼬리로 감싸는 건 어깨동무를 하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내가 느끼기엔 어깨동무보다는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하나비랑도 노는 날 했어야 했는데 깊이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해.”
<아니다냐. 미안하다고 그만해라냐. 나도 화내서 미안하다냐.>
하나비가 몸을 돌렸다.
몇 초간의 눈 맞춤이 있었고 녀석이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하나비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근데 하나비, 집에 아무도 없을 때는 뭐해?”
염려되는 마음에 물었다.
오늘처럼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라면 그건 너무 속상한 일이니까.
<걱정 말라냐. 나도 나름대로 바쁘다냐. 잠도 자야 하고 랄이랑 먹꾸랑도 놀아야 한다냐. 이제는 포도 있어서 포도 돌봐줘야 한다냐.>
그때 자기 이름을 들을 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뺘뺘, 밥쪄! 밥쪄! 배고빠! 밥쪄!>
나는 바로 쌀밥 덩어리를 뭉쳐와 포의 저녁을 챙겼다.
그리고 하나비와 마저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도, 하나비 네가 많이 바쁘게 지내도 앞으로는 최대한 일찍 들어오도록 노력할게. 알겠지?”
하나비는 대답 대신 내 다리에 옆구리를 스쳤다.
* * *
“자, 다들 모여봐.”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호령했다.
“삼촌, 나도? 나도 모여?”
보라가 물었다.
“보라는 삼촌 옆에 앉아.”
“응!”
나는 보라에게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동생들 선물 주려고.”
“재밌겠다아아!”
보라는 귓속말이라는 걸 까먹었는지 큰소리로 들뜬 마음을 드러냈다.
“재미께따! 재미께따!”
제일 첫 번째로 온 랄이가 보라의 말을 따라 하며 춤을 췄다.
“랄이가 첫 번째로 왔으니까 랄이부터 선물 줄게.”
“삼촌, 내가 줄래! 내가!”
“그래. 보라가 줘.”
상황을 읽지 못한 포는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배를 대고 누워있는 하나비 옆에 몸을 붙이고 같은 자세를 했다.
반면 먹꾸는 벌써 냄새를 맡은 모양인지 고개를 쭉 내민 채로 핑크색 코를 벌름거렸다.
“첫 번째 랄이!”
내가 북소리를 냈다.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쨘! 목걸이!”
아, 보라에게 이게 하네스라는 걸 알려주지 못했다.
용도는 알려줬지만, 정확한 이름을 알려준다는 걸 깜빡했다.
그 덕분에 하네스는 졸지에 목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두구두구두구! 목꿔리! 목꿔리!”
당연히 하네스든, 목걸이든 둘 중에 어느 것도 모르는 랄이.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많이 불러주고 시선이 집중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행복한 모양이었다.
“랄이야! 이거 하구, 나랑 밖에 많이 놀러 다니자! 내가 앞으로 더 재미있게 해주께!”
보라가 진심을 담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랄이는 보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귀를 뒤로 바짝 붙였다.
제일 기분 좋을 때 랄이가 하는 행동이다.
그 덕분에 안 그래도 볼링핀처럼 맨들맨들한 머리가 민머리처럼 보였다.
귀가 안 보여서 더 그랬다.
“보라 조아! 보라 조아!”
랄이가 날개를 펼치고 보라에게 다가갔다.
“안아주께!”
보라는 하네스를 내려놓고 랄이를 꼬옥 안았다.
“랄이야, 앞으로 밖에 나가서 같이 산책할 거야. 온실보다 더 멀리 같이 가보는 거야. 어때?”
“같이 조아! 같이 조아!”
여전히 보라와 안고 있는 랄이가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분이 하늘 끝까지 올라간 모양이었다.
“한 번 해볼까?”
빨간 하네스를 랄이의 몸에 걸쳐보았다.
맞춘 듯이 딱 맞는다.
“답답하지는 않지?”
“조아! 랄이 조아!”
“나갈 때 하자. 지금은 벗고.”
내가 손을 뻗어 하네스를 벗기려는데 랄이가 줄행랑을 치듯 내 방으로 뛰어갔다.
“랄이 거! 랄이 거!”
그러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청만 높였다.
“참나.”
다음 차례, 하나비.
하나비는 한껏 동그래진 동공으로 눈을 반짝였다.
포는 하나비에게 약간의 그루밍을 받았는지 정수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하나비 선물!”
보라가 외쳤고,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나는 또다시 북소리를 냈다.
“개다리 나무랑 참치 과자아!”
“보라야, 개다리 아니고 개다래···.”
“개다리가 더 이뿐데에?”
“그치만 개다래가 얘 이름이야. 보라도 보라라고 안 부르고 보나라고 부르면 싫잖아.”
“보나 아니야, 보라야!”
“응. 그러니까 얘도 개다래 나무.”
“아라써!”
<줄 거면 얼른 줘라냐아아아! 선물을 왜 이렇게 늦게 주는 거냐아아아!>
하나비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는 울음소리를 냈다.
선물을 전달받은 하나비는 마따따비 나무를 끌어안고 잘근잘근 씹고, 발로 차며 놀았다.
그러다 다시 뭔가 떠오른 듯이 강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왔다.
“먹꾸 차롄데?”
<안다냐! 물어볼 게 있다냐!>
“뭐어어어?”
보라가 하나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마주 대며 물었다.
하나비는 머리를 세게 부비며 애정표현을 한 뒤에 선물로 준 과자를 앞발로 살살 건드렸다.
<이거는 선물이니까냐 내 마음대로 아무 때나 먹어도 되는 거냐아?>
“그건 안 돼. 그러면 한 번에 다 먹을 거잖아.”
하나비는 실망했다는 듯이 ‘흥’ 하고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줄 알았다냐. 근데냐, 나한테 준 선물인 건 아는데냐···.>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는 하나비.
<먹꾸랑 나눠 먹고 싶다냐. 지금 조금 먹꾸랑 먹어보면 안 되는 거냐아아?>
물그릇을 서로 건네주며 마실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다.
모르는 새에 녀석들 사이에 우애가 깊어진 모양이다.
“당연히 되지.”
나는 하나비에게 네 알, 먹꾸에게 네 알씩 참치과자를 줬다.
녀석들은 까드득까드득 맛있게 소리 내며 먹었다.
다른 집고양이들은 소리 없이 꿀떡꿀떡 삼키는 애들도 있다는데 우리 집 녀석들은 씹는 맛을 아는 듯하다.
“아오오옹···.”
먹꾸가 아쉽다는 듯 앞발을 허우적거렸다.
<안 된다냐!>
너무하네.
하나비가 그런 먹꾸에게 주저 없이 냥펀치를 갈겼다.
<나눠 먹는다고는 싶지만냐, 다 주고 싶은 건 아니다냐아!>
“아옹.”
먹꾸는 하나비에게 맞은 머리통이 얼얼한지 앞발로 서너 차례 문질렀다.
“다음은 먹꾸!”
“아옹!”
먹꾸가 내 발목에 두 발을 가지런히 올리고 눈을 반짝였다.
“먹꾸는 츄르사타아아앙!”
여러 브랜드에서 츄르 사탕이 출시되긴 했지만 성분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아 찝찝해서 사지 않았었다.
이 츄르 사탕은 방부제가 없고 개박하 함유량이 높다. 그리고 안개지대에서 재배된 슈퍼귀리가 섞여 있다. 먹꾸가 좋아하는 가다랑어 냄새도 솔솔 난다.
무엇보다 제조된 날짜와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보라는 츄르 사탕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내게 물었다.
“삼촌, 이거 사탕이잖아! 그럼 나두 먹어도 돼?”
“이건 고양이 사탕이라 보라는 안 돼. 보라는 사람 사탕 먹어.”
“아라써.”
떼쓰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보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츄르 사탕을 포기했다.
“아옹!”
먹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울음소리를 내더니 내 바지에 침을 뚝뚝 흘렸다.
“기다려봐. 이건 벽에 붙여야 먹을 수 있단 말이다.”
“말이다!”
보라가 내 말끝을 똑같이 따라 외쳤다.
피식 웃음이 났지만 보라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꾹 참았다.
“아옹!”
“따라와. 네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방에 붙여주마.”
“붙여주마!”
형 방으로 향했다.
먹꾸는 여기라고 표현하듯이 형의 책상 모서리에 볼을 거세게 부볐다.
“여기다 이거지?”
“이거지이?”
결국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보라 너 언제까지 삼촌 말 따라 할 거야?”
“몰라! 재미써!”
“그래. 재미있으면 됐어.”
“됐어!”
“참나.”
“참나!”
“어허, 그건 따라 하면 안 되지.”
“안 되지! 돼지? 돼지이? 꿀꿀!”
보라는 내 다리를 끌어안고 계속 아기돼지 놀이를 했다.
먹꾸는 혓바닥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열심히 츄르 사탕을 핥았다.
“보라야, 잠깐 동생들이랑 놀고 있어. 삼촌 온실 좀 갔다 올게.”
“같이 가쟈!”
“지금은 삼촌 혼자 해야 하는 게 있어서 그래. 이따 할 거 하고 보라도 부를게.”
“아라써!”
나는 돌아서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오늘의 외출은 보라의 침대 말고 또 다른 큰 목적이 하나 더 있었다.
거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쇼핑백 하나를 들고 온실로 향했다.
쇼핑백 안엔 간식이 가득 담겨 있다.
털뭉치들의 간식.
온실에서 녀석들의 간식을 하나씩 키워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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