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놀이처럼
짖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랄이가 현관문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다.
“랄랄랄랄랄랄! 랄랄랄랄!”
보라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랄이 우리 온 거 벌써 알고 있나 봐, 삼촌!”
랄이는 개새답게 냄새와 소리에 민감하다.
우리가 현관문에 더 가까이 다가서자 랄이의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짖는 소리가 헥헥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혓바닥을 내밀고 반가운 듯 활짝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곧바로 일정한 리듬으로 꽁지가 문을 스치는 소리도 들렸다.
“어떻게 알았을까아?”
내가 질문을 던지자 보라는 당연하다는 듯이 양손으로 각각 귀와 코를 가리켰다.
“여기랑 여기로!”
“오? 어떻게 알았어?”
“나도 다 알 수 있어!”
보라는 괜히 자신의 코와 머리칼 사이로 숨어 있는 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금은 조금만 알 수 있는데, 변신하면 보라도 다 알아.”
강아지로 변신했을 때는 청각과 후각이 훨씬 예민해지는 듯하다.
아마 나도 늑대폼이 되면 그럴 것 같다.
신체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것은 이미 경험했고.
“들어가자. 랄이 꼬리 떨어지겠다.”
“응!”
문고리를 돌렸다.
분명히 잠그고 나갔었는데.
아마도 하나비가 문을 열었다가 추워서 다시 닫은 거겠지.
하나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고양이답게 따뜻하고 포근한 곳만 찾아다니는 녀석이지만, 이 전 삶의 방식이 몸에 남아 있는지 종종 옥상에서 산책을 즐기는 듯했다.
“흐음···.”
나는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고양이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줘야지.
“헥헥, 헥헥! 랄랄! 랄랄랄랄! 헥헤헤헥!”
문이 열리자마자 랄이가 날아와서 우리를 반겼다.
“랄아아아아아!”
보라가 손을 뻗었다.
랄이가 보라의 손바닥에 얼굴을 마구 들이밀고 핥아주며 애정표현을 했다.
“꺄하하핫! 간지러!”
“랄랄랄! 랄랄!”
한참을 그렇게 나와 보라를 바쁘게 오가며 반갑게 맞이해주던 랄이는, 절대 떨어지기 싫다는 듯 보라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주둥이를 올리고 품에 폭 안겼다.
“랄이 귀여워···.”
보라는 아기를 안듯 랄이를 꼬옥 안으며 등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애들은 어딨지?”
내가 두리번거리는 찰나였다.
“냐아아아아아.”
내 방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더니 앞다리를 쭈욱 뻗고 기지개를 켜는 하나비.
팔을 있는 대로 뻗더니 눈을 질끈 감고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귀를 뒤로 젖이며 팔랑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미소 지으며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 하나비 제법이야. 인사는 언제 배웠대? 기특하네?”
하나비는 내 말을 거뜬히 무시하고는 반쯤 감긴 눈으로 꾸중하듯 말했다.
<일찍일찍 다녀라냐.>
살다 살다 고양이에게 잔소리를 들을 줄이야.
“문은 하나비 네가 열었던 거지?”
<그렇다냐. 그건 나만 할 줄 아는 거다냐아아아. 다른 녀석들은 절대 못한다냐아.>
“나가려다가 추워서 다시 들어왔구나?”
<깜짝 놀라서 이렇게 뛰어오르기까지 했다냐아아아아.>
하나비는 제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상황을 재연할 정도로 녀석에겐 충격적인 추위였나 보다.
<너무 춥다냐아아. 집에 들어와서 다른 표정을 짓기 힘들었다냐아아.>
“먹꾸는?”
하나비는 앞발로 형의 방을 쿡 찌르듯 가리키고는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것이라는 양 나의 침대 가운데 올라가 한두 바퀴 천천히 빙글빙글 돌다가 자리를 잡은 하나비. 우아하게 앞다리를 엑스(X)자로 교차하기까지 했다.
“참나.”
나는 헛웃음을 치며 형의 방으로 향했다.
“어디··· 아.”
먹꾸는 형의 책상 아래서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널찍하고 포근한 공간을 좋아하는 하나비와는 다르게 먹꾸는 그늘지고 아늑한 공간을 선호하는 듯하다.
“거기가 먹꾸 마음에 들었어? 좀 더 좋은 데로 정하지 그랬어.”
“아오옹.”
목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빼는 모습을 보니 내가 반갑기는 한 모양이다.
“그래그래, 거기 있고 싶으면 있어야지. 푹 쉬어.”
먹꾸는 지금이 딱 편안한 상태인 듯했다.
나는 손으로 먹꾸의 얼굴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러자 녀석은 고로롱거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 더 자.”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사를 하느라 바빴다.
기분 좋은 바쁨이다.
귀가했을 때 반겨주는 식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 * *
얼굴만 쏙 내놓은 듯이 털복숭이 상태인 보라.
“삼촌, 왜 매일 물을 뒤집어써야 되는 거야?”
보라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괜히 머리 위로 물을 한 번 더 끼얹어주었다.
“사람은 매일 씻는 거야. 몸이 깨끗해야 항상 건강하고,”
나는 어린이 샴푸를 손바닥 위에 펌핑했다. 순식간에 욕실 안은 달콤하고 귀여운 향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보라의 머리를 장난스러운 손길로 감겨주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는 거지.”
“그렇구나.”
“아침에 일어나서 치카치카도 잘하고, 어디 나갔다 오면 손도 뽀득뽀득 씻고, 목욕도 매일 잘해야 착하고 훌륭한 어린이야.”
보라는 샴푸질이 기분이 좋은지 연신 꺄르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중대장 같은 말투로 보라에게 물었다.
“보라, 착하고 훌륭한 어린이 할 수 있겠습니까!”
“좋아! 할 수 이써!”
“오오, 정말?”
보라는 고개를 틀어 나와 눈을 마주치며 해맑게 대답했다.
“응! 씻는 거 좋아! 이거 냄새도 맨날 맨날 맡고 싶어!”
보라가 샴푸 거품으로 우스꽝스러워진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와 함께 대답했다.
“이야, 보라 대단하다!”
보라는 개구진 웃음이 잔뜩 묻은 눈으로 나에게도 박수를 쳐주었다.
“삼촌도 대단해! 삼촌도 이렇게 매일 씻잖아! 삼촌도 훌륭하고 착한 어린이야!”
“삼촌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
“어르은!”
나는 씻고 있지 않았다.
보라를 씻기느라 옷이 물에 다 젖었을 뿐이지.
내가 옷을 입고 씻는다고 보라가 착각하면 안 될 텐데.
“랄랄!”
세숫대야에 들어가서 반신욕을 즐기고 있던 랄이가 몸을 흔들고 날개를 털며 요란하게 씻기 시작했다.
“아이 좋아! 아이 좋아! 랄랄! 아이 좋아아!”
몸을 다 씻었으니 이제 양치할 차례.
“보라 치카치카 하자!”
보라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어린이 치약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치카치카 한다!”
아, 어린이 치약을 아직 써보기 전이라 이것도 매울까 봐 겁이 나는구나.
“하하하하, 보라야 이거 진짜 하나도 안 매워. 이건 보라가 엄청 좋아할걸?”
보라와 함께 고른 치약은 초코맛 치약.
달달한 간식을 좋아하는 어린아이들에게는 불호이기 힘든 치약이다.
얼마나 인기가 좋으면 어린이 치약 코너에 있는 그 많은 치약들 중에서 3년 연속 베스트 1위라는 팻말이 크게 붙어 있었다.
“정··· 말? 근데 매워도 이제 참고 할 수 있어!”
“보라 최고다.”
내 말에 보라가 엄지를 높이 들어 보였다. 아까 만두가게에서 사장님에게 배운 엄지 척.
“체고!”
“응, 최고!”
나는 보라의 알록달록하고 자그마한 칫솔을 들어 가지런하게 치약을 짰다.
보라는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이 가득 차 있는 눈으로 칫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 이제 삼촌 따라서 해보자?”
내가 닦아줘야 할까 잠시 고민했는데, 보라가 양치하는 것에 재미를 붙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하든 놀이처럼. 그러면 처음 경험하는 많은 낯선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아! 우아아아! 상텬! 이어 마이뗘! 지쨔!”
치약이 일으킨 거품 때문에 보라의 발음이 우스꽝스러워졌다.
“그치? 상텬 마이 마찌?”
덩달아 나까지.
우리는 웃음이 멎는 순간 없이 행복하게 양치를 마무리했다.
양치를 하면서 이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양치도 이렇게 웃길 수 있구나.
새삼스레 내가 보라에게 해주고 싶었던 놀이 같은 일상이, 사실 알고 보면 보라가 내 일상을 먼저 그렇게 변화시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서 물기 닦자!”
욕실 문을 열고 나서기 전, 보라가 선심 쓰듯 내게 말을 건넸다.
“내가 특별히 허락해줄게. 삼촌도 다음부터 내 치약 같이 써.”
“뭐어? 하하하하하!”
“삼촌만 같이 쓰게 해줄게!”
“하하하하, 삼촌은 삼촌 거 쓸게.”
“진짜 괜찮은데? 삼촌 이거 안 매워! 맛있다니까? 삼촌 무서워하지 마. 치카치카 안 매운 거야.”
보라는 한참 동안 어린이 치약을 나눠주고 싶다며 나를 타일렀다.
조금 정신없기는 하지만 즐거운 목욕시간이었다.
* * *
“자, 여기 수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준비해놓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려던 찰나였다.
보라가 양손을 바닥에 짚고 엎드려 있었다.
랄이는 보라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머리를 바닥에 바짝 붙이고 양 날개를 펴고 완전히 엎드렸다.
“냐아?”
내 옆에 앉아 있던 하나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였다.
파다다다다다다다닥, 차차차찻.
보라와 랄이가 몸을 거세게 흔들어 물을 털었다.
“어엇, 터, 털지 마. 털지 마.”
나는 수건을 펼치며 이리저리 튀는 물을 막았다.
“냐? 냐아, 냐아아아아!”
예상치 못하게 물을 뒤집어쓰게 된 하나비는 비명을 질렀다.
“꺄하하하핫! 시원해!”
보라가 목소리를 높였고, 옆에 있던 랄이도 동의한다는 듯이 “랄” 하고 짖었다.
<짜증이 마구 난다냐아아아······.>
흠뻑 젖은 하나비가 도끼눈을 떴지만, 보라와 랄이를 해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 참······.”
나는 일단 수건으로 옆에 앉아 있던 하나비를 문질렀다.
“냐아아아.”
그 와중에 자다 일어나서 얼굴이 찌그러진 채 우리 사이를 지나가는 먹꾸.
“아옹?”
눈이 마주치자 괜히 목소리를 내고는 물그릇 앞에 앉은 먹꾸.
챱챱챱챱챱챱챱챱.
옥탑방의 깊어가는 밤은 평화로웠다.
* * *
“랄이는 거기서 자다가 자리 옮기고 싶으면 옮겨.”
일단 현재 랄이의 자리는 빨래건조대 위.
개와 앵무새의 특징을 모두 가진 랄이는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잔다.
정확히는 개처럼 자기도 하고, 새처럼 자기도 한다.
일단 우리 집에 오고 난 후에 이곳저곳을 발로 잡아보더니, 최종적으로 빨래건조대에게 합격표를 준 모양이었다.
“먹꾸는······.”
먹꾸는 이미 형의 방을 자신의 공간으로 정한 듯했다.
형의 베개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자리를 잡은 먹꾸.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눈빛으로 나를 옮기려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거기가 편하면 거기서 자.”
“아오옹.”
하나비는 내 침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은 채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삼촌, 얼른 자자······.”
목욕까지 하고 노곤노곤한 보라는 잠에 취해 있었다.
눈을 비비면서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어구구 졸려.”
나는 보라를 안아올린 다음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자자아.”
그리고 보라가 편안히 잠에 들 수 있도록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쓰담쓰담······.”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손으로 머리를 빗어넘겨준 게 떠올랐다.
형도 자주 내 머리에 손을 대곤 했다. 엄마처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은 아니었다. 거칠게 문지르듯 만지며 헝크러트렸지. 형 나름대로 나를 칭찬하는 방식이었다.
“쓰담쓰담······.”
이내 보라는 완전히 꿈나라에 들어갔는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들었다.
나는 보라에게 해주고 싶은, 필요한 것들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생각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잠에 들었다.
* * *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면서 아침이 왔음을 느꼈다.
보통 누가 깨운 것처럼 벌떡 일어나서 찌뿌둥한 몸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며 시작하는 게 내 아침 루틴인데.
아마 이것도 초인이 된 덕분이겠지.
“음······.”
믿을 수 없는 개운함을 느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눈을 떴다.
“응?”
보라가 앉아서 자그마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일어났어?”
나는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응!”
“뭐 하고 있던 거야?”
“쓰담쓰담!”
“응?”
보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삼촌이 나 쓰담쓰담 해줬잖아. 나도 삼촌 쓰담쓰담 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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