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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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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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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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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84화

DUMMY

마차가 서쪽으로 달려갈 수록, 실비아의 눈에 보이는 풍경은 점점 낯설어졌다. 녹색의 초원은 마지막 양치기의 곁을 스쳐 지나간 이후로 점점 줄어들었고, 바닥의 색깔은 갈색을 넘어 붉은 색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석양이 지평선에 가까워 짐에 따라 저 멀리에서 듬성듬성 나무가 심어진 커다란 바위산이 얼핏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차마 나무가 뿌리를 내릴 틈도 없는 커다란 바위 절벽은, 그 위압적인 자세로 산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기가 그 산이야.” 어느새 잠에서 깬 올리버가 차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원래는 시뻘건 민둥산이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나무를 심어 저모양이라도 된 거지.”


“오히려, 더 보기 흉해진 것 같아요.”


실비아는 듬성듬성 나무가 세워진 붉은 산을 보며, 화살받이가 되어 죽은 병사의 시체를 떠올렸다.


“보기좋으라고 심은건 아니니까요.” 펠릭스가 말했다. “아무튼, 저기만 넘어가면 우리 목적지 까지는 금방일 거예요.”


“손님들.” 차창을 열고 마부가 말했다. “오늘은, 저 산을 넘지 못합니다.”


“아, 그래요? 펠릭스가 그에게 말했다.


“해가 저문 뒤에 산을 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늘 밤은 역참에서 쉬어가는게 좋을 겁니다.” 마부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전문가의 말을 따르도록 하죠. 올리버. 당신도 별 불만은 없죠?” 펠릭스는 올리버를 향해 말했다.


“없어. 사실, 밤에 산을 오르는건 위험한 일이거든. 비록 마차를 타고, 길 위를 달려간다고 해도 말이야.”


“그래요. 그렇게 결정됐으니, 부탁해요.” 펠릭스는 말을 마치고 차창을 닫았다.


“괜찮을까요? 그 역참이요.” 펠릭스가 차창을 닫자, 실비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가요?” 펠릭스가 물었다.


“아까, 낮에 역참에 들렀을 때, 그랬잖아요. 마적들의 습격을 받은 곳이 있다고.”


“괜찮겠지. 마적들이 무슨 바보도 아니고, 멀쩡한 역참을 왜 습격하겠어?” 올리버가 말했다.


“그래요. 실비아. 그리고, 만약에 진짜 역참이 습격을 당했더라 하더라도, 그 때는 다른 역참을 찾아 옮겨가면 될 일이니까요.”


“역참이라는게 그렇게 흔한 거예요?” 실비아가 말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이슬 맞으며 잘 걱정은 하지 말라는거죠 뭐. 아무튼, 마적 걱정 따위는 다 쓸데없는 걱정이니까, 긴장 풀어요.”


그리고 펠릭스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얼굴로 거대한 암벽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저무는 해가 그림자를 드리운 바위 거인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그림자에 의해, 그 바위 거인은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평선에 붉은 태양이 닿았을 때, 그들은 역참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부가 역참의 관문을 넘어 마당에 마차를 멈춰 세울 때까지 아무도 그들을 맞이하러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역참이네요.”


실비아가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까지도 그 무시무시한 마적단에 의해 휩쓸린 불행한 역참의 모습이 남아있는 듯했다.


“아무도 없나?”


올리버 역시 차창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밭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낮에 만난 사람처럼.”


펠릭스는 별로 불안한 기색도 없이 중얼거렸다.


“해가 저무는데 밭일 하는 사람이 어딨어? 하다못해 저녁 준비라면 모를까.”


올리버가 시큰둥해서 말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지도 않아요.”


실비아가 조금 불안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불을 안 쓰고 저녁을 준비하나 보죠.” 펠릭스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


“아침 식사도 아니고, 밤에 찬 걸 먹으면 속이 더부룩 할텐데.” 올리버가 말했다.


“뭐가 됐든, 내려가서 살펴보면 될 거 아녜요? 가죠.”




펠릭스는 마차가 멈춰서자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렸다. 뒤이어 실비아와 올리버가 마차에서 내려, 그 음울한 얼굴의 마부와 마주섰다.


“손님들.” 마부가 말했다. “역참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그 안전한 곳인가요?” 펠릭스가 말했다.


“여기도 꽤 안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제가 말한 곳은 다른 곳입니다.”


그 때, 마부는 희미하게 웃었는데, 그 덕에 그의 얼굴은 조금 더 소름끼쳐 보였다.


“일단은, 안을 살펴보자.” 올리버가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마적들한테 빼앗긴 역참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외관상으로는.”


그래요. 가 보죠, 올리버. 아, 당신도 같이 오겠어요?” 펠릭스는 마부에게 말했다.


“저는, 말과 마차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마부가 말했다.


“말은 여기 말뚝에 묶어두면 될 일이고, 말 없이 마차만 누가 훔쳐가진 않겠죠. 그러지말고, 같이 가요.”


펠릭스가 마부를 채근했다. 그러자 마부는 영 못마땅한듯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느릿하게 말고삐를 말뚝으로 옮겨 묶기 시작했다.


“저 마부. 괜찮은 사람일까요?” 실비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왜요?” 펠릭스가 물었다.


“그러니까, 앞잡이일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조용하고 허름한 역참으로 손님을 몰고 가면, 그와 한패인 마적 패거리들이 달려들어서······.”


“내 참. 실비아. 낭만 소설을 너무 봤어요. 아까 말 했잖아요. 마부는 신용이 생명이라고.” 펠릭스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오르데움 마차 대여소에서도, 저 사람은 피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실비아가 중얼거렸다.


“진짜 신용없는 마부였으면, 아예 발도 못 붙이게 내쫓았겠죠. 안 그래요, 올리버?”


“뭐. 뭐가 됐든, 우리가 직접 보고 판단하자고.” 올리버가 말했다. “어쨌든, 펠릭스 너랑 나는 마적과 마주쳐도 살아날 길은 있으니까.”


“저는요?!” 실비아가 물었다. “저는, 어떡해요?”


“내 참. 걱정도. 우리가 도와줄게요. 아니면 새총 쏘든가요. 아, 아직 갖고 있었나요?”


실비아는 입을 비죽이고 펠릭스의 무례함에 대해 뭐라고 투덜거리며 조용히 바닥의 돌맹이를 몇 개 정도 주머니에 주워담았다.




역참 안은 어두컴컴했다. 조금 허름해 보였지만, 판자에 틈새가 없어 차가운 밤바람이 스며들지도 않았고, 벽에 붙은 촛대도 아직 단단히 고정되어 초를 올리는데 문제도 없어보였다.


“사람이 없나?”


펠릭스는 입구 바로 근처에 걸려있는 등불을 살피며 말했다. 등불은 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기름이 말라붙어 있었다.


“글쎄.”


올리버는 창틀쪽으로 걸어가, 창틀을 살펴보았다. 우선 눈으로 살펴봐도 가시가 일어나지 않은 창틀은 꽤 정성을 들여 사포질을 한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뻗어 슬쩍 훑어보아도 먼지가 별로 묻어나오지도 않았다. 강제 침입의 흔적이나 파손의 흔적은 물론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으스스해요.”


실비아는 몸을 살짝 떨며 역참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얼핏 움직이는 것을 종종 보았지만, 정작 다가가 살펴보면 그저 그림자의 변덕이었을 뿐이었다.


“손님들.” 그리고 마부가 말했다. “역참 주인이, 잠시 마을에 가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시설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그렇기는 하네요. 아, 그러면, 통성명이라도 하죠. 좋든싫든 간에, 오늘 밤은 같이 보낼 운명이니까요.” 펠릭스는 그에게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펠릭스.”


“벨룸이라고 합니다.”


마부가 펠릭스와 천천히 악수하며 말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벨룸이요?” 실비아가 말했다.


“왜요? 무슨 대단한 이름이라도 되나요?” 그러자 펠릭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아니에요. 그, 제가 착각했겠죠 뭐.”


“뭐 있어?” 올리버가 물었다.


“그, 사람 이름으로 쓰는 단어인줄은 몰랐거든요. 전쟁이란 뜻인데······.”


“철자가 다릅니다. 말을 자주 하지 않다보니, 제 발음이 조금 흐트러진 모양입니다.” 마부가 조용히 말하기 시작하자 다른 모든 소음들이 가라앉는 듯했다. “저는 장막이라는 뜻을 쓰는 벨룸입니다.”


“아, 네. 실비아에요.” 실비아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올리버라고 불러. 어쨌든, 잘 부탁하네.”




통성명을 마친 뒤에 펠릭스의 일행들은 역참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해가 저물자 저마다 밤을 지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실비아와 올리버는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고, 펠릭스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초에 불을 붙이거나 창고에서 기름통을 찾아 등불에 기름을 넣었다. 벨룸은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넣고 불을 붙인 다음, 말들에게 여물을 먹이러 잠시 밖으로 나갔다.




“음식들은 전부 새것이에요.”


지하실에서 채소와 고기를 바구니에 담아 계단을 올라오며 실비아가 말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던 곳 같아요.”


“그 마부의 말대로, 역참 관리자가 마을에라도 간 모양이지.”


올리버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솥에 물을 끓이면서, 실비아가 가져온 채소를 능숙하게 손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다고요?”


“거기서 술에 진탕 취했거나, 아니면 황무지의 무시무시한 괴담과 전설이 무서워 아침을 기다리고 있나보지.”


올리버는 실비아가 가져온 당근의 껍질을 줄줄 깎은 다음, 솥에 대고 당근을 뭉텅뭉텅 썰어 당근 조각들을 솥 안에 빠뜨렸다.


“황무지의 괴담? 전설? 그런게 있어요?” 실비아가 조금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아까 봤잖아? 그 붉은 바위산 말야. 황무지에 석양이 드리우면, 이 땅 위의 모든 것들이 참을수 없이 쓸쓸하고 슬퍼 보이거든. 그리고 밤이 되면 먼 곳에서 고요하게 울려퍼지는 들개와 늑대들의 울음소리, 바람의 노랫소리,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꼭 누가 구슬피 울고 있는 착각이라도 든다니까.”


“으스스해요, 올리버. 그만 말해요.” 실비아는 몸을 가볍게 떨며 말했다.


“네가 물어봐놓고는. 알았어, 실비아. 그럼, 거기 감자좀 깎아줄래?”


“그정도야 좋아요. 그나저나, 먹을 만 한 음식이 됐으면 좋겠는데.” 보글보글 끓는 솥을 조금 걱정스레 바라보며 실비아가 말했다.


“왜?”


“소금이 없어서요. 이걸로 맛이 나면 좋으련만.”




어둠의 군세가 지배하고 있던 역참 안으로 눈부신 빛을 흩뿌리던 펠릭스는 오래지 않아 역참 건물 안에서 어둠을 몰아냈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침대 아래나, 또는 옷장 문 너머, 책상이나 의자의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펠릭스는 그 정도의 어둠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그쯤에서 불 밝히기를 멈췄다.




역참 안에서 어둠을 몰아낸 펠릭스는, 이번에는 등불을 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역참의 정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이미 해가 거의 져버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펠릭스는 음산하게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가로질러 말들이 머무르고 있는 마구간의 문을 살짝 열고 등불을 비추었다. 그가 타고온 마차를 몰던 말 두 필이, 마구간에 느긋하게 앉아 쉬고 있었다.


말들의 앞에는 새로 넣은 건초가 있었다. 건초를 살짝 만져보니 습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잘 관리된 깨끗한 건초였다.


“누구 있습니까?” 마구간 문이 열리며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접니다. 펠릭스. 벨룸, 어디 다녀오는 길입니까?”


펠릭스는 등불의 불빛에 눈이 부시지 않도록, 갓을 조정하여 마구간 입구를 비추며 말했다.


“말들은 제가 잘 돌보았으니, 더이상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여전히 문간에 서서 벨룸이 말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도 별 생각 없이 그냥 한번 와 봤습니다.”


펠릭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굿간의 입구로 걸어갔다. 그는 벨룸과 거의 나란히 걸으면서, 이 낯설고 음울한 남자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서쪽으로 가신다고요?” 의외로 벨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서쪽에 대해 잘 아십니까?” 펠릭스가 물었다.


“산맥 너머는 붉은 사막입니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 많습니다.”


“아, 물론이죠. 저도 그쯤은 알고 있습니다.” 펠릭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뭐. 필요한걸 구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어서요.”


“상인이십니까?” 벨룸이 물었다.


“아니오. 상인은 아닙니다. 혹시, 제가 상인처럼 보이던가요?”


펠릭스가 묻자, 벨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먼저 온 손님 중에,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도 동쪽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혹시나 싶어 물어봤다, 이 뜻이군요. 저는 상인은 아닙니다. 저는 연금술사인데, 재료를 구하러 서쪽으로 가던 길입니다.”


벨룸은 펠릭스의 말을 듣더니,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연금술사.” 벨룸이 그 단어를 천천히 곱씹었다.


“그렇습니다. 혹시, 약이 필요하십니까?” 펠릭스가 묻자, 벨룸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뒤늦게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지금은 필요 없습니다.”


“과거에 필요했거나, 또는 미래에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뜻이군요.”


벨룸은 펠릭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역참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밤은 춥습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갑시다.”


“황무지의 밤에 대해 잘 알고 계시나요?” 펠릭스가 물었다.


“네. 무척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찬 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안으로 드십시오.”


펠릭스는 잠시 벨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재촉해 그를 따라잡았다.




불티를 튀기며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벽난로의 따스한 불빛을 받으며, 네 사람은 조용히 스튜를 한 스푼씩 떠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이따금 서쪽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 창문에 달라붙어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창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따스한 불과 빛이 머무는 역참 안으로까지 그 바람은 감히 들어오지는 못 했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진 않네요.”


줄곧 스튜를 먹던 실비아가 또다시 불어오는 바람을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듯, 한 마디 했다.


“여기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실례로군요, 실비아.” 펠릭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튜를 한입 떠 먹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 소리 좀 들어 봐요. 꼭, 유령이 제 귀에 대고 속삭이는것 같다고요.” 실비아가 말했다.


“걱정 마. 유령이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네 귓가에 대고 의미도 없는 말을 속닥거리기밖에 더 못하니까. 그런 점에서는, 귓가를 맴도는 귀찮은 파리와 같다고 볼 수도 있지.” 올리버는 스스로가 한 말이 웃기다는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올리버. 당신은, 유령이 안 무서워요?” 실비아가 올리버에게 물었다.


“안 무서워. 실비아. 너도 전쟁터에 나가 보면, 이 세상에 유령따윈 전혀 무서울 것이 없다는걸 뼈저리게 알게 될 거야.”


“왜요? 오히려, 더 무섭지 않아요? 죽은 병사들의 원망이라든가, 집념이라든가······.”


올리버는 실비아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피식 웃었다.


“죽은 사람의 원한에 어떤 분명한 힘이 있었다면, 전쟁 따윌 할 리가 없잖아? 전장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어떻게 달래려고? 전쟁에서 이긴 쪽이, 오히려 피해가 클 텐데.” 올리버가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요.”


“그리고, 유령 보다 살아있는 사람이 훨씬 무섭다고.” 올리버는 스튜를 한 스푼 뜨다가, 문득 마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벨룸. 당신 생각은 어때?”


“저는 유령이 두렵지 않습니다.” 벨룸이 말하자, 때맞춰 텅 빈 황무지에서 음산한 바람이 창문으로 불어닥쳐왔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는, 살아있는 사람도 두렵지 않습니다.”


“겁이 없군요.”


펠릭스가 벨룸의 말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그러자 벨룸은 다시 천천히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밤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불어오는 바람도 점점 더 음산함을 더해갔다. 실비아는 방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창문에 유령이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창틀이 덜컹거리고, 바람의 우는 소리가 들릴 때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베개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잠시 바람이 잠잠해진 틈을 타, 실비아는 재빨리 방에서 나와 일층 부엌으로 갔다. 마음을 안정시킬 만한 차라도 끓여마실까 하여. 그러나, 막상 일층 부엌으로 내려오자, 세 사람이 거기에 모여있었다.


“여기서 다들 뭐해요?” 잠옷 차림의 실비아가 눈을 깜빡이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별로 졸립지가 않아서요.” 펠릭스가 말했다. “그래서 차라도 한잔 할까 싶어서 내려왔는데, 올리버랑 벨룸이 있더라고요.”


“아, 뭐. 그냥. 잡담이나 하고 있었어.” 실비아가 자기를 쳐다보자 올리버가 말했다.


“잡담이요?” 실비아는 조금 의아한듯 물으며 벨룸을 곁눈질했다. 그 음울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잡담이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옛날 이야기라든가, 뭐 있잖아. 우리들은 너희 어린 애들이랑 달라서, 옛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출 수가 없거든.”


“저도 옛날이야기라면 꽤 할 말 많지만 말이죠.” 펠릭스가 끼어들어 말했다.


“아무튼, 이렇게 모여있을 거였으면 저도 불러주지 그랬어요.” 실비아가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를 끌어내며 말했다.


“자는 줄 알았죠.” 펠릭스가 말했다.


“자기는요. 바람 소리가 얼마나 으스스한지, 졸립다가도 바람이 불어오면 잠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고요. 진짜, 무슨 황무지 어딘가에 유령이라도 배회하는 것처럼······.”


“황무지에는, 유령이 있습니다.” 갑자기 벨룸이,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실비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네?” 실비아가 살짝 몸을 떨며 벨룸에게 말했다.


“황무지에는 유령이 있습니다. 듣고 싶으십니까?”


벨룸이 살짝 고개를 들어 실비아를 보았다. 실비아는 그의 무시무시한 회색 눈동자를 마주볼 용기가 없어, 먼저 시선을 피해버렸다.


“저는, 무서운 이야기는 질색이에요.” 실비아가 말했다.


“왜요? 악몽이라도 꿀까봐? 좋은 꿈을 꾸는 약이라도 하나 만들어 줄까요?”


“됐어요, 펠릭스. 그런거 아니에요.”


“그래, 뭐. 싫다면 싫은 거지. 하지만, 나도 그 유령 이야기가 궁금하긴 하군.” 올리버가 말했다.


“그러면, 저도 들을래요.”


“왜요?”


“저만 쏙 빼놓고 그러는거, 이젠 싫어서요.” 실비아가 어린아이 투정부리듯 말하자, 펠릭스는 씩 웃었다.


“거 참. 그래요. 그래서, 벨룸. 그 유령에 대한 이야기. 들려줄 수 있나요? 황무지를 배회하는 유령이라. 제가 살던 동쪽에는 황무지가 없거든요. 그래서, 더욱 궁금한걸요.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유령인지······.”


벨룸이 조용히 말하기 시작하자, 창문을 연신 두들기던 음산한 바람도 잠잠해졌다. 오직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끊길듯 말듯 들려오며, 벨룸의 잔잔한 목소리에 약간의 리듬을 더해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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