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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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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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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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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67화

DUMMY

글레이스 수도원의 부엌은, 빈 공간이나 작업대가 많아 연금술사가 약을 만들 재료들을 늘어놓기에 꽤 괜찮은 곳이었다.


“하지만 솥은, 영 별로인걸.” 화로 위에 걸려있던 솥을 내려, 수세미와 솔로 내부를 닦아내며 펠릭스가 말했다. 그의 옆에는, 솥 안에다가 바르려고 하는 것인지, 이상한 향이 나는 기름과 유액이 담긴 병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험하게 다룬 솥에 섬세한 약을 끓이기는 힘들긴 하지.” 옆에서 올리버가 말했다. “좀 도와줘?”


“됐어요. 힘으로 닦는게 아니거든요. 기술이 필요한 일이지. 그런데, 올리버 당신은 연금술에 관한 기술이나 지식은 별로 없잖아요? 마음만 고맙게 받죠.”


“그렇다면야.” 올리버는 더이상 솥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한참 솥을 닦고 나서, 펠릭스는 올리버의 도움을 받아 다시 솥을 화로 위에 걸었다. 그는 마당 우물에서 물을 받아와, 솥 안에 부어넣기 시작했다.


“그래서, 펠릭스.” 다시 올리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젊은 수도사들이, 왜 늦잠을 자는지 그 이유를 알겠어?”


“알 것 같나요, 내가?” 펠릭스가 조소하며 말했다.


“뭐, 넌 가끔 혼자서만 알고 넘어가는 일도 있으니까. 혹시나, 또 나 모르게 다 알아냈나 싶어서.”


“전혀요. 제가 알아낸 것이라고는.” 펠릭스는 양동이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켜며 솥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젊은 수도사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는것, 수도원에 유령이 나타난다는것. 그 정도가 전부인데다가, 둘 사이엔 별다른 상관도 없죠.”


“그런데도, 약을 만들어도 되는거야?” 올리버가 조금 걱정스레 묻자, 펠릭스는 별 것 아니라는듯 대답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평범한 사람들은 약의 포로에요. 약의 효과를, 이겨낼 수는 없죠. 저는 이곳의 젊은 수도사들에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수면욕이 쌓이다가, 특정한 시간이 되면 죽을듯이 졸린 약을 만들어 줄 겁니다. 그 약에다가, 마찬가지로 대강 일정한 시간이 되면 번쩍 정신이 드는 약을 아주 적절하게 배합할 거고요.”


“그게 돼? 무슨, 약에 알람 자명종이 달린 것도 아니고.”


“약효가 언제 어떻게 나타나게 하는지 정도는 조정할 수 있어요. 약을 일정한 시간에만 먹어준다면, 강제로라도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될테죠.”


펠릭스는 여기까지 설명한 다음, 다시 솥에 물을 부어넣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겠지만.”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 신경쓰이는 것이 있다는 투로 올리버가 말했다. “딥우드에서, 기억하지? 그때는 반대로 잠을 못자서 탈이었지. 지금처럼 그 원인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기양양하게 약을 만들어 줬는데, 우리가 보는 앞에서 잠 한 숨도 못 자고 벌떡 일어났잖아.”


“그 때는, 강렬한 환각 작용을 하는 꿈버섯 때문이었지만, 이곳 글레이스 수도원에는 그런 강렬한 환각 작용을 유발하는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어요. 그 때와는 상황이 다르죠.” 펠릭스가 대답했다.


“물에 섞여 있을지도.”


“이미, 시약을 이용해 검증한 뒤랍니다, 올리버. 그러니, 걱정 말아요. 약을 준 다음에는, 포도주를 한번 더 맛보여달라고 할 테니까, 기대하라고요.”


펠릭스는 히죽거리며 말하고는, 충분히 솥에 물을 부어넣고 불을 붙였다.


“뭐, 나야 좋은 술을 마신다면 좋다만. 그냥, 만에 하나라도, 뭐가 잘못될까봐 그러는거지. 그러면, 네 연금술사 체면도 말이 아니잖아? 그리고, 이 수도원에는 예전에 연금술사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그러는데, 그 사람과도 비교가 될 테고······.”


“그 이야기는, 그만 하죠!”


갑자기 펠릭스가 짜증을 냈다. 그래서, 올리버는 조금 놀랍고도 또 당황스러워 눈을 깜빡였다.


“펠릭스. 왜그래? 넌 다른 연금술사니, 약사니 하는 사람들과 비교당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들뜨지 않아? 내 실력이 훨씬 낫다든가 하는 이유로. 왜?”


“몰라요. 아무튼, 그 이야기는 관둬요.”


다시 씩씩거리며 펠릭스가 말했다.


“거 참. 왜? 너보다 잘난 연금술사기라도 해?”


올리버의 물음에, 펠릭스가 대답하지 않자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고 헛기침을 하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펠릭스. 그 암호 말야. 수도사들이 쓴다는것.”


“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펠릭스가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돼?”


“상관없어요. 그리고, 보나마나 별 것 아닐 걸요. 이 나잇대 남자들이 남자들끼리 모여서 굳이 암호까지 만드는 이유야 다 뻔하죠. 수도원장이나 다른 나이든 수도사 몰래,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즐거움. 규칙을 어기고 소소한 나쁜짓을 벌인다는 쾌감.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들끼리의 언어를 만들어냈다는 성취감, 그 언어를 공유함으로써 얻는 소속감. 다 시답잖은 이유들 뿐이에요. 어느쪽이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것과는 별 상관 없을겁니다.”


“꽤 단정적으로 말하는군, 펠릭스.” 올리버가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뻔하죠. 설마, 무슨 머나먼 과거에 잊혀진 고대의 무시무시한 악신을 되살리려는 비밀스러운 어둠의 지하조직이라도 만들고 있겠어요?”


“하! 그럴리가. 그건, 너무 과장된 농담이야.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수도원에서 금지하는 것들, 예를 들어 식탐, 욕정, 쾌락을 숭배하는 지하 조직을 만들었을지는 모르지.”


“술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이겠군요. 바로 옆에 양조장이 있으니 술 마시는 모임 정도야 얼마든 만들 수는 있겠어요. 그러면 굳이 그런 시답잖은 암호를 쓸 이유도 충분하군요.”


펠릭스는, 전혀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그렇게 말하고는 늘어놓은 재료들을 솥 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뭐, 어느쪽이든, 사실 네 약과는 별 상관없지만.” 올리버가 중얼거리자 펠릭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 신경쓰이면.” 펠릭스가 재료를 넣다 말고 올리버를 돌아보며 말했다. “약효가 어떻게 도는지, 내일 아침까지 여기 머물죠.”


“뭐? 왜? 언제는, 시간낭비라고 툴툴거리더니. 펠릭스, 무슨 바람이라도 분 거야?” 올리버가 이렇게 묻자, 펠릭스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딱히, 뭐 그런건 아녜요. 갑자기 무슨 불쌍한 마음이 든 것도 아니고.”


“그러면?”


“그냥 별 이유 없어요. 일시적인 변덕이라고나 할까.”


올리버는 펠릭스가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듯한, 또는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순간의 호기심으로 동료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실수를 하지 않고, 슬며시 웃으며 시선을 살짝 돌려주는 선에서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펠릭스가 막 솥에다가 세 번째 재료를 집어넣으려 할 때, 올리버는 부엌으로 향하는 복도 쪽에서 발소리를 들었다. 아주 다급하고, 또 가벼운 발소리였다. 이렇게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수도원 안에서는 아마 한 명 뿐이었다.


“펠릭스! 암호, 풀었어요!” 거의 누덕대기가 된 종이 한 장과, 마찬가지로 공 모양으로 구겨져 바닥을 나뒹굴던 종이를 들고 실비아가 부엌으로 달려들어왔다.


“그래요?” 그러나 펠릭스는 전혀 궁금하지 않으며, 또한 전혀 관심도 없다는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니, 기껏 풀었더니, 왜 그렇게 심드렁해요? 들어봐요. 이건 제 추측대로, 아주 단순한 형태의 암호였어요. 그림 하나가 문자 하나에 대응하는 암호였죠. 처음에는 조금 골머리를 썩혔는데, 동쪽 문자에 대입하고 있어서 그런 거였지 뭐예요. 서쪽 문자에 대입하니 단번에 풀렸어요. 그러니까, 무슨 내용이냐하면······.”


“무슨 내용이었지?”


관심없어보이는 펠릭스를 대신해, 실비아가 너무 시무룩해 지지 않도록 옆에서 올리버가 추임새를 넣었다.


“자정, 이층 우측 복도 중앙 방, 노크를 다섯 번.”


실비아가 말하고 나자, 부엌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런 뜻이에요.”


“그게, 대체 무슨 뜻인데.” 올리버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저야 모르죠. 이게 다라구요.”


“하하!”


갑자기, 솥에 재료를 넣고 나무 주걱으로 휘적이던 펠릭스가 웃었다.


“왜 웃어요?” 실비아가 묻자, 펠릭스는 흔쾌히, 아주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올리버. 아까, 우리가 한 말이 맞나본데요. 어쩌면, 이 수도원 안에 젊은 수도사들이 주축이 되어 무슨 비밀 집회라도 열고 있나보죠.”


“비밀 집회? 무슨 뜻이에요?”


“그렇잖아요?” 펠릭스가 실비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 밤중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비밀스럽게 모여야 할 이유가 달리 뭐가 있죠? 지난 밤에 봤던 그 유령을 숭배하거나, 아니면 유령에 홀린 사람들의 비밀 집회라도 있나보죠.”


실비아는 펠릭스의 말을 듣고, 평소라면 짜증을 낼 법도 했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금새 시무룩해졌다.


“결국, 별 도움은 안 됐네요.”


실비아가 암호를 푸느라 온갖 메모를 하다보니 거의 누더기가 되어버린 종이를 슬쩍 보며 말했다.


“파고들어보면 재미난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까지 할 생각은 아직 없어요.” 펠릭스가 대답했다.


“그러고보니, 펠릭스. 당신은, 무슨 일인지 다 알았어요? 파악했나요? 전에, 딥우드에서 처럼······.”


“올리버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걱정마요. 이번에, 딥우드에서와 같은 실수는 없어요. 나는 아주 효과가 분명하고 확실한 약을 써서, 이 약을 먹는 사람들을 태엽 인형처럼 제 시간에 픽 잠들고, 또 제 시간에 벌떡 일어나게 만들겁니다.”


“조금, 무시무시한 말이네요. 잘 모르면서, 그렇게 약을 써도 되나요?” 실비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딱히, 뭐 안될 것도 없잖아요? 부작용이 없는 약이기도 하고.”



“그래도, 뭔가 좀 꺼림칙해요. 약의 힘을 빌려, 사람을 그렇게 조종하다니.”


“조종이라뇨.” 펠릭스가 씩 웃었다. “약효죠.”


“그래도, 기분이 좀 그렇다는 말이에요.” 실비아가 말했다.


“그게 약의 본질인데 뭘 어쩌겠어요. 뭐, 기껏 풀어낸 암호가 영 시원찮은 것이라 기분이라도 좀 상했나본데, 걱정 말아요. 수도원장한테 약을 주는 김에, 포도주라도 한 잔 더 달라고 해 볼 테니까.”


실비아도, 올리버도, 딱히 더이상 할 말은 없었는지, 그들은 펠릭스가 약을 만드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펠릭스가 실비아에게 도와달라고 하여, 그녀는 바로 옆에서 펠릭스가 약을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옳다는 확신에 가득찬 모습. 그러나, 실비아는 펠릭스의 그런 모습 사이에서, 평소에는 못 보던 무언가가 느껴졌다. 조그마한 짜증이나 불안감과 비슷한 것.


“펠릭스. 당신, 혹시 긴장했어요?” 실비아가 물었다.


“네? 긴장? 누가요, 제가요?”


펠릭스는 당장에 장난스레 되묻더니, 혼자 깔깔 웃고 다시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기분탓인가보다 하고 다시 펠릭스가 약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다.




펠릭스는 완성된 약을 들고, 수도원장의 방을 찾았다. 지금은 그 강렬한 향을 태우지 않아서인지, 방 안에 별달리 냄새가 나지도 않았으며 실비아도 재채기를 하지 않았다.


“약입니다.” 펠릭스는 약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약인가?”


“먹으면 일정한 시간 후에 푹 잠들고, 다시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번쩍 깨어나는 약입니다. 이걸 제 시간에 먹기만 하면, 더이상 늦잠 자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흐음.” 수도원장은 뭔가 걸리는 것이 있기라도 한듯, 약병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부작용은 없나?”


“없습니다. 굳이, 이 약으로 바보같은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야.” 펠릭스가 대꾸했다.


“특별히 조심해야 할 사항은, 가령, 함께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있다던가. 뭐, 생선이라든가, 육고기라든가, 산채라든가, 아니면 술이라든가······.”


“술과 약을 같이 먹는건, 나 죽여줍쇼 하는것과 같고, 달리 같이 먹어서 탈나는 음식은 없습니다.”


“알겠네.” 수도원장은 약병을 챙긴 다음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해서, 약값을 줘야 할 텐데······.”


“아! 약값이요. 물론 받아야죠. 저는 아주 합리적인 비용을 받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게 없습니다.”


“내가 어릴 때 수도원에 다녀갔던 연금술사는.” 돈주머니를 꺼내다말고, 수도원장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우릴 도와줬었지.”


그 말을 듣더니, 펠릭스의 눈썹이 아주 일그러졌다.


“분명하게 기억하고 계십니까?”


“내가 기억하지 못 할 리가 없어. 그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는데······”


“제 생각에, 그는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 했을 것 같은데요.” 펠릭스가 끼어들었다. “약에는, 정당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고. 아닙니까?”


펠릭스의 말을 들은 수도원장은, 다시 헛기침을 하며 돈주머니를 꺼냈다.


“아, 그러고보니, 그랬던것 같기도 하고. 내가 잠시 착각했나본데. 아무튼, 얼마면 되겠나?”


“오늘 지어드린 약은 하루치니, 은화 5닢만 주시지요.”


“하루치! 좀 더 만들어 줄 수는 없나?” 수도원장이 말했다.


“금화 한 닢이면, 약을 만드는 방법을 남겨두고 가겠습니다.”


“금화 한 닢은, 좀 비싼데······.”


“저도 장사는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약 만드는 법을 헐값에 팔아치우면, 전 금새 손가락이나 쪽쪽 빠는 꼴이 되고 말겠죠. 금화 한 닢 입니다.”


그러자 수도원장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금화 한 닢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좋은 거래로군요.” 동전을 슬쩍 가져오며 펠릭스가 말했다.


“뭐. 그래. 약효는 확실하지?”


“연금술사를, 못 믿으십니까?”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습관상 물어봤네.”


수도원장은 도로 돈주머니를 어딘가에 넣고, 찰칵 열쇠를 돌려 잠갔다.


“뭐, 아무튼. 약에 관한 거래는 이걸로 일단락 됐습니다만.” 그러자 이번에는 펠릭스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꺼냈다.


“뭔가?”


“포도주 말입니다. 정말 괜찮더군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한번 더 맛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수도원장은 잠시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안될 건 없네만.”


“그럼, 부탁드립니다. 이곳의 포도주는 제법 맛이 괜찮더군요. 제가 어디가서 또 이런 질좋은 포도주를 맛보겠습니까?”


속내가 뻔히 드러나는 칭찬이었지만, 어쨌든 수도원장은 그런 것을 듣고서도 기분이 꽤 좋아졌는지, 다시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조장으로 가지. 아직, 포도주를 덜 내려서, 맛을 보려면 양조장까지 가야하네.”


“얼마든지요.”


수도원장의 뒤를 따라, 펠릭스의 일행들은 조금 가벼운 발걸음으로 포도밭을 지나 양조장으로 걸어들어갔다.




양조장에서, 수도원장은 작년에 팔고 남은 포도주 한 병을 창고에서 꺼내왔다. 그가 따라주는 포도주의 맛을 음미하며, 펠릭스는 입맛을 다셨다.


“제법 좋군요.”


“그래. 이래뵈도, 쓰러져가던 수도원을 도로 일으켜 세운 일등공신이니까.”


수도원장은 포도주의 병에 코를 살짝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어이쿠, 술은, 마시면 안 되는것 아닙니까?”


“아, 맞아. 하지만, 탐닉하지 않는다면 괜찮네.”


수도원장이 재빨리 병에서 코를 떼며 말했다.


“그래요. 탐닉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까?”


“나처럼, 수행이 깊은 수도사라면 얼마든지 알 수 있지.”


수도원장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뭐, 그렇군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나저나, 무슨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쓰러져가던 수도원을 단시간에 일으켜 세울만큼 대단한 이 포도주에.”


펠릭스는 와인잔을 슬쩍슬쩍 움직여, 붉은 액체를 흔들며 물었다.


“있지. 사실, 사람이 비법이야. 포도주를 빚는 사람은, 그야말로 보통 솜씨가 아니거든.”


“오호? 사람이요?” 펠릭스가 물었다. “수도사들이 빚는게 아닙니까?”


“아, 그러니까, 수도사 말야. 그게 그거지, 너무 단어 하나가지고 트집잡지는 말아주게.”


펠릭스는 잔을 흔들다가, 잔 안에 담긴 내용물을 쭉 들이키고 물었다.


“그러고보니, 막 수확이 끝난 지금같이 바쁜 시기에, 양조장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군요. 잘못하면 귀한 포도들이 쉬어버리거나, 말라 비틀어지거나, 아니면 썩을 텐데요.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아깝게 내버려도 되는 겁니까?”


그러자 그 말을 수도원장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술 빚는 사람이 낯가림이 워낙에 심해서 그렇네. 낯선 사람이 있는 동안에는 일을 못 해.”


“아, 그렇다면. 저희들이 방해가 되고 있다, 이 뜻이군요?”


“그러니까, 방해까지는 아니지만, 양조장에 자꾸 들락거리는 일은 자제해 줬으면 하네.”


수도원장이 궁색하게 변명했다.


“뭐, 앞으로 여기 올 일이 얼마나 더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그 술 빚는 수도사는 보통 힘든게 아니겠군요. 수도사로서, 수행과 예배, 미사에 잡무까지 모조리 하면서 틈틈이 술 빚으러 양조장까지 내려와야 하다니.”


수도원장은 헛기침을 했다.


“아닙니까?”


“그는, 그런 잡무들은 하지 않네. 술을 빚는 것이야말로, 몸과 마음을 단정케 하는 수행이니까.”


“참으로, 그럴싸한 이유입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듯, 있는대로 빈정거리는 말투로 펠릭스가 말하자, 수도원장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헛기침을 했다.


“그럼, 다들 마신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지.”


“물론입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수도원장님.” 얄미울 정도로 웃으며, 펠릭스가 말했다.




양조장에서 돌아온 펠릭스의 일행은 그 비좁은 방 안에 다시 모였다.


“이제, 어쩔거죠 펠릭스?”


“글쎼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하품을 하며, 펠릭스는 입맛을 다셨다. “약은 완성했으니, 돌아가도 별 상관은 없죠.”


“글쎄.” 올리버가 시원찮다는듯 말했다. “펠릭스. 하루쯤 더 머무는게 어떨까?”


“왜요?”


“딥우드에서도 그랬는데, 여기에서라고 그러지 말란 법도 없잖아.”


“뭐가요?” 펠릭스가 묻자, 올리버가 다시 말했다.


“네 약. 또 안 통할지, 어떻게 알아?”


“걱정 말라니까 그러네. 그 때랑은 상황이 다르다니까요. 약효는 확실한게 틀림없어요. 내가 말 한대로, 제 시간에 먹기만 한다면.”


“하지만, 저도 하루쯤 더 머물렀으면 좋겠어요.” 실비아도 말했다.


“당신도, 그 딥우드에서의 일 때문에 그러나요?”


“그것도 있고. 또, 그러니까······.” 실비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그 유령,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서요.”


“유령! 무섭다면서요?” 펠릭스가 놀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치면 계속 떠오를 것 같단 말이에요. 차라리, 오늘 밤 다시 가서 분명하게 확인하는게 좋겠어요.”


“대단한 용기로군.” 올리버가 말했다.


“대단한 성장이로군요.” 펠릭스도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하루 더 머무를 건가요?”


“흠.” 펠릭스는 잠시 멍한 눈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짜증스런 얼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루 더 머물죠.”


“그래, 잘 생각했어 펠릭스. 그런데, 표정은 왜 그모양이야?”


“그냥, 있어요. 암튼 그럼 일어나요 올리버. 실비아, 당신도 내려오고.” 이층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펠릭스가 말했다.


“뭐하려고?” 올리버가 말했다.


“이대로 밤까지 기다리면 심심하잖아요. 나가서 뭐라도 하려고요.”


“그래, 가서 장작패기 라든가, 밭에서 채소 기르기라도 돕게?” 돌리버가 말하자, 펠릭스는 씩 웃었다.


“아니오. 그것보다 훨씬 재밌는 일이죠.”


“그게 뭔데요?” 실비아가 물었다.


“양조장 탐험이죠!” 펠릭스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하고는, 뭐라 묻고 자시고 할 새도 없이 그대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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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8화 21.11.05 24 1 22쪽
57 57화 21.11.05 23 1 24쪽
56 56화 21.11.04 25 1 25쪽
55 55화 21.11.04 19 1 24쪽
54 54화 21.11.03 28 1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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