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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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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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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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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56화

DUMMY

실비아는 수첩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조그마한 수첩의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실비아는 솜씨좋게 연필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의 한 단면을 능숙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물론, 실비아는 펠릭스나,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있는 올리버에게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실비아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그녀가 수첩으로 뭘 하는지 알 방도는 없었다. 다만, 실비아가 가끔씩 수첩 위에 무언가를 한참동안 끄적이다가, 수첩을 가만히 보다가, 마침내 어딘가 만족스레 웃는 것을 보고, 그저 무언가를 하고 있겠거니 생각하는게 전부였을 것이다.




마차는 계속해서 서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달려갔다. 아무것도 마차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아, 조금은 지루하고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리듬으로 덜컹거리며 서쪽으로 달려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새하얗던 햇살은 노란 빛으로 빛나다가, 이제는 붉은 기운이 섞여 쓸쓸한 황혼을 드리우며, 만물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올리버. 슬슬 일어나요.”


“아, 어?” 잠시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올리버는, 차창 밖을 불쑥 내다보았다. “도착했어?”


“곧 도착할 것 같아요.”


“벌써 해질녘이군.” 올리버가 도로 앉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마르키아에 도착하면 우선 머물 여관부터 찾아야 하겠어요.”


“좋은 곳이면 좋을텐데.” 실비아가 말했다.


“나름 괜찮을걸요?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가려면 꼭 거쳐가는 마을들이 있는데, 마르키아도 그것들 중 하나거든요. 그러니 다른거라면 몰라도, 숙박업 정도는 꽤 괜찮을 거에요.”


“운이 좋다면 그렇겠지.” 마른 침을 삼키며 올리버가 말했다.


“운까지 필요하겠어요. 뭐가 됐든, 낮에 봤던 역참 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수첩을 탁 덮고, 소중하게 품 속으로 넣으며 실비아가 말했다.


“마음에 드나요?”


“생각보다 좋네요. 종이도 좋고.”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펠릭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가끔이지만, 당신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네요. 어디까지나, 가끔이지만요.”


가끔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실비아가 말하자, 펠릭스는 조금 서툰 연극 투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로부터 삼십 분 정도를 더 달린 끝에, 마침내 저쪽 앞으로 저무는 마지막 붉은 햇살을 받으며, 마르키아의 마을 이름이 새겨진 조그만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랗고 흉흉한 나무 토막으로 세운 목책 너머로, 나무로 세운 키작은 건물의 꼭대기가 빼꼼하게 보이는, 지금은 평화롭고 목가적으로 보이는 마을이었다.


“도착했네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느릿하게 마차는 관문을 통과했다.


“검문도 없네요.”


“반대쪽에 있어요.” 펠릭스가 말했다.


“반대쪽이요?”


“그러니까. 가끔 있거든요. 범죄를 저질러 놓고,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그래서 서쪽 경계선에 검문소가 많아요.”


“그거랑 이 마을에 검문이 없는게 무슨 상관인데요?”


“마을을 일종의 덫으로 쓰는 거죠.” 펠릭스가 말했다. “마을 입구에서 검문을 하면,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 마을을 피해 달아나겠죠. 저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황야 속으로. 그러면 찾아내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검문이 없으면? 그치들도 일단은 사람인만큼, 마을 안으로 들어와 보겠죠. 그러면 이제 독안에 든 쥐 꼴이 되는 거에요.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관문에는 엄격한 검문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멋모르고 동쪽 문과 같겠거니 하고 서쪽으로 가면? 그대로 붙잡히는거죠.”


“그게 잘 먹히나요?”


“예전에는요. 요새야, 알려질대로 다 알려진 마당에 무슨 소용이에요. 그래서 아예 산맥 근처에다 검문소를 곳곳에 세워버렸죠 뭐.”


“그렇군요.” 별로 흥미롭지 않다는듯 실비아가 대답했다.


“그런거죠. 아! 진짜 도착했네요. 자, 이제 다들 내릴까요?”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어주자, 가장 먼저 펠릭스가 내리고, 그 뒤를 따라 실비아가 마차에서 내렸다. 마지막으로, 올리버는 안에 흘린 물건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안에서 보았던 것처럼, 마르키아 마을은 아주 조용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키 작은 나무 건물들의 굴뚝에서는 한 줄기 연기들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고, 서쪽 산맥 위에서 바람이 불어 내려오면 나무 타는 냄새가 코끝을 살짝 맴돌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비록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넉넉함과 하루 일을 끝마친 보람 정도는 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어떤가요?”


“생각보다 작은 마을이네요.”


“서쪽 도로는 뚫린지도 그리 얼마 안 되었고, 아직 무역 루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골든 포트같은 항구도시에 비할 바는 못 되죠.”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쪽 땅에는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으니까.”


“땅에는 상처 안 남아요.” 올리버에게 펠릭스가 말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남아. 전쟁을 직접이든 간접적으로든 겪은 사람들은, 이 땅을 꺼리게 된다고.”


“뭐, 그건 일리 있는 말이기는 하죠.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인 문제도 있고요.”


“그건 뭔데요?”


“그건.” 펠릭스가 웃으며 말을 멈추었다. “우선, 여관부터 잡고 나서 생각해 볼까요?”




마르키아에서 마을 여관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건물들의 크기며 높이가 모두 엇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외관조차도 비슷비슷한데다가, 시장 거리라고 부를 만한 곳도 없어서 그런지 집과 가게가 두서없이 섞여있어, 여기가 어딘지 알기도 힘들었다.




결국, 한동안 거리를 걸어 해가 떨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들은 겨우 입구에 입간판을 세워둔 여관을 찾아, 문을 열고 안으로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관 일 층은 식당으로 쓰고 있는 듯했고, 이 층에는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가 있는듯 했다.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너머에 서 있는 주인에게 인사를 하며, 슬쩍 식당쪽을 돌아보자, 술을 파는 가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서오시오.”


여관 주인이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말했다.


“하룻밤 묵으려고 하는데.”


“은화 한닢씩.”


“여기요. 뭐, 생각만큼 비싸지는 않군요.”


펠릭스는 주머니를 뒤져 은화 한닢을 꺼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은화를 카운터에 올려놓고 다시 주머니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 미안합니다. 잠시.”


한참 주머니를 뒤지던 펠릭스는 조그맣고 허름한 천주머니를 어디선가 꺼내더니, 카운터 위에 거꾸로 탈탈 털었다. 땡그랑, 하며 은화 두 닢이 먼지와 함께 카운터 위에 떨어졌다.


“여기요.”


여관 주인은 미묘한 표정으로 은화를 챙기더니, 열쇠 세 개를 꺼내주었다.


“식사는 얼맙니까?”


“그냥 공짜로 드시오.” 조금 불쌍하다는 눈으로 펠릭스를 보며, 여관 주인이 말했다.


“공짜로 먹을 수는 없죠. 잠시만요.” 펠릭스는 다시 주머니를 뒤지다가, 동화 열 닢 정도를 몸 구석구석에서 찾아 꺼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은 다시 조금 불쌍한 눈으로 동화를 받았다.




식당의 조금 불편한 나무 의자에 앉아, 세 사람은 아무 재료나 되는대로 넣고 끓인 수프와, 딱딱하고 거친 흑빵을 앞에 내려놓고 마주 앉았다.


“펠릭스. 당신, 빈털터리에요?”


“약간의 쇼라고 할까요.”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주변 눈치를 살피며 펠릭스가 식당의 소음에 묻힐듯말듯 조용히 말했다.


“쇼요?”


“돈 많다고 티내면 위험하니까요. 빈털터리인척 하는게 좋아요. 안 그래요, 올리버?”


“그래. 정말, 옆에서 보기에도 불쌍해 보일 정도로 구질구질하더군.”


“대단한 칭찬이로군요.” 스푼으로 수프를 한입 입 안으로 떠 넣으며, 펠릭스가 말했다.


“그런데.” 실비아는 빵 조각을 손에 들고 머뭇거리며 말을 꺼넸다.


“뭐죠?”


“저쪽에 있는 사람들. 아까부터 우리들을 쳐다보고 있는것 같아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눈동자만 살짝 움직여, 실비아는 어느 테이블을 흘끗 가리켰다.


“외지인이 신기한가보죠.”


“그렇지는 않은것 같은데요. 그런 것 치고는, 계속 쳐다보고 있는걸요.”


“이쪽에서 먼저 가 볼까?” 올리버가 손가락을 뚜둑 꺾으며 말했다.


“소란 피진 말고요, 올리버. 아, 그리고. 식사는 마저 하고 가는게 좋지 않겠어요?”


“그래? 하긴. 싸움이라도 붙으면 저녁 식사는 물건너 가는 꼴이니까. 그나저나, 실비아. 눈치가 빠른데.”


“귀족이니까요.” 자랑거리라도 된다는듯, 실비아가 말했다. “누가 어디를 보고있는지 파악하는게, 귀족의 기본 소양 아니겠어요?”


“눈치를 본다, 이 말이죠.”


“눈치 빠른건 장점이거든요!” 실비아가,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뒤늦게 주변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다시 수프를 한술 떴다.


“뭐, 눈치가 빠른지 없는지 가끔 헷갈리지만.”


“당신이 자꾸 놀려서 그렇잖아요.”


“어이, 싸우지들 마. 펠릭스. 그럼 내가 저쪽으로 가서 한번 물어볼게.” 그새 식사를 마친 올리버가, 가볍게 어깨와 목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펠릭스는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가 다가가자, 이쪽 테이블을 힐끔거리던 사람들은 짐짓 모른체 하기 시작했다.


“올리버가 소란을 피진 않겠죠?”


“저 몸뚱아리를 봐요. 저기, 호리호리한 사람들이 올리버랑 싸울 생각이나 하겠어요?”


“그건 그렇지만요.”


“이럴 때는 참 편해요. 올리버의 몸이 큼지막해서.”


“별로,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는걸요.”


실비아는 올리버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들은 무언가 두런두런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위협적이거나 싸우려는 듯한 말투는 아닌듯했다.


“그래서, 왜 우릴 쳐다보고 있었을까요?”


“글쎄요. 어쩌면, 제가 연금술사인 티를 내고 다녀서, 저한테 볼일이 있을지도.”


“내 참. 퍽이나요.” 실비아가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사람들은, 당신 생각만큼 당신을 쳐다보지는 않아요.”


“그런가요?” 이쪽으로 돌아오는 올리버를 곁눈질하며 펠릭스가 말했다.


“왔어.”


“올리버. 뭐라던가요?”


“펠릭스. 네가 연금술사냐고 묻던데.”


“오, 그래요? 약사가 아니라, 연금술사냐고 물었단거죠?”


“그래.”


“그리고요?”


“자기네들을 도와줄 수 있냐고 묻던데.”


“아하! 봐요 실비아. 바로 알아보잖아요. 연금술사라고.”


실비아는 조금 못마땅한듯 시선을 떨구며 다시 수프를 입에 떴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죠?”


“물어본다고 했지.”


“어쩔까, 어쩔까. 실비아. 어쩔까요?”


“뭘요?”


“도와줄까요? 그냥 갈까요?”


“당연히, 도와줘야죠.”


“왜 그게 당연한 일이죠?” 펠릭스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게 가진자의 의무 아녜요?”


“시간낭비고, 제대로 된 값도 못 치를 텐데. 저 사람들은.” 펠릭스가 저쪽에서 여전히 이쪽 눈치를 보고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그래도. 돕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저는 별로 안 좋은것 같은데. 좀 더 그럴싸한 설득은 못 하나요?”


실비아는 생각하다, 말을 하려다 말고, 결국 이렇게 말해버렸다.


“그래야지 제 마음이 편해요.”


“불쌍한 사람을 보면 가슴이 답답한가요? 도와줘야 할 것 같나요? 저들이, 스스로 자기의 삶을 구원하지 못할것 같나요? 스스로가 성인 군자라도 된 것 같나요?”


“아니, 펠릭스. 궤변 늘어놓지 마요! 그냥, 제가 돕고 싶어서 그렇다는데 뭐가 그렇게 구구절절 이유가 필요해요? 저 사람들이 조금 불쌍해 보이는건 사실이지만, 그게 다예요. 무슨 저 사람들의 비극 어쩌고 저쩌고 까지는 저도 모르고, 감당도 못할 일이라고요. 그리고 당신은 어렵잖게 저 사람들 도와줄 수 있잖아요? 대단한 연금술사라면서, 좀 건전한 일에 그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면 좀 좋아요?”


“참으로 솔직한 이유네요.” 펠릭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솔직하게 다 말했어요! 그래도 당신이 싫다면, 제가 뭐 어쩌겠어요.”


펠릭스는 마지막 빵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걸어갔다. 몇 마디 말이 오갔고, 그 말을 듣지 않아도 그 사람들을 둘러싼 어두운 공기가 일순간에 밝아진 것 정도는 실비아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도와주기로 했어요?”


웃으며 돌아오는 펠릭스를 보고, 실비아가 조금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네.”


“잘 됐네요.”


“제가 아니라, 당신이.” 펠릭스가 실비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


“당신이. 무슨 사연인지 들어봤는데, 제가 굳이 나설 것도 없더군요. 그러니까, 아까 당신이 저 사람들 도와주고 싶다고 했잖아요?”


“네. 그렇게 말했죠.”


“직접 도와줘요.”


“···제가요?”


“그 편이, 당신한테도 좋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만······.”


“자, 그럼! 그렇게 된 겁니다!”


“아니, 펠릭스. 제 말도 좀 들어보고 가지, 그렇게 무턱대고······.”


“당신이 도와주고 싶다면서요? 진심이 아니었나요?”


“진심이었죠.”


“그럼 됐네요. 자, 어서 먹어요 실비아.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재빨리 끝내자고요. 대단찮은 이유로 연금술사를 찾던 거니까요.”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펠릭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요?”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뭘 걱정해요? 폴라 발목의 약도 당신이 만들어 줬잖아요. 무대에서 그녀는 훨훨 날아다녔고.”


“그렇네요.” 조금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실비아가 말했다.


“제 감기약도.”


“그건, 당신 덕이 컸지만.”


“뭐 어쨌든 잘 됐잖아요. 그러니 긴장 풀고, 밥이나 마저 먹어요.”


잠시 가만히 눈만 깜빡이던 실비아는, 마음 속으로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다시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실비아는 올리버와 펠릭스의 사이에 끼어, 이제는 벌써부터 대단히 감사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있는 사람들을 향해 왔다.


“안녕하세요. 연금술사의 도움이 필요하시다고요?”


“아, 맞아.”


“실례지만, 성함들이?”


“닉.” 콧수염이 거뭇한 남자가 말했다.


“타오.”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이어져 있는, 조금 얼굴이 붉고 살집이 있는 남자가 말했다.


“필리페.” 병난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고 이상한 반점 같은것이 나 있는 남자가 말했다. “아, 이건 그냥 점이니까, 신경쓰지 말고.”


“아, 네. 그래서, 무슨 도움이 필요하세요?”


“농사가 안 돼.”


“가축들은 살이 안 찌고.”


실비아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보고 싶어요. 더 자세히 알고싶어서요.”


“그럼, 축사 먼저 갈까.”


“그러든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타오가 앞장서서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축사는 마을 밖에 있었고, 당연하게도, 밭도 마르키아를 둘러싼 목책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관문을 통하여 마을을 빠져나왔다. 잠시 걸어가자, 저쪽에 조그만 나무 건물 한 채가 보였다.


“저기가 축사야. 뭐해?”


펠릭스와 올리버는 축사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을 잠시 서성였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가 있나요?”


“실비아. 잠깐 봐요. 어때요. 이 축사, 어때 보이나요?”


실비아는 축사를 잠시 둘러보았다.


“글쎄요. 저는, 이쪽 방면에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저건 어떻게 생각하나요?”


펠릭스는 축사 벽에 뚫린 커다란 창문들을 가리켰다.


“창문이네요. 유리는 없지만.”


“그래요. 바람이 잘 통할 것 같나요?”


“그래보여요.”


“좋습니다.”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타오에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보죠.”




정말 바람이 잘 통하는지, 축사 안에서는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다. 타오가 키우는 가축들은 소였는데, 사실 그리 깡마른지 어떤지 실비아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일렁이는 횃불의 조명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때?”


“글쎄요.”


“실비아. 잘 봐요 한번. 어때보여요?”


실비아는 눈쌀을 찌푸리고, 소의 멀뚱멀뚱한 눈을 마주보았다.


“모르겠는데요.”


“병난것 같나요?”


“멀쩡해 보여요.”


“기생충이 있어 보이나요?”


“그건 저도 모르죠. 어쩌면 있을지도.”


“좋군요.” 펠릭스는 의아해 하는 타오의 얼굴을 무시하고, 실비아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아, 소가 먹는 여물을 좀 봅시다.”


타오는 축사 옆에 붙은 조그만 건물과, 짚을 보관하는 창고를 연이어 보여주었다. 펠릭스는 횃불을 받아, 올리버에게 들게 하더니, 갑자기 지푸라기 한 묶음을 들어올렸다.


“뭐하려고요?”


“실비아. 잘 봐 둬요.” 펠릭스가 지푸라기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자, 그 안에서 쬐끄만 벌레 같은것 몇 마리가 사삭거리며 빠져나갔다.


“꺅!”


그리고 그중 한 마리를, 펠릭스가 잽싸게 붙잡았다. 그의 손에 붙들려 바둥거리는 벌레는, 청색의 화려한 등딱지를 가진 딱정벌레였다.


“아하! 좋군요. 이걸로 하나 해결했습니다.”


벌레를 유리병에 집어넣으며 펠릭스가 말했다. 그러나, 실비아도 타오도, 다른 두 사람도 그게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듯 눈만 깜빡였다.


“다음! 이제, 당신들은 뭐가 문제죠?”


“저기, 내 문제는? 약 안 만들어줘?”


“순서를 기다려요, 타오.”


그러자 타오는 시무룩해져서 뒤로 돌아갔고, 두 사람은 얼굴에 활기를 띄며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마르키아의 마을 밖 밭에서는, 감자나 고구마 따위의 작물들을 기르고 있었다.


“겨울이라, 이거밖에 없긴 한데. 작물들이 영 못자라. 크기도 작고, 맛도 없고.”


“자, 실비아. 이번에도, 어때보이나요?”


실비아는 어둠에 반쯤 가려진 밭을 향해 횃불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하긴, 그렇겠죠. 이건 조금 어려우니까.” 펠릭스는 바닥에 바짝 엎드리더니, 흙을 손끝으로 한 꼬집 집어 살살 만져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띠에 꽃혀있던 약병 하나를 골라 꺼내, 뚜껑을 열고 바닥으로 약물을 슬쩍 흘려보았다. 약물의 색깔이 바뀌자, 그의 눈이 반짝였다.


“어때요?”


“자, 실비아. 잘 모르겠을 때는, 물어봐야죠. 이봐요. 필리페, 닉. 당신 둘다 이 밭에서 일하는 농부인가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펠릭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뭘 기르죠?”


“감자나 고구마, 봄에는 배추라든가, 파, 양파, 뭐든 가리지 않고 다 길러.”


“그렇군요. 농사를 지은지 몇 년이나 되었는지?”


“올해로, 삼 년인가?”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마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비료는 쓰나요?”


“가축들 똥이나, 뭐 그런거.”


실비아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지만, 펠릭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달리 비료를 쓰진 않고요?”


“비싸고, 구하기가 힘들어.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가는데만 몇 시간에, 운송비가 만만찮게 붙더라고.”


“아하. 알아보긴 했군요. 그런데, 서쪽에 산이 있잖아요. 거기서 부엽토를 가져올 수는 없나요?”


두 사람은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부엽토?”


“낙엽 썩은 흙 말예요. 혹시, 농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그냥, 어쩌다보니······.”


“나는, 원래 다른데서 살고 있었는데, 떠돌이로 방황하다 여기 정착했어.” 필리페와 달리, 닉은 조금 생기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을 분위기가 너무 좋더라고. 그래서, 무작정 정착해서 일거리가 있나 알아보는데, 마침 얘가 같이 일할 농부를 찾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두 분 모두 농사에는 별 지식이 없군요?”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마주보더니, 펠릭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또 한건 해결했군요. 좋아요. 잠시, 시간을 좀 주시지요. 자, 실비아?”


“네?”


“가요. 해결하러.”


“어떻게요?”


“오면 알아요. 아, 서두르죠. 벌써 올리버가 하품을 하고 있으니까.”


“느긋하게 해.” 벌써 반쯤 잠에 잠긴 목소리로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느긋하게는요. 빨리 해치울테니까, 걱정 말아요. 자, 그럼. 다들 식당이든 어디든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금새 해결해 줄 테니까.”


그리고 펠릭스는 알쏭달쏭한 표정의 실비아와, 지루한 표정의 올리버를 데리고 먼저 마르키아 마을로 돌아왔다.




“뭘 어떻게 해요?”


“우선, 축사는 어떻던가요?”


“괜찮던데요. 바람도 술술 통하고.”


“그게 문제에요.”


“뭐가요?”


“겨울이 오잖아요. 춥다고요. 소들이라고 추위를 안 타겠어요?”


“아.” 실비아가 조금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런데, 저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설마 그걸 모르겠어요?”


“나무로 지은 건물에는, 구멍이 잘 뚫려요. 습기에 썩고 비틀리며, 벌레가 갉아먹기도 하죠. 아마 주인도 모르는 새에, 이미 건물이 많이 상했을 거에요.”


“그럼 축사를 뜯어고쳐야 하나요?”


“가죽이나 헝겊, 짚으로 덧대도 돼요.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약은 필요 없고요?”


“아, 약! 구충제는 이시기에 한번쯤 먹여주는게 좋죠. 그 외에는 보양식이면 충분하고. 그런데, 짚에 문제가 있었어요.”

펠릭스는 아까 축사 헛간에서 주워담은 벌레를 보여주며 말했다.


“으, 징그러.”


“이거, 독이 있는 벌레에요. 가뢰라고, 한두 마리는 먹어도 괜찮지만, 자꾸 먹으면 죽을지도.”


“그렇군요. 세상에, 그럼 어떡해요? 저 짚을 다 버려야 하나요?”


“소죽 끓일 때, 물에 빠뜨려놓고 나중에 벌레만 골라내든가 해야죠 뭐. 별 수 있나요.”


실비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펠릭스에게 물었다.


“그럼, 약은 필요 없네요?”


“구충제 정도 말고는.”


“농부들은 어떡해요?”


“아, 농부들! 거긴 좀 어렵죠. 실비아. 당신, 흙 볼줄 아나요?”


실비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농사가 안 되는게 당연한 땅이에요. 산도가 너무 높아요. 인분이나 배설물을 비료로 써서 그렇겠죠. 달리 비료도 안 썼으니, 아마 땅 속에 영양분도 얼마 안 남아있을테고.”


“그럼 어떡해요?”


“흙을 갈아엎어야죠. 제대로 된 비료도 쓰고. 정 안되면, 저기 산맥에서 부엽토라도 좀 긁어오든가.”


“양분이 없어서 그래도 못 자란다면서요?”


“거기에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그게 뭔데요?”


“땅콩이요.”


“땅콩?” 실비아가 물었다.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그 땅콩?”


“대스승님이 예전에 알려줬어요. 척박한 땅에는, 땅콩을 심으면 괜찮아 진다고. 바다건너 더운 땅에서 농사 짓는 사람들은, 두 해 연달아 농사를 지은 다음에는 반드시 밭에다가 땅콩을 심는다더군요.”


“그래요? 그게 대체 무슨 원리래요? 양분을 빨아먹는게 아니라, 도로 뱉어내기라도 하나요 땅콩은?”


“저야 모르죠. 근데, 원리를 몰라도 그런 효과가 있다니 한번 써 보자고요.”


대책없이 실실 웃는 펠릭스의 얼굴을 보며, 실비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번에도 약이 필요 없네요?”


“그렇죠.”


실비아가 조금 아쉽다는듯 한숨을 쉬었다.


“왜요?”


“그냥, 조금 김이 새서요.”


“약은, 가능하면 안 쓰는게 최고에요. 물론, 필요하다면 최고의 약을 써야 하는 거고.”


“납득은 가지만, 조금 아쉽네요.”


“그렇게 아쉽나요?”


“솥에다가, 이것저것 넣고, 빙글빙글 돌리고. 확 하고 떠오르고······.”


“당신.” 펠릭스가 웃었다. “사실, 연금술 좋아하죠?”


실비아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아니거든요!”


“티나는 거짓말은. 하여튼, 언제든지 궁금하면 물어봐요. 바로 여기, 위대한 연금술사 펠릭스 선생이 있으니까.”


“절대 안 물어봐요!”


“하하. 기다리고 있을게요.”


“저기, 이봐들.” 올리버가 마침내, 기나긴 하품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래서, 계속 길바닥 위에서 어정거릴거야?”


“아, 그렇네요. 그래서, 실비아. 가서 잽싸게 알려주고 여관으로 돌아가죠.”


펠릭스는 실비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혼자서 저쪽으로 쪼르르 가다가 중간에 돌아왔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당신이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빨리 따라와요.”


그리고 펠릭스는 다시 저쪽으로 쪼르르 가버려, 실비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뒤따라갔다.




세 명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자, 그들은 하나같이 대단히 감사하다며 연신 허리를 숙여댔다. 물론,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펠릭스는 그들을 비웃었지만, 실비아는 마음 한구석이 조금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실비아는 침대위에 누워 눈을 깜빡이며 혼자 괜히 실실 웃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기쁨.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그 감각에, 실비아는 괜히 기분좋게 뒤척거리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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