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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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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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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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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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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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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64화

DUMMY

수도원장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포도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수확이 끝나버린 포도밭은, 사실 별 볼것은 없었다.


“여기가 다 우리 수도원의 포도밭이야.” 수도원장이, 자랑스레 말했다.


“노예를 씁니까?”


“농부들이 있어!” 모욕적이라는듯 수도원장이 말했다. “젊은 수도사들이 수행을 대신해 도와주기도 하고. 좋은 곳이지. 한 여름에 왔더라면, 좀 더 볼거리가 많았을텐데······.”


“그래서, 이 포도밭과 젊은 수도사들이 늦잠을 자는 것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포도밭에 사람 무는 벌레라든가, 또는 식물에게서 인간에게 옮는 병이라든가······뭐 없나?” 수도원장은 대책없이 펠릭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일단, 잠시 보도록 하죠.”


“그래! 고마워. 그럼, 나는 도로 들어가 있을 테니, 볼 만큼 보고 알아서 찾아오게. 아, 수도사들에게는 말을 다 해 둘테니까. 마음대로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 있게.”


그러고는 수도원장은 자기 할 말만 끝내놓고, 벌써 걸음을 재촉했다.


“저런 사람이 수도원장이라고?” 올리버가 말했다.


“그러게요. 그냥, 사업가 같은데.” 옆에서 실비아도 말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죠.”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투로 펠릭스가 말했다. “그래서, 뭐 한번 보는 시늉이라도 하자고요.”


그래서 세 사람은 어기적거리며 갈색 빛만 도는 포도밭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실비아는 열매도 잎도 떨어진 포도나무를 살펴보며,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슬쩍 펠릭스 쪽으로 다가갔다.


“펠릭스.”


“왜요.” 실비아 보다는 훨씬 집중하여 포도나무를 살피며, 펠릭스가 말했다.


“의외로, 흔쾌하게 받아들였네요?”


“뭘요?”


“도와달라는거요. 당신은, 약값 못 받는 일은 안 한다면서요?”


“올리버가 포도주를 맛보고 싶다잖아요. 안 그래도, 당신 약과 관련해서 올리버한테 미안한 일도 많았으니까.이 기회에 그 빚을 청산한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거죠.”


“그런가요? 제가 보기엔, 다른 이유도 있어 보이던데요.” 실비아의 말을 듣더니, 펠릭스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불쑥 돌렸다.


“뭐요?” 그리고 펠릭스가 방어적으로 물었다.


“아까, 무슨 연금술사 이야기를 듣더니, 당신 표정이 바로 바뀌던데요. 혹시, 아는 이야긴가요?”


“몰라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펠릭스는 다시 포도나무를 잠시 살피는 척 하다가, 고개를 들어올려 저쪽에서 나무를 헤집고 있는 올리버를 불렀다.


“올리버! 그만 돌아가요! 여긴, 없어요!”


“그래? 알았어.”


그리고 나서 펠릭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실비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설령 아는 이야기라고 해도, 당신한테 설명해줄 의무도 없잖아요.”


다시 그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펠릭스가 말하자, 실비아도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었다.




포도밭에서 걸어나온 그들은 다시 길을 걸어걸어 수도원장의 방으로 갔다. 그러나, 문 앞에서 노크를 해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살짝 문을 열어보자, 방 안은 비어있었다.


“찾아오래더니.” 펠릭스가 툴툴거렸다.


“바쁜가보지.” 옆에서 올리버가 말했다.


“어디서 미사라도 하고 있는것 아녜요?” 실비아가 말했다.


“미사가 뭔줄은 알아요?” 펠릭스가 말하자, 실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뭔데?” 올리버가 묻자, 이번에는 펠릭스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래서 미사가 뭐냐니까?”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종교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식이 없는 것인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문 앞에서 기다린지 한 십분쯤 지났을까, 수도원장이 계단을 올라오다가 그들을 보고 황급히 방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 미안하네. 어디 일이 있어서.”


“미사라도 있었습니까?” 올리버가 묻자, 수도원장은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미사?”


“당신도, 그게 뭔지 모릅니까?” 올리버가 반 농담투로 말하자 수도원장은 기분나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미사란······.” 그리고 졸지에, 올리버는 생각지도 못한 삼십분 가량의 종교학적 지식을 얻게 되고 말았다.




“해서, 포도밭을 살펴봤습니다만, 별다른 건 찾지 못했습니다.”


조금은 원망스런 눈으로 올리버를 힐끗 돌아보며, 펠릭스는 수도원장에게 보고를 했다.


“정말인가, 그게?”


“수면이나 그 비슷한 증상을 유발하는 식물, 버섯, 곤충이나 그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펠릭스가 말했다.


“밭 전체를 다 둘러본건가?”


“아니오.”


“그러면.” 조금 얼굴이 일그러진채, 수도원장이 다시 말했다. “발견하지 못 했다는 것은, 어쨌든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는것 아닌가?”


“말장난을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어울려 주겠습니다만, 제 입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늦잠꾸러기가 된 것은, 포도밭 때문은 아니다’라고요.”


“하지만······.”


“포도밭에서 원인이 비롯된 것이라면, 얼마든지 약을 처방해 줄 수 있습니다.” 펠릭스가 조금 짜증을 부리듯 말했다. “저는 수면을 유발하는 다양한 증상의 병과, 그 약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아니, 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좀 더 자세히 봤으면 어떨까 하고······.”


펠릭스가 고자세로 나오며 짜증을 부리자, 수도원장이 꼬리를 말았다.


“아무튼 밭에는 별 원인이 없어보입니다. 애초에, 수확까지 다 끝나고 잎도 다 떨어진 포도밭에서는 별달리 볼 것도 없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그러면, 수도원 안을 좀 둘러보겠나?”


“일단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펠릭스가 대답했다.


“아, 그러면 부탁하네.” 수도원장이 딴데 정신 팔린 사람처럼 말했다.




수도원장의 방을 빠져나오며, 펠릭스는 영 어딘가 못마땅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그래요, 펠릭스?” 실비아가 물었다.


“실비아. 늦잠을 자는게 병이라고 생각하나요?” 펠릭스가 말했다.


“글쎄요. 밤에 늦게 자면,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도 있지 않아요?”


“저는 수도사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들이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 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그들도 사람일테니, 하루에 필요한 만큼의 잘시간은 보장해 주겠죠?”


“그렇겠죠.”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곳 수도원은 그렇게 엄격한 분위기도 아니고요. 그것도 아직까지는 모를 일이긴 하지만, 아무튼 빡빡한 일과에 다가오는 겨울의 추위를 못 견뎌서 늦잠 자는것 같지는 않단 말이죠.”


“그렇군요. 그래서요?”


“그리고, 수면을 유발하는 여러 병들을 떠올려 봤지만, 글쎄요. 그것도 하나같이 영 애매해요. 아주 유명한 원인이 있긴 한데, 곤충이 옮기는 병이에요. 하지만 그 곤충은, 이 지방에는 살지 않거든요.”


실비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고, 생각하다, 신기하다는듯 말했다.


“꼭, 우리 딥우드에 갔을 때랑 비슷하네요. 거기서는, 사람들이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못 잔다고 하소연 했잖아요? 정작 찾아보니, 꿈버섯 때문이었고.”


“그랬죠. 하지만, 여긴 버섯이 못 자라요. 봐요. 죄 돌이잖아요.” 펠릭스는 수도원의 석조 건물의 차갑고 딱딱한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 틈에서 피는 버섯도 있잖아.”


“이끼가 껴야죠.” 올리버가 제기한 가능성을, 펠릭스가 일축했다. “여긴 이끼도 없다고요. 청소는 잘 하나본데.”


“아무튼, 난 다른게 불만이야.” 올리버가 툴툴거렸다 “왜 포도주를 아직까지도 맛보여주지 않는거지? 처음에 말을 꺼낼때는 바로 한 병씩이라도 내줄 것처럼 말 하더니. 우린 손님이잖아. 그리고, 아까 수도원장이 한 말에 따르면, 귀한 손님이잖아. 안 그래 연금술사?”


“그렇게 볼 수도 있죠.” 펠릭스가 대답했다. “다음에 만나면, 직접 물어보든가요. 그런데, 그 수도원장. 아예 딴데 정신 팔린것 같더만. 제대로 대답이나 해 주련지.”


“그러게요. 결국, 돈 때문일까요?” 실비아가 말하자, 두 사람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돈?”


“우리가 태워준 그 심부름꾼이 가져온 편지가, 어느 귀족이 이곳에서 만든 포도주를 산다는 내용의 편지였다면서요. 한창 값을 흥정하고, 포도주를 어디에 담아 어떻게 포장하고.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게 아니겠어요?”


“일리있네.”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물론, 그거랑 수도사들이 늦잠자는 거랑은 전혀 무관하겠지만. 내 참. 늦잠 가지고 연금술사를 찾다니. 나를 무슨 태엽 감아 시간을 맞추는 자명종 알람 쯤으로 아는것도 아니고 무슨······”


툴툴거리는 펠릭스를 보고, 실비아는 다시 올리버에게 속닥였다.


“오늘 펠릭스,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그냥요. 뭔가, 오늘따라 안절부절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요. 긴장한 것처럼.”


“긴장? 저놈이? 글쎄. 내가 보기에는, 평소랑 같은 투덜이인데.”


“누가 투덜이에요! 다 들리거든요!” 펠릭스가 투덜거리자, 실비아는 눈을 깜빡이며 올리버에게서 슬쩍 떨어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도원장의 방에서 나와 수도원 마당으로 내려가자, 저쪽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젊은 수도사가 보였다. 그는 펠릭스와 눈이 마주치더니, 황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 혹시, 원장님께서 말씀하신 분들이······?”


“아마도 저인것 같네요. 연금술사입니다. 당신은?”


아, 저는 도미닉입니다. 수도사인데, 원장님께서 당신들에게 이곳 수도원 곳곳을 알려주라고 하셔서······.”


“아, 마침 기다렸던 참입니다.” 펠릭스가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수도원의 전체 시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시면?”


“우선, 몇 가지 묻고싶군요. 괜찮습니까?”


“아, 네.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도미닉이 흔쾌히 대답했다. “어디, 여기 서서 할까요? 아니면 어디 앉을 곳이라도?”


“당신 편한 곳으로 가죠.”


“그럼, 그냥 여기 서서 합니다. 수도원 안에는, 솔직히 맘편이 말 할 만한 곳이 없어서요.”


“이해합니다.” 펠릭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도미닉은 글레이스 수도원을 둘러싼 정원을 느릿하게 걸으며 펠릭스의 질문들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미닉. 혹시 젊은 수도사들이 밤에 잠들지 못 한 만한 원인으로 짐작가는게 있나요?”


“글쎄요.” 도미닉은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어보였다.


“혹시, 춘화집을 몰래 가져온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깜짝 놀라, 도미닉이 펄펄 뛰었다. “여긴, 기숙 학교도 아니고, 직업 학교는 더더욱 아니며, 농부들의 집단 숙소도 아닙니다. 신성한 수도원에, 어찌 그런 불경한 물건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실, 꽤 흔한 일이거든요. 뭐, 신성모독이든 아니든간에. 없다면 없는거겠죠.”


“그렇습니다.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 말이에요!”


“그럼, 도미닉. 음담패설집을 몰래 들인 사람은 없습니까?” 펠릭스가 또 민감한 주제를 묻자, 다시 도미닉이 얼굴을 붉히며 길길이 뛰었다.


“아니, 연금술사 선생님! 우리 수도원을 뭘로 보시고 그런걸 묻는겁니까?”


“있는지 없는지나 말 해요. 그리고, 난 당신들이 춘화니 음담패설이니 계집질을 하니마니 아무 관심 없으니까.”


“펠릭스! 좀, 말좀 가려서 해요. 듣는 내가 다 민망하네.” 옆에서 실비아가 항의를 했다.


“아무튼, 없습니다. 비록 우리 수도사들이 어린 것도 맞고, 피끓는 나이인 것도 맞지만, 그런 하찮고 불경스런 이유로 잠에 못 드는 것은 아닙니다!”


도미닉이, 자신을 포함하여 전체 수도사들을 대변하듯 변명했다.


“그런 이유였다면 차라리 편했을 것을. 알았어요 도미닉. 그럼, 달리 물어보죠. 혹시, 밤에 추워서 잠 못드는 일이 있습니까?”


“딱히, 없습니다.” 이번에도 잠시 생각해본 다음, 도미닉이 대답했다.


“그렇겠죠. 한겨울도 아니고, 이시기에 추워서 못 잔다는건 말도 안 되니까. 그럼, 또 묻죠 도미닉. 쥐, 벌레, 또는 요정이나 유령 기타등등 무엇이든 간에, 밤마다 수도원에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의 잠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나요?”


“아니, 아까부터 자꾸 뜬구름잡는 말씀만 하시는군요? 없습니다. 여긴, 유령들린 집도 아니고, 어린아이들이 뛰노는 마을 숲도 아닙니다. 경건한 수도원에, 왠 말입니까?”


“있는지 없는지나 말해요.”


“없습니다.” 조금 짜증이 난 목소리로 도미닉이 대답했다. “더 물어보실건 없습니까?”


“수도사들의 잠자리와 식사를 보고 싶군요.”


“그정도는, 알려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도미닉은 몸을 휙 돌려, 수도원에 붙어있는 별채 건물로 갔다.




수도사들이 머무는 숙소는, 사실 창문에 창살만 달려있지 않다 뿐이지, 감옥과 다를 것이 없었다. 좁고, 딱딱딱하며, 살풍경한 것이, 아마 이곳에 갇히게 된다면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실비아는 숙소를 둘러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습니까?”


“방 하나에 침대 네 개. 추워서 잠 못들 일은 없겠네요.”


“아니, 또 그런 외설스러운 말을······.”


“맨몸으로 뒤엉킨다는 말은 안 했어요. 그냥, 좁아 터진곳에 사람을 넷이나 밀어넣어 뒀으니,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열만으로도 버틸만 하겠다 싶어 한 말이죠. 아니면, 어디 켕기는 구석이라도?”


“없습니다!” 도미닉이 말했다.


“펠릭스. 젊은 수도사를, 너무 놀리지는 마.” 올리버가 점잖게 끼어들어 말했다. “기왕 돕는 김에, 좋은 마음으로 해 주자고.”


“어휴, 빨리 포도주를 내 달라고 하든지 해야지 원. 올리버.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서, 도미닉. 침실에서는 딱히 잠못들 이유는 없는것 같네요. 아, 혹시 잠깐 괜찮습니까?”


“무엇이요?” 도미닉이 물었다.


“침대라든가, 짐이라든가 좀 뒤져봐도 될까요?”


“아니, 당연히 안 됩니다! 무슨, 그런 걸 부탁이랍시고 하는 겁니까?”


“그렇다면야 할 수 없죠. 사생활이니. 아, 도미닉. 그런데, 저게 뭐죠?” 펠릭스가 숙소의 열린 문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가요?” 도미닉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사이, 펠릭스는 침대 밑을 뒹굴던 구겨진 종이뭉치를 잽싸게 집어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아, 제가 잘못 봤나보네요. 그만 나가죠. 이렇게 좁은데 갇혀있으니, 헛것이 다 보이네요.” 그러면서 펠릭스는 앞장서서 숙소를 벗어나버렸다.




이번에 그들은 수도사들이 일과를 진행하는 본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수도원장의 방에서 맡아보았던 그 강렬한 향에, 실비아가 다시 재채기를 했다.


“엣취! 아, 죄송해요. 으, 엣취!”


“향이 너무 강렬해.” 올리버도, 영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무슨, 시체 썩는 냄새라도 숨길 셈인가?”


“아니, 그럴리가 있습니까? 머리를 맑게 하고, 몸의 부정한 기운을 씻어준다고 하는 향입니다.”


“그럴리가.” 펠릭스가 이죽거리며 작게 말했다.


“네? 뭐라고 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향은 그렇다치고, 조명은 왜이리 어두운 겁니까?”


펠릭스는 벽에 드문드문 박혀있는 촛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촛대에는 초를 꽃을 자리가 세 개 있었는데, 정작 촛대마다 꽃힌 초는 하나씩 뿐이었다.


“어두운 분위기가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고 해서 그렇습니다.”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을 해줬으면 하는군요.”


펠릭스가 도미닉의 얼굴을 보며 말하자, 도미닉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양초 재고가 없답니다.”


“어디 썼는데요?”


“그, 재고 관리자가, 주문하는걸 잊었답니다. 그래서, 초를 아끼기 위해 이렇게 어둡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 계절에만?” 펠릭스가 슬쩍 물었다.


“네? 뭐라고요?”


“그게, 이 계절에만 그러는지, 아니면 평소에도 수시로 양초 주문하는 것을 잊어버리는지 물었습니다.”


“별 이상한걸 다 물으시는군요.” 도미닉은 잠시 생각한다음 대답했다. “그러고보니, 유독 이 즈음에 자주 실수를 하는것 같긴 합니다. 작년에도, 이맘때 쯔음에 어두컴컴하게 보낸 기억이 나는군요.”


“그러고도 잘도 재고 관리자 자리를 꿰차고 있군요. 참 대단합니다.”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참 이상하긴 합니다. 아,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볼까요?”


“당신들 식사를 준비하는 부엌을 좀 보여주시죠.”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다시 도미닉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부엌은 넓었지만, 정작 부엌에 쓸 도구들은 별로 없었다.


“휑하네요.”


그 부엌 안을 돌아다니며 펠릭스가 말했다. 그는 부엌의 벽이나 물을 길어오는 통로, 식기를 쌓아놓는 선반 따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살폈다.


“식사 준비도 수행의 일종이니까요. 여러 사람이 도울 수 있도록 넓게 만들었습니다.”


“정작, 화로는 하나 뿐인데.” 올리버가 말했다.


“음식에 탐닉하는 것은, 불경한 일입니다. 이렇게 공간이 넓은 것은, 한번에 많은 재료를 손질하면서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음식이 아닌 다른 것은 어떻습니까? 돈이라든가, 여색, 술, 오락을 비롯한 각종 쾌락······.”


“다 똑같이 불경한 일이지, 달리 뭐가 있겠습니까? 함부로 그런 것에 빠졌다간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고, 아주 비참하고 불명예스럽게 이곳에서 추방당합니다.”


펠릭스의 말을 못 들어주겠다는듯, 도미닉이 대답했다.


“포도주를 양조하는 곳이라면서요. 그런데, 술도 그렇게 엄하게 다룹니까?” 펠릭스가 묻자, 도미닉은 조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술은, 사실 잘 모릅니다. 수도원장님과, 포도주 양조를 전문으로 하시는 수도사님 말고는, 우리 수도사들은 양조장 근처에 얼씬도 못 합니다. 수확철이 되어 포도 옮길때나 그리로 가지, 우리들은 포도주 구경도 못 합니다.”


“네. 잘 들었습니다. 아무튼, 부엌은 잘 봤습니다. 식재료는 어디 보관합니까?”


“저쪽 창고입니다.” 도미닉은 창고의 문을 열어주었고, 펠릭스는 안으로 들어가 잠시 살펴보고 나왔다.


“도미닉. 그동안 안내해 줘서 고마운데, 저는 알아낸 사실들을 잠시 정리를 좀 하고 싶습니다.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을 그런 곳이 있습니까?”


“없지는 않습니다만, 대화를 나눌 곳은 없습니다.”


“그럼 알겠습니다. 마당에서 우리끼리 떠들고 있도록 하죠.”


“죄송합니다.”


“그럴것 까지야. 아무튼, 그럼 수고하십시오. 아, 다시 부르려면 어디로 가면 될까요?”


“아, 아무 수도사나 붙잡고 물으십시오. 수도원장님이 말씀을 해 두었기 때문에, 괜찮을 겁니다.”


“그렇다면야. 그럼, 우린 이만.”


그리고 펠릭스는 도미닉에게 가볍게 인사를 해 준 다음, 부엌을 빠져나왔다.




다시 글레이스 수도원 마당에 모여, 펠릭스는 다른 두 사람에게 가벼운 소감을 말했다.


“이상하군요.”


“그래 보여.” 올리버도 거들었다. “그래서, 대체 왜 늦잠을 잔다는 걸까?”


“글쎼요. 아마, 이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펠릭스는 아까 숙소 침대 밑에서 몰래 챙겼던 종이뭉치를 꺼냈다.


“뭐에요?”


“아까 주웠어요. 숙소에서. 어디, 뭘 끄적여놨나 보자고요. 보자······.”


그리고 펠릭스는 보란듯이 종이를 펼쳤고, 종이 위에 쓰여진, 아니, 그려진 전혀 낯선 무언가의 그림과 문자의 중간쯤 되어보이는 것들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뭐지?”


“저도 처음봐요.” 실비아가 말했다. “이건, 무슨 암호같은데요?”


“실비아. 당신이 모르는 문자일지도 모르잖아요.”


“펠릭스! 저는, 문자와 언어에 대해서는 꽤 공부했어요. 이건, 적어도 흔히 통용되는 문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에 썼던 문자도 아니에요. 무슨, 고어라면 모를까.”


“암호 같은건가?” 올리버가 눈쌀을 찌푸리고 종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면요. 그럼, 저한테는 별 쓸모 없는 물건이군요.” 펠릭스가 도로 종이를 구기려하자, 옆에서 실비아가 종이를 낚아챘다.


“해독하게요?”


“네. 할 수 있을것 같아요.”


“무슨 자신감으로요?”


“그냥, 그런건 없어요. 감이에요. 어차피, 제대로 된 수도사들이라면 경전 공부를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테니까, 암호를 만들거나 연구하는데 별로 신경쓰지 않았겠죠. 그러면, 이건 꽤 단순한 형태의 암호일지도 몰라요.” 실비아가 종이 조각을 살피며 말했다.


“그러면 뭐, 알아서 해 보시든가요. 나는 일단 입막음 용으로라도 약을 하나 만들어······음. 흠.” 말을 하다말고, 뭔가 시원찮다는듯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왜그래?”


“올리버. 우리, 우선 그 양조장에 먼저 가 보죠.”


“나도 같이 가요!” 종이를 보던 실비아가, 눈을 돌리고 잽싸게 말했다.


“당신은 암호 푼다면서요.”


“양조장은 구경하고 싶단 말이에요.”


“그럼 그러시든지. 하고싶은대로 해요. 어차피 나는 그 암호인지 뭔지에 별 중요한 내용은 없다고 확신하니까.”


“그건, 두고 볼 일이죠.” 실비아가 종이를 꽉 쥐며 말했다.


“아무렴요. 방금 막 도미닉을 쫓아냈는데, 그새 찾아내야 하다니. 원. 조금만 생각해 볼 걸 그랬나. 어이, 이봐요! 그래, 당신. 도미닉이라는 수도사를 찾고 있는데······.”


펠릭스가 다시 도미닉을 찾아오는 동안, 실비아는 펠릭스에게서 빼앗은 종이를 다시 살펴 보았다. 원, 사각형, 삼각형, 그리고 이런저런 낙서에 가까운 모양들. 질서가 있는듯 하면서도 무질서해 보이는 그 낙서를 보며, 실비아는 그 안에 무슨 뜻이 담겨있을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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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78화 21.11.15 25 1 22쪽
77 77화 21.11.15 27 1 25쪽
76 76화 21.11.14 30 1 20쪽
75 75화 21.11.14 29 1 23쪽
74 74화 21.11.13 28 1 23쪽
73 73화 21.11.13 28 1 20쪽
72 72화 21.11.12 25 1 19쪽
71 71화 21.11.12 24 1 21쪽
70 70화 21.11.11 28 1 19쪽
69 69화 21.11.11 25 1 20쪽
68 68화 21.11.10 22 1 21쪽
67 67화 21.11.10 22 1 20쪽
66 66화 21.11.09 25 1 23쪽
65 65화 21.11.09 24 1 20쪽
» 64화 21.11.08 25 1 22쪽
63 63화 21.11.08 24 1 24쪽
62 62화 21.11.07 22 1 28쪽
61 61화 21.11.07 27 1 21쪽
60 60화 21.11.06 22 1 26쪽
59 59화 21.11.06 26 1 20쪽
58 58화 21.11.05 24 1 22쪽
57 57화 21.11.05 23 1 24쪽
56 56화 21.11.04 25 1 25쪽
55 55화 21.11.04 19 1 24쪽
54 54화 21.11.03 28 1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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