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조회수 :
6,006
추천수 :
188
글자수 :
1,774,925

작성
21.11.10 18:10
조회
21
추천
1
글자
21쪽

68화

DUMMY

실비아는 지금까지 펠릭스와 한 달 남짓한 시간을 함께 다니면서, 이제는 그에 대해 제법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습기에 약한 점이라든가, 희한한 잠꼬대가 있다든가, 아무거나 가리는거 없이 잘 먹는 척을 하면서도 뒤에서는 달콤한 음식을 좋아한다는가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약에 관련된 일에서는 자존심을 세운다는 것도.


그런 실비아에게, 이곳 글레이스 수도원에서 펠릭스가 보이는 태도는 조금 낯선 것이었다. 그는 실비아가 학교에서 종종 보았던, 다른 사람을 향해 질투와 경쟁심을 불태우는 사람과 비슷한 눈을 뜨고서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수도원을 슥 빠져나와 양조장으로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미묘하게 나쁜 짓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실비아는 가슴이 뛰었다. 긴장과 불안 때문만은 아니었고, 호기심과 즐거움의 영향도 분명 있었다.


“양조장이군요.” 자물쇠로 잠긴 울타리 앞에서 실비아가 말했다.


“열쇠 없지?” 올리버가 말했다.


“강력한 산으로 녹일까요?” 펠릭스가 농담하자, 두 사람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있어봐. 이런 울타리는, 꼭 찾아보면 한두 군데쯤 낡은 부분이 있거든. 부러진 곳이라든가, 개구멍이라든가, 뭐 그런거.”


그렇게 말하고는 올리버는 울타리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펠릭스.” 그리고 올리버가 울타리를 살펴보는 동안, 실비아가 물었다.


“왜요.”


“왜 하필, 양조장이에요?”


“재밌잖아요. 수도원장이 꽁꽁 숨기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리고, 아까 가만히 생각하다가 알아챈건데, 뭔가 이상해서요.”


“뭐가요?”


펠릭스는 씩 웃으면서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어제나 오늘, 수도원 안에 새롭게 들어온 사람도, 나간 사람도 없어요. 식사시간에 식당에 있던 사람들도 모조리 봤던 얼굴들이고. 그럼, 이 양조장에서 지금 술을 빚고있는 수도사는 누구죠?”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한 마디로, 술 빚는 수도사는 수도원 본채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러니까 잡무 말고 예배나 미사, 수행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여기 혼자 틀어박혀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걸, 수도사라고 부를 수나 있나요?”


“그야······.” 실비아는 잠시 생각했다. “양조업자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네요.”


“그래요. 그래서,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요. 그리고, 지금까지 돌아다니면서 얼굴 한 번 못 본 것도 신경쓰이고.”


“그래서 양조장에 돌아온건가요?”


“그런 셈이죠. 어때요, 재미있지 않나요?”


실비아는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역시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흥미롭긴 하네요.”


“어이! 이쪽이야!” 저쪽에서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나 보네요. 가죠, 실비아.”


그리고 펠릭스와 실비아는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갔다.




울타리 한 곳이, 땅이 물러서 푹 꺼진 것인지, 슬쩍 기울어 있었다.


“뛰어넘을수 있겠군요.” 펠릭스가 말했다.


“내가 넘겨줄 테니까, 쓸데없는 소리 마.”


“이런, 고맙기도 하지. 그럼, 부탁해요 올리버.”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울타리 앞에 바짝 붙어 서서, 두 다리를 슬쩍 벌리고 자세를 잡았다. 펠릭스가 울타리를 향해 뛰어오자, 올리버는 자기의 두 손을 단단히 붙잡아 발판을 만들어, 펠릭스가 발을 딛자 있는 힘껏 위로 밀어냈다.


“넘어왔어요!”


올리버의 도움을 받아 펠릭스가 넘어가자, 이제 올리버는 실비아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저기, 올리버.” 실비아가 말했다.


“왜? 겁먹을거 없다. 내가 잘 받쳐 줄 테니까.” 올리버가 안심하라는듯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저기, 풀에 조금 가려있긴 한데, 저거 개구멍 아닌가요?”


실비아는 울타리 저쪽 옆에, 뜬금없이 놓여있는 돌멩이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구멍을 가리켰다. 그러자 올리버는, 자세를 가다듬고 그쪽으로 걸어가, 발끝으로 돌을 휙 밀어냈다. 거기에는, 사람 한 명쯤 어렵잖게 드나들만한 개구멍이 있었다.


“올리버. 당신이 들어오기에는 조금 작네요.” 구멍 안으로 쑥 들어간 실비아가, 이쪽을 내다보며 말했다.


“난 저걸 타넘고 들어가면 돼.” 올리버는, 쓴웃음을 지으며 울타리를 타넘었다.




양조장 건물을 향해 들어서며 펠릭스가 올리버를 놀렸다.


“올리버. 눈 밝은 당신도, 가끔은 못 보고 지나치는 것도 있군요.”


“나도 사람인이상, 가끔 실수할 때도 있지 뭘.”


“그래요. 펠릭스, 너무 놀리지는 말아요.” 실비아가 말했다. “그나저나, 여긴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네요.”


“전에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올리버가 말했다.


“아, 네. 뭔가, 밖에서 봤을 때 보다 안이 좁은것 같아서요.”


“건축가가 재료를 때 먹었나보죠. 아니면 실력이 없었거나.” 펠릭스가 말했다.


“비밀 공간이라도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그 비밀 공간 안에, 술 빚기 전담 수도사가 틀어박혀 있겠군요. 지나치게 솜씨가 좋다는 이유로. 그리고 평생 갇혀서 술만 빚다 가는거죠.”


펠릭스의 농담은, 별로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양조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실비아는 어디선가 삐걱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실비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글쎄.”


“딱히요. 어디 쥐라도 지나갔나보죠.”


실비아는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하고는, 신난 얼굴로 양조장을 느긋하게 구경하는 펠릭스를 힐끗 돌아보았다.


“해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일단은, 찬찬히 한번 살펴보려고요. 그 수도원장놈이, 안내해 준답시고 순식간에 양조장에서 쫓아내다시피 했으니. 이 기회에, 천천히 보자고요.”




펠릭스는 실비아에게 대답을 해 주고는 저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를 따라가려다가, 실비아는 창고쪽에 포도가 쌓여있는 것을 다시 보았다. 누군가, 선별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포도송이들이 커다란 양동이에 조금 담겨 있었고, 바닥에는 옮기다가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포도알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펠릭스를 따라 양조장을 구경하던 실비아는, 딱히 사람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찾지는 못했다.


“숙성실에 가 보고 싶었는데.” 펠릭스가 팔자좋게 말했다.


“거긴, 자물쇠로 한번 더 잠가둘 법도 하지.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곳이니까.” 올리버가 옆에서 말했다.


“그래서, 결국 양조장 안에는 별달리 볼 게 없었네요.” 실비아가 여전히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벽과 천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기분탓이겠지. 그럼, 더 볼 것도 없고. 도로 나갈까?”


“하긴, 죽치고 있어봤자 술도 못 얻어 먹을 텐데, 슬슬 나가죠.”


펠릭스와 올리버가 먼저 양조장을 빠져나갔고, 실비아는 영 무언가 마음에 걸려 머뭇거리며 그들을 따라가다가, 다시 벽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멈춰섰다.


“안 와요?” 양조장 밖에서 펠릭스가 말했다.


“잠시만요. 잠시만, 확인해 보고요.”


실비아는 펠릭스에게 대답한 다음, 조심스럽게 양조장의 벽면을 손으로 훑으며 지나가다가, 보이지 않는 틈새를 손끝에서 느끼고 멈춰섰다. 눈에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얇은 틈새가 벽 한 군데에 나 있었다. 그 틈새는 위로도, 아래로도, 옆으로도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문 크기만큼 나 있었다.


“찾았어요!” 양조장 밖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고, 실비아가 말했다.




그 비밀 문 앞에 모여, 세 사람은 잠시 소리없는 회의를 했다. 당연하게도, 이걸 열어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올리버가 다시 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옆에서 실비아가 보챘다.


“글쎄. 이 쪽에서 여는 방법이 따로 없나? 뭐 문 손잡이는 커녕 열쇠구멍도 없는데.”


“힘으로 부숴볼까요, 올리버?”


“농담 마 펠릭스. 폐가도 아니고, 수도원의 양조장 벽을 부쉈다가는, 장난으로 못 넘어간다고.”


“하기야. 그건 좀 문제긴 하군요. 그런데, 실비아. 아까부터 뭐해요?”


벽을 다시 가만히 살피다가, 한 군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실비아를 향해, 펠릭스가 물었다.


“여기, 틈이 있어서 안이 보여요. 좀 어두운데······.”


실비아는 조그만 구멍을 통해 벽 너머의 공간을 살폈다. 숨을 죽이고 쳐다보고 있자 갑자기, 벽 너머에서 칙 하는 소리가 나더니 빛이 반짝였다. 누군가, 안에서 초를 켰다. 방 안에 수도사의 옷을 입은 사람의 몸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구멍의 높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실비아는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좀 보여요?”


펠릭스가 말하자마자, 그 몸은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갑자기 벽 쪽으로 다가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하필이면, 그 사람이 얼굴을 갖다붙인 것이 실비아가 엿보던 구멍 근처여서, 실비아는 그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어젯 밤에, 복도에서 보았던 바로 그 유령이었다.


“꺅!”


실비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양조장의 문을 박차고 달아나자, 두 사람도 그녀를 잽싸게 따라갔다.




실비아는 포도밭 한 가운데쯤 와서야, 올리버와 펠릭스의 도움으로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 유령이, 저기 있었어요!”


양조장을 가리키며, 실비아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진짜요?”


“진짜라니까요!” 실비아가 짜증스레 대꾸했다. “벌써, 세 번째 묻는거잖아요 펠릭스! 절 그렇게 못 믿어요?”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그만 좀 물어봐요.”


“그래. 그래서, 아무튼. 그 유령이 양조장에 있었다는 거네?”


“그렇네요.” 실비아가 말했다.


“그리고, 그 유령이 한 밤중에 수도원 복도를 거닐었고.”


“그렇군요.” 이번에는 펠릭스가 말했다.


“하지만, 이 수도원은 밤에는 문을 전부 잠근다면서. 그 유령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왔대?”


“유령이니까, 스르륵 통과해 왔겠죠.” 펠릭스는 실비아를 힐끗 보고, 놀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럴리가 있어요! 열쇠를 갖고 있겠죠. 어쨌든, 수도사의 수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 그렇겠죠. 저 사람이 아마 그 수도원장이 말한 낯가림이 심한 술 빚는 수도사인 모양인데.” 펠릭스는 잠시 기침을 하고 말했다. “쓰러져가는 수도원을 일으켜 세울 만큼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까짓 열쇠가 없겠어요?”


“글쎄.” 올리버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몰래 숨어든 수도사일 지도 모르지. 양조장은, 우리한테도 그랬지만, 저 수도사들 한테도 꽤 재미난 곳일지도 모르니까.”


“제가 얼굴 봤다니까요!” 실비아가 말했다.


“실비아. 나는 너를 믿지만, 네가 지나친 긴장과 스트레스로 잘못 봤을 지도 모르잖아.”


“뭐, 정 그러면, 가서 물어보죠.” 손바닥을 털며, 펠릭스가 말했다.


“뭘 불어봐?”


“양조앙에, 귀신 하나 가둬놨는지 어떤지 수도원장한테 물어보면 될 일이죠. 안 그래요?”


“뭐? 아니, 그 사람이, 물어본다고 제대로 대답해 줄까? 사실, 약간 민감한 질문 아냐?”


“해 보고 나서 생각하자고요. 실비아. 당신도 어쨌든 그 유령의 정체가 궁금하긴 하잖아요?”


“그렇죠.”


이제는 숨을 충분히 골라서, 평소처럼 안정된 태도로 실비아가 대답했다.


“그럼 수도원을 가장 잘 아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면 될 일이죠. 자, 그럼 가 봅시다!”


그리고 펠릭스는 포도밭을 가로질러 수도원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우리가 양조장에 들어갔던 이야기도 해야 하지 않나요?”


“몰라.” 올리버가 말했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더라도, 쫓겨나기밖에 더 하겠어.”


“글쎄요. 되게, 화낼 것 같은데······.”


“안 따라와요?”


앞서가던 펠릭스가 뒤를 돌아보고 외치자, 두 사람은 영 못마땅한듯, 내키지 않는듯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수도원장의 방 문에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그러자,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드르륵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뒤에야 수도원장은 문을 열었다.


“아하, 누군지 묻지도 않으시고 열어주시다니, 혹시 저인줄 알겠던가요?” 펠릭스가 농담처럼 묻자, 수도원장은 헛기침을 했다.


“들어오게.”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 세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전과 같이 코끝을 찌를 듯한 강렬한 향내에, 다시 실비아가 재채기를 했다.


“에취!”


“깜짝이야. 실비아. 별로 귀족적이지 못하군요.”


“아니, 냄새가 너무 세서······에취!”


실비아는 손수건을 들고 잠시 코를 훌쩍였다.


“사실, 향이 꽤 강하긴 하군요. 이렇게 센 향을 피우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도, 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수행을 하기 위함이라고······.”


“전에는, 방 안에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던데요. 어떨 때는 피우고, 어떨 때는 피우지 않는 것 같은데. 혹시, 그 수행이라는 것을 마음 내킬때만 하는 것인지?”


“그럴 리가 있나. 아무튼, 별 것 아니니 신경 끄게.”


수도원장은 그렇게 얼버무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그런데, 힐끗 보니 그의 손수건에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니, 손수건에 시뻘건게 묻었는걸요.”


펠릭스가 말하자, 수도원장은 멈칫하더니 헛기침을 했다.


“사실, 아침 식사 시간에, 그만 조심스럽지 못하게 혀를 조금 씹었네. 그 피가 묻어나온 모양이야.”


“저만큼 피를 흘리려면, 아주 혀를 한입 베어드셨나봅니다.”


펠릭스가 말하자, 수도원장은 심기불편한 소리를 냈다.


“전에 묻었던 얼룩이 덜 빠져서, 그렇게 보인 모양이네.”


“무슨 얼룩이기에, 아직도 묻어있는 겁니까?”


“흙탕물이겠지. 흙탕물은, 유난히 얼룩이 안 지니까.”


“거 참. 그말이 사실이라면, 비위도 좋으시군요. 흙탕이 아직 씻겨 나가지도 않은 손수건으로, 피가 날 정도로 상처입은 혓바닥이 들어있는 입을 닦으시다니 말입니다. 위생적으로, 그리 권장할 만한 일도 아니군요.”


“아니,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두지!”


결국 펠릭스의 비아냥에 못 견딘 수도원장이 짜증스레 내뱉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아, 뭐. 일이 있어서 온 거긴 합니다. 다만, 듣고 화를 내지는 않으셨으면 하는데······.”


“들어 보고 결정하지.”


수도원장이 대답하자, 펠릭스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양조장에 들어갔다고!”


수도원장의 방에서, 수도원장의 목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왔다.


“자, 자. 진정 좀 하시고. 다 필요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펠릭스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필요? 내가, 중요한 곳이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 수도원을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곳이라니까······.”


“아, 물론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어쩌면 사실 양조장이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원인? 무슨?” 수도원장이 여전히 화가나서 얼굴이 붉어진채 물었다.


“젊은 수도사들이 잠 못자는 거요.”


“어디, 한번 말이나 해 보게.” 반쯤 자포자기한듯, 아니면 화가 나서 반어법으로 한듯, 수도원장이 말했다.


“자, 우선, 여기 수도사들은 꽤 젊고, 그리고 사실 별달리 재미난 일이 없으니 다들 심심할 겁니다.”


“그래서?”


“그런데, 수도원 근처에 양조장이 있죠.”


“그런데?”


“그런데, 수도원장은 그 양조장에 아무나 함부로 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니, 심심하고 피끓는 젊은 수도사들이 양조장에 몰래 기어들어가 보고 싶은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런 멍청이는 우리 수도원에 없어!”


“울타리에 개구멍이 있던데요. 사람 한명 드나들기에 아주 충분해 보였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수도원장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돈이 없단 말야. 올해, 포도주를 팔면 그 돈으로 울타리를 고치려고 했네.” 수도원장이 궁색하게 변명했다.


“빨리 고치는게 좋겠군요. 그리로 도둑이라도 들면, 막심한 손해일 테니까.”


“아무튼!” 수도원장이 말했다.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젊은 수도사들이 밤에 잠못들리는 없네. 그만큼 멍청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내가 바로 알아챘을 걸세.”


“오, 어떻게 알아채십니까? 어젯 밤에 돌아다녀 보니, 이곳 수도원에는 야간에 보초를 세우지는 않는것 같던데. 혹시, 양조장에 밤에 보초라도 세우시나요? 아니면, 달리 알아챌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왜 자꾸 귀찮게 묻는건가?”


결국, 참다못해 수도원장이 짜증스레 물었다.


“다름아니라, 그 양조장 안에서 유령을 봤거든요.”


“유령? 무슨?” 수도원장이 당황하여 말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펠릭스는, 수도원장이 말을 자르고 끼어든 탓에 미처 말하지 못했던, 양조장의 유령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수도원장은 펠릭스가 하는 말을 다 들은 다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헛기침을 했다.


“양조장에 유령은 없네.”


“저도 동감입니다. 아마, 전에 말씀하신 그 낯가림이 심한 수도사가 아니었을지.”


수도원장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그리 편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더군요. 암만 봐도, 꼭 남몰래 가둬놓은 꼴이니까요.”


“가둔게 아닐세!”


“오, 그럼 뭡니까? 자진한 일이라도 되나요?”


“아무튼!” 수도원장이 말했다. “양조장에 유령따윈 없네. 자네들이 잘못 봤겠지. 당장, 내가 가서 직접 확인시켜 줄 수도 있네.”


“그렇습니까? 하지만, 굳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인데, 굳이 몸소 나설 이유가······.”


“자네들이!” 수도원장이 화를 냈다. “딴소리 할까봐 그래! 우리 수도원의 평판이 달린 문제란 말일세!”


“아, 뭐 함부로 입을 놀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모처럼 보여주신다니, 그럼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가겠습니다.”


“하여튼. 연금술사들이란······.” 수도원장은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에 왔던 연금술사도 장난꾸러기던가요?”


“그는, 모르겠네. 아직 그 땐 나도 어렸으니까. 하지만, 자네못지않게 골치아팠다는 것만 기억하네.”


“어련하겠어요.” 펠릭스가 그렇게 말하자, 잠시 수도원장은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수도원장은 양조장의 비밀 문을 옆으로 슥 밀어 열어젖혔다. 그리고 열린 문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 이제, 그 비밀 공간의 정체일세. 밤늦게 일한 일꾼이 쉴수 있도록 만든 간이 침실일 뿐이네. 유령따윈 없어!”


펠릭스는 수도원장의 설명을 건성으로 듣고 비밀 공간을 살피기 시작했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전부였고, 책상 아래 서랍장이 하나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있었는데, 읽다 만듯한 경전이라든가, 펜과 잉크, 종이 뭉치 따위가 있었다. 펠릭스는 펜을 슬쩍 들어보았다. 얼마전까지 누가 쓰던 것인듯, 펜끝의 잉크는 아직 촉촉했다.


“경전이 있군요.”


“독실한 수도사들도 많으니 말일세.” 수도원장이 말했다.


“이불에 꽤 좋은 깃털을 넣어뒀나봅니다.” 올리버가, 어느새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보며 말했다. “따뜻하군요.”


“그렇겠지. 비단 이곳 말고도, 수도사들이 쓰는 옷이며 침구들은 다 좋은 물건일세.”


“오호. 그런것 치고는, 처음에는 갑작스레 찾아온 겨울 추위 때문에 수도사들이 늦잠을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거 말고 달리 떠오르는 이유가 없어서 그런 걸세. 그리고, 잠자리가 따뜻할 수록, 잠자리에서 빠져나온 순간은 더욱 차게 느끼는 법 아닌가? 그러면, 따스함의 유혹에 못 이기는 수도사들이 늘 법도 하지.” 수도원장이 변명했다.


“꽤 그럴싸한 이유로군요.” 펠릭스는 여전히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건, 뭐죠?” 이번에는 실비아가 책상 위 구석에 놓여있던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거울이었다.


“거울이지.” 수도원장이 말했다.


“의외네요.” 실비아가 말했다.


“의외라니, 수도사들은 그 마음만큼이나 몸에도 신경을 써야 해.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지 않나?”


“철학자가 한 말이지요?” 펠릭스가 말했다.


“수도사라고, 경전에 있는 말만 달달 외는건 아닐세! 신학을 공부하려면, 무릇 철학과 의학, 박물학, 생물학, 천문학에 대해서도 능통해야 하지.”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충분히 본 것 같군요. 침대 밑에 숨은 사람도 없고, 사람이 숨어있을 옷장도 없으니. 설마, 이 쬐끄만 서랍장 안에 사람이 숨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펠릭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하자, 수도원장도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돌연, 펠릭스는 서랍장의 서랍을 휙 잡아당겨 열었지만, 그 안에는 조그만 책자 하나와 잡동사니 몇 개 뿐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행복의 연금술 가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3 83화 21.11.18 26 1 20쪽
82 82화 21.11.17 28 1 24쪽
81 81화 21.11.17 26 1 18쪽
80 80화 21.11.16 26 1 21쪽
79 79화 21.11.16 22 1 22쪽
78 78화 21.11.15 25 1 22쪽
77 77화 21.11.15 25 1 25쪽
76 76화 21.11.14 28 1 20쪽
75 75화 21.11.14 29 1 23쪽
74 74화 21.11.13 28 1 23쪽
73 73화 21.11.13 26 1 20쪽
72 72화 21.11.12 25 1 19쪽
71 71화 21.11.12 23 1 21쪽
70 70화 21.11.11 27 1 19쪽
69 69화 21.11.11 25 1 20쪽
» 68화 21.11.10 22 1 21쪽
67 67화 21.11.10 21 1 20쪽
66 66화 21.11.09 24 1 23쪽
65 65화 21.11.09 24 1 20쪽
64 64화 21.11.08 24 1 22쪽
63 63화 21.11.08 23 1 24쪽
62 62화 21.11.07 22 1 28쪽
61 61화 21.11.07 27 1 21쪽
60 60화 21.11.06 22 1 26쪽
59 59화 21.11.06 24 1 20쪽
58 58화 21.11.05 23 1 22쪽
57 57화 21.11.05 23 1 24쪽
56 56화 21.11.04 25 1 25쪽
55 55화 21.11.04 19 1 24쪽
54 54화 21.11.03 28 1 2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