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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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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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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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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54화

DUMMY

행복의 연금술 가게로 돌아가는 길에, 펠릭스는 마을 우편국에 들렀다. 설마 하루사이에 무슨 새로운 소식이 올까 하며 실비아와 올리버는 우편국 앞을 잠시 서성였다. 그리고, 곧 희희낙락한 표정의 펠릭스가 우편국에서 걸어나왔다.


“짠!”


펠릭스는 겉봉도 뜯지 않은 편지 봉투를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봉투 위에 쓰인 에밀리아 콘월의 서명을 보더니, 실비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언니가 보낸 편지에요!”


“볼까요?” 그리고 펠릭스는 봉투를 죽 찢어, 안에 들어있던 편지지를 하나 꺼냈다.


“보자. 친애하는······음. 감사합니다. 귀하의 무궁한 영광을 기원하며.”


“정작 중요한 내용을 말 안하면 어떡해요? 내 참. 그렇게 편지 읽는 방법은 또 처음이네요!”


“지루한데요.” 펠릭스는 편지지를 휙 돌려 실비아에게 잠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생각 외로 빼곡하게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부럽네요.”


진심어린 목소리로 실비아가 말했다.


“저한테는, 아직 편지 한 장도 안 써 주셨는데.”


“아, 추신. ‘실비아의 주소를 알고 계신지요? 만일, 연금술 가게에 같이 머물고 있는 것이라면, 가게로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라네요.”


“언니!” 그러자 실비아의 목소리와 얼굴에 기운이 돌아왔다.


“그래서, 무슨 편지인데, 펠릭스?”


“호수뿌리를 발견한 호수의 위치요. 마침, 서쪽이군요. 흑살구를 구하러 가는 길에 잠깐 들르면 되겠어요. 이거 참. 벌써부터 운이 트이는군요?”


“재수없는 소리 마 펠릭스.” 올리버가 말했다. “너무 일찍 축배를 터트리면, 뒤끝이 안좋다고.”


“아직 터트린 적도 없거든요. 올리버, 만약 제가 축배를 터트리는 모습을 보면, 아마 기겁을 할 걸요?”


“그런 날이, 우연히라도 오지 않길 바라지.”


“그러든지요.”


“그래서, 이제 서쪽으로 가는 건가요?”


실비아가 물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짐 챙긴 다음에요.”


“지금 배낭 메고 있잖아요.”


“이건 단거리 여행용. 필요한 건 장거리 여행용. 봐요, 실비아. 당신 신발도 그새 헤졌잖아요. 새로 사던지, 기우던지, 하는 편이 나을걸요?”


실비아는 자기의 두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벌써요?”


“긴 여행에 못 버텨요. 지금에야 멀쩡하겠지만, 서쪽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거칠거든요. 그렇죠, 올리버?”


“그렇지.” 아는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올리버는 헛기침을 하며 짐짓 학교의 교수처럼 말했다. “서쪽은, 예전부터 땅이 거칠어서 왕국에서 관심을 별로 안 줬거든. 그러다가, 전쟁이 한창일때는 기병이며 포병들이휩쓸고 지나간 탓에, 안 그래도 거친 땅이 더욱 거칠어졌고.”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 치고는, 별로 알맹이는 없네요, 올리버.”


실비아가 말하자 올리버는 조금 멋쩍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길바닥에 서서 서쪽 땅에 맺힌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줄줄이 풀 수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실비아도 이해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럼 마을까지 나온 김에 제 신발이나 사서 돌아가죠.”


“그래요. 자, 올리버. 어느 가게를 추천하나요?”


“내가 가는 곳은.” 올리버가 실비아를 슬쩍 뒤돌아보며 말했다. “별로 아가씨들 취향에 맞지는 않을 텐데?”


“여행길에 꾸미고 다니지 말라면서요?”


“오, 잘 기억하고 있구나, 실비아. 아주 좋아. 그래, 그러면. 어디 한번 가 볼까?”


그리고 올리버는 조금 의기양양하게, 힘찬 발걸음으로 한창 왁자지껄한 밤숲마을의 시장 거리를 향해 들어갔다.




올리버는 거리 이곳저곳을 빙빙 돌다가, 한적한 골목에 있는 어느 조그마한 가게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자, 여기야.”


그러면서 올리버는 가게의 문을 열었고, 그러자 가게 안에 먼저 와 있던 세 명의 사람과 가게 주인이 동시에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저기, 혹시 영업중이 아닌가?”


올리버는 슬쩍 고개를 내빼어, 가게 입구의 열림 팻말을 다시 확인하고 가게 안을 보았다.


“지금은 바빠요.” 코가 살짝 휘어진 가게 주인이 조금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물건 하나만 보고 가면 되는데.”


“여기!” 가게 주인이, 갑자기 하소연하듯 소리쳤다. “도둑놈 잡기 전에는, 아무것도 못 팔아요!”


“도둑? 어디?”


“이 세 놈들중 한 놈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나는 못 속여. 아주, 잡히기만 해 봐. 어이! 어떤 놈이 훔쳐갔는지, 당장 불라니까?”


가게 주인의 성화에, 세 사람은 모두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바빠보이는군. 그럼 실례.” 그리고 올리버는 슬쩍 가게 문을 도로 닫았다.


“뭐죠?”


“몰라. 도둑이 있다는데. 용의자가 세 명 있더군.”


“도둑이요? 경비대에 신고하면 될 일 아닌가요?”


“실비아. 그게, 사실 그렇지만도 않아요.”


“뭐가요?”


“그러니까. 경비대에 신고하면 우선 경비병들이 증거를 찾느니 뭐니 하며 가게를 뒤져댈테죠. 그리고 증언을 받는답시고 가게 주인한테 똑같은 질문을, 말만 살짝 바꿔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던져 대고요. 그러면 장사는 언제 해요? 게다가, 경비병들이 얼쩡거리는 가게는 괜히 사람들한테 나쁜 소문을 탄다고요. 이렇게, 여러모로 귀찮고 번거로우니까, 가게 주인들은 대충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 하는 거죠.”


“별로 정의롭지는 않네요.” 실망한 목소리로 실비아가 말했다. “그리고, 제 신발도 못 사게 됐고.”


“다른 가게도 많아. 다른데 가 볼까?”


“그래야겠네요. 모처럼 올리버가 추천해주는 가게였는데, 아쉽게 됐어요.” 펠릭스를 힐끔 돌아보며 실비아가 말했다. “어쩌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이 가게는 못 오게 될지도 모르죠. 그리고 제 신발도.”


“아니, 왜 절 보고 그런 말을 하실까?”


“펠릭스. 당신은 뛰어난 연금술사죠?” 화제를 돌려, 실비아가 펠릭스에게 물었다.


“물론이죠.” 그리고 아주 당당하게 펠릭스가 대답했다.


“온갖 약을 만들 줄 알고요.”


“말해 뭐해요.”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는 약도 만들 줄 알죠?”


“당연하죠. 사실, 우리끼리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펠릭스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내리깔며 실비아에게 속삭였다. “저는, 첩자를 잡는 일에도 동원된 적 있어요.”


“농담이 지나치군.” 올리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믿기 싫으면 말고요.”


“내 참. 알았어. 믿어줄게 펠릭스.”


“아무튼, 펠릭스. 그러면 말이에요······.”


“전 안합니다.”


말을 자르고 펠릭스가 끼어들자, 실비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인줄 알고요?”


“뻔하죠. 제가 당신을 모를까요?”


“모르잖아요.”


펠릭스는 잠시 생각했다.


“사실, 모르기는 하죠. 하지만, 알 만큼은 알아요. 저 사람들 도와달라 그럴거죠?”


“네.”


“경비대에 신고하라는것 이상의 조언은 못 해줘요.”


“아까 당신이 그랬잖아요. 경비대에 신고하면, 귀찮고 피곤하게 일이 돌아간다고.”


“그래요. 대신, 범인은 잡아주겠죠.”


“저는 지금 당장 신발이 필요한데요.”


“다른 가게에서 사요.”


“올리버가 제게 추천해준 신발이 궁금해요.”


“올리버. 달리 아는 가게 없어요?”


“많지.” 실비아가 올리버를 째릿 노려보았다. “흠흠. 하지만, 주인하고는 다 서먹해. 정말, 이름이랑 위치만 아는 정도야.”


“봐요. 다른곳도 많다잖아요. 딴데 가죠. 귀찮은 일에는, 휘말리지 않는 편이 상책이거든요.”


“저, 당신 다리도 만들어 줬는데.” 그 말을 듣더니, 펠릭스가 걸어가다 말고 제자리에 우뚝 섰다. “조그마한 호의 정도는 베풀어 줄 수 있지 않나요?”


“치사하게, 그렇게 나오기에요?”


펠릭스가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자, 실비아가 조금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금방이잖아요. 당신, 솜씨가 뛰어난 연금술사니까.”


“아부해봤자 뭐 안 줄 겁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간파하는 종류의 약은 하나같이 만들기 귀찮고 번거로워요.”


“쉬운것도 하나쯤은 있을거 아녜요?”


펠릭스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있네요.”


“그럼, 그거 써요.”


“술인데.”


“네?”


“술이라고요.” 펠릭스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술 마시면, 머리가 빙빙 돌아 제대로 된 사고를 못 하죠. 그런데, 거짓말이라는건, 꽤나 고등한 지적 활동이거든요.”


“아니, 술마신 사람 헛소리를 듣고, 누가 거짓말쟁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그거 말고는 다 시간도 품도 많이 드는 약들 뿐이에요. 포기해요 실비아.”


실비아는 입을 비죽였다.


“꼭 저 가게에서 사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어요?”


“봐요, 펠릭스.” 무언가 묘안이 생각난듯, 실비아는 갑자기 펠릭스를 불러세웠다.


“네.”


“언니의 편지를 받은 걸로, 이미 서쪽으로 향하는 우리의 모험은 시작된 거라고요.”


“낭만 소녀로군.” 뒤에서 올리버가 웃으며 끼어들자, 실비아는 올리버를 힐끔 노려보았다. 그러자, 올리버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래요. 이미 서쪽을 향하는 여정은 시작된 거라고요. 그런데, 그 여정의 첫 발걸음이 바로 이 시장이에요.”


“그런데요?”


“그런데, 첫 걸음부터 삐끗하고 말았네요. 제 신발을 사러 가게에 들어가야 하는데, 도둑 때문에 가게 주인이 장사도 팽개치고 저러고 있으니.”


“그래서요?”


실비아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펠릭스. 서쪽으로 향하는 모험은 아마 긴 여정이 되겠죠?”


“물론이죠.”


“그 기나긴 여정의 첫 걸음부터 이렇게 삐걱이는데, 당신은 그렇게 도망칠 생각인가요?”


“도망이라니! 실비아. 일을 어렵게 만드는건 당신이잖아요?” 펠릭스가 말했다.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 곤경에 처한 것을,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겠죠.”


“우리의 여정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요.”


“그 때, 불나무 껍질을 찾은것. 기억하나요? 화이트 플레인 마을로 가는 길에요. 그 귀한 재료를 마을 사람들을 돕는데 썼죠.”


“아직까지도 후회합니다.”


“덕분에, 호박석도 얻었고, 골든포트 경비대와 친분도 쌓았잖아요. 봐요. 마음을 곱게 쓰면, 다 되돌아 온다고요.”


펠릭스는 영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인과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하는 말이에요.”


“당신은, 미신을 믿잖아요?”


그 말에, 올리버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끼어들었다.


“펠릭스. 이번에는 네가 진거 같은데.”


“끼어들지 말아요 올리버. 당신은 대체 누구 편이죠?”


“난 내 편이지. 내가 누구 편을 들겠어?”


“아 진짜.” 펠릭스가 툴툴거렸다. “알았어요. 내 참. 별 소리를 다 하네. 알았어요 알았어. 도와줄게요. 됐죠?”


그제서야 실비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까짓 신발 하나 가지고 이게 대체 뭐람.”




세 사람이 더 들어오자, 가죽가게는 아주 혼잡하고 비좁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리고 가게 주인은 카운터 너머에 앉아, 펠릭스를 조금 짜증스런 얼굴로 쳐다보았다. “도와주겠다고?”


“물론이죠. 아주 개인적인 이유로 하는 것이니, 아무런 보수도 필요없고. 다만, 두 가지만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당신을 어떻게 믿지?”


“저는 아주 뛰어난 연금술사고······.”


가게 주인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자. 이런 사람과 교류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면서 펠릭스는 에밀리아에게서 온 편지의 겉봉을, 이름 부분만 손가락으로 살짝 가리고 작위만 보여주었다.


“후작!” 가게 주인은 이제서야 조금 당황한 얼굴로 펠릭스를 보다가, 금새 염치도 없이 매달렸다.


“그래! 그러니까, 이 세 놈중 한 놈이 범인이 틀림없다고. 셋 다 당장 경비대에 집어 쳐 넣어야해!”


“그러면, 아주 길고 지루한 조사가 시작되겠죠.” 펠릭스가 달라붙는 가게 주인을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면, 한 며칠 동안은 장사도 못할 테고요. 그래서, 이렇게 붙들어는 놓고서도 경비대를 부르지도 못하고 쩔쩔 매고 있는것 아닙니까?”


“아주 틀린말은 아냐.” 가게 주신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귀찮은 절차는 싸그리 생략하고 요점만 말하죠. 제가 원하는건 이겁니다. 첫째, 적극적으로 협조해줄것. 둘째, 범인을 잡고 나면 가게를 바로 정상영업 해 줄것.”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뭐가 없어진 겁니까?”


가게 주인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울상을 짓더니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주머니야!”


“주머니요?”


“그래. 자그마한 주머니. 내 주먹만 해. 바다 건너에서 온, 귀한 비단으로 직접 짠 주머니야. 귀한 손님이 직접 주문한 주머니라고. 오늘 찾으러 온댔거든.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 그래서, 포장을 하려고 카운터에 잠시 올려놨지.


그런데, 손님 셋이 오더군. 같이 온 건 아니고, 한 명은 조금 일찍왔어. 뭘 사려고 하는지 계속 이것저것 둘러만 보고. 두번째 손님은 좀 더 늦게 왔고, 세 번째는 두 번째 손님이 온 직후에 들어왔어.”


“가게 밖에서 카운터가 보이죠?” 펠릭스는 조그만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이지. 그래야 가게 주인이 안에 있나없나 보고 들어올거 아냐.”


“그래요. 그래서요?”


“카운터 위에 주머니를 올려놓고 포장하려 하는데, 포장지가 없어 잠깐 가지러 간 사이에 주머니가 없어진거야.”


“그래요.” 가게 주인이 하소연이든 뭐든 할 틈새를 주지 않고, 펠릭스가 다시 물었다. “그 때, 손님들은 뭘 하고 있었죠?”


“첫 번 째로 들어온 키작은 남자 손님은, 원단 하나를 집어들고 살펴보고 있더군. 두 번째로 들어온 키큰 남자 손님은, 자루를 살펴보고 있었고. 세 번 째로 들어온 여자 손님은 가죽 띠를 살펴보고 있었어.”


펠릭스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자, 그래서. 당신도 나름대로 손님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죠?”


“말해 뭐하나! 하지만, 누가 거짓말 하고 있는게 틀림없다고!”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게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혹시, 쌀 있습니까?”


그 말에,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쌀?”


“네. 쌀. 요새는 제법 있을 텐데요. 있습니까?”


“아니, 가죽 가게에서 쌀을 왜 찾아?”


“없나요? 그럼, 올리버. 가서 쌀 한 줌만 사 와요.”


“어디 쓰려고?”


“그냥 좀 사 와요. 나도 빨리 해치우고 싶으니까.”


“원 참.” 올리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갔다.


“쌀을 어디 쓰려고요?” 실비아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있어봐요.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러니까. 자 그럼, 손님들?” 그리고 펠릭스는 가게 카운터 옆에 일렬로 앉아있던 손님들을 돌아보았다. “한 분씩, 제게 뭘 하고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까요?”


“우리가 왜?” 그 키 작은 남자가 짜증스레 말했다. “네가 뭔데?”


“아, 뭐 싫으시면 경비대 부르러 가겠습니다. 당신들도 거기서 조사받기는 귀찮아서 여기 이렇게 답도 없이 죽치고 앉아있는거 아닙니까?”


그러자 세 손님들은 모두 헛기침을 하며 괜히 시선을 피했다.


“내 참. 경비대가 알면 화내겠군. 이렇게 신용이 없어서야. 어쨌든, 다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그러는거 뻔히 알고 있으니까, 괜히 뻗대지 말고 그냥 협조해 주시죠. 아니면, 경비대 부를겁니다.”




펠릭스의 협박아닌 협박을 들은 세 사람은 암전히 펠릭스에게 한 명씩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당신부터 하죠.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포터.” 키 작고 성말라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뭐하고 있었죠?”


“뭐 하기는! 새로 옷이나 하나 만들까 어떨까 해서 가죽 보고 있었지. 그런데, 통 마음에 드는 가죽이 없어서 계속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겨우 하나 마음에 드는걸 찾아냈는데. 갑자기, 주인이 날 도둑이라고 몰아가잖아!”


“어떤 가죽이었죠?”


“이거!” 그는 금새 가죽 더미에서 하나를 꺼내들었다.


“소가죽. 좋네요. 뭘 만들려고요?”


“조끼. 이걸로 실내복을 만들 수는 없잖아?”


“일리있는 말이군요. 그래요. 그게 단가요?”


“그게 다지, 그럼 달리 뭐가있어?” 포터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다음. 당신은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팻.” 키크고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남자가 말했다.


“당신은 뭐하고 있었죠?”


“나는, 떠돌이 모험가가 될 생각이야.”


“대단한 꿈이군요. 그래서요?”


허황된 꿈에다가 뭐라 시비를 걸기에도 귀찮았던 펠릭스가 다그치듯 물었다.


“모험을 가려면.” 조금 짜증을 내며 팻이 말했다. “준비를 잘 해야지.”


“그렇죠. 그래서?”


“그래서. 자루를 보고 있었어.”


“자루를?”


“그래, 자루. 모험을 떠나려면, 싸야할 짐이 많아. 커다란 자루가 필요해.”


“네, 뭐 그렇겠네요. 그래서, 당신은 그냥 가게에 들어와서 계속 자루만 보고 있었나요?”


“그래. 좋은 자루를 찾고 싶었거든. 천으로 만든건, 너무 쉽게 뜯어져버려.”


“가죽으로 만든 건, 용량도 작고 무겁고 뻣뻣해서 다루기 힘든데요.”


팻은 짜증스레 펠릭스를 내려보았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요. 그래요. 당신은 자루만 봤군요. 아, 그래. 하나만 묻죠. 당신, 가게 안에 들어올 때, 혹시 카운터 위에 비단 주머니가 있던가요?”


“몰라. 난 그냥, 자루만 보러 왔거든. 카운터 위에 뭐가 있었는지 어떻게 기억해.”


“알겠습니다.” 펠릭스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마지막이군요.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트래시.” 조금 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여자가 말했다. “난 허리띠를 보고 있었어.”


“그렇다더군요. 어디 쓰시려고?”


“남편이 새로 신사복을 맞췄는데, 재단사가 솜씨가 없었는지, 바지의 허리가 남아서.”


“원단을 자르면 될텐데.”


“아깝잖아.”


“새로 허리띠를 사는건 안 아깝고요? 옷을 수선하는게 더 싸게 먹히지 않나요?”


“수선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옷이 상하잖아.” 트래시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래. 그래서, 그냥 가죽 띠를 하나 사라고 했어.”


“그렇군요. 그래서, 당신은 계속 허리띠만 보고 있었습니까?”


“이것저것 둘러봤어. 그렇지만, 거의 허리띠 위주로 보고 있었지.”


“그럼 당신도 카운터 위에 주머니든 뭐든 몰랐겠군요?”


“아마도.”


“아, 그래. 혹시, 당신이 구경하던 가죽 띠가 어떤 건지 좀 보여주겠어요?”


“많은데.”


“그래도요.” 펠릭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트래시는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띠를 고르더니 몇 개 집어들고 돌아왔다.


“여기.”


“다 비슷비슷한 모양이네요.”


“그래서 고르기 힘들었어.”


“그래서, 결국 고른 것은?”


“이거.” 트래시는 가장 어두운 색의 띠를 하나 집어들었다.


“좋네요. 가죽 보는 눈이 제법 좋군요.”


“가끔 와서 사니까.”


“알겠습니다. 자, 그럼!” 펠릭스는 손뼉을 짝 치며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쌀이 오면, 누가 범인인지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펠릭스는 때마침 문을 열고 쌀이 들어있는 조그만 주머니를 들고 오는 올리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제. 진실의 시간입니다. 제가 주문을 외고 나면, 누가 범인인지 이 새하얀 쌀알들이 낱낱이 보여줄 겁니다.”




펠릭스의 주문은 아주 이상한 것이었다. 세 명의 손님들은, 펠릭스가 부탁한 대로, 입안에 쌀을 머금은채 종이 위에다가 이 가게에 오게된 경위와, 가게에 들어와서 했던 행동들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포터는 거침없이 순식간에 써내려갔고, 팻은 천천히, 느긋하게 써내려갔다. 트래시는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쓰다 말다 몇 번이나 수정하다를 반복했다.


“펠릭스.”


“왜요.”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죠?”


“뭐가요. 당신이 거짓말쟁이를 잡아 달라면서요. 굳이, 꼭, 반드시! 이 가게에서 신발을 사겠다고.”


“뭐, 그렇기는 한데. 그러니까, 그게 쌀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보면 알아요. 아, 마침 다 썼군요. 자 다들! 수고했어요. 이제 여기다가 쌀을 뱉으세요.”


펠릭스는 어디서 얇고 하얀 천을 하나 꺼내 들이밀었다.


“우선 포터. 당신부터.”


포터는 냅다 축축한 쌀을 뱉었다.


“내 참. 별 꼴 다 보겠군.”


“으, 축축해. 그렇죠?”


“꺅! 더럽게.”


“으, 더럽잖아. 내 가게에서 뭐하는 짓이야?”


가게 주인에게까지 굳이 쌀을 보여준 뒤에, 펠릭스는 천을 뭉쳐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재빨리 다음 천을 꺼냈다.


“다음, 트래시. 당신이에요.”


“뭐죠 이게 대체.”


트래시도 축축한 쌀덩이를 뱉었다. 마찬가지로, 펠릭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쌀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팻. 당신이군요.”


팻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올리버! 입 열어요! 당장!”


올리버가 뛰어들어 그의 입을 억지로 열자, 펠릭스는 손을 불쑥 넣어 그의 입에서 쌀을 끄집어냈다.


“어떤가요?”


“아니,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무례하게.”


“됐고, 어때요? 직접 봐요 팻. 이 쌀, 어떤가요?”


쌀을 가만히 보던 실비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안 축축하네요.”


팻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당신들이 보기에는 어떻죠?”


“훨씬 덜 축축한데.” 아예, 직접 만져보기까지 하며 가게 주인이 말했다. “저건, 아주 침이 흥건했잖아.”


“미안하게 됐군.” 포터가 툴툴댔다.


“그러게. 이건 건조한걸. 뭐지?”


“자, 여러분! 거짓말쟁이는 바로 팻이었습니다!”


“뭐야!” 팻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아냐! 난 주머니를 훔치지 않았다고!”


“어허. 그럼, 팻. 당신이 구경했다던 그 자루. 가져와 봐요.”


팻은 잠시 주저하다가, 저쪽 자루들이 걸린 곳에서 자루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자, 가게 주인이 보기에. 이 자루, 어떤가요?”


“뭐가?”


“팻. 당신은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위해 자루를 사러 왔다고 했죠.”


“그래. 그런데, 이딴 대접이라니.”


“자, 가게 주인이 보기에, 이 자루는 어떻죠?”


“이건, 그 자루가 아냐.” 당장 가게 주인이 말했다.


“뭐가 아니죠?”


“아까, 나한테 보여줬던 자루가 아니라고! 이놈, 네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구나!”


“아니야! 난 아니라고! 그리고, 몸수색까지 했으면서 나한테서 그 주머니 찾지도 못했잖아!”


팻이 소리쳤다.


“올리버. 가서 배낭 뒤져봐요.”


“뭐?”


“배낭. 배낭중 어디에 그 주머니 숨겨놨을 걸요. 주인 아저씨. 하나만 물어봅시다 배낭에, 안주머니가 있는 것도 요새는 많죠?”


“그래. 짐 싸는것도 고역이니까, 아예 짐 싸기 쉬우라고 미리 주머니를 나눠놓은 배낭이 많아.”


“올리버. 가요.”


“내 참.” 올리버는 배낭들을 뒤적이며 슥슥 안을 살피다가, 곧 손에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이건가?”


새파란 색깔의, 비단 주머니가 올리버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걸 보자, 팻은 헉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내가 한거 아냐!”


“자루는 배낭 바로 옆에 걸려있어요. 가죽 띠는 입구 근처에 있고, 포터가 보던 가죽 원단들은 배낭 정 반대편에 있죠.”


“난 그런 주머니 있는 줄도 몰랐다고!”


“창문으로 카운터가 보여요. 막 포터가 주머니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다음, 처음으로 들어온게 당신이잖아요.”


“저 여자도 거의 같이 들어왔잖아! 저 여자도 창문으로 카운터 위를 살펴봤을거 아냐?”


“가죽띠는 입구 근처에 있다니까요. 그리고, 트래시는 이전에도 몇 번 이 가게에 와 본적 있다고 했어요. 언제 가게 문을 여는지, 가게 주인이 있는지 없느니쯤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아무튼, 난 진짜······.”


“자. 주인아저씨. 어쩔까요? 저와 같이 경비대에 가시렵니까? 아니면 주머니를 되찾았으니 이만하고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뭐, 뭐야?” 펠릭스가 묻자, 이번에는 가게 주인이 당황했다. “도둑질을 했으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그러면, 경비대로 갈까요? 가서 조서를 쓰고, 조사를 받고······.”


“아, 아니. 생각해보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것 같아. 주머니도 멀쩡하고.” 가게 주인이 금방 저자세로 나왔다. 그러자, 펠릭스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손님들은 마저 물건 고르시고, 도둑은 그만 돌아가시고. 실비아. 당신도 이제 신발 하나 골라봐요. 아, 주인아저씨. 혹시, 살짝만 흥정을 해도 될까요?”


“우리 가게는 정찰제야.”


펠릭스는 그가 들고 살피던 비단 주머니를 흘끔 돌아보았다.


“진짜요?”


“조금만, 도와줬으니까 조금만 해 줄게.” 재빨리 주머니를 숨기며, 가게 주인이 허둥대자, 펠릭스도 마침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좋네요.” 새 신발을 신을 발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실비아가 말했다.


“솜씨 좋지?”


“그러게요.” 실비아는 웃으며 올리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펠릭스. 그래서, 쌀은 뭐였죠?”


“대스승님이 가르쳐 줬어요. 사실, 재미난 옛날 이야기 하다가 우연히 나온거에 가깝지만. 동방에서 일어난 일이라더군요. 거짓말쟁이의 입 안에 쌀을 넣으면, 바싹 마른 채로 나온다고.”


“무슨 원리지?”


“몰라요 저도. 거기까지는. 하지만, 어쨌든 잘 먹혔네요.”


“그래. 그래서, 쌀은 됐고. 펠릭스. 난 다른게 궁금한데.” 이번에는 올리버가 물었다.


“물어봐요.”


“그 가게 주인. 절대 흥정 안 해주거든. 그런데, 너한테는 흥정해 준거야?”


“내 참. 그 비단. 그거 원래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거든요.” 펠릭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요?”


“비단이 뭐죠?”


“누에로 만드는 천이잖아요.”


“그럼 그 누에는 누구 애벌레죠?”


“나방 아녜요?”


“그럼, 저 새파란 실을 뿜어내는 고치를 만드는 누에는 어떤 나방의 애벌레일까요?”


“저야, 모르죠.”


“왕국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는 재료에요. 이런 허름한 가게에서 취급할 물건이 아니라고요. 고치 안에 들어있는, 되다만 나방의 유체에 끔찍한 맹독이 있는데, 그 독은 흔적도 거의 안 남거든요.”


“세상에!” 실비아가 외쳤다 “그럼, 저 주머니는······.”


“주머니에는 독 없어요. 실일 뿐이니까. 하지만, 저 가게 주인은 모종의 경로로 위험한 물건을 구했어요. 그걸 제가 경비대에 까발리면 큰일이죠. 애초에, 처음부터 그게 켕겼으니 경비대를 부르지도 않았겠지만.”


“뭐야. 못 믿을 사람이었군?”


“가벼운 일탈이라고 쳐 두죠. 아무튼! 그래서, 실비아. 만족하나요?”


“뭐가요?”


“모험의 첫 장을, 영광스런 승리로 기록해서, 만족하나요!”


실비아는 그러자, 시원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최고로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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