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조회수 :
6,077
추천수 :
188
글자수 :
1,774,925

작성
21.11.08 18:10
조회
23
추천
1
글자
24쪽

63화

DUMMY

숲 속에서 한바탕 일을 치른 펠릭스의 일행들은, 해질 무렵 겨우 오르투스 마을로 통하는 도로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숲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미리 약속이라도 한듯, 길 위에 멈춰서서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엄청난 숲이었어.” 올리버가 말했다. “운도 좋았고. 곰을 만나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니.”


“운이 좋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군요, 올리버.” 펠릭스 역시, 뭔가 착잡한 눈으로 숲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다 지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꽤 재밌었어요.” 실비아의 말에, 다른 두 사람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르투스 마을 식당에 모여, 세 사람은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 하루 일을 끝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농부나 나무꾼의 적당한 잡담을 의도치 않게 엿들으며, 그들은 숲에서 일어난 일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곱씹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숲 속에서 일어난 일을 충분히 되새겨본 다음, 실비아가 물었다.


“서쪽으로, 계속 가야죠.” 펠릭스가 대답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남서쪽이지만.” 올리버가 펠릭스의 말을 가볍게 정정하며 끼어들었다.


“흑살구는 희귀한 재료라고 했던가요?”


“아니오. 그렇게 흔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희귀하지도 않아요. 농장이 있는데, 농장이 크지는 않은, 뭐 그런 정도?”


펠릭스가 대답하자, 실비아는 고개를 살짝 위로 들고서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해보았다.


“땅콩 정도로 희귀한가요?”


“그쯤 되겠네요. 아무튼, 뭐 아주 운이 없지 않은 이상, 빈 손으로 돌아올 일은 없어요.”


“다행이네요.” 실비아가 말했다. “그러고보면, 우리들. 꽤 운이 잘 따라주네요? 정작 재료가 없어 빈 손으로 돌아온 일도 없고, 위험한 일에도 몇 번이나 휘말렸지만 무사히 빠져나왔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올리버가 실비아의 말에 수긍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좀 더 거칠고 험난한 여정이 될 줄 알았거든.”


“그야, 아직 평화롭고 만만한 땅으로만 다니니까 그렇죠. 북쪽으로 가면, 그 모든 생각이 크게 달라질 겁니다.” 펠릭스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북쪽에는 뭐 없잖아요. 거기야말로, 거친 산맥과 황량한 눈밭 말고 더 있나요?” 실비아가 말하자, 펠릭스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씩 웃어보였다.


“북쪽은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고, 우선은 서쪽으로 갈 궁리나 하자고요.”


“궁리할 것 까지야. 마차를 타고, 계속 달려가면 그만이잖아. 안 그래, 펠릭스?”


올리버의 말을 듣고, 펠릭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또 무슨 재미난 사건에 휘말리지 않는다면 말이죠.”


펠릭스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가볍게 웃음으로써, 그의 말에 동의했다.




오르투스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다음날, 세 사람은 마차 대여소에서 마차를 하나 빌려 서쪽 관문을 통과했다. 관문 너머로는 다시 길과 벌판이 쭉 이어져 있었는데, 이미 수확을 끝내버린 밭은 조금 볼품없어보였다.


“여긴 수확을 끝냈네요?”


“그러게. 서쪽이 동쪽보다 조금 더 따뜻해서 수확철이 늦을 텐데. 일찍 수확하는 작물을 심었나봐.” 올리버가 말했다.


“뭘 심었어요?”


“글쎄. 잘 안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밑동만 남은 풀뿌리를 가지고 무슨 풀인지 구분하긴 힘들어.”


“그렇군요.” 실비아는 조금 아쉽다는듯 차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마차 여행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사실 꽤 지루한 일이었다. 펠릭스와 올리버, 실비아는 한 몇 분 정도는 떠들었지만, 금새 떠들만 한 이야기가 바닥나버려, 그들은 궁색하게 끝말잇기를 하거나, 십자말풀이를 하려고 해 보려고 하다가, 금새 포기하고 저마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렇게 지루하게 길 위를 달려가던 와중, 갑자기 마차의 속도가 늦춰졌다.


“뭐지?” 올리버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뭔가요?” 펠릭스가 묻자, 올리버는 도로 마차 안으로 들어와 대답했다.


“앞에 무슨 사고가 나 있던데. 마차 한 대가, 길 옆에 나무에 들이 받았더군.”


“괜찮아요? 다친 사람은 없어요?” 실비아가 물었다.


“몰라. 내려서 확인해 볼까? 어이! 마부! 잠깐 내린다!”


올리버는 마부에게 신호를 보내고, 마차의 문을 열어 조심스레 풀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실비아와 펠릭스도 마차에서 따라 내렸다.




반쯤 부서진 마차가 길 위를 가로막고 있었으며, 그 마차의 주인은 바퀴에 깔려 헥헥거리며 숨쉬기도 힘들어 보였다. 마차를 이 끔찍한 파멸로 몰아넣은 말은, 정작 어디로 도망쳐 버린 것인지 보이질 않았다.


“괜찮아요?” 실비아가 당장 바퀴에 깔린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겉보기에 큰 상처는 없어보였지만, 바퀴에 얼마나 눌려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살려줘······.” 그가 힘겹게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실비아는 바퀴를 들어올리려다가, 자기 힘으로는 어림없을 것을 알고, 올리버를 불렀다.


“올리버!”


“잠깐 있어봐.”


올리버는 침착하게 바퀴의 상태를 확인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오히려 잔해가 무너져 그를 덮칠지도 몰랐기에. 조심조심 근처를 살피던 올리버는, 마침 옆에 놓인 부서진 판자를 지렛대 삼아 잔해 아래 끼워넣었다.


“펠릭스. 실비아. 내가 셋 하면 있는 힘껏 잡아당겨. 어이, 마부! 같이 도와주지?”


귀찮은다는듯 심드렁하게 있던 마부도 올리버가 다그치자, 못마땅한듯 하면서도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올리버가 구령을 넣자, 두 사람은 지렛대를 힘껏 밀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깔려있던 사람을 힘껏 끄집어냈다. 남자가 빠져나오자마자 잔해가 와르르 무너지며 먼지구름이 피어나, 실비아는 가볍게 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그녀는 시선을 돌려, 끄집어낸 남자를 살펴보았다. 이미, 펠릭스가 그의 맥을 짚어보고, 배를 통통 두드려보며 무언가의 진찰을 하고 있는듯 했다.


“뭐, 별 탈은 없네요. 타박상 정도인가. 자, 이거 먹어요.”


펠릭스는 선뜻 그에게 약병을 하나 주었다. 그 모습을, 실비아는 조금 의아한듯 바라보았다.


“아, 고, 고맙습니다.” 남자는 약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쭉 들이켰다.


“다음부턴 좀 더 좋은 말을 구해야겠군.”


마부와 함께 널찍한 널빤지로 부러진 잔해를 길 옆으로 밀어 치우며, 올리버가 말했다.


“아니면, 한눈 팔지 말던가요.”


펠릭스는 잔해 사이에 끼어있던 무슨 전단 같은 것을 힐끗 보며 말했다. 실비아도 그것을 힐끔 보았는데, 무슨 배당률 같은 것이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 남자는 어느 도박장 내지는 그 비슷한 곳에 돈을 걸었던 모양이었다.


“아, 네. 그럴 겁니다. 두 번 다시, 한눈 팔지 않을 겁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하고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산산조각난 마차의 잔해를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가던 길이에요?” 실비아가 그에게 물었다.


“글레이스 수도원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아, 중요한 편지를 가지고 가던 길이었는데, 마차가 이 꼴이 났으니······.”


남자는 부서진 잔해를,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펠릭스. 잠깐 태워줘도 괜찮지 않겠어요?” 실비아가 펠릭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 친절은, 방금 바닥났는데요.” 빈 약병을 슬쩍 보며 펠릭스가 말했다.


“그나저나, 글레이스 수도원에 무슨 일로 가던 길이었나?” 올리버가 남자에게 물었다.


“아, 중요한 편지를 갖고 가던 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글레이스 수도원은 포도 농장과 포도주 양조장으로 꽤 유명한데, 어느 귀족이 그 포도주를 사겠다고 타진해와서 말입니다. 사실, 요즘같은 시대에는, 수도원들도 살아남으려면 돈이 필요하니까요.”


목소리를 살짝 낮추어, 남자가 말했다.


“아무튼, 그럼 좀 중요한 일이기는 하군?”


갑자기, 조금 탐욕스런 시선으로 턱을 슬슬 쓰다듬으며 올리버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여기서 먼가?”


“마차를 타면 한 시간이면 도착하겠지만, 걸어가면 한 해질녘이 넘어서도 못 도착할 겁니다.” 최대한 불쌍한 척 하며, 남자가 말했다.


“펠릭스. 잠깐 말이야. 그 포도주로 유명한 수도원에 들르는것도 괜찮지 않을까?” 올리버가 슬며시 말을 꺼냈다.


“글쎄요. 저는 포도나 포도주에는 별 관심 없는데요.” 심드렁하게, 펠릭스가 대답하자 올리버는 실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비아. 포도 농장이나, 수도원에 관심 없니?”


“궁금하긴 해요. 사실, 어릴 때 부모님이 저한테 종종 그랬거든요. ‘실비아! 너, 말 안들으면 수도원에 보내버릴거야!’하고요.”


고전적인 부모의 협박을 들은 세 남자는, 거의 동시에 헛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요!”


“아니, 아냐. 아무튼, 그래서 그 글레이스 수도원에 잠깐 들렀다 가는건 어떨까? 우리가 이 남자를 도와준 걸 알면, 수도원장이나 그 비슷한 사람이 우리에게 소소한 사례를 해 줄지도 몰라. 그래,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빚어둔 포도주의 맛을 보게 해 준다든지······.”


“올리버. 술은 술집에서 찾아요.” 펠릭스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수도사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직접 빚은 포도주잖아. 그리고, 방금 이 남자 말대로, 뭐? 어느 귀족이 사겠다고 타진을 해 올 정도면, 맛이 좋지 않겠어?”


남자도, 누가 자기 편인이 금새 파악하고는 올리버의 말에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렇습니다. 아주 맛이 좋은 포도주입니다. 색깔은 루비같고, 향은 설탕이나 한 여름에 푹 익은 복숭아보다 달콤하며, 그 무게감은 고기를 삼키는듯 하면서도 한없이 가벼운 꽃잎처럼 느껴진다고도 하는······.”


“허풍이 심하군요.” 펠릭스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남자는 시무룩해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뭐. 정 원한다면야. 그래요. 올리버, 당신도 그동안 저랑 같이 일 하면서, 저를 많이 도와줬으니까. 한번 가 보죠, 그 글레이스 수도원으로.”


그러자 줄곧 이 소란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마부가 도로 마차 위에 올랐다.


“타요. 다들.”


펠릭스가 먼저 마차에 올랐고, 남자는 눈치를 보며 마지막에 조심스레 마차에 탔다.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마차가 생각보다 좁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펠릭스와 실비아가 나란히 앉아버려 그 남자는 졸지에 거구의 올리버의 곁에 겨우 끼어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좁아서 미안하군.”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와 말투로 올리버가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태워줘서 감사합니다.” 남자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 글레이스 수도원이라는 곳에 대해서 좀 알려 줄 수 있나?” 올리버가, 본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조금 궁금해서 말야. 무슨 포도를 키우는지, 술을 어떻게 빚는지······.”


“사실, 저는 잘 모릅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저는 그냥 심부름꾼이랄까, 편지만 이리저리 옮겨주는 사람입니다.”


“그래? 그럼, 뭐 아는게 없나?”


“수도원장의 성격이 서글서글한것 말고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조금 미안하다는듯 웃으며 말하자, 올리버도 더이상 할 말이 없어진듯 그에게 달리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올리버는 그 남자에게 계속 수도원에 관한 이런 저런 것을 물어보았는데, 그는 정말 그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지, 도통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대화는 단절되었고, 그들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글레이스 수도원으로 달려갔다.




주 도로에서 아래로 빠져나가자, 금새 한창 수확중인 포도밭과, 그 포도밭 한 가운데 자리잡은, 꼭 요새처럼 생긴 석조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아, 저기가 글레이스 수도원입니다!” 남자가 마차의 차창 밖으로 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꼭 성이나 요새처럼 생겼네요.” 옆에서 실비아가 말하자,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설명했다.


“사실, 원래 무슨 조그만 공국이라든가, 아무튼 뭔가의 수도였다는 그런 전설이 있답니다. 동화같은 이야기긴 합니다만.”


“그래요. 암만 봐도 허구가 틀림없군요. 애초에, 저렇게 조그만 성을 수도로 삼을 수는 없을 테니까.” 펠릭스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뭐가됐든, 가서 보면 알겠지.” 그리고 올리버는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이는듯, 계속 입술을 날름거리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 그 조금 음울한 수도원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마차가 수도원의 마당에 멈춰서자, 남자는 가볍게 풀쩍 뛰어내려 부엌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몇몇 수도사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마차 근처를 서성이다가, 곧 수도원장이나 그 비슷해 보이는 나이든 노인이 걸어나왔다.


“당신들은?”


“아, 뭐 우연한 사고에 휘말려서요. 올리버?”


펠릭스는 설명하기 귀찮다는듯 올리버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러자 올리버는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해서, 그 편지는?”


수도원장이 묻자, 남자가 쪼르르 나와 수도원장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저기, 그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남자가 말하자, 수도원장이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뭐지?”


“사소한 사고로, 마차가 박살이 나버려서······.”


“사소한 사고?


수도원장이 혼란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더이상 설명하지는 않고, 다만 굽실거릴 뿐이었다.


“말은 있나?”


“도망가버렸습니다.”


“손해가 막심하군. 가서 말 한필 빌려주게.”


수도원장이 마침 옆에 있던 종자인지, 하인인지, 아니면 다른 수도사인지에게 눈짓을 보내자, 그는 남자를 데리고 저쪽으로 가버렸다.


“아무튼, 손님들. 도와줘서 고맙소. 어떻게 보상을 해 드려야 할지······.”


올리버는 기분좋게 웃으며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포도주를 빚는다던데······.”


“아, 그래. 포도주. 그래. 그런데······.” 갑자기, 수도원장은 펠릭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혹시나, 어디까지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수도원장은 갖가지 약병들을 주렁주렁 달고있는 펠릭스를 보며 물었다. “당신, 그······.”


“아! 말을 잘 고르는게 좋을 겁니다.” 수도원장의 말을 자르고, 펠릭스가 말했다. “아주 비슷하지만서도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착각하는것은, 때때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키니까요.”


“저게 무슨 소린가요?” 실비아가 눈치를 보며 올리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약사인지, 연금술사인지 말을 잘 고르라는 뜻이겠지. 펠릭스는, 자존심이 세니까.”


올리버도, 새나가지 않게 손으로 슬쩍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아, 그래. 그래서, 당신 혹시 연금술사인가?” 다행히, 수도원장은 절반의 확률 싸움에서 승리한듯 했다.


“아, 맞습니다! 보는 눈이 좋군요. 티가 나던가요?”


“아, 뭐······.” 수도원장은 그의 몸에 주렁주렁 달린 약병들을 다시 힐끗 보았다. “해서, 연금술사가 맞다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저는 아주 뛰어난 연금술사로서, 그야말로 못 만드는 약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만약 제가 못 만드는 약이 있다면, 그건 다른 어떤 연금술사도 만들지 못할 약일 겁니다.” 모처럼 연금술사라고 바로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어 그런지, 펠릭스는 조금 들뜬 기분으로 말했다.


“우리 수도원에······.”


“그렇지만, 저는 해결사는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감기약과 강장제 정도면 될까요?”


펠릭스는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수도원장의 수상한 낌새를 원천봉쇄 하려 했다.


“······문제가 있네.”


그러나 수도원장은, 펠릭스가 방금 한 말을 한숨으로 짓뭉개며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젊은 수도사들이, 자꾸 늦잠을 자.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없겠나?”


“호통을 치고, 매질을 하고, 벌을 세우시던지요.” 펠릭스가 대답했다. “그리고 말하자면, 저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긴 합니다만, 무슨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봐도 잘 모르겠어. 약에 대해서는 모르거든. 경전이라든가, 공부라든가, 포도주에 관해서라면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지만······늦잠이라니.” 수도원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뭐, 감기나 그 비슷한 병의 영향일지 모르니 보양식이라도 달여 드시지요.”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없겠나?” 수도원장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저는, 그러니까······.”


“펠릭스. 나는, 이 수도원에서 직접 양조한 포도주를 맛보고 싶은데.” 올리버가 입맛을 다시며 끼어들었다.


“아! 포도주. 그래, 포도주. 피처럼 붉은 그 포도주. 악마의 혓바닥처럼 달콤하고, 지옥의 유황불처럼 뜨뜻한 포도주. 얼마든지 맛보게 해 주겠네. 그러니, 우릴 좀 도와줄 수 없겠나?” 다시 수도원장이, 불쌍한 표정으로 펠릭스에게 물었다.


“알았어요. 내 참. 올리버, 내가 한 말이 있으니까, 이번에만 해 주는 거에요.”


마침내, 펠릭스가 툴툴거리며 대답하자, 수도원장과 올리버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그래, 그래!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자고. 전후 사정은 알아둬야 할 테니까.”


늦잠이라는, 언뜻 보면 별 것 아닌 문제가 그 수도원장에게는 꽤 속썩이는 일이었는지, 그는 대단히 귀한 손님이라도 온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펠릭스를 수도원 안으로 들였다. 그러나 펠릭스는, 영 못마땅한듯 눈쌀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수도원장의 방 안에서는, 어딘가 이상한 향 냄새 같은 것이 났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실비아는 눈쌀을 찌푸렸고, 펠릭스는 코를 킁킁거렸으며, 올리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방안에, 이상한 약초를 태우시는군요?” 펠릭스가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향이야. 전에, 어느 귀족이 선물로 준 건데······.”


“엣취!” 실비아가 그만,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아, 미안합니다.”


“끌까?” 수도원장이 펠릭스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뭐, 그래주면야 고맙죠.” 펠릭스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수도원장은 향을 은은하게 태우던 불을 꺼버리고는, 의자에 앉아 목을 가다듬고 말하기 시작했다.




“해서, 지금으로부터 213년 전에, 왕국 유일신교는······.”


“아니, 짧게 부탁드립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늦잠을 자는 이유를 파악하는데, 수도원의 역사를 줄줄이 읊을것 까지는 없어보이는군요.” 펠릭스가 웃으며 수도원장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자, 그는 꽤 불쾌한듯 보였지만 그래도 목을 다시 가다듬었다.


“해서, 우리 수도원은 원래 근처에 밀을 기르고 있었는데, 전전 수도원장인가, 그 때부터 밀 대신 포도를 기르기 시작했지.”


“아하, 종교 개혁 시기로군요. 더이상 왕국이 교회, 예배당, 수도원, 기타 종교시설에 지원금을 주지 않겠다고 선포했죠? 아, 동쪽에서 그랬단 말입니다. 여기 서쪽은······.”


“비슷해.” 수도원장은 잠시 입맛을 다시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해서,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언젠가. 어느 연금술사가 내 두 대 앞의 수도원장에게 아주 맛있는 포도주 빚는 방법을 알려줬다고 하네.”


“연금술사가?” 펠릭스가 의아한듯 물었다.


“그래, 연금술사. 그가 알려준 비법은 아주 대단한 것이어서, 우리 수도원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었지. 그 때, 나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는데,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어딘가 살집이 푸근하고, 목소리와 몸짓에서 여유가 철철 흘러넘치는 남자였는데, 조금 독특한 목소리를 가졌지.


아무튼, 그 연금술사가 그러더군, 자기네들 연금술사들은 기교와 마술을 부려, 사람들이 원하는 꿈을 이뤄주는 사람들이라고······, 자네. 내 말 듣고있나?”


펠릭스는 아주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가, 뒤늦게 수도원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물론입니다. 그래서요?”


“흠흠. 그래서.” 수도원장은 펠릭스를 힐끗 쳐다보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 수도원에 새로운 문제가 생긴 김에, 마침 연금술사를 찾던 중이었는데. 이 무슨 운명의 계시인지, 연금술사가 우리 수도원에 찾아왔군그래.”


“신의 이름을 말한다든가, 성호를 긋는다든가 하지 않으시네요?” 펠릭스가 묻자, 수도원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신의 뜻은 아주 드높고 오묘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더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찾는다고 해서 신이 항상 우릴 찾아오지는 않는다는거야.”


“어려운 말이군요. 쉽게 설명해 주겠습니까?”


수도원장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헛기침을 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수도원이 망하게 생겼을 때, 우릴 구해준 것은 성호나 성가, 기도와 찬송이 아니라, 이 포도주와 포도주가 벌어오는 돈이었지. 뭐, 어쩌면 그것조차도 신의 드높은 뜻이었을지도.


하지만 뭐가 됐든 간에, 그땐 내가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인지, 그 뒤로는 성호를 잘 긋지 않게 돼 버릇 하더군.”


별로 수도원장으로서 할 말은 아니었기에, 그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늦잠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애초에, 그것 때문에 저를 찾으셨으니. 언제부터 시작됐습니까?”


“한달쯤 전 부터인가. 그래, 그쯤이야.”


“전에도 이런 일이 있던가요?” 펠릭스가 물었다


“해마다 있기는 했어. 아무래도, 겨울이 길어지는 계절이 오면 잠이 늘어나는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들판의 동물들도 겨우내 잠이 들지 않나. 우리 인간도, 그런 짐승의 본성을 아직 갖고 있으니.”


“경과를 알려주시죠.”


“해마다 조금씩 늘고있네. 그리고, 올해는 유난히 심해. 젊은 수도사들 거의 전부가, 제때 잠에서 깨지도 못하고, 공부나 수학, 찬송, 예배, 수행, 그 무엇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 오히려, 마귀들이 돌아다닌다는 밤이 되면 그들의 눈에 또렷하게 총기가 돌지. 해서 말인데, 나는 이게 무슨 마귀의 장난은 아닐까 싶어. 그리고, 또 하나. 조금 기우지만······.”


수도원장은 뭐가 그리 신경쓰이는지, 다시 괜히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내 생각에, 수도원 안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아.”


“보물이라도 숨겨뒀답니까? 보석 박힌 황금 십자가나 뭐······”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수도사들이, 나몰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것 같아.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다가 내가 인기척만 내면 모른체 하고, 알 수 없는 문자가, 꼭 악마의 손톱자국같은 낙서가 쓰인 종이 쪽지도 종종 발견했지. 어쩌면, 정말 큰일일지도 몰라. 꼭 좀, 도와줄거지?”


펠릭스는 올리버를 향해 시선을 흘끗 돌렸다.


“포도주.” 올리버가 말했다.


“아, 아! 물론, 맛 보게 해 줄게. 우리 수도원의 포도주는, 아주 맛이 좋거든.” 수도원장이 재빨리 대답하고 다시 펠릭스를 쳐다보자, 펠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머물 곳과, 우릴 도와줄 사람 한 명을 붙여주십시오.”


“도와줄텐가?”


“네.” 의외로 선뜻 대답하는 펠릭스를 보고, 실비아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고맙네, 고마워. 바로 마련해주지. 아, 그래. 우선 포도밭을 안내해 줄 테니까, 그리로 가 보자고.”


그리고 수도원장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의 등을 떠밀며 그들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행복의 연금술 가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3 83화 21.11.18 27 1 20쪽
82 82화 21.11.17 29 1 24쪽
81 81화 21.11.17 26 1 18쪽
80 80화 21.11.16 27 1 21쪽
79 79화 21.11.16 22 1 22쪽
78 78화 21.11.15 25 1 22쪽
77 77화 21.11.15 26 1 25쪽
76 76화 21.11.14 29 1 20쪽
75 75화 21.11.14 29 1 23쪽
74 74화 21.11.13 28 1 23쪽
73 73화 21.11.13 27 1 20쪽
72 72화 21.11.12 25 1 19쪽
71 71화 21.11.12 24 1 21쪽
70 70화 21.11.11 28 1 19쪽
69 69화 21.11.11 25 1 20쪽
68 68화 21.11.10 22 1 21쪽
67 67화 21.11.10 22 1 20쪽
66 66화 21.11.09 25 1 23쪽
65 65화 21.11.09 24 1 20쪽
64 64화 21.11.08 24 1 22쪽
» 63화 21.11.08 24 1 24쪽
62 62화 21.11.07 22 1 28쪽
61 61화 21.11.07 27 1 21쪽
60 60화 21.11.06 22 1 26쪽
59 59화 21.11.06 25 1 20쪽
58 58화 21.11.05 24 1 22쪽
57 57화 21.11.05 23 1 24쪽
56 56화 21.11.04 25 1 25쪽
55 55화 21.11.04 19 1 24쪽
54 54화 21.11.03 28 1 2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