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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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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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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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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66화

DUMMY

글레이스 수도원은 사각형에서 아래쪽 변을 뚝 떼어낸 모양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역자 모양의 본채 왼편에 별채가 바로 붙어있는 모양새였다. 왼쪽의 별채 복도에 수도사들의 침실이 모여있었고, 펠릭스의 일행들이 창문 너머로 유령을 발견한 것은 맞은편의 오른쪽 복도였다. 그들이 별채와 본채를 잇는 통로를 거쳐 모퉁이를 두 번 돌아 오른쪽 복도에 도달했을 때는, 그 유령같은 형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세상에, 정말, 유령이······.”


실비아의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졌고, 입술은 새파래졌다.


“진정해요. 유령따윈 없으니까. 진정제라도 좀 줄까요?”


“부탁해요.”


그러자 펠릭스는 조그만 약병을 하나 꺼내 실비아에게 내밀었다. 뚜껑을 열자, 그녀가 좋아하는 사랑초의 달콤한 향기가 나,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술냄새.” 올리버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술냄새가 나는데.”


“방금 제 약의 뚜껑을 열어서 그래요.”


“아니, 아냐. 그 냄새가 아니야.” 올리버가 잠시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건 술냄새야. 나는 종종 맡아봐서 안다고.”


“그런가요? 흠. 그런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펠릭스도 올리버를 따라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고보니까, 그 유령.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실비아가, 다시 두 손을 작게 떨며 말했다.


“글쎼요. 진짜 유령일 리 없으니까, 아마 이쪽 복도 어딘가의 방 안으로 들어갔겠죠. 보자, 여긴······.” 펠릭스는 문패도 붙어있지 않은 복도의 방들을 둘러보았다. “뭘까요?”


“글쎼.” 올리버는 가까이 있는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지만, 철컥 하고 걸리는 소리만 났다. “잠겼군. 열쇠 없이는, 못 열어.”


“열수 있잖아요, 올리버?” 펠릭스가 옆에서 조금 놀리듯 말했다.


“도구가 없어. 시간도 걸리고, 한 밤중에 할 만한 일은 아냐.”


“대낮에 할 일도 아니고요. 몰래 자물쇠를 따기에는, 차라리 밤이좋죠.”


“아무튼, 지금은 무리야. 도구가 없으니까.” 올리버는 다시 문 손잡이를 철컥 돌려보고는, 열리지 않는 문을 노려보며 문에서 떨어졌다.


“이제 어쩌죠?” 실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펠릭스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일단, 돌아가죠. 유령이 있다는 걸 확인한 걸로, 수확은 충분해요. 그리고 내가 볼 때, 아마 저 유령도 늦잠과는 별 상관 없을테니까.”


“어떻게 확신해요?”


“여긴 숙소가 아니잖아요. 저쪽 숙소 방향으로는 가지도 않았다고요, 이 유령.”


“글쎄. 뭐가 됐든 간에, 일단 오늘 밤에는 달리 더 할 만한 일이 없는것 같기는 해.”


“그럼, 빨리 돌아가죠. 무서우니까.”




펠릭스를 앞세우고, 올리버를 뒤에 세운채 실비아는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걸어 재빨리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이불을 휙 뒤집어 쓰고는, 괜히 불안에 떨며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오늘 밤에 무서운 꿈이라도 꿀 까봐 걱정하던 그녀는, 아까 펠릭스가 준 약병의 뚜껑을 다시 열었다.


“단내.” 올리버가 말했다.


“아, 제가 약병 뚜껑을 열어서 그래요.” 실비아가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흠. 확실히, 아까 술 냄새가 났던것 같기도 하고.” 잠시 코를 킁킁거리던 펠릭스가 말했다.


“술이라. 한 밤중에 누가 양조장에라도 다녀왔나?”


“열쇠는 수도원장만 가지고 있다잖아요. 누가 그러겠어요? 설마, 수도원장이 굳이 한 밤중에 남몰래 양조장에 갈 이유도 없잖아요.”


“뭐, 술 마시러 갔을 수도 있지.” 올리버가 대수롭잖다는듯 말했다.


“그럼 대낮에 당당하게 가면 될 걸, 뭐하러 밤에가요. 귀찮고 번거롭게.”


“글쎄. 또 모를 일이잖아. 가령······.”


실비아는 펠릭스와 올리버가 시답잖은 토론을 나누는 것을 들으며, 어느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유령을 만났다. 어린 아이를 납치해 간다는 무시무시한 할아버지 유령. 그러나, 유령은 올리버의 주먹질과 펠릭스의 약병을 맞아 금새 저만치 달아났고, 실비아는 아주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잠에서 깨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쳐드는 창문을 쳐다보았다.




수도원의 아침은 일찍 시작되는 듯했다. 벌써 새벽에 뭔가 한듯, 수도사들은 모두 옷을 갖춰입고 어디선가 슬슬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마당에 모이더니, 저마다 가볍게 잡담을 나누거나 햇살을 받으며 몸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이에요.”


실비아가 말하자, 펠릭스와 올리버도 뒤척이며 잠에서 깼다.


“일어나요, 이 잠꾸러기들 같으니.”


“내 참. 어제 누가 잠꼬대를 해 대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 말이죠.” 펠릭스가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누가 그랬어요?”


“여기 달리 누가 있어요?”


“아, 뭐. 난 그냥 아무 말도 안 할게.” 올리버도 하품을 하며 일어나더니, 잠시 눈을 끔뻑이며 가만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저요? 제가 그랬다고요?”


“뭐, 모를 일이죠. 아무튼, 슬슬 나가보자고요. 어휴, 이 좁아 터진 방.”


펠릭스는 비척비척 사다리를 내려와, 먼저 방에서 나가버렸다.


“올리버. 저, 혹시나요. 저 잠꼬대 하던가요?”


올리버는 실비아를 잠시 쳐다보더니, 시선을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


“실비아.”


“네.”


“나는, 잠버릇이 험한 것이, 사람의 큰 결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 네.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그래서, 저 잠꼬대 하던가요?”


올리버는 실비아를 쳐다보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젓고는, 재빨리 방에서 나가버렸다.




식당에서 수도사들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아 식사를 하던 펠릭스는, 멀건 스튜를 뜨다말고 갑자기 큰 소리로 도미닉의 이름을 불렀다. 저쪽에서 동료 수도사와 뭔가 대화를 하던 도미닉은, 당황하여 동료에게 재빨리 뭐라 말하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도미닉. 반갑군요. 수도원장님은 어디계실까요?”


“글쎄요. 아마 방에 계실것 같습니다.”


“도미닉. 거기 멀뚱히 서있지 말고 앉아요. “ 펠릭스가 자기 옆의 의자를 끄집어내며 권유하자, 도미닉은 당황한듯 잠시 머뭇거렸다.


“앉아요.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그러니까.”


“아, 네.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중요하고 말고요. 자, 그러니까 앉아 보세요.”


결국, 도미닉은 그 의자에 앉았다.




“스튜가 잠 묽군요.” 펠릭스가 말했다. “싱겁고, 고기의 양도 적군요.”


“맛에 탐닉하는 것은, 아주 부끄러운 일입니다.” 도미닉이 대답했다. “그래서, 그 중요한 이야기 라는 것이······.”


“아, 별 건 아닙니다. 어젯 밤에, 유령을 봤거든요.”


“유령이오?” 도미닉이 당황하여 말했다. “이 수도원에, 유령 따윈 없습니다. 안 그래도 수도사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도는데, 그런 말로 괜히 수도사들을 자극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오, 무슨 이상한 소문입니까?” 펠릭스가 묻자, 도미닉은 뒤늦게 자기 입을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알려주지 않을 건가요?”


“저는 잘 모릅니다. 그냥,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밖에는. 어쨌든! 유령 따윈 없습니다. 건전한 이성과 성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 아닙니까? 세상천지에, 유령이 어딨습니까?”


“하지만, 전 봤는걸요. 머리가 산발이 된, 노인이, 복도를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


“기분탓이거나, 어느 어린 수도사가 장난이라도 친 모양입니다.”


도미닉은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는듯, 재빨리 대답하고는 스튜를 한술 떴다.


“아,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숙소가 있는 층의 오른쪽 복도에는 뭐가 있습니까?”


“이층 동편 복도 말입니까? 거긴, 수도사들이 모여 토론을 하거나, 같이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도서관 같은 곳입니까?”


“도서관은 삼 층이고, 이층 우측 복도는 강연장이라든가, 뭐 그런 곳입니다. 신학 토론을 열거나, 공부에 관심이 많은 수도사들이 따로 모여 공부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든, 그런 곳입니다.”


“그렇군요. 자주 씁니까?”


도미닉은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적당히 쓰는 것 같습니다.”


“밤에는 씁니까?”


“밤에는, 잠을 자야죠. 밤에 자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그렇군요. 아, 그리고 말입니다. 혹시, 밤에는 수도원의 문이란 문은 모조리 잠급니까?”


도미닉은 별걸 다 묻는다는 듯한 얼굴로 펠릭스를 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왜요? 도둑이라도 들까봐서?”


“당연한 일입니다. 밤에, 수도사들이 몰래 어디 숨어들어 장난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가끔, 정말 도둑이 들 때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하나만 더 묻도록 하죠. 혹시 말입니다. 수도원 안에, 술이 있습니까?”


도미닉은 펠릭스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듯 했다.


“네?”


“아, 그러니까 말입니다. 밤에 잠이 안 와서 잠시 복도를 거니는데, 아까 유령을 봤다고 했잖아요? 저도 처음에는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어 유령이 있던 곳으로 가 보았는데, 유령은 간데없고, 다만, 술 냄새만 희미하게 나더군요.”


“그런 유령이 어딨습니까?”


도미닉이, 터무니없다는듯 말했다.


“수도원 안에 술을 들이는 사람은 없나요?”


“양조장에야 술 천지지만, 그 술을 수도원 안으로 잘못 들였다간 여간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술에 대해서는 그저 착각이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그럼, 도미닉. 식사 맛있게 하시길. 실비아, 올리버. 가죠.”


펠릭스는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만 자리를 떴다.




수도원장은, 이번에는 자기 방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래서 펠릭스와 실비아, 올리버는 다시 지나가는 수도사들을 붙잡고 수도원장의 행방을 묻지 않아도 되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그래. 그래서, 그, 뭐좀 알아냈나?”


“아직은요. 오늘도, 늦잠꾸러기들이 많던가요?”


수도원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젯 밤에, 복도에 유령이 떠돌던데요. 어쩌면, 그 유령 때문은 아닐까요?”


유령 이야기를 들은 수도원장의 얼굴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유령을 봤다고?”


“그렇습니다. 머리가 산발이 된, 노인의 모습이던데요. 그 수도사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복도던가? 그곳에 나타난 걸 창문을 통해 봤는데, 제가 가 보니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없더군요.”


수도원장은 불편한듯 헛기침을 했다.


“내가, 밤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제가 밤잠이 적은 편이라. 그리고, 좋은 약을 만들려면 영감이 필요한 법인데, 달과 별로 수놓아진 밤하늘은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거든요.”


실비아는, 평소에는 밤에 쿨쿨 잠만 잘자는 펠릭스를 떠올리며, 잠시 코웃음이 나는 것을 참았다.


“어린 수도사가 장난을 쳤겠지.”


“아, 그리고. 조금 뜬금없는 말입니다만, 술냄새가 나더군요. 유령이 사라진 자리 근처에서. 혹시, 술독에 빠져 죽은 유령은 아니겠죠? 아, 이 경우에는, 포도주를 숙성하는 오크통이려나?”


펠릭스의 기분나쁜 농담을 들은 수도원장은, 다시 불편한듯 기침했다.


“그런 유령이 있을리 없지않은가.”


“아무렴요. 어쨌든, 뭐 약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만. 그 전에, 양조장을 좀 봤으면 싶군요.”


“포도주 양조장을?” 수도원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비록 제가 포도밭을 뒤져보기는 했지만, 제가 거기서 본 것이라고는 수확이 끝나 잎도 열매도 다 떨어지고 덩그러니 남은 포도나무 뿐이었습니다. 정말 사람에게 해를 끼칠 만 한 벌레, 곰팡이, 또는 질병의 흔적은 포토 잎사귀나 알맹이에 있었겠죠. 잎사귀야 이미 틀린것 같으니, 양조장에 있을 포도 알맹이라도 좀 보고싶어 그럽니다. 혹시, 그새 모조리 으깨버린건 아니겠죠?”


“아직, 남아있는것이 있기는 한데.”


“잘 됐군요! 그럼, 양조장을 좀 구경시켜 주시지요. 아, 그리고. 가는 김에, 포도주 맛도 한번 봤으면 싶고요.”


“아, 그래. 맛을 보여준다는걸 깜빡 잊어버렸군. 일이 바빠서 그랬네. 아무튼, 맛을 보여주는거야 어렵지 않지만, 양조장을 꼭 봐야 하나?”


“네. 꼭 봐야겠습니다.” 펠릭스가 당당하게 말하자, 수도원장은 영 못마땅한듯 헛기침을 하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네. 연금술사의 부탁이니, 못 들어줄건 없으니까.”




글레이스 수도원의 마당을 지나, 포도밭 근처에 세워진 목조 양조장으로 가는 길에는 장애물 하나 없었으며, 길도 깨끗했다.


“관리를 잘 하시는군요. 잡초 몇 포기쯤은 자라날 법도 한데.”


“양조장은 우리 수도원의 유일한 자랑이니까.” 수도원장이 말했다.


“달리, 자랑거리가 없습니까? 가령, 성인의 유해가 담긴 항아리라든가, 금과 보석을 있는대로 박아 만든 성물이라든가······.”


“없네.”


수도원장은 짧게 대답하고, 오솔길 저쪽에 세워진 양조장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철사 울타리 앞에 멈춰섰다.


“아쉽군요. 서쪽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동쪽에서는 그런 수도원이 많습니다. 예물과 성물, 보물이 많은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처럼 여기는 그런 수도원들이요.”


수도원장은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울타리 문을 열고, 열쇠를 도로 주머니 안에 넣었다.


“열쇠를 가진 것은, 수도원장님 혼자 뿐입니까?”


수도원장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나 뿐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보죠.”


펠릭스가 말하자, 수도원장은 다시 느릿하게 앞장섰다.




펠릭스를 가리켜 귀한 손님이라고 칭한 것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는듯, 수도원장은 펠릭스에게 양조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포도를 모으고 선별하는 창고에서 시작하여, 으깨어 즙을 내는 곳, 오크통에 담는곳, 오크통을 교체하는 곳, 오크동들이 쌓여있는 지하 숙성고 까지.


“꽤 괜찮군요.” 다시 포도가 쌓여있는 창고로 돌아와, 펠릭스가 말했다.


“좋은 곳이지.” 수도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포도 수확이 늦은 편이군요.” 쌓인 포도 한 송이를 집어들고, 펠릭스가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포도는 알에 탄력이 있고 단내가 났지만, 송이가 그렇게 탐스럽지는 않았다.


“동쪽 기준으로 보면, 그렇겠지. 이곳 땅은 따뜻하니까, 겨울이 늦게 찾아오거든.”


“수도원과 포도밭에 겨울이 찾아오는 시기가 다르군요. 수도사들은 때이른 겨울에 벌써부터 겨울잠 준비나 하고있으니까요.”


“그건, 나도 궁금하네. 대체 뭐 때문인지. 갑자기 날이 추워져서 잠이 많아진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키나 한지 원.” 수도원장이 툴툴거리듯 대답했다.


“그래서, 거기 계속 계실겁니까?” 포도송이를 내려놓으며 펠릭스가 말하자, 수도원장은 다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네들을 못 믿는건 아니지만, 이곳 양조장은 아주 중요한 공간이야. 열쇠를 넘겨줄 수도 없고, 어찌됐든 감시를 하기는 해야 하네.”


“아, 뭐. 그렇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실비아, 올리버. 같이 포도를 살펴보자고요. 아, 알맹이가 상하지는 않도록 조심하고요.”


“이 많은걸 다요?”


“되는데 까지는. 적어도, 해 봐야죠. 그럼, 시작할까요?”


옷소매를 걷어부치며, 포도들이 쌓인 곳으로 걸어가는 펠릭스의 뒤를 바라보고, 실비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도 옷소매를 걷어부쳤다.




포도 선별 작업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었다. 실비아는 포도 더미에서 한 송이 집어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달콤하고 조금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향기만이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펠릭스. 뭐 좀 알겠어요?”


포도송이를 살펴보던 펠릭스에게, 실비아가 물었다.


“글쎄요. 올리버. 뭐 좀 보이나요?”


“오늘 안에 이 많은 포도를 다 살펴보는게 무리라는 건, 확실히 알겠군.” 올리버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러게요.” 펠릭스는 포도 송이를 들여다 보다가, 갑자기 코 가까이 가져다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았다. “흠. 수도원장님? 거기 아직 있습니까?”


창고 문 뒤에 서 있던 수도원장이 다시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펠릭스는 포도를 내려놓고,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봤습니다.”


“어떻던가?”


“적어도, 이 포도 때문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해서, 양조장 견학은 이쯤에서 마쳤으면 합니다.”


“잘 생각했네. 자, 빨리 가지.” 수도원장은 조금 허둥대며 펠릭스를 재촉하였다.


“잠시, 잠시만요. 수도원장님. 뭐 하나 빠뜨리신것 없습니까?”


“응? 뭘?” 수도원장이 되묻자, 펠릭스가 올리버를 힐끗 돌아보았다.


“포도주를, 맛보았으면 합니다만.”


“아, 아하! 잠시, 잠시만 기다리게. 어디보자······.”


수도원장은 올해 팔려고 만들어둔 포도주를 찾으러 어디론가 가버렸다.


“흠. 뭐, 양조장에도 별 건 없나본데요.” 펠릭스가 말했다.


“그러게요. 그나저나, 여기 겉보기랑 조금 다르네요.” 실비아가, 벽과 천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가?”


“올리버. 여기, 조금 좁은것 같지 않아요?”


“좁다고?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음. 그런가요? 제가 보기에는 조금······.”


그 때, 갑자기 벽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났어요?”


“쥐라도 사는가보죠.”


“양조장에 쥐가 살면, 그건 그것나름 큰일아녜요?” 아까, 이쪽에서 들린 것 같은데.”


“유령 아니에요?” 펠릭스가 놀리자, 실비아는 걸어가던 것을 멈추고 다시 이쪽으로 쪼르르 돌아왔다.


“펠릭스. 유령따윈 없다면서요.”


“그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몰라, 유령은······.”


갑자기, 벽 속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나, 세 사람은 눈을 멀뚱히 뜨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였죠?” 실비아가 당황한 눈으로,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요. 올리버, 한번 보고 올래요?”


“왜 나야?”


“유령이라도 나오면, 때려잡아야 하니까요. 부탁해요, 올리버. 전 유령하고 싸우는 재주는 없어서.”


“언제는, 유령따위 없대놓고서는.” 올리버는 그러면서 소리가 났던 벽쪽으로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쥐고 벽을 통 통 두드려 보았다.


“어때요?”


“글쎄.” 다시 올리버가 벽을 통 통 두드리는 찰나, 수도원장이 포도주를 들고 들어오다가 기겁을 했다.


“아니, 뭐, 뭐하는 거야!”


“아니, 무슨 문제라도?” 벽에서 떨어지며, 올리버가 물었다.


“아니, 함부로 양조장을 건드리면 안 되네!” 수도원장이, 얼굴이 붉어진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술은, 아주 예민하고 섬세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부탁이니 더이상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그만 나가주게. 자, 나가서 한 잔 하지. 포도밭을 내려다보며 말야.”


수도원장은 잽싸게 올리버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아니, 거 참. 저기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그랬습니다. 벽 속에, 쥐라도 살고 있으면 그게 더 큰 일 아닙니까?”


“잘못 들어겠지. 그래, 잘못 들었을 거야.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나? 술이 숙성되며 나는 소리가, 꼭 요정의 노랫소리 같다든가······그런 소리를 잘못 들었겠지. 자, 가서, 이 올해 병입한 포도주 맛을 보여줌세.”


아주 당황한 것처럼 허둥거리는 수도원장과, 수상한 소리가 났던 양조장의 벽을 돌아보며, 펠릭스는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등이 떠밀려 양조장에서 쫓겨났다.




포도밭 울타리에 몸을 기댄 채, 올리버는 검붉은 와인을 천천히 입 안에 한 모금 머금고, 그 맛과 향을 음미했다.


“맛있나요?” 여전히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이쪽을 쳐다보고있는 수도원장을 힐끗 돌아보곤, 펠릭스가 말했다.


“좋네. 역시, 가끔은 좋은 술을 마셔줘야 한다니까.” 다시 한 모금 음미하며 올리버가 말했다. “펠릭스. 넌 안 마셔?”


“저는 별로. 실비아. 당신은 어때요? 귀족이라면 꽤 즐기지 않나요? 와인이라든가······.”


“지금은, 별 생각 없어요.”


“그러지 말고 온 김에 한 모금 마셔보지. 언제 또 맛보겠어요?” 펠릭스가 슬며시 부추기자, 실비아도 수도원장에게서 와인을 한 잔 받아들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와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좋은가요?”


실비아는 두 눈을 살며시 감고, 천천히 맛을 음미한 다음,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 아주 대단한 미식가라도 된 척을 하네요. 그래봤자 포도주인걸.”


“이건, 꽤 괜찮은 포도주거든요? 향도 좋고, 잡내도 안 나요. 왕국 안에서 최고의 포도주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귀족들의 만찬 테이블에 올라갈 만큼은 충분히 되고도 남아요.”


실비아는 펠릭스에게 가볍게 쏘아붙인 다음, 수도원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누가 만드는 거예요? 수도사들이 다같이 만드나요? 아니면 원장님이 직접?”


“아, 그, 있어. 아무튼.” 수도원장은 얼버무렸다.


“아, 하긴, 비밀이라는 거죠. 이해해요. 누가 됐든, 어쨌든 대단한 솜씨를 가진 건 틀림없네요.”


“포도주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에요?” 펠릭스가 다시 옆에서 물었다.


“아니죠, 당연히! 포도를 선별하는 것도 중요하고, 으깨는 것도 마구잡이로 함부로 으깨서는 안 된다고요. 오크통도 아무거나 써서는 안 되고, 숙성 시키는것도 일이에요.”


“뭐, 딱히 당신이라고 해서 특별히 잘 알거나 그렇지도 않네요.” 펠릭스가 말하자, 실비아는 입을 비죽였다.


“아무튼, 좋군.” 막 와인 잔을 비우며 올리버가 말했다. “잘 마셨습니다. 좋은 포도주를 빚는군요.”


“뭐, 그렇지. 그럼, 이제 슬슬 본채로 돌아가겠나? 아, 아니면, 약을 만들려면 또 무슨 준비가 필요한가?” 수도원장도, 이제 양조장에서 그만 나가자고 눈치를 주며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딱히요. 큰 솥이 하나 있으면 좋겠군요. 그 외에는, 필요 없을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늦잠에 좋은 약을 이제 슬슬 만들어 줘.” 수도원장이 보채듯이 말하자,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죠. 얼마든지, 필요하신 만큼 만들어 드리죠. 그럼 갈까요?”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펠릭스를 생각없이 뒤따라가던 실비아는, 뒤늦게 그 암호가 가득한 종이를 떠올렸다.


“저기, 펠릭스.” 수도원장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실비아가 펠릭스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왜요?”


“그, 조금만 기다려줘요. 아직 암호를 덜 풀어서요······.”


“언제는, 금방 푼다면서요?”


“거의 다 했어요!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요.”


“내 참. 솥에 받은 물이 끓기 전까지. 그 때 까지 해독 못 하면, 그 암호는 무시하고 약을 만들겠어요.”


“알았어요. 그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실비아는 이제는 머릿속으로 외워버린, 그 암호가 적힌 종이를 떠올리며, 이 종이 안에 무슨 뜻이 숨겨진 것인지 다시 헤아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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