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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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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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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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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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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74화

DUMMY

실비아는 언젠가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가정교사가 말 해 주었던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던가? 친구와 수다를 떨며 점심을 먹다가 들은 말일 수도 있었고, 바닥을 쓸고 장식대를 마른 걸래로 닦고있던 하인들의 잡담을 우연히 엿들은 것일 지도 몰랐다.


어쨌든, 실비아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아주 반항적으로 그 말을 거부했다. 적응이란, 결국 강한 힘에 굴복하는 약한 자의 애처로운 생존 전략이라고. 뭔가, 이렇게까지 어려운 단어를 써 가며 생각했던것 같지는 않지만, 대충 그 비슷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실비아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실비아는, 지금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올랐다. 이 두꺼운 어둠의 장막을, 이제는 꽤 익숙하게 걸어가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해서였다. 처음 동굴에 들어왔을 때 보다 긴장감도 덜 했고, 두려움도 꽤 줄어들어 있었다. 이런 걸 보면, 그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듯 했다.


“응? 웃었어요?” 한참 걸어가던 펠릭스가 말했다.


“아, 아니에요. 기분탓이겠죠.” 실비아가 얼버무렸다.


“뭐 재미난 이야기라도 있으면 혼자만 알고있지말고, 같이 나누자고요.” 펠릭스가 말했다.


“아니라니까요, 그런거.” 실비아가 말했다. “그리고, 저한테 재밌는 이야기라고 해서, 당신한테도 재밌을거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아주 일리있는 말이로군.”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희들은 내가 해 주는 농담들은 다 싫어하잖아.”


“술꾼들의 걸쭉한 농담을 좋아하는 소년소녀가 어딨어요?” 펠릭스가 올리버에게 대꾸했다.


“뭐, 좋아하는 애들도 많거든.” 올리버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뭐, 아무튼. 별로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말은 안 할 거예요.” 실비아가 말했다.


“하기야, 뭐 이해는 해요. 저도 연금술사 숲에서 한창 배울 때는, 첼시나 버크가 재밌는 이야기랍시고 항상 말을 꺼내곤 했는데, 거의 말하는 당사자만 웃고 우리들은 가만히 있었죠. 진짜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놓는건 트로이랑 게일이었는데. 트로이는 서커스 지망생이라 그렇다 쳐도, 게일이 참 말솜씨가 좋았거든요. 아주, 타고난 배우라고나 할까.”


“펠릭스. 당신 친구들은 재밌는 사람이 많네요.” 실비아가 조금 부럽다는듯 말했다.


“뭐,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잘 찾아보면 그런 구석은 있곤 하죠. 안 그래요, 올리버?”


“갑자기 내 이야기를 왜?” 올리버가 말했다.


“당신은, 그렇잖아요. 산짐승을 사냥해서 내장을 긁어내고, 가죽을 벗겨 고기를 구워먹는 주제에, 다람쥐 한 마리가 그렇게 잘 따르잖아요? 뭐야, 코튼이랬던가? 그 다람쥐. 지금도 있나요?”


“글쎄.” 올리버가 대답했다. “가게에 두고 온 것 같아.”


“하여튼. 자기 애완 동물은 잘 관리해요. 귀엽다고 주워 기르다가 질린다고 버리는건 어디가서도 자랑스레 못 할 말이니까.”


“내가 주운게 아냐. 코튼이 따라왔지. 그리고, 내가 버린 것도 아니라고.”


“어련하겠어요.” 펠릭스가 말했다.


“그리고, 난 코튼을 자유롭게 해 주고 싶어. 코튼도 아마 그 연금술 가게 안에서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그 근처는 밤나무 숲이니까, 배도 안 고플 테고.”


“우리가 신나게 밤알을 땄는데도요?” 그 말을 들은 올리버는, 잠시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우리가 안 턴 밤나무나, 아니면 우리 식량 창고로 숨어들어 알아서 잘 먹고 있겠지.”


“식량 창고는 안 돼요!” 펠릭스가 동굴 속에서 크게 외쳐버린 탓에,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렸다. “이 다람쥐놈이, 내 감자나 기껏 말려둔 허브에 이빨 하나라도 갖다댄 자국이 있으면, 당장 온 가게 안에 쥐약을 갖다 뿌리겠어요.”


“펠릭스. 불쌍한 생물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실비아가 끼어들었다.


“불쌍한건 나거든요? 다람쥐한테 집을 뺏길 수는 없어요. 그건, 내 마지막 보루에요!”


“펠릭스. 애처럼 굴지 말아요. 좀, 어른스럽게 굴라구요. 다람쥐랑 진심으로 싸우는 어른이 어딨어요?”


“그래, 펠릭스. 어른스럽게 굴어야지.” 올리버도 실비아의 편을 들며, 펠릭스를 놀렸다.


“그 멍청한 다람쥐 같으니.” 결국, 궁지에 몰린 펠릭스는 한 마디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즐겁게 떠들다가, 다시 조용하게 동굴 안을 걷던 실비아의 눈가에, 무언가가 언뜻 보였다. 눈을 돌려 살펴보니,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야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 실비아는, 그 동굴 천장에 잔뜩 붙어있던 벌레인줄 알았지만, 빛의 색깔과 모양이 달랐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빛이 아니라, 이상한 모양으로 반딧불의 불빛처럼 야광으로 가만히 빛나는 그 모습은, 분명 달랐다.


“펠릭스. 저게 뭐죠?” 실비아가 그걸 가리키자, 펠릭스는 가볍게 탄성을 지르며 그리로 쪼르르 갔다.


“야광 이끼!” 펠릭스의 등불 빛이 가까워지자, 그 조금 신비로운 야광빛은 사라져버리고, 거기에는 평범하게 돌에 달라붙곤 하는 이끼밖에 보이지 않았다.


“야광 이끼요? 이끼도 빛을 내요?” 실비아가 의아하다는듯 물었다.


“그런 종이 있어요. 아무튼, 이건 좀 좋은 수확인걸요.” 펠릭스는 배낭에서 병을 꺼내, 주머니칼로 이끼를 조심스럽게 긁어내어 병 안에 담은 다음, 만족스럽게 병뚜껑을 닫았다.


“별 꼴이네요. 당신이 약재를 못 알아보는 날도 다 있고.”


“조명의 불빛때문에 그래요. 아마, 나한테는 너무 밝았나보죠. 야광 이끼를 못 찾을 만큼.”


“하긴. 당신은 바로 옆에 불을 달고 다니는 꼴이니, 그럴지도요.” 실비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야광 이끼를 발견한 펠릭스는 퍽 기분이 좋아보였다. 딱히 그가 티를 낸 것은 아니지만, 실비아는 펠릭스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고 그가 지금 꽤 기분이 좋다는걸 알 수 있었다. 어쨌든, 한 달 가까이 같이 붙어다니다보니, 그런 사소한 버릇 같은것도 이제 실비아의 눈에 슬슬 익기 시작한 것이었다.


“꽤 좋은가봐요, 펠릭스?” 실비아가 물었다.


“좋죠. 좋고말고요. 사실, 귀한 재료는 아닌데, 굳이 야광 이끼를 구하러 동굴 안을 파헤치는 사람이 없다보니. 구하려면 은근히 귀찮은 재료거든요.” 펠릭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어디 쓰는 재료인데요?” 실비아가 물었다.


“아, 뭐. 딱히 어느 약에 쓰는 약재는 아니고, 독성을 좀 중화시켜주는 재료에요. 또 그렇다고 이것만 가지고 해독약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뭐랄까. 윤활유같은 존재라고 할까? 그런거죠.”


“그렇게 들어보니, 왜 그 이끼를 구하는 사람이 없는지도 이해가 가는군.” 줄곧 조용히 듣던 올리버가 말했다.


“왜요?” 실비아가 묻자, 올리버가 기다렸다는듯 대답했다.


“약재를 구하는건 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야. 하지만, 실비아. 기왕에 노력을 기울일 거라면, 금화 단위로 비싸게 팔리는 약재를 찾는게 낫지, 어떤 약에서 필수적인 재료는 아닌 야광 이끼 따위에 노력을 기울일 사람은 별로 없지 않겠어?”


“그래서 값도 별로 안 비싸죠. 희귀해도 찾는 사람이 있어야 비싸지, 희귀하다고 무조건 비싼 것도 아니니까.” 펠릭스도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그건 다 약사들이고 애송이 연금술사들이고, 제대로 재료를 볼 줄 몰라 저지르는 실수에요. 나처럼 눈이 좋은 연금술사는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재료였는데, 운이 좋군요.”


실비아는 예쁜 자갈을 주워 기뻐하는 어린애처럼 신난 펠릭스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풋 웃음이 났다.


“또 웃은것 같은데. 실비아. 뭐 재밌는 이야기 있으면 같이 좀 알자니까요.”


“알았어요. 그럼, 특별히 해 줄게요.” 실비아가 말하자, 뜬금없이 올리버도 끼어들었다.


“그래?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내 비장의 이야기를 해 주마, 실비아.”


“아니, 올리버. 갑자기, 그런 식으로 나오기에요? 그러면 괜히 말 꺼내기 힘들잖아요.”


“오호라. 이런 것도 괜찮군요. 그야말로 ‘동굴 속의 결투’처럼요!” 펠릭스는 아무도 부탁한 적도 없었는데, 벌써 심판이라도 된 듯이 말했따.


그 동굴 속의 결투라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인지 실비아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침내 적당히 떠오르는 재미난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실비아와 올리버의 잡담을 조용히듣고 있던 펠릭스는, 두 사람이 꺼낸 농담이 끝나자, 소리내어 크게 하품을 하는 것으로 감상을 대신했다.


“것 봐요. 내가 별로 재미 없을거라고 했잖아요.” 실비아가 투정부리듯 말했다.


“그럼 왜 자꾸 혼자 실실 웃는 거에요? 대체 그 정원사의 이야기 어디에 웃긴 부분이 있는 건지, 저는 도통 모르겠던데요.” 펠릭스는 말을 마치고는 다시 하품을 했다.


“그렇잖아요? 하도 풀을 만져 대서 손끝이 초록색으로 물든거야 그렇다쳐도, 정원수를 자르다가 코끝까지 초록색으로 풀물이 든건 좀 우스운 일 아닌가요?”


“글쎼요.” 펠릭스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번에는 올리버의 농담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그리고 술꾼들의 농담은, 솔직하게 말해서, 너무 식상해요 올리버.”


“나도 알아.” 변명하듯이 올리버가 대답했다. “사실, 취기가 돌면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어도 웃음부터 터져나오곤 하지. 이미 다들 무슨 이야기를 듣든 간에 웃을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말야. 꼭, 막 어른이 되려고 하는 소년소녀들처럼.”


“그래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둘 다 별로 재미없었어요.” 펠릭스가 소감을 말하며 크게 하품을 하자, 실비아가 그에게 말했다.


“그럼, 펠릭스. 당신이 해 봐요. 재밌는 이야기.”


“그러게. 거 좋은 생각이군, 실비아.” 올리버도 거들었다. “어디, 네가 하는 이야기는 얼마나 재밌나 한번 들어보자.”


“제 이야기요? 흠. 글쎄요. 저는 농담하는 재주는 별로 없는데.”


“누군 있어서 했어요? 정말 재밌는 이야기였는데, 제 말솜씨가 조금만 더 뛰어났어도, 지금쯤 다들 배를 쥐어잡고 까르르 웃어넘어가고 있었을 걸요!”


실비아가 화를 내자, 펠릭스도 어쩔수 없다는듯 머리를 굴리며 쓸만한 이야깃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뭐 없어요?” 조금 시무룩해져서, 실비아가 물었다. “정말, 재밌는 이야기라고 할 만한게, 하나도 없어요? 아니면 우리들한테는 말 해주기 싫은가요?”


“아, 있어봐요. 음. 흠. 글쎄. 으음.”


“실비아. 내가 보기에, 틀린것 같구나.” 올리버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펠릭스는, 남이 해주는 이야기는 다 들어놓고, 자기 이야기는 우리들한테 해 주기 싫은가봐요.” 실비아도 말했다.


“음. 생각하고 있잖아요. 왜들 그리 재촉이람. 음. 흠.”


“아니, 펠릭스. 뭐 실수해서 혼났다는 이야기라든가, 뭐 말을 잘못 해서 식사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이 다 같이 웃었던 이야기라든가, 하다못해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았다던가, 뭐 없어요?”


“없어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펠릭스가 대답했다. “저는 뛰어난 연금술사라.”


“좋겠네요.” 실비아가 입술을 비죽였다. “참 대단하네요.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일 줄이야.”


“아, 실수한 거 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별로 재미는 없어요.”


“뭔데요? 한번, 들어나 봐요.” 실비아가 금새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자 펠릭스는 헛기침을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솥에, 실수로 유황과 인, 통통하게 살이 오른 기름벌레와 살구꽃, 말린 무화과열매, 초석을 넣었다가 솥이 대폭발한적이 있어요.”


실비아와 올리버는, 그 이야기가 우스운건 둘째치고, 대체 뭘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 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봐요. 재미없잖아.”


“펠릭스. 이건, 재미있고없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실비아가 말했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이에요? 기름 벌레는 뭐고, 솥에 초석과 인은 왜 넣은 건데요? 대체 뭘 하려다가 그 꼴이 된 건지도 모르겠고, 어느 부분이 실수인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래. 뭘 어떻게 실수하면 솥에 그런걸 집어넣는건데?” 올리버도 옆에서 말했다.


“아, 설명하자면 길어요. 그러니까, 아니, 실비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하품하기에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하는 실비아를 보고, 펠릭스가 말했다.


“됐어요. 벌써 흥이 식었는걸. 하여튼, 펠릭스. 재미없기는.”


“그래, 펠릭스. 재미없는 남자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다고.” 올리버가 말했다.


“됐네요. 하여튼, 이래서 연금술 문외한들이란. 말이 안 통하니······. 아, 이게 뭘까?”


펠릭스는 말을 하다 말고, 때마침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저쪽으로 갔다.


“펠릭스. 대화 주제를 돌리려고 시도한 거라면, 조금 더 실력을 갈고 닦는 편이······.”


“짠!” 펠릭스는 실비아의 눈앞으로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관절을 통해 반으로 접히는 다리 여덟개를 오그렸다 펴기를 반복하는 어느 갑각류의 배를 보고, 실비아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실비아의 비명소리가 동굴안에 울려퍼졌다. 그녀는 어찌나 놀랐는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게, 대체, 뭐에요?!”


“동굴바위게. 진흙을 뭉쳐 등딱지를 대신하는 재밌는 놈들이죠. 원래 바닷가에 살던 소라게가 동굴 안으로 들어와 이렇게 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 그걸 왜 내 눈앞에 들이미냐고요!” 실비아가 펠릭스를 향해 거칠게 항의했다.


“신기하게 생겼잖아요?”


“펠릭스! 눈앞에 그렇게 징그러운걸 갑자기 들이미는데, 그게 신기한지 아닌지 제가 뭘 볼 새나 있었겠어요?”


“거 참.” 펠릭스는 자기 손에 잡혀 바둥거리는 동굴바위게를 잠시 구경하다가, 금새 바닥에 풀어주었다. 그 조그만 갑각류는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잽싸게 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휴! 하여튼, 간 떨어질 뻔 했네.” 실비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벽에 등을 기대려다가, 흠칫 하고 벽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리가 많은 벌레 하나가 태연하게 벽을 기어가고 있었다.


“꺅!” 또다시 그녀의 비명이 들렸다.


“뭐야, 왜?” 올리버가 물었다.


“저기, 벌레. 엄청 다리가 많고, 엄청 징그러워요!”


“아, 노래기군. 난 또. 뱀이라도 나온줄 알았네.” 올리버는 그 벌레를 잠깐 살펴보다가, 주머니 칼을 꺼내 칼등으로 벌레를 툭툭 건드려 쫓아냈다.


“어휴. 어디든 빨리 가요. 여긴, 징그러운 것들이 너무 많아요.” 실비아가 두 손으로 자기 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원. 알았어요. 올리버. 슬슬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죠. 나중에 동굴 거미라도 봤다가는, 그대로 까무러치겠네.”


“그건 또 뭔데요?” 실비아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는게 나을걸요.” 펠릭스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잠시 생각하다가,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그냥 모르는 채로 살게요. 그러니까, 자, 빨리 가요 가.” 다시 실비아는 펠릭스의 등을 쿡쿡 밀어, 그의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동굴을 한참 가던 펠릭스는, 또 무슨 재미난 걸 발견했는지, 걸음이 느려지더니 그자리에 멈춰섰다.


“펠릭스. 뭐예요? 빨리 가자니까요.” 실비아가 펠릭스를 재촉했다. 그녀는 또 무슨 징그러운 생물이 다가오는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동굴의 벽과 천장을 계속 힐끗거렸다.


“동굴버섯이에요. 볼래요?” 펠릭스가 말했다.


“동굴에, 버섯이 피어요? 썩은 나무도 없잖아요.” 실비아는 별 것 다 보겠다는듯 하며, 펠릭스의 근처를 기웃거렸다.


“그러게요. 그러니 신기한것 아니겠어요? 이것 좀 봐요.”


펠릭스가 보고 있던 곳에는 파랗고 빨간 버섯이 몇 개 피어있었다. 그건 그냥 빨간색이나 파란색이 아니었다. 젊고 패기 넘치는 화가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려고 새로 산 물감처럼 선명한 빨간색과 파란색의 버섯은, 실비아가 보기에는 아주 낯설어 보였다.


“엄청 색깔이 짙어요.”


“맹독성이에요. 저것들은 약으로도 못 쓰니까, 이대로 슬쩍 피해가죠.” 펠릭스가 말했다.


“그래, 실비아. 마침 버섯이 보이니 하는 말이다만, 버섯은 전문가가 되기 전에는 함부로 따지도 말고, 먹는건 더더욱 안 된다.”


그리고 올리버가 모처럼 채집꾼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제가 버섯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저런 버섯은 별로 먹고 싶을 것 같지는 않네요.”


실비아는 이 깊은 동굴의 어둠속에서 피어난 낯선 버섯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찰박거리는 물을 밟으며, 세 사람은 동굴 안을 걸어가다가 잠시 쉬어갈 만한 곳을 찾아, 이번에도 마른 땅 위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대체 얼마나 깊이 들어온 걸까요?” 실비아가 회중시계를 꺼내며 말했다. “으. 벌써, 안에 들어와서 헤매고 다닌지도 네 시간 째에요.”


“좀 걸리는군.” 올리버가 페미컨 하나를 꺼내 씹으며 말했다.


“올리버. 또 먹나요?”


“너희들도 차라리 지금 먹어두는게 좋을 걸. 동굴 안에는 쉬어갈 곳이 잘 없으니까. 오늘 우리가 운이 좋은거지, 재수가 없었으면 안에 들어온 뒤로 잠시도 못 쉬고 계속 걸었을거다.”


“아니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웅덩이 근처에서 어거지로 쉬든가요.” 펠릭스도 히죽거리며 페이컨을 꺼내 베어물었다.


“저는 벌써 바깥 공기가 그리운걸요.” 실비아가 말했다.


“난 한 두 시간 전부터 그리웠어.” 올리버가 말했다.


“그럼 저는 동굴에 들어올 때부터 그리웠다고 말해야 하나요?” 펠릭스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펠릭스. 당신은 그냥 있어요. 당신이 하는 농담은, 하나같이 못 들어주겠으니까.” 실비아가, 역시 배낭에서 페미컨을 꺼내며 말했다.


“어때. 먹을 만 하지?” 올리버가 실비아에게 물었다.


“네? 뭐가요?”


“페미컨. 생각보다 괜찮지 않아? 아까는 무슨 사막의 모래알 씹는것 같다고 하더니.”


“아, 네. 먹다보니까, 괜찮네요.” 실비아가 말했다.


“실비아. 당신도 점점 귀족에서 멀어지고 있군요.” 그리고 그녀가 페미컨을 베어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펠릭스가 말했다.


“무슨 뜻이에요?” 페미컨을 우물거리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실비아가 물었다.


“귀족들이 어디 그런 음식을 먹기나 하겠어요?”


“펠릭스! 당신,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귀족들을 모욕하는군요! 귀족도 사람이에요. 필요하면, 이런거든 저런거든 얼마든지 먹는다고요. 대체, 귀족을 뭐라고 아는 거람.” 실비아는 펠릭스를 향해 한바탕 쏟아낸 다음, 신경질적으로 페미컨을 베어 우물거렸다.




동굴의 어두운 통로를 지나가는 동안, 실비아는 뭔가 근처에서 계속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이 박쥐의 기척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제 박쥐 한두 마리가 그녀의 머리 근처로 휙 하고 스쳐 지나갈 즈음이었다.


“박쥐들이 부산스럽군.” 올리버는 무슨 파리 쫓듯 손을 휘휘저으며 말했다.


“사냥 시간인가보죠. 하지만, 박쥐가 우리들 가는 방향으로 날아간다는건 꽤 좋은 징후기는 해요.”


“어째서요?”


“그야, 밖으로 빠져나가는 통로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뭐, 재수없게 우리는 통과 못하는 쬐끄만 구멍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펠릭스가 말했다.


“하지만, 길대로 잘 따라가고 있었잖아요 우리. 그러면, 괜찮은거 아니에요? 동굴 초입부에서 그랬잖아요. 어차피 사람들이 드나드는 동굴이기도 하고, 마을에서 관광 상품으로 만들 생각을 할 정도니 괜찮을 거라고.”


“그랬죠. 그런데, 제가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가느라 중간부터 길을 잃었거든요.”


“네에?” 실비아가 당황해서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우리 여기 갇힌 거에요? 이대로 죽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돼요?”


“진정해요. 무슨, 방금 말했잖아요. 박쥐들이 나다니는 통로가 있을거라고.”


“좁으면 어떡해요?” 실비아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 다른 통로 찾으면 되죠. 뭘, 울지마요 실비아. 뭐가 그리 무섭다고. 여기, 듬직한 올리버도 있잖아요?”


“난 왜.” 올리버가 말했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요. 아, 실비아! 저거, 빛이에요 빛!” 그 말을 들은 실비아는 당장 펠릭스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빛은 없었다.


“해질녘이잖아. 빛이 새어들어올 시간은 아니지.”


“아니, 잘 봐봐요. 빛 맞잖아요.” 펠릭스는 다시 한 방향을 가리키다가, 아예 그쪽을 향해 재빨리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농담 적당히 해요. 그러니까 어디에 빛이-”


펠릭스를 따라 가다보니, 갑자기 실비아의 눈앞에 큰 절벽과, 그리고 바깥을 향하여 뻥 뚫린 구멍이 보였다. 맞은 편의 시커먼 절벽이 그늘져, 어둠 속에서는 꼭 동굴 벽과 똑같이 보이던 것이었다.


“세상에, 밖이다!”


뻥 뚫린 동굴 출구로 빠져나가려다가, 실비아는 바닥이 낭떠러지일까봐 잽싸게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다행히, 제대로 된 출구는 아닐지언정, 가끔이나마 쓰이는 통로기는 했는지, 동굴 바깥으로는 가파른 언덕 위아래를 통과하는 오솔길이 나 있었다.


“드디어 나왔구만. 올리버. 어때요? 꽤 빨리 나왔죠?”


“그러게말야. 난 밤이나 다 돼서 나올 줄 알았더니.” 저무는 해를 보며, 올리버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휴. 세상에. 영영 바깥 공기를 다시 못 마시는 줄 알았네.” 그리고 실비아는 들뜬 채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지, 옷 위로 그녀의 가슴이 부풀었다가 수축하는 모습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꼭 물고기같군요.” 펠릭스가 농담을 했다.


“물고기라니! 펠릭스! 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물고기 부레 같아서 그랬어요.”


“뭐가요?”


펠릭스는, 이번에도 뭐라 말을 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도, 어쨌든 한 달 남짓동안 실비아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어느정도 구분하고 있었다.


“뭐가요? 뭐가 부레같은데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그보다. 아까 동굴 거미에 대해 물었죠?”


실비아는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그랬죠.”


“알려줄게요. 동굴 거미는 그러니까······.”


“아! 몰라요! 안 들려요!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실비아는 자기 귀를 막으며, 재빨리 펠릭스에게서 떨어졌다. 그 꼴을 보고, 올리버는 그만 웃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올리버가 웃자 펠릭스도 웃었고, 실비아도 잠시 후에 슬며시 손을 내리고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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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연금술 가게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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