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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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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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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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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53화

DUMMY

메를린은 펠릭스가 앉아있는 길다란 나무 테이블 위에 펠릭스의 새 의족을 툭 올려놓았다. 사람의 다리를 닮은, 창백하고 조금은 물건처럼 보이는 그 의족을, 펠릭스는 꽤나 만족스러운 눈길로 찬찬히 훑어보았다.


“괜찮아 보이네.”


“실비아가 만들었어.”


펠릭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비아가? 왜? 어째서?”


“그야. 여행 중에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거기까지 가서 도와줄 수는 없잖아.”


메를린은 펠릭스의 얼굴을 보며 생긋 웃었다.


“뭐, 그렇기야 하다만. 하지만, 그럼 아예 나한테 직접 가르쳐주지 그랬어?”


그러자 메를린은 슬쩍 펠릭스의 시선을 피하며 괜히 휘파람을 불었다.


“밤에는.” 올리버가 끼어들었다. “휘파람을 불면 안 돼.”


“그런가요?”


“그래.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는 말이 있어.”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올리버가 말했다.


“어머, 미안해요. 하지만, 여기라면 뱀이 좀 나온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다들 착한 아이들이거든요. 그러고보니, 펠릭스. 너도 미신을 믿는 편이었지?”


“왜?”


“그냥. 온 김에, 점이라도 쳐 줄까?”


일순간에, 펠릭스와 올리버, 그리고 실비아의 얼굴 위로 서늘한 기운이 스쳐지나갔다. 마녀의 혈통을 이은 연금술사가 직접 쳐 주는 점. 동네 시장 구석의 천막에서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싸구려 점술과는, 그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아니, 괜찮아. 사양할게.”


펠릭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젓자, 메를린은 조금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나, 꽤 잘 하는데.”


“아냐아냐. 진짜로, 괜찮으니까.” 다시 펠릭스가 어색하게 말했다. “난, 그러니까. 미신은 믿지만, 점은 안 믿거든.”


“그런게 어딨어, 펠릭스. 하여튼, 괜히 겁먹어서는.” 메를린은 지레 긴장한 펠릭스를 가만히 보더니, 갑자기 왁! 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펠릭스는 다람쥐처럼 쬐끄만 생물들이 그러듯이, 그 답지 않게 움찔했다.


“펠릭스. 긴장 풀어. 알았어. 그렇게 싫다니까, 점은 안 쳐 볼게.” 까르르 웃으면서, 메를린이 말했다.


“대단히 고마워 메를린.” 이제서야 펠릭스는 평소의 안정을 되찾았다.




네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벽난로의 장작이 탁 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것을 배경 음악 삼아, 이런저런 주제들로 사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중간에, 실비아가 목이 마른듯 헛기침을 하자 메를린은 차를 끓여왔다.


차의 힘을 빌려, 잡담은 더욱 느긋하고, 느릿하며, 노곤하게 이어졌다. 결국, 끊길듯 끊이지 않는 지루한 잡담을 못 이긴 올리버는, 크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만 자러가지.”


“어머, 벌써요? 아직, 여덟 시 밖에 안 된걸.” 메를린이 오두막 한옆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시계판을 보며 말했다. 그 시계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가득한 오두막 안에서, 혼자 누가봐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모양을 하고있어, 어색하게 짝이 없어 보였다.


“졸려. 그리고, 애들 대화에 끼기도 그렇고.”


“아, 하긴. 올리버 당신은 우리들과는 세대가 다르죠. 나이차가 거의 두 배가 넘으니······.”


“거 나이 이야기는. 아무튼, 그럼 수고들 하라고. 난 먼저 잘테니까. 어느 방으로 가야 하지?”


“아, 잠시만요.” 메를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올리버에게 방을 안내해 주었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찰칵 닫히고 메를린 혼자 돌아왔다.


“소란스럽던데.”


“손님 맞을 준비가 덜 돼서.” 메를린이 수줍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사실, 자고 갈 줄은 몰랐거든. 그럴 줄 알았으면, 이것저것 좀 더 준비 해 두는건데.”


“몰라서 다행이군.” 펠릭스의 넋두리에는 진심이 조금 담겨 있는듯 들렸다.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가 뭐였지?” 도시에서 한창 유행중이던 연극에 관한 거였나?”


“아니야. 겨울 이야기를 하고 있었잖아. 올 겨울은 추울지도 모르겠다고. 연극은, 어디서 튀어나온거야 펠릭스?”


“아, 얼마전에 트로이를 만났더니.” 펠릭스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트로이? 아, 서커스 단장이 되었다던데. 잘 지내?”


“아마도.”


“트로이. 그립네. 전에는 해리어, 이번에는 트로이. 또 누구 안 만났어?”


펠릭스는 첼시의 이름을 말 하려다가, 그녀의 이름위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고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뭐.”


“다들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건지, 가끔 궁금하기는 해. 아, 맞아. 한번 점쳐볼까?”


“아니, 안 그러는게 좋을걸?”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아, 펠릭스는 메를린을 말렸다. “알아서 어련히들 잘 살고 있겠지 뭐.”


“그거야, 그렇지만.”


갑자기, 실비아가 손으로 입을 가린채, 조심스레 하품을 했다. 그러나 손으로 입을 가렸는데도, 그만 그녀는 조금 칠칠치 못하게 소리내어 하품을 하고 말았다.


“실비아. 졸려요?”


“아, 아뇨? 그러니까······.”


“여긴 귀족들 집이 아니에요. 편하게 있어요.”


“아, 그럼. 저, 조금 졸리네요.”


“잠꾸러기거든.” 펠릭스가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아니거든요? 그러는 당신은, 비오는 날만 되면 무슨 축 처진 시래기처럼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그 말을 듣더니, 메를린은 풋 하고 웃었다.


“귀족이면서, 시래기를 알아요?”


그리고 메를린의 웃음을 못들은체 하며, 펠릭스가 시비를 걸어왔다.


“귀족도 알건 다 알거든요? 너무 무시하지 말아줄래요?”


“칡은, 몰랐잖아요. 그런데, 시래기는 안다고요?”


“네! 그래요. 뭐 불만이라도 있나요?”


“아니, 불만까지야. 그냥, 신기해서요.”


“귀족을 그렇게 무슨 우리에 갇힌 서커스 짐승처럼 말하지 말아줄래요!”


“자 자. 실비아. 진정해요. 여기, 차 한 모금 마셔요.” 메를린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그러자 실비아는 고분고분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마음이 진정되죠?”


“좋네요. 따뜻하고.” 그리고 실비아는 다시 크게 하품을 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입을 가리고 할 새도 없이.


“졸려요?”


“아, 그렇네요. 갑자기 졸린걸요.”


“요 며칠동안 피로가 쌓여서 그렇겠죠.” 펠릭스가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 언니네 집이 그렇게 편한 곳은 아니었나보죠.”


“어느정도 사실이긴 하지만, 제 언니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는 말아줘요 펠릭스.”


“나쁘게 말한적 없어요.”


실비아는 긴가민가한 눈으로 펠릭스를 보다가, 다시 하품을 하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자러 갈래요?”


“아, 부탁해요.”


메를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실비아를 부축하여 어느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혼자 조용히 돌아왔다.


“약 탔지?”


메를린이 다시 의자에 앉자마자, 펠릭스가 말했다.


“어머, 들켰나?”


“당연히 알지. 내 참. 나중에라도 알았다간 길길이 뛰며 화를 낼 걸.” 펠릭스는 실비아가 들어간 방의 닫힌 문을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나중에라도 사과해. 실수였다고.”


“안 들키면 되잖아?”


“거짓말 하는걸 싫어하는 아가씨야. 뭐, 네 말마따나 안들키면 그만이긴 하지만.”


기지개를 켜고, 넉살좋게 두 발을 테이블 위에 턱 올려놓은 다음, 펠릭스가 말했다.


“그래서, 나랑 무슨 말이 하고싶어서 두 사람 모두 먼저 자러 보낸거야?”


“네가 나한테서 이것저것 받아 갔으니까, 나도 이제 너한테 값을 받아야지.”


그러자 펠릭스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발을 순식간에 도로 내려놓고, 딱딱하게 굳은 정자세로 앉아 말했다.


“벌써?”


“그럼, 언제 받아?”


메를린이 히죽 웃었다. 그러자, 펠릭스는 아주 당황스러운 얼굴로 억지 웃음을 지었다.


“아직, 너무 이르지 않아? 밤이 깊지 않았는데······.”


메를린은 펠릭스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조금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겁쟁이.”


“아니야. 부담스러워서 그래.”


“변했어, 펠릭스.”


“나이먹으면 사람은 다 변해.”


“거짓말. 언제는, 사람은 고쳐쓰는게 아니라면서.”


“그건, 그 때 스승님인지 누군지 자꾸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랬어! 내 입에까지 옮았다고.”


펠릭스가 구차하게 변명하며 시선을 피하자,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메를린이 말했다.


“싫어?”


“아니, 뭐 그런건 아니고······.”


“그래?” 메를린이 순식간에 화색이 되어, 얼굴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싫은거 아니라고 했다, 분명?”


“몰라! 알아서 해. 될 대로 되라지.” 결국, 펠릭스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숲의 마녀이시여. 나는, 당신의 땅을 멋대로 침범하여 당신의 것을 훔쳐갔습니다. 그 값을, 이제 제게서 가져가십시오.”


그러자 메를린은 까르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난 재료 값으로 네 몸을 받아갈게. 하룻밤동안만.”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해서, 뭐 해줄까? 장작이라도 패 줘? 아니면, 저기 구멍에 나무 판자라도 덧대줄까?”


메를린은 오묘한 웃음을 지었고, 펠릭스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피해버렸다.


“제발. 그것만큼은, 봐주면 안될까.”


펠릭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지만, 메를린은 여전히 웃기만 했다.




메를린의 침실은, 전에 봤던 것처럼, 그리 넓지 않은 데다가 유난히도 큰 침대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 더 비좁게 느껴졌다.


“미리 말하는데.” 침대 앞에서 펠릭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아무것도 안 할거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니면, 뭘 하려고 했어?”


“아니!” 펠릭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 참. 펠릭스. 하여튼, 순 어린애라니까.”


펠릭스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메를린이 먼저 침대 옆으로 슬금슬금 걸어가더니, 조심스레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앉아.”


메를린이 앉아있는 옆 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치며 말하자, 펠릭스는 못마땅한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녀와 한 뼘 조금 넘게 간격을 두고 앉았다.


“가까이 앉지.”


“내맘이야. 그정도로, 너한테서 많이 받아가진 않았다고.”


“하여튼, 말은 잘 해.”


메를린은 혼자 쿡쿡 웃었다.


“그래서, 펠릭스. 서쪽으로 간다고 했던가?”


“편지에 그렇게 썼지.”


“서쪽은, 땅이 거칠잖아.”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메를린이 말했다. “괜찮겠어? 그 다리로.”


“비는 적게오니까, 어쩌면 여기보다 나을지도 몰라. 난 습기에 약하니까.”


“그래, 예전에는 아니었는데. 빗속을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녔잖아.” 조금 쓸쓸한 목소리로, 메를린은 조용히 팔을 뻗어 펠릭스의 오른쪽 무릎 아래에 붙어있는 의족을 슬금슬금 쓰다듬어보았다.


“뭐, 아쉬울건 없지만서도.”


“늑대의 눈물을 뽑겠다고, 그 아가리에 발을 밀어넣는 사람이 어딨어?”


메를린은 작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손을 거두어 들였다.


“달리 좋은 수도 없었잖아?”


“좀 더 생각했으면, 더 좋은 수를 떠올렸을 지도 몰라.”


“퍽이나. 거기있는 사람들은 멍청이들이 아니었어.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던게 아니라고.” 펠릭스가, 조금 공격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사람들이 픽픽 죽어나가는데, 아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써봤는데, 거기서 더 생각해본다고 뭐가 있었겠어?”


“또 모르지.”


“있었다 해도, 이제와선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펠릭스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오른 다리를 마구 움직여보았다. “어휴! 하긴. 솔직히, 가끔 아깝기는 해.”


“그래? 사실, 나는 가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내가 네 오른 다리를 만들어 주지 않았더라면.” 메를린은 살짝 펠릭스 쪽으로 얼굴을 기울이며 말했다. “너는 더이상 나를 찾지 않았을 것 아냐?”


펠릭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내 참!” 그러자, 갑자기 메를린이 다시 혼자 까르르 웃었다. “긴장 풀어 펠릭스. 나도 너 안 건드릴거야.”


“그래? 진짜? 진짜지? 약속한거다?”


“어휴, 의심많기는. 펠릭스. 너나 나나, 아직 애야. 애들이 뭘 하겠어?”


그제서야, 펠릭스는 안심한듯 크게 한숨을 쉬더니, 메를린의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러자 메를린도 펠릭스의 옆에 벌렁 누웠다. 그러자, 그녀의 긴 머리칼이 낙엽처럼 침대 위에 드리웠다.


“뭐 봐?”


자꾸 힐끔거리는 펠릭스의 시선을 느끼고, 메를린이 살짝 눈을 옆으로 돌렸다.


“네 머리.”


“예쁘지?” 메를린은 웃으며 손으로 자기 머리칼을 슥슥 빗어보았다. “어릴 때는, 조금 싫어했는데.”


“왜?”


“얼룩덜룩하잖아. 그리고, 가끔은 좀 더 빨갛다가, 가끔은 좀 더 노랗다가, 제멋대로라.”


“정말 단풍같네. 그래도, 예쁘고 좋잖아.”


“사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칼이 부러웠거든.”


“그래서 실비아랑 친해? 실비아의 머리칼은 꽤 까맣지. 검은 물감이나, 밤하늘 보다도.”


“글쎄?”


두 사람은 잠시 소리죽여 쿡쿡 웃다가, 동시에 천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쪽으로 가면, 건강 조심해.”


“그래야지.”


“뭘 구하러 가는거야?”


“흑살구. 서쪽에서, 올해 풍년이라더라. 네 몫도 조금 가져올까?” 펠릭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 흑살구. 달콤하지. 죽을 정도로 말야. 스승님이 그랬잖아. 독이 있다고. 많이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괜히 겁주는 이야기였지만.”


“독이 있는건 사실이니까. 뭐, 사람 죽이기엔 한참 모자라는 독이기는 하다만.”


“그래. 흑살구를 찾으러 가는구나. 다른건 뭐 없어?”


“호수뿌리의 정보를 누가 제보해 주더라.”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 보다가, 오두막 천장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을 발견하고, 그 틈으로 밤하늘을 훔쳐보며 펠릭스가 말했다.


“호수뿌리?”


“그래. 귀족 부인인데, 내가 약을 좀 만들어 줬거든. 그래서 고맙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려준 거라는데, 내가 듣기에는 호수뿌리가 맞는 것 같아.”


“그래? 흔히들, 착각하는 재료잖아.”


“잎사귀도 없고, 꽃도 없고, 깨끗하고 맑은 호수에서 나타났고, 어느날 갑자기 나타났댔어.”


메를린은 잠시 입으로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음. 그럼, 꽤 비슷하긴 하네. 그런데, 그게 사실이면, 서둘러야 하지 않아, 펠릭스? 호수뿌리는 금새 없어져버리잖아.”


“내 팔자지 뭐. 그리고, 아직 그 호수의 위치도 모른다고. 나중에 알려준다고는 했지만.”


“빨리 찾았으면 좋겠다.”


펠릭스는 고개를 돌려, 메를린의 옆얼굴을 향해 말했다.


“죽음의 약의 재료인데도?”


메를린도 고개를 돌려 펠릭스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실비아의 약이랬지?”


“그래.”


“완성되면, 만들어 줄 거야?”


“난 못 만들어.” 조금 심술이 난 얼굴로, 다시 천장을 돌아보며 펠릭스가 말했다.


“왜?”


“안 돼. 그건, 실비아가 직접 만들어야 해.”


“천하의 펠릭스가, 못 만드는 약이 다 있다고?”


“안 돼. 아무 죽음의 약이면 내가 얼마든지 만들어 주겠지만, 그녀에게 최고의 죽음의 약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어. 그리고, 난 최고의 죽음의 약은 못 만들어.”


진심으로 그 사실이 분한듯, 펠릭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펠릭스. 하여튼, 네 머릿속에는 약 생각 뿐이지?”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래도, 조금 다행이네. 거의 그렇다는 건, 완전히 약 생각 뿐이지는 않다는 거잖아.”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그럼말야.” 메를린이 손을 뻗어, 펠릭스의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가끔이라도, 내 생각해?”


펠릭스의 얼굴이 서서히 복잡하게 일그러져가는 것을 보더니, 메를린은 까르르 웃으며 천장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날 너무 놀리지는 말아줘.”


펠릭스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널 안 놀리면, 누가 널 놀려주겠어.”


“그건 그렇네. 올리버는 말솜씨가 없고, 실비아는 아직 너무 어리지.”


“그러니까 말야. 아무튼, 펠릭스. 다시 하는 말이지만, 혹시나 말야. 만약에라도, 바깥 세상에서 살기 싫어지면, 나한테 와.”


잠시 침대 위에 침묵이 감돌았다.


“나, 기다리고 있을거니까.”


그리고 조금 후에, 펠릭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메를린은 자고있는 건지, 아니면 자는척하는 건지, 아무튼 눈을 감고 숨을 색색 거리는 펠릭스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살짝 만져보다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사뿐사뿐 문으로 걸어가, 소리나지않게 침실 문을 열고 침실 밖으로 나간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메를린은 침실 문에 등을 기대 서서 잠시 가만히 있다가, 조금 쓸쓸하게 웃으며 소리죽여 한숨을 쉰 다음, 그녀의 연금술 작업실의 문을 열었다.




숲 속 오두막에서 맞이하는 아침에는 낭만이 있었다. 지저귀는 새 소리와 눈을 간질이는 햇살을 받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기분은, 그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실비아는 모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저녁 즈음의 일이 잘 기억 나지 않는 것만 빼면, 정말 기분좋고 달콤한 잠이었다.


올리버도 비슷한듯 했다. 그는 본래 몸을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어딘가에 계속 갇혀있으면 영 힘을 못 쓰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올리버는 메를린의 오두막에서 새 아침을 맞이하며, 온 몸에서 힘이 불끈 솟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메를린의 침실에서 눈을 반짝 뜬 펠릭스는, 잠시 지난 밤의 기억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딱히 이상한 기억은 없었고, 이제 그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거기에는, 메를린이 잠시 누워있어 이불이 어지러진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메를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펠릭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거실로 나오자, 조금 더 빨리 일어난 실비아, 올리버, 그리고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모를 메를린이 모두 테이블에 앉아 조촐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


메를린이 펠릭스를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제 뭐 없었지?”


“뭐가요?”


근처 숲에서 나는 월귤을 따 메를린이 직접 만든 잼을 빵 위에 바르다 말고, 실비아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실비아는 의아한 눈으로 펠릭스를 힐끔 보고는, 빵에 마저 잼을 바른 다음 작게 한입 베어물었다.


“올리버. 당신은 잘 잤어요?”


그리고 펠릭스는 조용히 차를 홀짝이는 올리버의 옆으로 가 앉았다. 그는 맞은 편에 앉아있는 메를린과 눈이 마주쳤는데, 메를린이 소리없이 씩 웃자 그만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잘 잤어. 코튼도, 잘 잔것 같아.”


“그 다람쥐 아직도 데리고 다녀요?”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지. 그렇지, 코튼?”


올리버가 이름을 부르자, 그 조그만 다람쥐가 올리버의 목덜미를 타고 기어올라, 수염을 까딱이며 찍찍 소리를 내고 다시 그의 옷속 어디론가 사라졌다.


“똑똑한 다람쥐네요.”


메를린이 대견하다는듯 말하자, 올리버는 쑥스럽다는듯 웃으며 다시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마녀의 손길을 탔으니까. 아마, 똑똑하고 친절한 마녀의 손길을 탄 덕분 아닐까?”


올리버의 아부를 듣더니, 메를린은 까르르 웃었다.


“어쩜. 고마워요.”


“내 참. 다들 아주 아침부터 대단하시군.”


펠릭스는 괜히 어깃장을 놓으면서, 접시 위에 담긴 갈색 빵을 한 조각 집어들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 뭐지? 왜이렇게 써?”


한창 빵을 우물거리던 펠릭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아, 펠릭스. 반죽에 약초를 섞었거든. 말 해 줬어야 하는데, 미안. 잊어버렸네.”


“메를린. 그런거 치고는, 너무 쓴데? 뭐 만드레이크라도 섞었어?”


메를린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섞었어?”


“몸에 좋잖아.”


“아니! 나한테는 필요없거든! 정력제를, 먹어서 어디다 써 내가?”


“뭐, 어딘가에는 쓰지 않겠어?”


“안 써! 필요없다고. 내 참. 전에는, 감기걸렸을 때 실비아가 그러더니, 이번엔 메를린 너까지 그러기야?”


“어머. 처음이 아니야, 펠릭스?”


"그래. 하여튼, 감기 몸살로 열 좀 난 걸 가지고. 실비아가 호들갑을 떨다가 만드레이크 한 뿌리를 통째로 달달 달인 약을 먹었거든. 어휴, 아주 끝내주던데.”


“그게, 정력제로도 쓰여요?” 실비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헛소문이나 다름없죠. 먹으면 힘이 난다고 하니까, 뭐 그렇게 와전된 소문이에요. 정력이랑은 상관없죠.”


실비아는 갑자기 먹던 빵을 슬그머니 내려놓더니, 두 팔로 자기 몸을 슬쩍 가렸다.


“당신한테는 흥미없거든요!”


그러나 실비아의 살짝 굳은 얼굴은 도로 펴지지 않았다.


“실비아. 걱정하지 말아요. 펠릭스 말대로, 만드레이크는 그렇게 대단한 약은 아니에요. 잃어버린 체력을 보충해 주는 정도가 다니까.”


“진짜죠? 믿어도 되죠, 메를린?”


“그래요. 날 믿어요.” 메를린은 그러면서 펠릭스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럼, 당신만 믿을게요 메를린.”


그제서야 실비아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시 빵 조각을 집어들었다.


“아니, 실비아. 정력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죠?”


“펠릭스. 숙녀한테 그걸 노골적으로 묻다니, 너무 실례 아닌가요?”


“아니, 그게 왜요? 힘나는 약 아니에요? 아니면, 또 어느 이상한 낭만 소설을 보고 혼자 착각에 빠져있는건 아니죠?”


실비아는 빵조각을 집으로 가져가다말고, 잠시 가만히 생각했다.


“아니죠?”


“아닐······걸요?”


“실비아! 당신도 낭만소설 작작봐요! 어휴, 내 근처에는 왜 제대로 된 글을 보는 사람이 없는거지?”


“너만하겠어, 펠릭스?” 메를린이 말했다.


“내가 왜?”


“넌, 연금술 책이랑 도감밖에 안 보잖아. 그것보다야, 낭만 소설이 훨씬 낫지.”


“어머, 메를린. 당신도 낭만 소설을 읽어요?”


“그럼요. 요즘은, 솜씨좋은 작가들이 많아서 좋아요. 제가 한창 어릴때는, 다들 솜씨가 영 별로였거든요.”


“아주 대단들 하시군그래. 아주 평론가 납셨어.” 펠릭스가 심술을 부리며 이번에는 흰 빵을 한 조각 집어들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래도, 시끌벅적하니 좋지 않아, 펠릭스?”


펠릭스는 빵을 우물거리다 말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없이 꿀꺽 삼키기만했다.


“예전 생각도 나고. 안 그래?”


“몰라.”


“아닌 척은.”


다시 조용히 빵 조각을 집어드는 펠릭스를 보며, 메를린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살짝 웃었다.




오두막에서 아침 식사까지 마친 세 사람은, 이제 짐을 싸서 오두막의 문 밖에 서 있었다.


“편히 쉬다 가요.”


“나중에 또 놀러와요.”


실비아와 문간에서 가볍게 포옹을 하며 메를린이 말했다.


“그럴게요.”


“큰일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그리고 뒤에서 펠릭스가 툴툴거렸다.


“왜요?”


“마녀의 집에는, 허락없이 오면 큰일 나요. 동화 많이 봤다면서요?”


“동화는, 동화잖아요?”


“어휴, 자기 필요할 때만 낭만을 갖다붙이는군요.”


“뭐 어때, 펠릭스. 내가 허락해 준걸. 실비아. 당신은,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물론, 펠릭스랑 같이 와주면 더 고맙겠지만요.”


“생각해 볼게요.” 웃으며 실비아가 대답하고, 그녀는 오두막의 나무 계단을 통 통 뛰어 내려왔다.


“나 간다, 메를린.”


“또 와 펠릭스.”


“되면.” 시선을 피하며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아, 펠릭스. 혹시나 해서, 자.”


메를린은 계단을 내려와 펠릭스에게 슬며시 약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자주색과 황금색이 섞일듯말듯 공존하고 있는, 신비한 색상의 물약이었다.


“이걸? 네가?”


“쉿. 비밀이야.” 메를린은 실비아와 올리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꼭, 필요할 때 써야해. 알겠지?”


“어련하겠어. 아무튼, 고맙다 메를린. 아, 이건 공짜지? 선물이지? 마녀의 선물 말고, 그냥 선물인거지?”


메를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도. 펠릭스. 그냥 가져가. 걱정말고.”


“그래. 가져간다? 네가 그냥 가져가라고 한 거다?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마.”


“어련하겠어.”


펠릭스가 약병을 슬쩍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고 나서야 메를린은 안심한듯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다들.”


그리고 숲 속 오솔길로 세 사람이 완전히 사라져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메를린은 그들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꼭, 건강하고.”




오솔길을 되돌아 오던 펠릭스는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어이, 잘 따라 오고 있는거 맞아?”


선두에 선 올리버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물론이죠.”


“네. 잘 따라가고 있어요.”


“펠릭스. 오늘은 네가 앞장 안 서?”


“이제 길 다 외우지 않았나요, 올리버?”


“그렇긴 하다만. 마녀의 숲이잖아. 풀과 나무를 움직여서 길을 바꾸면 어떡해?”


“그럼 방법없죠. 나라고 어떻게 못해요.”


“거 참. 대책없기는. 빨리 벗어나기나 해야지 원.” 올리버는 툴툴거리며 조금 걸음을 재촉했다.




후미에서 따라가던 펠릭스는,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레 메를린이 만들어준 약병을 꺼내 살펴보았다. 비단같은 자줏빝의 조금 걸쭉한 액체와, 가루처럼 반짝이는 황금빛의 모래 알갱이같은 액체가 섞일듯 섞이지 않은 물약.


“엘릭서라.”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도로 약병을 주머니에 쑥 집어넣고 숨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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