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금위장 강일지
정관서가 김 내관을 찾았다.
그로서는 더 이상 주저할 것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 이미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 기대 또한 품을 것이 없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에게 할 일이 남아있음을 아는 정관서였다.
정관서의 물음에 김 내관은 강하게 부인부터 하였다.
“금시초문이옵니다. 그런 소문이 있었다는 것조차 저는 몰랐습니다.”
“사실인가?”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해 나리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나리와 저는 세자저하와 더 나아가서는 이 조선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함께 뜻을 모은 사이가 아닙니까?”
자신의 진심을 믿어달라는 듯 거침없이 정관서의 눈을 응시하는 김 내관이었다. 그 눈빛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러나 정관서는 김 내관의 말 속에서 거짓을 보았다.
세자저하와 더 나아가서는 조선을 위한다는 김 내관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의 조선은 세자저하를 위해 존재하는, 저하께서 왕좌에 오를 때에만 완벽해 지는 나라였다.
나라가 그러하니 그 안에 속해있는 자들이 예외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 오직 권좌의 주인인 저하께 이로운가 아닌가로 생사는 갈릴 것이고, 하여 적통자이신 아기씨는 저하의 정적으로서 이미 김 내관의 살생부에 기록되어 있음을 직시하는 정관서였다.
이 자를 베어야 한다!
아기씨를 위해서뿐 아니라 세자 저하와 이 나라 조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김 내관의 목을 베고야 말리라 정관서는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
김 내관의 집을 나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조면의 집이었다. 이번에도 에두르지 않고 바로 질문을 던지는 정관서였다.
“청국에서 조만간 조선의 국왕을 불러들이려 할 것이니 양위하심이 어떠냐, 그리 고할 사람이 있다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난번에도 말하였듯이···”
“통사 박귀철 맞습니까?”
조면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최찬형 장군께 들었습니다. 헌데 박귀철 그 자는 병을 핑계로 요즘 두문불출이라 하더군요.”
조면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답을 하였다.
“예. 아무래도 겁을 집어먹은 것 같습니다. 섣불리 양위를 입에 올렸다가 목줄이 달아나는 것 아니냐며···. 그러나 걱정마세요. 다른 사람을 구했습니다. 곧 대전에 말이 건너갈 것입니다.”
“누굽니까? 새로이 그 일을 맡은 사람은?”
“그것은······”
“김 내관이 구한 사람이라 하더군요. 부인하지 마십시오. 이 역시 장군께 들은 것입니다.”
정관서의 기세가 여느 때와 다른 것에 조면은 긴장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여는 것이었다.
“예. 김 내관이 말하길 자신에게 맡겨달라, 적당한 사람이 있다 하기에 맡겼습니다. 헌데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어찌 그리 무거운 안색을 띠고 계신 것인지....?”
“김 내관이 새로이 물색을 했다는 자는 선생께서도 아시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물었으나 밝히기 어렵다 하기에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김 내관이 비록 그 신분은 미천하나 저하를 위한 충성심만은 우리 중에 결코 빠지는 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나름 꾀가 있고 조심성 또한 걱정할 것이 없을 것으로 판단돼··”
방판서로부터 조면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듣고 온 길이었다. 방판서에 따르면 조면은 때를 기다려라. 그러면 훗날 반드시 원한을 풀어줄 거라 약조를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조면이 자신에게 한 말과는 배치되는 말이었다. 자신에게는 방판서가 장 포수의 일은 묻기로 하였다고, 다시는 그 일에 관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단단히 약조를 하였노라고 말을 하였었다.
어떤 말이 진실일까? 아마도 방판서에게 한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컷다.
김 내관에게 조선이 세자 저하를 위해 존재하는 나라라면, 조면에게 조선은 사대부가를 위해 존재하는 나라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정관서 자신 역시 이 조선이 사대부가의 나라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죽은 이교가 주장하였던, 이 나라 조선은 왕과 사대부와 백성이 삼위일체가 되어 함께 끌어가야 할, 그들 모두가 하나로써 주인인 나라라는 말에 정관서는 온전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교가 남긴 말과 글에 감복하고, 그의 사상에 놀라고 감탄하는 바 적지 않았지만, 그러나 생리적으로 반감이 느껴지는 것을 또한 부인하기가 힘이 들었다.
사대부는 글을 읽어 세상만물의 도리를 깨우치고 지혜를 가지게 되었으니, 의당 마땅히 이 나라를 이끌고 가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 정관서의 생각이었다. 물론 사대부의 의무 속에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잘 돌보아 그들의 삶을 평온하게 만들어 줄 책임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즉 현명한 사대부는 아비요, 어리석은 백성은 어린 자식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린 자식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아비가 때로 꾸중을 하고 매를 들 수는 있지만 자비와 사랑으로서 돌보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일.
김 내관과 조면이 세자 저하를 위해, 혹은 사대부를 위해 당연한듯 백성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면서도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고, 고난과 희생을 백성들에게 강압하는 것이 불의인 것조차 모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렇듯 생각이 다른 자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관서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것인가 또한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수심이 깊어지는 정관서였다.
**
김 내관의 수족인 장 내관을 미행한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장 내관의 첩이 사는 집과 담장을 사이에 둔 바로 뒷집이 비밀장소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또 3일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또 4일 뒤, 비밀장소로 쓰이는 뒷집으로 들어가는 자를 발견한 정관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카이였다. 조선 공인들을 납치해 왜국으로 끌고 가려다 체포되었으나, 전하와의 거래를 통해 풀려난 그 왜국의 상인!
저자가 왜? 세자저하께서 저자를 찾아내라 명하셨으나 김 내관은 그때마다 실패하였노라 보고를 올렸었다. 허면 김 내관이 저하께 그간 거짓보고를 하여왔단 말인가? 어째서?
저 자가 풀려난 것은 청국의 조정과 끈이 닿아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전하를 음해하는 서찰을 청국 황제에게 보내는 조선 조정의 반역자를 잡아낼 수 있도록, 그 서찰 중 하나를 빼올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전하께선 저자를 풀어 주셨다.
혹시 김 내관이 말하였다는 자가 저 자인 건인가? 저자로 하여금 청국에서 전하를 곧 소환할 예정이라는 거짓 보고를 올리도록 할 생각인 걸까?
하기는 그렇게만 된다면 최상의 작전이랄 수 있었다. 청국 소환을 무엇보다 두려워하시는 전하시니 물 흐르듯 세자저하께로 양위가 이루어질 터이다. 애초 계획한 것이 그것임은 분명하였으나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김 내관이 저 왜인과 내통을 시작하였던 것이. 내통의 이유는 정말 그 하나뿐인 것일까?
정관서의 이마 주름이 깊어갈 즈음, 왜 상인 사카이가 거리로 다시 나왔다. 그의 뒤를 다시 쫓는 정관서였다.
**
쉬는 날, 내금위장 강일지는 찾아온 이가 있다는 하인의 소리에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놀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마당에 서 있는 이는 다름아닌 유모였다. 유모의 등에 잠든 아이가 업혀 있었는데, 한눈에 그 아이의 정체를 알아본 강일지였다.
소현의 아들일 터였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다니던, 임금으로부터 죽일 것을 명 받은 바로 그 아이!
**
강일지의 방으로 들어온 유모는 마치 제 방인 듯 차분히 방 한쪽에 잠든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가 잠을 깨려하자 깨지 않도록 손으로 토닥거리는 데 놀랍게도 유모의 얼굴에 어린 것은 잔잔한 미소였다.
홀린 듯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강일지는 놀란 정신을 애써 수습하고는 입을 열어 말을 하였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찾아와? ....정신이 나간 게로군.”
“······”
“말해보거라. 내 집을 찾아 온 연유가 무엇인지?”
“세상이 곧 바뀐다지요?”
이번에는 강일지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그런 그의 심정을 꿰뚫는 듯 유모가 냉소하며 말을 이었다.
“바뀐 세상에 나리의 자리는 어디쯤 있을까, 생각해보셨습니까?”
강일지가 입술 끝을 비틀며 답을 하였다.
“저승 어디쯤이겠지. 허나 그 전에 네 년이 먼저 죽을 것이다. 저 아이와 함께.”
“나리께선 그리 하지 못하십니다.”
찰나의 순간 정적이 있더니, 곧이어 강일지가 미친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 네 년이 내 손에 묻은 피를 모른단 말이냐? 누구 누구의 피가 내 손에 묻어있는지 정녕 몰라?”
“알지요. 알다 뿐이겠습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아 감히 저하의 두 아기씨를 해하고, 생사를 같이 했던 동료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호형호제하였던 이마저 죽인 그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헌데? 너는 죽이지 못한다?”
“예.”
“어째서?”
“세상이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해보이기까지한 유모의 모습에 강일지의 웃음이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
“제가 증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왕자 아기씨를 나리께서 감춰주셨다, 살려주셨다 증언을 해드리겠습니다.”
강일지가 쓴 웃음을 지었다.
“그것으로 내 목숨이 구명 된다?”
“예. 구명됩니다.”
“순진한 것이냐? 미친 것이야? 그깟 걸로 구명될 것이라 진정 그리 생각하느냐?”
“새로 즉위하시게 될 지금의 세자 저하께선 분명 나리를 죽이고 싶어하시겠지요. 말씀하신 대로 나리 손에 묻힌 피의 주인들은 지금의 저하께서도 아끼시던 분들. 나리의 그 간악한 목줄기를 끊어 필시 이승을 떠돌 억울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허나 제가 그걸 막아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재주로?”
코웃음을 치는 강일지였으나 내심으로는 진지하였다. 그럴 수밖에. 죽고 싶은 자 세상천지에 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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