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뜨거운 짐
막말로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이 1,2년 사이에 가능한 일인가? 몇백년, 몇천년이 걸릴 지도 모르는 일을 어찌 사서 걱정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가 되면 나는 이미 시신이 되어 흙속에 묻히고 뼛조각조차 남아있지 않을 터.
설사 연이란 계집이 바위를 뚫는 최초의 물방울이 된다 한들, 그래서 세상이 뒤바뀌는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내 탓이 될 것인가?
나는 종 6품의 일개 현감, 앞에 앉은 이는 종 5품의 의금부 도사다. 이제 연이란 계집의 존재를 도사도 알게 되었으니 말인즉슨 걱정도, 책임도 몽땅 도사에게 떠넘겨진 셈이었다.
자고로 누리는 것이 많으면 책임도 따라서 큰 법. 나는 일개 현감으로서의 책임만 느끼고 걸머지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또였다. 바위에 눌린 듯 무거웠던 사또의 어깨가 날라갈 듯 가벼워지는 이유였다.
세상 모두가 다 제각각인데 어찌 작은 계집 하나가 남들과 다르다 해서, 경계하고 탓을 할것인가? 쯧쯧. 세상이 박정해지니 내 마음그릇까지 좁아지고 작아졌던 게야···.
어깨가 가벼워진 만큼 마음도 따라서 가벼워지고 넉넉해진 사또는 또한 생각하며 웃는 것이었다. 으흐흐흐흐.
한편 정관서는 내심 감탄하는 중이었다. 특별히 나쁘게 본 것은 아니었으나 사또는 생각 외로 도량이 넓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랫것의 허물까지도 이렇듯 보듬어 주려 하다니···.
그런 한편으로 이교의 처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정관서였다.
그가 말하던 개혁이 설마 이런 것이었나? 낡은 것을 깨고 새롭게 만들자던 것이 기껏 천것의 계집아이에게 공자의 말씀을 외우게 하는 것이었어? 그래서 바뀔 것이 무엇이간데? 밀수꾼 무리를 잡아낸다 하여 그것이 세상의 개혁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백번 양보해 설사 바뀌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야기될 혼란은 짐작치 못한 것인가? 남녀가 유별하고 고하가 엄연하거늘, 그것을 흔들었을 때 발생할 잃어버릴 가치는 무시해도 좋았다는 말인가?
저하께서도, 소현세자께서도 설마 이것을 용인하셨던 것일까? 이교의 그런 생각을 용납하셨나?도대체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도돌이표처럼 원래의 의문으로 돌아가고 돌아오는 의문들이었다. 어째서? 왜?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알고 싶은 것이 태산과도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하와 저하의 사람들 모두 불귀의 객이 되어 떠나고 자신만 홀로 이곳에 버려져 있는 까닭이었다.
가슴 한편으로 서늘하고도 아득한 그림자가 지는 정관서였다.
조금 전까지 비슷한 고민에 골치를 썩였으나 이제는 날듯이 홀가분해진 사또가 말을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
“정해진 절차를 제대로 밟자면 윗전에 그 아이의 공을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윗전에서 그 말을 온전히 믿어 줄 것이냐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아이가 먼저 나서 싫다 할 것이 분명합니다.
스승을 벌한 조정의 상따윈 받지 않겠노라 말할 터이지요.
윗전의 면전에서 무슨 말을 할지 솔직히 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서삼경을 줄줄 외고 살인범과 밀수범은 손쉽게 잡아내면서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또한 가리지 못하는 천상 어리석은 계집아이이기도 하니 말씀입니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된다면 그 아이, 목숨이나 온전히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
“물론 절차는 밟되 모든 것을 제 공으로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허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제 양심이 특별히 깨끗하여서가 아니라, 뭐랄까? 자존심의 문제랄까요?
이제 17,8세 된 어린 계집아이의 공을 가로채다니, 참으로 한심하고 못난 짓이 아니겠습니까?
아랫것들 보기도 민망하지요. 영전되어 이 고을을 떠난다면 또 모르겠으나 계속 이곳에 남아있어야 한다면 아이구, 벼룩의 낯짝인들 그 상황을 온전히 견디어낼 수가 있겠습니까?”
아까부터 말을 잃고 묵묵히 생각에 잠겨 앉아있는 정관서였다. 그런 정관서를 바라보는 사또의 표정 위로 슬쩍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연이라는 골칫덩이를 이 참에 확실히 떠넘기고 아예 수결까지 받아두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진성관 주인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이 낯뜨거운 짐을 떠맡아 주시렵니까?”
**
관아로 불려온 장 포수는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옆에 선 연이는 아비에게 몹시 혼이 난 까닭에 울던 가락이 아직도 남아 훌쩍이고 있었다. 영락없는 어린 계집아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정관서의 심중이 더할나위 없이 복잡해졌다.
한편 부녀의 이런 모습이 익숙한 사또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또 혼을 낸 모양이군. 그래서야 쓰느냐? 사람을 찾다가 그리 된 것을. 혹 번번이 위험한 일에 딸자식을 끌어들이는 내가 미워 부러 그런 것이냐? 차마 나를 혼낼 수는 없으니 보란 듯 그러는 것이야?”
사또의 농지거리에 당황한 장 포수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받았다.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직 철이 없어 그저 제 얕은 꾀 하나 믿고 설쳐대다가 다칠까.... 물론 지가 다치는 것은 상관이 없지요. 자업자득이니 할 말은 없으나 행여나 다른 이들에게까지 그 화가 미친다면 그것은 큰 일 아니겠습니까? 하여···”
“괜한 걱정. 내가 저 아이 덕을 많이 보고 있다.”
기뻐할 줄 알았던 장 포수의 얼굴이 돌덩이를 넘어 이제 흙무덤처럼 어두워졌다. 잠시 망설이던 장 포수가 이내 작정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과한 칭찬이십니다. 뒷걸음질 치다 재수가 좋아 벼룩 몇마리 잡은 것을 두고 그리 칭찬을 해주시니 철없는 년이 천방지축 더 까불자 들 테고. 그러다 언젠가는 사단이 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참에 정신이 바짝 들도록 사또께서 물고라도 내주십시오.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놓으셔도 좋고, 엉덩이를 죽반죽을 만드셔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나으리”
한편으론 야속하고, 다른 한편으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아부지의 입에서 나오는 험한 이야기에 연이가 흐흑, 잠시 멈췄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그 모습에 사또가 난감해 하니, 이방이 낮으나 엄한 목소리로 꾸짖는 것이었다.
“사또께서 말씀하신 것을 어디로 듣고 그런 소리를 해? 지금 여기가 자네 집 안방인 줄 아는가?”
“송구합니다. 소인은 다만···”
“으흠. 됐다. 내가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표범의 가죽을 몇장 얻을 수 있을까 해서인데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워낙 귀한 것이라 한 장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이것이 가져가 버려···”
이것이란 물론 연이였다. 애비 허락도 없이 번번히 가죽을 빼돌리는 딸년의 못된 손버릇에 장 포수는 다시 열불이 치솟았다. 하물며 그걸 밀수꾼 잡는데 사용해? 밀수꾼 소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었다고? 겁대가리가 없어도 유분수지. 이놈의 지집앨 확!
“그 얘긴 들었고···. 그나저나 낭패로군. 따로 구할 데는 없느냐?”
“알아는 보겠으나 워낙 귀한 것이기도 하고, 팔아버린 것만큼 좋은 물건은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냥은? 잡을 수 있지 않느냐?”
“요즘이 새끼를 낳는 철입니다. 원래부터 경계심이 많은 동물인데 새끼까지 품었으니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노력은 해 보겠으나 시일이 한참은 걸릴 것입니다.”
장 포수의 말에 사또가 정관서를 돌아보며 설명을 하였다.
“그 왜인 놈을 만났을 때, 집에 있는 가죽을 더 갖다 주기로 하고 선금을 받았답니다. 하여 가죽을 건넨다 하여 놈을 유인해 현장을 덮쳐 잡을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때였다. 휴우-. 연이가 답답하다는 듯 과장되게 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저를 봐달란 표시였다.
사또와 정관서는 물론 이방과 아비인 장 포수까지 돌아보니 연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유인이 되겠습니까? 정말 답답해. 어떻게 그렇게 생각들이 없을···”
또다시 예의라곤 없는 딸아이의 말버릇에 장포수가 눈을 부라리며 잇사이로 쓰읏, 하는 경고의 소리를 내보냈다.
자동반사적으로 연이가 찔끔하며 입술을 꼭 깨물어 닫아걸었다.
“괜찮다. 계속 말을 해보거라.”
“······”
“괜찮으니 말해 보라는데도.”
하늘 아래 존경하고 어려워하는 이는 오직 두 사람, 돌아가신 스승과 아비뿐인 연이는 사또의 재촉에도 제 아비의 눈치만 살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딸의 입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꽁꽁 실로 짜매고, 꽉꽉 자물쇠로 채워두었으면 좋으련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장 포수는 어쩔 수 없이 말하라는 눈짓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닫혔던 입이 비로소 트이는 연이였다.
“이미 한번 선을 뵌 물건인데 굳이 주범이 또 나서려 하겠습니까? 그 자가 다시 나타날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사람들 앞에 나서길 꺼려한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까?”
“그럼 일단 확보된 놈들부터 잡아들여 주범놈의 행방을 물으면 어떻겠느냐?”
“조선놈 앞잡이를 부리고는 있으나 모두 노름꾼에 도적놈들 뿐이니 믿을 턱이 없지요. 제 행방을 알려주었을 리 만무합니다.”
말하는 족족, 어찌 저리 이치에 닿는 말만을 해대는지···. 그런 한편으론 또 어찌 저리 사방 분간을 하지 못하고 날뛰어대는 망아지새끼만 같은지, 정관서는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느냐? 네게 다른 방책이 있는 것이냐?”
“있지요, 당연히. 제가 누구 제잔데요!”
사또의 물음에 눈가며 뺨 위로는 아직 마르지 않는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채로 자랑스레 씨익- 웃는 연이였다.
그런 철부지 어린 딸애의 모습에 장포수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휴-우. 땅이 꺼지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을 만큼 큰 소리였다.
그런 아비의 심장을 모두들 짐작하고도 남는지라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오직 한사람 연이만이 동그랗게 뜬 눈을 꿈벅이며 아비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왠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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