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의 제안
마방으로 안내되어 온 세자는 감회에 젖었다. 푸른 빛을 띄는 잘 생긴 검은 암말의 등을 두드리는 세자를 기림이 흐뭇한 표정으로 옆에서 바라보았다.
한편 정관서는 잠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런 기림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건만 기림은 내색하지 않고 세자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실로 판을 박은 듯 제 어미와 똑같지요?”
“그렇구나···. 말을 하지 않으면 그 놈이라 해도 믿겠어.”
“생김새만 닮은 것이 아닙니다. 빠르고 영특하기가 제 어미와 한가지입니다.”
“그러하냐···? 용케 살렸구나. 꼭 죽을 줄만 알았는데.”
“다들 그리 말했습니다. 어미 덕분에 겨우 목숨은 부지했으나 말로써 제 구실은 하지 못할 게 분명하니, 차라리 죽이는 것이 이 놈을 위해 나을 것이다 라고들 말을 했지요.
허나 보십시오. 이리 훌륭히 성장을 했습니다. 어미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억 나십니까? 이 놈 어미를 타고 사냥 나가셨던 때가···?”
“나다마다···. 암놈임에도 여느 종마 못지않게 빠르고 날쌔었지.
뿐이냐? 영특하기가 꼭 사람만 같아 고삐를 조정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빠르고 느리게 갈 때와 방향 전환할 때를 저 혼자 알고 움직였던 놈이 아니냐···.”
“그때처럼 달려 보시겠습니까? 그 어미와 빼닮은 듯 똑같은 이 놈을 타고 말입니다.”
**
세자와 기림, 그리고 정관서가 말을 타고 들판을 달렸다.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정관서와 달리 세자와 기림은 말을 달리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한참을 달리던 세자가 언덕 위에서 말을 세웠다.
“좋구나, 좋아! 이리 달려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론 처음인 듯싶구나.
믿어지느냐?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하루에 두 번씩은 꼭 말을 달렸던 내가 구중궁궐에 갇힌 여인네마냥 방에 틀어박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길이 있습니다, 저하.”
세자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여렸던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늠름한 장부의 모습으로 자란 기림의 모습을 세자는 눈이 부신듯 쳐다보는 것이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어느새 세자의 뒤에 바짝 말을 붙이고 선 정관서가 주시하는 가운데 기림이 다시 말을 하였다.
“그 길을 가보시겠습니까.... 저하?”
“?”
“저하께선 무인의 기질을 타고나신 분이시지요. 길이 보이면 그 어떤 위험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발을 내미셨습니다. 당당히 맞서 싸우셨습니다.
그것이 제가 아는 저하의, 대군마마 시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다시 뵙고자 소원한다면 저의 어리석은 욕심이 되겠습니까?”
억울하게 아비를 잃고 방황하던 기림을 잡아 준 것은 형님의 호위무사였던 죽은 강천이었으나, 세자 역시 기림을 친 아우처럼 생각하였었다. 기림 역시 세자를 친 형님 이상으로 따랐었다. 그 마음을 의심치 않는 세자였다.
다만 기림의 입에서 나올 얘기가 어쩐지 두려운 세자였다.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는 어린 아이가, 이제 어른이 되어 무능해지고 겁쟁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보며 어떤 말을 하게 될지···.
기림에게서 언덕 아래로 펼쳐진 넓은 들판으로 시선을 돌리고 마는 세자였다.
“보수한 성벽을 허무십시오, 저하.”
예상치도 못한 뜻밖의 발언에 세자와 정관서가 놀라 쳐다보았다.
“왜의 침략을 방비한다는 거짓말은 하지 마십시오. 조선 조정은 왜구가 출몰하는 남쪽 해변가의 성벽뿐 아니라, 우리 청국과 맞닿은 국경성의 성벽까지 보수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조선 왕이 몸을 피했던 남한산성의 성벽은 그 이전보다 배는 크고 두텁게 강화시켰음을 또한 모르지 않습니다.
그뿐입니까? 장마비에 무너졌다며 심지어는 수항단까지 부셔버린 조선입니다. 그것이 거짓임을, 무엇을 뜻함을 우리 청국이 진정 모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황제 폐하께서 의구심을 가지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세자가 할 말을 찾지 못해 있는데 대신 정관서가 나섰다.
“무너진 성벽을 그대로 방치하라니, 그것이 주권을 가진 한 나라에 요구할 사안이라 생각하는 것이요? 강철처럼 단단한 성벽을 쌓은 것도 아니요. 단순히 무너진 담을 보수한 것뿐이거늘 그것을 트집 잡는다면 그것이 어찌 대국의 행위라 하겠소?”
처음으로 기림이 정관서의 시선을 똑바로 받으며 대꾸하였다.
“만사엔 선과 후가 있는 법입니다. 조선이 우리 청국을 더 이상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선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조선 왕이 우리 황제 폐하 앞에 고개를 숙였다고는 하나, 그 속내가 다름을 세상 천지 모르는 이가 없거늘 성벽부터 쌓고자 한다면 그것이 어찌 올바른 방법이라 하겠습니까?
또한 영원히 보존토록 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기고 조선은 수항단을 무너뜨렸습니다.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정면에서 거스렸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대꾸하는 정관서의 말을 세자가 끊고 말하였다.
“너무 멀리 왔다. 돌아가자.”
“한가지 더 있습니다. 소현세자 저하의 마지막 남은 소생이신 왕자 아기씨를 청국으로 보내주십시오.”
세자와 정관서 모두 또 한번 크게 놀라 쳐다보았으나, 그 놀람의 성격은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세자는 기림이 숨겨진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었고, 정관서는 기림의 이야기 자체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왕자 아기씨를 청국으로 보내달라고? 돌아가신 분을 어찌···? 살아계시기라도 한단 말인가?
“조선 왕이 소현세자 저하의 죽음에 연루됐음을 아옵니다. 또한 그 이유를 모르지 않습니다. 저하께서 우리 청국과 가까우신 것이 못마땅한 때문이었지요.
전후 사정이 이러하니 조선을 향한 우리 황제 폐하의 의심이 날로 커지시는 것입니다. 허니 그 의혹을 씻기 위해서라도 왕자 아기씨를 폐하께 보내셔야 합니다.”
형님이 겪은 그 불행한 일들의 시발점은 다름아닌 청국에 인질로 끌려가면서부터였다. 그런데 그 아들을 또다시 청국으로 보내라고?
저승에서 들려오는 형님의 울분과 절규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세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눌러 삼켰다.
“그 아인 죽었다.”
“그렇지 않음을 제가 알 듯 저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는 세자를 그저 놀라움으로 바라볼 뿐인 정관서였다. 살아계신다! 소현세자 저하의 아드님께서 살아 계신다!
“말씀 드린 두 가지를 행하신다면 조선 조정을 향한 폐하의 의심도 일부분 가실 것입니다. 허면 조공의 양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고, 조선 백성은 살 길이 생길 것입니다.
어찌하실 것입니까, 저하? 길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구중궁궐에 갇힌 여인네가 되었다 한탄만 하고 계실 것입니까?”
답이 없는 세자를 쳐다보던 정관서의 머리 속으로 불현듯 깨달음이 왔다. 지난번 진성관에서의 그 자는 바로 왕자 아기씨를 노린 자객이었다는 사실···.
**
“정말 가져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하께 드릴 요량으로 어렵게 가져온 것입니다.”
궐로 돌아가는 세자를 배웅하며 청국 정사가 말하였다.
대답 없이 굳은 얼굴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말에 오르는 세자였다. 기존에 자신이 타고 왔던 말이었다. 청국에서부터 기림이 가져온 말은 거절한 세자였다.
사신의 뒤에 서있던 기림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으나 세자는 그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사신관을 나온 세자가 짓씹듯 중얼거렸다.
“인질이 아니라 일가로 생각하며 키워? 흥! 언제부터 청국의 황제가 조선의 세자를 근친인양 생각하였단 말이냐?.... 이럇!”
새삼 화가 치미는 듯 세자가 말의 옆구리를 세차게 걷어차니, 놀란 말이 튕기듯 앞으로 달려나갔다. 정관서가 말을 재촉해 황급히 그 뒤를 따르고, 놀란 백성들은 물길이 갈라지듯 다급히 옆으로 몸을 피해 달아났다.
대낮의 폭주에 흙먼지가 누렇게 일어났다.
**
“사신관에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세자가 답이 없으니 김 내관이 묻듯 정관서를 돌아보았다. 생각에 잠겼던 정관서가 고개를 들어 세자를 향하여 말을 한 건 그때였다.
“그 자의 말이 옳다 할 수는 없으나 방책인 것만은 분명한듯 하옵니다.”
세자가 험한 눈길을 보냈으나 주저하는 기색없이 정관서가 다시 말하였다.
“제가 전하께 주청 올리겠습니다. 오롯이 저의 생각임을 말씀 드리고···”
세자가 냉소로서 정관서의 말을 잘랐다.
“하하. 오롯이라?”
“···”
“전하께서 기뻐하시겠군. 자넬 내 옆으로 보낸 그 뜻을 이루게 되셨으니 말이야.”
“저하···.”
“그래, 주청을 올리면 전하께서 받아 주시겠는가?”
“·····”
“왜 대답을 못해? 받아 주시겠느냐 묻지 않아?”
“진노하시겠지요. 허나 달리 방법이 없음을 전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그래? 진정 그리 생각해?”
“치욕임을 저라고 모르겠습니까? 허나 훗날을 기약하여 일보 후퇴하는 것도 전술의 일환입니다.
성벽을 보수하였다고는 하나 지금 당장 청국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저들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남한산성의 성벽을 강화하였으나 그것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한 수항단을 없애버렸다 하여 전하께서 겪으신 그 참담한 일이 없어지옵니까? 아닐 말로 삼전도에는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보란 듯 세워져 있단 말씀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김내관이 소스라치게 놀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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