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 사람, 기림
연이는 사라진 도공이 그릇을 대던 가게를 찾아냈다.
“안녕하세요? 저 뭣 좀 여쭤 보려고요. 듣자니 만수골 계곡에 사는 도공의 그릇을 사는 곳이 여기라 하던데, 맞습니까?”
“만수골? 아, 그 아들 하나 키우는 이?”
“예, 맞습니다.”
“맞지. 헌데 무슨 일로?”
“혹시 근자 들어 그 도공의 그릇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었는가 해서요. 아니면 그 도공에 대해 묻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그딴 걸 왜 묻누?”
“그 도공이 없어져서요.”
“없어지다니? 어딜 갔는데?”
“그걸 몰라서 이렇게 찾고 있는 겁니다.”
“그래? 어딜 갔을까? 야밤 도주라도 했나?”
“아뇨. 그런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있었습니까, 관심을 가진 이가?”
“글쎄···. 아, 그러고 보니 어떤 이가 그릇을 가져와선 이 그릇을 만든 이가 누구냐? 만날 수 있냐, 묻길래 내가 소개를 시켜 준 적은 있지.”
“어디 사는 누굽니까, 그 사람은?”
“글쎄,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럼 혹시 그 사람에 대해 단서가 될만한 건 알고 계십니까? 이름이라든지, 사는 동네라든지 하는 거요.”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얼굴은 기억하십니까? 어떻게 생겼던가요?”
“글쎄. 늙도 젊도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입기는 비단옷을 입었는데 양반 같지는 않았던 것 같고. 생긴게 좀스럽게 생긴게 꼭 말라비틀어진 미역대가리마냥 생겼더라고. 옳지, 그래! 실없이 자꾸 웃더라고.”
“자꾸 웃어요?”
“응. 그래서 허파에 바람구멍이라도 뚫렸나? 참도 실없다, 그런 생각을 했었지, 속으로.”
**
“아이구, 이뻐라. 죽도 다 비우고. 약도 잘 먹고. 열도 다 내리고.”
소화 되라고 아이의 등을 쓸어주는데 아이가 물었다.
“아부지는요?”
“곧 오실 거야. 걱정 마. 이 누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복성이 아부지 찾아줄 거야. 누나 믿지?”
연이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두 눈을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복성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답을 하였다.
“그래, 착하다. 우리 복성인 지금처럼 착하게 아부지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런데 복성아, 누나가 뭐 좀 물어 봐도 돼?”
복성이가 다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 보였다.
“아부지 끌고 간 사람들 기억 나? 몇 사람이나 왔었어?”
“······많이.”
“많이? 그럼 생긴 건 기억 나?”
“······모르겠어.”
“그래···. 기억 나는 게 하나도 없어? 예를 들면 젊은 사람이었다던가, 나이 많은 사람이었다던가. 옷은 어땠어? 비단옷 입은 사람은 없었어?”
“한 사람.”
“한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는 거야?”
“응.”
“그 사람 나이는? 누나 아부지 정도? 아니면 복성이 아부지 정도? 아니면 그 아래? 어느 쪽이야?”
“음···. 잘 모르겠어.”
“얼굴에 점이 있었다거나, 다리를 절뚝거렸다거나, 아니면 잘 웃었다던가. 별로 웃기지도 않는데 계속 웃었던 사람 혹시 없었어?”
“있었어.”
“있었다고? 잘 웃는 사람이? 그 사람이 혹시 그 비단옷 입었다는 사람이야?”
“응. 이상했어. 계속 하하하하 웃어서 좀 무서웠어.”
찾았다! 연이의 눈이 반짝하고 빛을 내었다. 그릇 가게 주인의 눈에는 허파에 구멍이 뚫린 듯 웃어대는 비단옷 입은 자이고, 어린 아이의 눈에는 무서울 정도로 웃어대는 비단옷 입은 인간이 바로 범인인 것이다!
자, 이제 그 놈을 찾기만 하면 되는데 어디 가서 찾는다···? 생기로 반짝이던 연이의 얼굴이 곧 다시 심각해지는 순간이었다.
**
기림은 진성관 객방에 이틀째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수선된 벼루를 살펴본 기림이 만족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감쪽같군. 수고했네.”
손님의 칭찬에 심부름을 하였던 만수도 흡족한 얼굴로 말하였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문방사우 고치는 데는 도가 튼 노입넵니다. 근방에선 실력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게 나있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이긴 하나 선친께서 쓰시던 것이라 내 특별히 아끼는 것이지. 여행길에 들고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실수로 떨어드려 금이 간 것을 보고는 내내 마음이 안 좋았어. 헌데 이리 감쪽같이 고쳐놓다니 자네 말대로 재주가 용해.”
거짓이었다. 아끼는 것이기는 했으나 특별할 것은 없는 벼루였다. 진성관 내부자의 입을통해 상황을 알아 볼 요량으로, 또한 자연스럽게 자리를 마련코자 기림은 일부러 벼루에 금을 내 수선을 맡긴 터였다.
조선의 복장을 하고 조선 말을 하고 있었으나, 그리고 그 자연스러움에 아무도 의심치 않았으나 기림은 실은 조선인이 아니었다. 그는 청국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들려온 비보에 앞뒤 잴 겨를조차 없이 황망히 달려오느라 기림은 백부께 자신의 행방을 채 알리지도 못한 상태였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모친이 백부에게 사정을 알렸을 터였다.
부친이 안 계신 기림에게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분이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마땅히 백부께 서찰을 내어 전후 사정을 알리고 허락을 받아야 했으나 기림은 주저하고 있었다.
당장 청국으로 돌아가라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소원하던 황실 호위부대원의 자리마저 사직하고 조선땅으로 달려간 것을 알았을 때, 백부의 노여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되니 더더욱 편지 내기가 어려웠다.
물론 기림에게는 나름의 정당한 명분이 있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은혜를 알고 갚는 것은 마땅한 사람의 도리이겠기에 한 점 부끄러울 것은 없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조선의 왕세자라는 점이었다. 청국과 조선이 화평 조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서로 불신하는 사이임은 분명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신단으로 조선에 와 있는 청국 정사의 조카가 조선 왕실의 사람에게 은혜를 갚겠다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옳게 비춰질 리 없었다.
과거 실제로, 하루가 멀다 하고 조선관으로 달려가 조선인들에게 말을 배우고, 무예까지 배우는 기림을 두고 수군대는 이들이 많았었다.
부친의 억울한 죽음 뒤, 방황하던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고 위로해 준 것은 바로 조선관에서 만난 조선인들이었다. 특히 소현세자의 호위무사 중 한명이었던 강천은 기림에게 처음 무예를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했다.
나라가 다르다 해서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과 의리의 색과 깊이가 다를 리 만무하다는 것이 기림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길이었다.....
기림이 준비해 놓은 엽전 여러개를 꺼내 건네는데 만수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수고비는 이미 주셨습니다.”
“솜씨가 가상해 내 특별히 내리는 상이라 전하게. 반은 자네 수고비고.”
“아이구, 아닙니다. 노인네에게 전해주라 하시면 전하기는 하겠으나 저는 아닙니다. 저야 이곳에서 이런 일을 하라고 있는 사람인 것을요.”
“받게. 내 기분이 좋아 주는 것이니.”
잠시 망설이던 만수가 엽전을 집어 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른 시키실 일이나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없네. 삼남지방 최고의 여각이란 소리가 괜한 말이 아니야. 모든 것이 아주 흡족하군.”
덧니를 보이며 웃는 만수의 얼굴 위로 자부심이 드러났다.
“드신 손님들 모두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자넨 여기에서 일한 지 오래 되었나?”
“올해로 3년째가 되니 오래 되었다 하기도 뭣하고, 적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어중간하지요.”
“그만 하면 적다고는 할 수 없지.”
“보통 다른 여각이라면 그렇겠지만 여기 진성관은 워낙 주인께서 잘해주시니, 한번 들어오면 붙박이로 다들 있는지라···. 오죽하면 3년째인 제가 제일 막내축에 들지 않겠습니까? 하하.”
기림이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듣자니 진성관 젊은 주인의 수완이 그 선친 못지 않다 하던데···?”
“예. 큰 주인께서도 훌륭하시지만 작은 주인께서도 매사 빈틈이 없으십니다. 성품은 또 얼마나 훌륭하신지....
전쟁에 가뭄에, 얼마 전에는 돌림병까지 겹쳐 전국 팔도에 죽어나가는 사람이 쎄고 쎘었지요. 헌데도 이 근방에선 죽어 나간 사람 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이 다 우리 작은 주인 덕분이었다고들 입 가진 사람들이라면 모두 얘기를 합니다요.
곳간 문을 활짝 열어두신 것은 물론이고, 약재가 부족하게 되자 청국에서까지 약재를 사다가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누어주셨지 뭡니까?
참말로 하늘도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그 일로 나라에서 벼슬도 주셨고 말입니다. 임금님께서 직접 글자까지 써서 보내주셨지 뭡니까? 하하하.”
이만하면 상대의 마음을 열었다 생각한 기림이 진짜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대단하군! 헌데 슬하에 자식은 없는 모양이지? 듣자니 입적을 했다 하던데?”
“왠걸요? 아닙니다. 올해 스물이 다 되어가시는 큰 아드님 밑으로 2남 1녀를 더 두셨는걸요.”
“헌데 어찌 입적을···?”
“그러니 말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우리 같은 것들하곤 역시 차원이 다르신 것이지요.
작은 주인의 옛 동무되시는 분이 몹쓸 병을 앓아 그만 돌아가셨답니다. 부인과는 오래 전에 사별해 혼자 아이를 키우셨다 하니, 아이는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돼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가친척이 있다고는 하나 모두 가난하여 아이를 거둘 형편이 되지 않는 것을 아신 저희 작은 주인께서 선뜻 아이를 입적해 키우기로 결정을 내리신 것이지요.”
“그래? 이 근방에 살았던가 보지? 옛 동무라면 어릴 적 친구였을 테니 말이야.”
“아닙니다. 근방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글쎄, 그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알 만한 사람은 없고?”
꼬치꼬치 묻는 기림의 태도에 비로서 의혹을 품은 만수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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