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같았으면...
진성관 주인댁 식구들이 모여 저녁상을 받는데, 평소 검약을 실천하던 큰 주인의 명에 따라 소박하기만 하던 밥상이 오늘만은 잔칫상마냥 잘 차려져 나오니 아이들이 작게 환호하였다.
그 모습을 보는 어른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일하는 이들에게도 차려주었고?”
“예. 한 상 차려주었습니다.”
“잘했다. 먹자꾸나.”
큰 주인이 수저를 들어 국을 뜨니 차례로 따라 수저를 드는데 어린 손녀가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할아버지 생신날도 아니고, 아버지 어머니 생신도 아닌데? 제삿날도 아니고.”
오빠가 동생의 물음에 답을 했다.
“오늘부터 세자 저하께서 대리청정을 하시게 된 것을 축하하는 것이야.”
“그럼 임금님이 되신 거야?”
“아니, 아직. 양위하신 것은 아니니까···.
저잣거리에선 세자 저하께서 곧 내쫓기실 거라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다행입니다. 그렇지요?”
“그럼. 그렇다마다! 그간 허튼 소리를 해대던 자들도 더 이상은 세자 저하를 흔들려 들지 못할 것이다. 저하의 자리가 이제 반석으로 올려진 셈이니 나라도 좀 더 평안해지겠지. 하하하.”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는 큰 주인의 눈이 자연스럽게 왕자 아기씨에게로 향하였다.
며느리가 호호 불어 밥을 떠 넣어주니, 그걸 받아 오물오물 작은 입을 움직여 밥알을 씹는 아기씨의 모습에 큰 주인의 가슴이 벅차 올랐다.
저하께서 전권을 행사하게 되신다면 더는 아기씨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어서 궐로 돌아가셔서 아기씨의 권리를 당당히 되찾게 되시기를 소원하였다. 부친이셨던 소현세자 저하의 뜻을 이으시게 된다면 물론 더할나위 없는 일이겠으나....
그러나 아직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한 훗날의 일일 터였다. 당장은 아기씨의 안위가 편안해진 것만이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었다.
“장 포수의 집에도 보내주었느냐?”
“예, 보냈습니다.”
“잘 했다. 뭐니뭐니 해도 그 아이의 공이 제일 컸느니라. 그 아이 덕분에 우리가 한시름을 놓았으니 그 공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야. 아닐 말로 우리 집안을 살렸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앞으로 특별히 신경을 써주거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때였다. 까르르, 웃음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아기씨였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앙증맞은 작은 두 손을 서로 부딪치며 까르르 웃고 있는 아기였다. 그런 막내의 재롱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함께 하하하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즐겁고도 편안한 저녁이었다.
**
“우와, 배 불러! 더는 못 먹겠어.”
수저를 내려놓은 연이가 한손으로는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다른 한손으로는 한과와 약과, 전 등이 놓인 접시를 평상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 옆에 대자로 누우며 말을 했다.
“맨날 오늘 같이만 먹으면 진짜 좋겠다! 그지 아부지?”
진성관에서 보내온 고기며 나물로 잘 차린 한상에 벌써 밥 두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세 그릇째 밥을 퍼먹으며 장 포수가 지청구를 놓았다.
“잘하는 짓이다. 애비가 아직 상도 물리지 않았는데 다 큰 딸년이 옆에 드러눕지를 않나.”
연신 배 부르다 소리를 연발하면서도, 또 연신 드러누운 채로 손을 뻗어 날름날름 약과와 전을 집어 먹는 연이였다.
그 모습을 본 장 포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고만 먹어! 배 부르다며? 뒀다 내일 먹으면 되지, 돼지처럼 오늘 밤 다 먹을래?”
누워 먹기 편하려고 일껏 손 닿는 위치에 잘 배열해놓은 접시들이었다. 그것들을 부친이 모조리 상 위에 다시 올려 놓으니 연이의 입에서 바로 부르튼 소리가 나왔다.
“왜-? 아부진 딸내미가 먹는게 그렇게 아까워?”
누워 먹다 행여나 체할까 걱정되어 일껏 한 아비의 행동을 저따위로 해석하는 딸년이라니!
뒷목덜미가 훤히 보이도록 짧디 짧은 더벅머리를 보면 미안했다가도, 막상 저따위로 말을 하는 딸년을 보면 왈칵 성질이 치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아깝다! 아까워 뒤져불게 생겼다! 딸자식이라는 게 말 본새 하고는···. 쯧쯧.
어디 가서 행여나 누구 제자니 뭐니 그딴 소린 할 생각도 말어, 이것아. 어르신 얼굴에 똥칠할 생각 아니면!”
스승을 거론하니 당장 풀이 죽은 연이가 중얼거렸다.
“내가 뭐 어디 다른데 가서도 이러나···? 맨날 나만 보면 뭐래···.”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는 안 샐까? 허고 다른 데선 안 그러는데 애비 앞에서만 이러는 건 잘하는 짓이냐? 애비가 만만해? 확 그냥! 아예 머릴 빡빡으로 싹 밀어버릴까 보다.”
풀 죽었던 연이지만 머리카락 얘기만 나오면 돌변하고 만다. 벌떡 몸을 일으켜 앉은 연이가 아비 못지 않은 기세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러기만 해? 나 진짜 가만 안 있어!”
“가만 안 있으면?”
원망 가득한 눈길로 아비를 노려보다 휙하니 고개를 돌려버리는 연이였다. 그리고는 풀썩 또 대자로 눕는데, 그런 연이의 시야 속으로 너른 밤하늘이 가득 들어왔다.
검은 밤하늘 한쪽에 가녀린 초승달이 있고, 그 주변으론 총총히 박힌 보석 같은 별들이 몹시 아름다웠다. 수려하면서도 정겨운 그 모습에 꽁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연이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이쁘다! 저 은하수 좀 봐! 아부지도 누워 봐. 오늘따라 별들이 더 많은 것 같아···. 빨리! 누워보라니까, 아부지!”
제 옆자리를 탕탕 손바닥으로 쳐대는 딸년의 성화에 장 포수가 못 이기는 척 밥상을 평상 아래로 내려놓고는 누우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어디서 아비 보고 누우라 마라, 딸년이? 허구한날 보는 별, 뭐 볼게 있다고 새삼 수선이나 떨고 있고···.”
“이쁘지?”
“이쁘긴 개뿔.”
“아부지?”
“왜?”
“내가 더 이뻐? 저 별이 더 이뻐?”
장 포수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어처구니가 없구만. 당연히 저 별이 이쁘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친 아부지 맞아? 고슴도치도 지 자식은 이쁘다는데?”
“아니면? 데려온 자식 거둬 먹이려고 내가 그 생고생을 했겠냐? 남들은 비가 오면 팔다리가 쑤신다는 데, 이 애비는 젖꼭지가 쑥쑥 아리는 사람이야. 알기는 해?”
“피이. 젖도 안 나오는 공갈 젖꼭지 애한테 물려놓고선 그걸로 나한테 뭐라고 하면 안되지? 사기 친 건 아부진데!”
“그럼 어째? 자다 깨서 일어나 배 고프다 우는데. 그 한밤중에 젖 동냥을 나갈 수도 없고. 어찌다 빨아대던지 이 젖꼭지가 허물다 못해 아주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구만. 그 공도 모르고···.”
“····아부지.”
“아, 왜 자꾸 불러 싸? 친 아부지도 아닌 사람을?”
연이가 옆으로 몸을 돌려 아비를 쳐다보며 말했다.
“간만에 옛날 얘기 하나 해 주라.”
“그 놈의 옛날 얘긴···. 어렸을 때 그렇게 밤마다 못살게 굴더니 아직도 그 타령이야? 도대체 넌 나이를 어디로 먹은 게냐? 남들은 벌써 시집을 가도 열두번은 갔을 나이에. 쯧쯧.”
연이가 앙탈을 부렸다.
“이잉! 해 줭! 옛날 얘기 듣고 싶단 말이양. 간만에, 응? 아부찌 아부찌. 응, 아부찌 제방!”
지 딴에는 그것이 애교라고 하는 것인지 툭탁툭탁 아비의 가슴을 쳐대는데, 힘 조절의 실패인 것인지, 아니면 부러 힘을 세게 줘 쳐대는 것인지 꽤 아팠다. 장 포수가 아이구, 소리를 내며 흘겨 보니 연이가 해해해 웃었다.
그 모습을 또 못마땅해 노려보던 장 포수는 이윽고 못이기는 척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옛날 옛날에 말도 드럽게도 안 들어 쳐먹는 딸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애기 이름이 뭐였는 줄 아냐? 바로 못난이다, 못난이!”
핳핳핳, 연이가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댔다.
기집애가 조신치 못하게! 흘겨보던 것도 잠시, 이내 피식 웃고 마는 장 포수였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좋은 것이, 바로 딸자식의 웃는 모습이었다. 이 모습 보는 맛에 자식 키우는 것이지 싶은 생각에 장 포수의 기분이 좋았다.
생긴 건 딱 산도적의 모습인데 이야기를 하는 장 포수의 모습은 사뭇 다정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 못난이가 어느 날 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돌 하나를 주었는데, 이게 생긴 모양이 묘한 거라. 꼭 사람 얼굴 모양으로 생긴 것이······”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던 별 하나가 딸아이의 눈 속으로 들어온 양 하였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딸의 모습이 그지없이 사랑스러웠다.
언제나 이 모습이었으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는데, 하고 생각하는 장 포수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부녀의 하루가 그렇게 지고 있었다.
**
호조 정랑 김육이 현장 시찰을 나온 참이었다. 벼의 알곡을 조사해 장부에 기입하는 서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한쪽에 선 농부들 역시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서리가 보고를 올리는데 목소리가 밝았다.
“이대로만 가면 풍작을 기대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그래.”
김육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농부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저기, 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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