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
장 내관의 보고를 들은 세자 역시 충격과 수치심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헛한 웃음.
“하하하. 소인배라···. 가엾다 생각을 하겠다고···. 하하하하하.”
눈가로는 물기가 보이건만 세자의 흐트러진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하하하하. 으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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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으로 돌아가는 사신단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세자를 향해 정사가 말하였다.
“약조하신 총포단은 바로 보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요.”
“세자께서 그간 우리 사신단에 보내주신 호의는 잊지 않고 폐하께 아뢸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먼 길 조심히 가십시오.”
“조선 왕실의 불화가 말끔히 해소되는 것을 보고 떠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지요. 마냥 지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마음을 편히 가지시길 바랍니다. 부모자식간의 정이란 천륜이 아닙니까? 무엇보다 자신을 닮은 자식에게 언제까지나 모질 수는 없는 법이니 말입니다. 하하하.”
닮았다? 자신이 부왕을 닮았다는 정사의 뜬금없는 말에 세자의 눈이 휘둥그래해졌다.
비밀 얘기라도 되는 양 그런 세자의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하는 청국 정사였다.
“세자께선 형님과는 많이 다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가 어찌 이리 다를까 의아할 정도입니다.
모후를 닮은 형님과 달리 세자께선 부왕을 닮으신 탓일까요?”
청국 정사가 소현세자를 어찌 생각하는지, 부왕을 어찌 생각하는지 뻔히 아는 세자였다.
그런 자신에게 굳이 형님과 다르다 강조하는 이유는, 부왕을 닮았다 말하는 것은 대놓고 자신을 조롱하고 있음이었다. 수치심에 세자의 온 몸으로 붉은 열기가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본 청국 정사의 얼굴엔 이제 완연히 드러낸 비웃음이 있었다.
그 옆에 선 청국 부사 역시 약간의 비웃음을 띤 얼굴로 조선의 세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정사의 뒤를 따라 말에 올랐다.
뒤에 남은 조선의 세자가 수치심과 분노로 온 몸을 떨었으나 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떠나는 청국 사신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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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탄 사신단을 피해 조선의 백성들이 길 양 옆으로 붙어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부사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소현세자의 남겨진 자식이 살아있다지요? 그 아이를 구하려 그리 하신 것입니까? 일부러 도발을 하신 이유 말입니다.”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사는 핵심을 꿰뚫는 부사의 질문에 얼마간 놀라 쳐다보았다.
“그 이유가 아니고서야 떠나가는 마당에 굳이 조선의 세자를 그리 자극할 이유가 없을 듯 하여 넘겨짚어 본 것입니다."
어지러운 심사에 정사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큰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휴우.
“조선의 세자는 원래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지요. 옹졸한 아비와는 그 천성이 다르단 말입니다.
무인으로서 내재된 그의 의협심은 응당 홀로 남겨진 조카를 가엾이 여기고 보호해주고자 하겠으나 상황이 상황이니···.
하여 모험을 해 본 것이지요. 매사 형과 비교 당하는 처지이니 오히려 내 자극에 비뚤어질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졸아붙은 그의 의협심이 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부디 후자이기를 바랄 밖에요."
잠시 말을 쉬었다 다시 말을 잇는 정사였다.
"형에게 지지 않겠다는 그 마음이, 형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야 될텐데 말입니다.”
“저는 죽은 소현 세자와는 연이 닿은 바가 없습니다. 다만 전해 들은 것이 조금 있을 뿐이지요.
새삼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생전에 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입니다. 우리 청국의 황실도 아닌 조선 왕실의 사람, 그것도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의 남은 혈육이나마 구하고자 정사께서 이리 애를 쓰시는 것을 뵈니 소현세자가 난 사람은 난 사람이었는가 봅니다.”
정사는 굳이 입을 열어 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살아 생전 소현세자가 그토록이나 사랑하고 그리워하였던 조선의 산하와 백성들을 씁쓸히 눈에 담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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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내관이 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탁자 위에 내려놓은 것은 다름아닌 정관서가 올린 사직 상소였다.
감히 내관따위가 정 5품인 좌익위의 앞에서는 절대 내보일 수 없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별반 반응이 없는 정관서였다.
그런 정관서를 향해 김 내관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보는 대로 일세.”
“지금 이 시점에서 사직 상소라니요?”
“······”
“무엇입니까? 무슨 뜻으로 이것을 내었냐 여쭙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을 진다는 뜻이겠지···.”
“책임이라 하셨습니까? 회피가 아니고요?”
“······”
“지금 좌익위께서 사직을 하시면 저하는 어찌 되십니까? 저하는 어찌 되실지 아느냐 여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만. 호위하는 자야 다시 뽑으면···”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그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정관서의 말을 중도에서 자른 김 내관이 다시 사납게 말을 붙였다.
“괴로운 것은 나으리 뿐만이 아닙니다. 저하 또한 이번 일을 크게 자책하시며 수치심에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신단 말씀입니다.
벼랑 끝에 서 계신 듯 심신이 위태롭기 짝이 없으신 저하이신데, 책임을 운운하며 좌익위께서 이대로 떠나시면 저하는 어찌 합니까?
무너지실 겁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실 거란 말입니다! 그것이 좌익위께서 바라시는 바인 것입니까?”
괴로움에 정관서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안 볼 수 있다면, 이도 저도 다 안 보고 사라질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어줄 텐데.... 기꺼이 죽고만 싶은데...
동정한다 말했지? 나를 소인배라 했어.... 그 말이 머리속에, 마음 한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인피에 달아붙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처럼 그 말들은 심신의 진액들을 갉아먹고 부셔놓고 있었다. 체액 모두를 다 빨리고 나면 부스스 부서지고마는 허물만 남겠지?
아아, 어서 그 시간이 왔으면... 남은 마른 허물마저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한점 흔적조차 남지 않았으면... 내가 이 세상에 왔었다는 자취마저 남기지 않고 모두 모두 사라져 없어져 버렸으면....
“아닐 말로 애초 이것이 누구에게서 비롯된 일이었습니까? 좌익위와 호조정랑의 서투른 속임수에서 비롯된 참사가 아니었습니까?
헌데도 저하께선 그것이 대의를 위한 충심에서 비롯된 실수라 하시며 크게 꾸짖음 한번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저하의 크고 넓으신 아량을 어찌 이리 욕되게 갚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설령 저하께서 잘못된 선택을 하셨을지라도, 신하된 자로서, 또한 애초 이 일의 시작자로서 좌익위께선 저하의 편이 서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비록 그 아이를 끌어들인 것은 잘못이었으나 그 마음만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 마음의 순정함만은 믿는다, 그리 말씀 올리고 저하를 위로해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헌데 떠나신다니요? 사직서라니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뒤로 잡아당기지는 못할망정 그 심장에 대못까지 박으려 하다니 이것이 어찌 신하 된 자의 도리이며, 사람된 자의 도리라 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허면 나보고 어찌하라는 것인가? 누구라도 이번 일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이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내가 그 책임을···”
김 내관이 돌연 냉소를 지으며 정관서의 말을 잘랐다.
“책임이라 하셨습니까? 예, 그 책임 의당 져야 할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저임을 저 또한 모르지 않습니다.
허면 어찌할까요? 제가 자진이라도 해야 나으리의 마음이 편해지시겠습니까? 말씀 하십시오. 세자 저하를 위하는 길이라면 섶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저입니다. 무엇이 두렵고 무엇을 꺼려 하겠습니까?
가깝게는 저하를 위한 길이고, 크게는 이 조선을 위한 길이라 하시면 이 길로 나가 죽을 것이니, 말씀만 하시란 말입니다!”
“·········”
“좋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원하시는 것이 정히 그것이라면 그리 하셔야지 어쩌겠습니까? 평양감사도 제가 싫으면 그만인 법인데 누군들 그 뜻을 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가세요.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사지에 저하를 두고 홀로 떠나 그 마음이 편해지신다면 그리 하셔야지요..... 허허허허.”
비웃음을 남기고 김 내관이 떠났다.
홀로 남겨진 정관서는 이도 저도 할 수 없음에 그저 못박힌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
3개월 후.
처가에서 혼례를 올리고 돌아오는 신랑 신부를 맞기 위한 잔치 준비로 집 안은 분주하였다.
“와요!”
마당으로 아이 한 명이 뛰어 들어오며 소리치자 신랑신부를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우르르 집 밖으로 몰려 나갔다.
신랑의 모친이자, 새로 맞이하는 며늘아기의 시어미가 될 천동의 모친은 기대감과 기쁨으로 오늘만큼은 화사하게 병든 얼굴이나마 제법 건강한 빛을 띠었다.
문 앞에 선 천동의 모친이 뛰는 가슴을 두 손으로 눌러 가라앉히려 애를 쓰는 가운데,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한 가마꾼 일행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맨 앞에 선 이는 다름아닌 장 포수였다. 새로 장만한 깨끗한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있어 제법 점잖은 태가 났다. 산도적 같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운 채 장 포수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사부인! 제가 좀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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