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취미
최찬형 장군을 모르는 조선의 무인은 없다. 또한 그의 업적을 자랑스레 여기지 않는 무인 또한 없다.
정관서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나 장군께선 어찌 나를 알고? 몇 달 전 장군께서 세자 궁을 찾아오셨을 때 그때 한번 뵌 것이 전부인 것을···.
아니 그보다 먼저....?
“설마 그럼 저하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아무리 용렬하기 짝이 없는 금상이라 할지라도 저하껜 혈육, 부자지간이 아닙니까? 금상을 내치고 보위에 오르시라, 이 일에 동참하시라 말씀 올리는 것은 무리이지요.
성리학의 가장 근본이 또한 효인 것을 어찌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허나 저하께서도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모르지 않으시는 바 상황을 마무리 지은 후, 보위에 오르실 것을 강권한다면 내치지는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저희와 뜻을 함께 해 주시겠습니까?”
너무도 뜻밖의 상황에 정관서는 어지러운 심사를 가누지 못했다. 답을 하지 못하는 후배의 모습에 김육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란 사람은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매사 고지식하여 답답하단 소릴 듣곤 하였지. 그런 내가 이번 일에 뛰어들었네. 더 이상 우리 조선을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안타까운 일이나 전하께선 더 이상 가망이 없으시네. 그분은 왕으로서의 자격을 잃었어. 두번의 호란으로 나라를 망국의 길 끝에까지 내몰았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세.
그 일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지. 정세를 바로 보지 못한 우리 사대부 모두의 책임이란 말이지.
문제는 전하의 머리 속에 조선의 백성이 없다는 것이야. 당신의 보위를 유지하는 데만 급급해 백성 따위, 조선의 안위 따윈 말끔히 잊으셨어. 그것이 전하의 가장 큰 실책이시고, 또한 전하께서 보위에 더는 계실 수 없는 까닭일세.”
인상된 군포를 내지 못해 죄인이 되어버린 백성들의 모습이 정관서의 눈가로 떠올랐다. 죽겠다, 차라리 죽여달라 외치던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생생하였다.
그 피맺힌 절규를 전하께선 외면하신다. 보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으신다···.
“다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능한 조용히, 가능한 무리 없이 우리는 이번 일을 처리할 생각입니다.
권좌에선 물러나시나 새로 즉위하실 전하의 부왕이 되시고 선왕이 되시니, 마땅히 누리실 모든 것을 지금의 전하께선 또한 누리게 되실 겁니다.
새로 즉위하신 왕께서 새로운 정치를 펼치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양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계셔야 하는 것, 그 하나만이 지켜야 할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아닙니다.”
조면과 김육이 긴장해 보는 가운데, 정관서가 두 사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힘주어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요. 두 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
뜻을 모은 세 사람은 좀 더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금의 상황에 대해 통탄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뜻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최찬형 장군께서 우리 쪽에 계시고, 충청과 호남의 병마절도사 또한 우리 편이니 그 수하의 군사들을 움직여 한양과 궁을 에워싼다면 필시 5군영 내에서도 반드시 동조하는 이들이 대거 나올 것입니다.
그런 후에 금상께 왕위를 양위하시라 압박을 가한다면 거절치 못할 것입니다.”
김육의 말에 정관서가 이의를 제기했다.
“한양과 궐을 지키는 어영청과 겸사복, 내금위의 수장들은 모두 전하의 사람들입니다.
의심 많으신 전하를 닮아 그들 역시 각 곳에 밀정을 심어 넣었지요. 군을 움직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저들의 귀에 우리의 일이 먼저 알려질 것입니다.
또한 설사 비밀이 지켜진다 하더라도 우리 군대끼리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인데, 이는 가능한 다치는 이를 적게 하겠다는 아까의 말씀과도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우리 군이 서로 충돌하여 죄 없는 이들의 피가 흘러내린다면, 그는 새 정치를 펼치실 저하의 치세의 시작으론 어울리지가 않지요.”
앞에 말과 방금 말이 맥락이 닿지 않으니 정관서가 의아히 여겨 쳐다보았다. 조면의 입술 위로 흐르는 미소 또한 어쩐지 수상쩍었다.
김육이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하여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 될 것이야. 1안이 실패할 경우 차후의 선택지란 말이지.”
**
격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대장 강일지가 이끄는 내금위 부대가 상대편을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사저 시절부터 격구를 좋아한 인조는 종종 이렇게 궐내에서 격구 경기를 개최하곤 하였다.
눈에 띄는 격구꾼이 있으면 친위부대에 배속시키는 특전을 내렸고, 일등을 하는 격구단에는 또한 큰 상을 내리었다.
때문에 많은 무관들이 격구에 열심이었을 뿐 아니라, 각 부대에서도 격구 지원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왕의 눈에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함께 경기를 관람하던 신하들이 왕의 비위를 맞춘 듯 한마디씩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하하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 마다요. 전하를 보위하는 내금위 부대가 아닙니까? 누가 감히 저들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본시 격구란 무장들의 신체단련은 물론이요, 말 위에서 적들을 상대케 하기 위한 훈련의 일환으로 시작된 경기가 아니겠습니까?
허니 조선 제일의 무사들로 구성된 내금위 부대를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럼요. 지난 봄과 가을에 열렸던 격구 대회에서 단 1패조차 없이 전승으로 일등을 차지하였던 내금위가 아닙니까?”
따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흐뭇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인조였다.
그러다 문득 한쪽에 앉아 있는 최찬형의 모습이 인조의 눈에 들어왔다. 모두를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자작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풍을 맞아 오랜 시간 두문불출하였던 최찬형이었다. 그랬던 그가 최근 들어 바깥 출입을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인조가 특별히 그를 부른 것이었다.
과거 최찬형 장군의 휘하 부대가 격구 시합을 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구경을 하였던 인조였다.
실력에 있어 최찬형 휘하의 부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었다. 뿐만 아니라 여타의 격구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공격력과 역동적인 전술과 기술로서 인조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을 열광 지지자들로 몰고 다녔던 전설의 격구단이었다.
죽은 소현세자의 한때 스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찬형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격구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항간에 돌았을 정도였다.
“최장군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군.”
인조의 말에 최찬형이 어눌한 발음으로 답하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의 내금위이니 의당 조선의 최고이겠지요.”
풍을 맞은 후유증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어딘가 심드렁한, 혹은 빈정거리는 모습으로도 보이는 최찬형이었다.
상대의 반응에 유달리 예민한 인조가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한쪽 입술 끝만을 올려 비뚜름하게 웃으며 인조가 말하였다.
“실망이로군. 아첨 하는 것으로 공무를 대신하는 소인배들과는 적어도 다를 줄 알았더니···.”
인조가 말하는 아첨하는 소인배라는 것이 바로 자신들을 가리킴을 아는 신하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변명의 말을 입에 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였다.
“늙어 간이 쪼그라들기라도 한 것인가?”
질책인지 칭찬인지 비아냥인 것인지, 도무지 아리송하기 짝이 없는 앞뒷말이었으나 최찬형은 인조의 본심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인조 자신이 아끼는 내금위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 자신 소인배들의 아첨이라 칭한 것을 최찬형에게서도 실은 듣고 싶은 것이다.
지존으로서도, 하나의 사람으로서도 자존감이 바닥인 인조가 보일 법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또한 최찬형이 기대한 바이기도 하였다.
최찬형이 빙그레 웃으며 답을 하였다.
“보잘 것 없는 소신을 그리 높게 쳐주시다니 황송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
늙은 이 한 몸, 시류에 편승해 편히 갈까 생각도 하였으나 그리 질책하시니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하오면 생각하는 바를 솔직히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
“내금위 부대의 격구 실력이 출중한 것은 맞나이다. 허나 조선 제일이라는 평가에는 소신 동의치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는다···? 싸우는 족족 승리하였고, 그것도 모두 압승이었는데도?”
“그래 봤자 호랑이 없는 동네에 여우가 날뛰는 격이지요. 맞서 싸운 상대들이 워낙 하수들이니 이긴 것을 자랑하기에는 참으로 민망한 처사가 아니올른지요?”
인조의 미간이 꿈틀하였다. 내금위는 물론이고 상대한 어영청 또한 자신의 친위부대였다.
그런 그들을 얕잡아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생각하는 인조였다.
“허약체? 의금부와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을 그대는 허약체라 부르는가?”
“말인즉슨 그렇다는 것입니다.”
커억 컥! 고개를 돌려 가래로 들끓는 목을 한바탕 요란하게 정리한 후, 최찬형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무인이란 하루도 편히 몸을 두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제 아무리 타고난 무인일지라도 훈련을 게을리 했다가는 당장에 표가 나는 법이지요. 하여 훈련, 오직 훈련만이 무인을 무인으로서 생존케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백 번의 훈련도 한 번의 실전만은 못한 법. 말씀하신 부대들이 최고의 무인들을 모은 것은 분명하나, 이곳 안전한 한양 땅, 그것도 구중궁궐 내에서 순찰이나 도는 것이 고작이니 어찌 실전 경험이 많다 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 매일 매 순간 긴장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크고 작은 실전을 몸소 치루고 있는 변방의 장수들을 저는 윗길이라 생각합니다.”
반응이 없는 인조를 올려다보며 늙은 얼굴에 장난꾸러기 아이 같은 웃음을 띄우는 최찬형이었다. 그러나 풍 맞은 여파가 남아있는 탓에 반쪽의 얼굴만이 웃었다. 웃는 듯도 싶고, 우는 듯도 싶은. 그것은 또한 최찬형의 속마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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