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의 눈에는 도둑만이 보인다.
“왜인이 말하기를 자신을 풀어주면 이취우라는 환관을 통해 그 서찰 중 일부를 빼내오겠다. 그리하면 적과 내통하는 밀정, 즉 역적 죄인들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합니다. 그를 전하께서 받아들이신 것으로 보입니다.”
정관서가 물었다.
“이취우라는 환관이 실존인물이기는 한 것인가?”
“예. 실재한다 합니다. 근 1,2년 사이에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독차지하여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한 자라 합니다. 그것을 확인하였기에 전하께선 왜인의 말을 신뢰하신 것이 겠지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본인의 말대로 그자는 장사치일 뿐이야. 환관의 이름쯤 아는 것을 가지고 어찌 의심 없이 그 자의 말을 믿으셨다는 것인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전하께서 그 자의 말을 믿으신 것은 분명해 보이니···”
김 내관이 선뜻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데 세자가 입을 열어 대신 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전하의 어심이기 때문이지.”
“?”
“전하께선 반정으로 보위에 오르셨네. 허니 또다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늘상 노심초사하시지. 역모에 대한 불안감과 의심이 깊어지다 보니 종내에는, 차라리 없는 역모라도 만들어내 적을 눈 앞에 세우고 싶어지신 게야.
보이지 않는 적을 상상하며 막연한 불안감을 키우느니 직접 만들어서라도 눈앞에 세워두면 우선 안심이 된달까?..... 하하하 하하하하.....”
공허한 웃음을 웃는 세자였다. 부왕께서 새로이 만들어 눈 앞에 세워두고 싶은 적이 누구일까 짐작이 되는 까닭이었다. 그것은 필시.... 당신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를 세자 자신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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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관에선 백부인 정사와 조카인 기림 사이에 말이 오가고 있었다.
“조선의 왕은 이제 의심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 하나의 숙명이 되어 버린 것이지.”
“허나 상대는 자식입니다. 어찌 제 핏줄을 의심하고자 저리도 애를 쓰는 것인지 저로선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쯧쯧. 세상을 여직 그리 몰라? 그러니 내 뭐랬느냐? 아직은 수양을 더 쌓고 세상 공부를 해야할 때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헌데 기어이 제 멋대로 이곳까지 와? 도대체 네 어머니를 얼마나 괴롭힌 것이냐? 어찌 했길래 네가 여기 오도록 허락을 하였어, 응?”
백부의 꾸중에도 기림은 주눅드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각오한 바였고 모친으로부터는 더한 꾸지람도 들었던 터였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부러워 마지않는 황궁 호위대 자리를 내차고, 당장에 조선으로 가야겠다는 말을 했을 때 모친은 기겁하였다. 혼례까지 미루겠다 하였을 때는 거의 혼절 직전까지 간 모친이었다.
처음에는 눈물로 호소하였다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와 이치를 묻고, 따지고 설득하던 모친은 급기야는 부모자식간의 연을 끊겠다 겁박까지 하였었다.
그럼에도 기어이 조선으로 오고야 만 기림이었다.
“세자께선 아직 아무런 연락을 주지 않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제가 알고 있던 봉림대군마마가 아닌 듯싶습니다.”
자신의 말을 허투루 듣는 듯한 조카가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 자라 준 것만도 고마운 정사였다.
억울하게 죽은 부친의 일로 방황하던 어릴 적 조카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렸다.
되도 않는 누명으로 죽음을 맞아야 했던 동생, 그 동생을 지켜주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에 무능한 자신을 얼마나 질책하였던가.
죽어가던 동생에게 네 아들과 내자만은 반드시 지켜주겠다 약조를 하였건만 하루가 다르게 비뚤어져만 가는 조카를 보며 또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그 방황을 잡아준 것이 볼모로 와 있던 조선 세자 일행이었다. 그러고 보면 조카의 이런 행동을 무작정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은혜를 아는 행동이니 칭찬을 해주어야 하는 걸까?
정사가 찻잔을 들어 마시며 씁쓸한 웃음을 함께 삼키는 것이었다.
“권력이란 한번 맛을 들이면 절대 그 맛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식이라 해도 절대 넘겨줄 수가 없는 마력을 가진 것이지.
지나간 역사를 보거라. 살아 생전 왕위를 이양한 제왕이 있더냐? 모두 숨이 넘어갈 때까지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어.
왕위 계승이 왜 친자에게로 넘겨지는지 너는 아느냐?”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안정을 꾀하는 마음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왕좌라면 다음 왕이 정해질 때까지 세상은 왕좌를 차지하려는 자들로 큰 혼란이 일터이니 말입니다.”
“그래, 그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 허나 다른 이유로는 죽어서도 누리고 싶은 인간의 권력욕이 그 저변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서도 누리고 싶은···?”
“그래. 선왕이 죽고 그 아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면 선왕은 죽어서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새로운 왕이 된 아들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선왕의 존재를 더욱더 위대하게 그려낼 것이 아니겠느냐?
반면 생면부지의 남이 왕이 된다면 어떠하겠느냐? 죽은 선왕 따위 무시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선왕을 깎아내려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려 할 것이야.
허니 인간의 꺼지지 않는 권력욕이 친자 계승의 전통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이나 조선 왕이 지금 보이는 행태는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다. 왜냐? 그자는 반정으로 왕좌를 차지한 자, 즉 왕위를 훔친 도둑이기 때문이다. 제가 도둑이니 아들도 도둑이 아니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옛 말도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참으로 못난 인사가 아닙니까? 어찌 그런 못난 인사에게서 저하 같은 훌륭한 분이 나실 수 있었을까요?”
기림이 말하는 이는 물론 지금의 세자가 아닌 죽은 소현이었다. 정사 역시 미루어 짐작하기에 바로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본디부터 그런 인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사저 시절에는 성정이 나쁘지 않았다 한다. 그러다 왕위를 도둑질하면서 인성까지 변해버린 것이지.
사람에게는 그래서 분수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제 그릇에 맞지 않는 자리를 탐낸 대가가 바로 지금 조선 왕이 보이는 저 해괴한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 한사람으로 인해 조선이 입은 피해는 또 얼마나 엄청난 것이고 말이야.
물론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워낙 그릇이 작은 인간이기에 조선 왕은 저리 무너지고 말았으나, 역사를 보면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보잘것이 없던 사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더니 맞춘 듯 훌륭한 인재로 재탄생 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다.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결국 그 자리가 그 인재의 맞춤 자리였던 셈이지."
"......"
"결국 가 앉아보지 않으면 그것이 제 분수에 맞는 자리인지 어떤지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인데···.
허허. 나도 늙은 모양이다. 너같이 우둔한 놈이 내 말을 알아들을 거라 생각해 이런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야? 쯧쯧쯧.”
꾸중하는 말에도 게의치 않고 기림이 진지하게 다시 묻는 것이었다.
“그릇으로만 치자면 소현세자 저하만큼 왕좌에 어울리는 분이 또 계시겠습니까?”
조카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 정사였다. 그러나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이 동의임을 알아 본 기림이 다시 말하였다.
“저하께선 제게는 큰 스승이셨습니다. 비록 직접 글을 배운 적도, 따로이 가르침을 받은 적도 드물었지만 옆에서 저하를 봬온 것만으로도 저는 큰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얻었으니 어찌 저하를 기리는 마음이 시간이 흐른다 하여 옅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깟 자리쯤 버렸다 하여 아까울 리 있겠습니까?”
자신의 행위를 변론하는 한편 진심을 토로하는 조카를 찬찬한 눈으로 바라보며 사신이 물었다.
“허면 너는 소현세자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느냐?”
“무엇을? 권력욕 말씀이십니까?”
“그래.”
“물론입니다. 저하께선 오직 백성을 사랑하셨을 뿐, 그들의 위에 서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백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는, 조선의 세자는 권력에 취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것은 주변 상황이 뒷받침되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변 상황으로 치자면 최악의 상황이셨지요. 일국의 왕세자가 볼모로 타국에 잡혀 있는 것이 어찌 뒷받침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하는 얘기다. 소현세자는 조선 국왕의 장자였다. 적통자란 얘기지.
뿐이냐? 그는 주변의 따르는 신하들부터 조선의 백성들, 나아가 우리 청국인들에게까지도 추호의 의심 없이 차후 조선의 왕위 계승자로 받아들여졌다. 조선 백성들의 세자를 향한 기대와 존경심이 얼마나 컸는지 너도 알지 않느냐?”
“알다 뿐이겠습니까? 멀리서 저하를 한번 뵙는 것만으로도 이제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저하께서 계시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 믿는 조선의 포로들을 날이면 날마다 보았었습니다.”
“그래, 그는, 조선의 세자는 자신의 위치를 단 한번도 위협받은 적이 없다. 그에게 의혹의 여지는 생길 여지조차 없었다는 얘기다.
조선으로 돌아와 아비이자 왕인 자의 의심 아래 놓이면서 상처는 입었겠지만, 흔들리기에는 그의 입지는 너무도 강한 것이었다.
조선 왕조차 골육상전의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세자를 폐위 시키는 대신 죽음으로 내몬 이유는 그가 바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적통자였기 때문이란 얘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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