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정신
“좋습니다. 쌀 1만포로 하지요.”
청국 정사의 말에 세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반면 조선 왕에게서 받은 어제의 수모로 인해 청국 정사의 표정은 그지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중이었다.
“대신 조선의 총포군 200명을 보내십시오. 그들에게 소요되는 경비 모두는 조선 조정이 일체 부담하여야 합니다.”
“총포군이요?”
“나성인들이 국경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조선의 총포군 실력이라면 도움이 될 듯 하여 하는 말입니다.”
“경비 일체는 과합니다. 거기에 총포군 200이라니요? 조선 내 총포군의 수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200명을 보낸다면 조선의 국경은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근자 들어 왜구의 횡포가 자심한 지경입니다.”
“허면 쌀 1만3천포를 보내던가요. 양자택일 하세요. 쌀 1만3천인지 총포군 200인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세자를 보며 청국 정사가 새삼 분이 치받는 듯 인상을 쓰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무슨 큰 약점이라도 잡은 양 행여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오산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잠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이나, 이미 정한 일을 뒤엎는 것은 대국의 신의에 어긋난다 하시며 황제 폐하께서 바로 물리치신 사항입니다.
그 일을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거론하였다가는 말이 나온 김에 조선을 속국으로 삼자 주장하는 이가 나올지도 모름을 세자는 아시겠지요?
수많은 신료들이 우리 조정에는 있고, 그들의 생각이 다 나와 같지 않음을 반드시 조선 조정은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정사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대국의 신의를 문제 삼는 것은 이번 한번으로 충분했다.
논리란 강자가 만들기 나름인 것, 약자의 항변 따위 덧없는 외침에 지나지 않으리라. 새삼 약소국의 비참한 현실을 절감하며 세자가 쓴 침을 삼키는 데, 정사가 은혜라도 베푸는 양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정히 어렵다면 총포군 150명으로 낮추지요. 일체 경비는 조선 부담. 더 이상의 논의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
백부의 부름을 받은 기림이 방으로 들어서는데 곧장 벼룻돌이 날아왔다. 백부가 던진 벼룻돌에 주르르 선홍빛 선혈이 기림의 눈 위로 이내 흘러내렸다.
그런 조카를 향해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보며 노성을 질러대는 백부의 신분은 청국 사신단을 이끄는 정사인 것이었다.
“네 이놈! 경고망동하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감히 세작 노릇을 해? 그러고도 네가 살기를 바라느냐?
그 표정은 또 무엇이냐? 조정의 일을 외국에 밀고해 팔아 넘긴 놈이 그 당당한 표정이 무엇이야?
입이 있거든 말을 해보아라. 네가 무슨 생각으로 세작질을 하였는지, 무슨 마음으로 황궁 조정에서 있었던 일을 조선에 말하였는지 말이다!”
“사람을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억울한 처지에 몰린 백성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일이었습니다.”
엄한 추궁에도 기림은 눈 위로 흐르는 선혈을 덤덤히 닦아내며 답하니, 그 모습에 화가 배가 된 정사는 분기탱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말이라고! 조선의 백성 일에 네가 왜 신경을 써? 그 계집이 네 계집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돌아가는대로 내 너의 행위를 낱낱이 아뢸 것이다. 행여 네가 내 피붙이라 하여 내가 이 일을 유야무야 넘길 것으로 생각했다면, 너의 그 어리석음이 명줄을 단축시킨 주범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어째 대답이 없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허나 죽기 전에 황제 폐하께 여쭐 것입니다. 우리 청국은 분명 조선을 신하의 나라라 칭하였거늘, 그 말이 허언이었는지 여쭐 것입니다.
신하란 아껴야 할 내 백성이고, 그렇다면 자연 그 신하 나라의 힘없는 백성들 또한 소중히 다뤄야 함이 마땅하지 않느냐 여쭐 것입니다.
또한 황제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실 때, 세상 천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어여삐 여기시겠다 말씀 하셨거늘, 어찌 그 생명에 조선의 백성은 포함되지 않는지, 국경선 너머에 있다 하여 소홀히 여긴다면 그것이 어찌 대국의 처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여쭐 것입니다.”
뻔뻔스럽다 못해 적반하장의 태도까지 보이는 기림의 모습에 정사는 혈압이 올라 벌개진 얼굴로 뒷목덜미를 잡아야 했다.
“저, 저런 미친놈을 보았나! 어디서 감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늘어 놓아? .....가거라. 이 길로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리고 있어!”
기림이 인사하고 나가는데 그 표정이 심히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그때 기가 막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정사에게 부사가 말을 건네는 데, 뜻밖에도 부사의 입가에 미소가 달려 있었다.
“부럽군요.”
해괴하고 느닷없는 부사의 말에 얼뜬 얼굴로 쳐다보는 정사였다.
“저 나이 때나 가능한 치기요, 용기 아니겠습니까?”
바로 샐쭉한 얼굴이 되어 정사는 중얼거렸다.
“위로를 참 희한하게 하십니다?”
“위로라니요? 축하를 드려야지요.
말이 나와 말이지만 애당초 쌀 1만3천포란 것은 고려해본 적조차 없는 숫자가 아닙니까?
조선 총포군 150명을 우리에게 보내되 그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조선이 부담토록 하라. 단 조선에서 그에 강력 반발하면 그땐 쌀 1만포를 9천포까지 감하여 주어도 무방하다, 그것이 우리 조정의 애초 방침이었습니다.
헌데 총포군은 총포군대로 확보하고, 쌀 1만포 또한 그대로 고수시켰으니 이는 오로지 대인의 공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크게 치하하실 터, 위로란 가당치가 않습니다.”
부사의 말인즉슨 옳으니, 기분이 한결 누그러지는 정사였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속엣말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걱정입니다. 아비 없는 조카라고 너무 오냐 오냐 하였던 모양이에요. 저걸 어찌해야 좋을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어요.”
“젊은 나이 아닙니까? 저 나이 때 그리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걱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
“생각해 보세요. 현실에 순응하여 이상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젊음이라 하겠습니까?
제 이익이나 챙기고 일찍부터 세상 눈치나 살피는 천박하고 노회한 자들만 있다면 그런 자들을 어찌 믿고, 또 어찌 후대를 맡길 수 있단 말입니까?
걱정마십시오.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저도 대인도, 또한 모든 이들이 지나온 길이 아니겠습니까?”
부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면서도 정사의 얼굴은 마냥 밝아지지는 못하였다. 혹여 그 순정한 젊음이 조카에게 큰 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염려하는 때문이었다.
**
다음날 새벽, 의금부에서 풀려난 연이가 절뚝거리며 나오는 데 기다리고 있던 장 포수가 얼른 다가가 부축하였다.
작은 주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위로를 하고 우선 의원을 찾아 가려 세사람이 방향을 잡는데, 저쪽에서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정관서였다. 세 사람 모두 차가운 얼굴로 쳐다보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행했다. 그리고는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정관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볼 낯이·····”
세 사람이 돌아보니 고개를 떨군 정관서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어 말을 이어갔다.
“···미안하다···. 살아 있는 것이 이리 부끄러울 수가 없어···.”
마음 같아서야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았지만 차마 그리 하지는 못하고 얼굴만 울그락 불그락하여 외면해버리는 장 포수였다. 그러다 딸아이가 물끄러미 정관서를 보고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뭐하냐? 가지 않고?”
“······”
“가자니까!”
“아부지, 잠깐만···.”
너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야? 양반 것들은 아예 상대를 말라는 애비 말만 들었어도 이런 꼴은 안당했을거 아니야?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게야 뭐야?
이번에야말로 정신 번쩍 들게 혼줄을 내주려던 장 포수였다.
그러나 옆에 서 있던 진성관 작은 주인이 자신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흔드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의 목숨을 구명해준 은인이니 감히 토를 달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편 자신을 쳐다보는 연이의 맑은 눈을 차마 마주쳐다 볼 용기를 내지 못해 정관서가 시선을 피하며 어렵게 물었다.
“몸은··· 괜찮은 것이냐···?”
“······”
“아뢰지 그랬느냐···. 억울하다, 이 모든 것을 꾸민 자들을 안다. 정관서란 자가 그 주범이다. 그리 아뢨다면 이리 큰 고초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마침내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술을 벌려 말을 하는 연이였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소인배들을 상대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들을 닮지 않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절대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져선 안 된다 말씀하셨지요. 저는 그 말씀을 따랐을 뿐입니다.”
소인배....! 나를 이름인가....? 참으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아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그 치욕적인 단어에 해당됨을 잘 아는 까닭에 정관서는 참담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질끈 눈을 감는 정관서의 모습을 말 없이 지켜보던 작은 주인은 이 비극적 상황이 슬프고도 화가 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끈불끈 치솟는 화를 꾹꾹 눌러 삼키느라 장 포수는 콧바람을 들이키며 연신 험한 욕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몸을 돌리며 연이가 차분히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가엾다, 생각하려 노력 중입니다······.”
가엾다? 동정을 한다고, 이 나를? 정관서의 건장한 몸이 흡사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냥 크게 휘청거렸다.
한편 윗전의 명을 받고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자궁의 장 내관 역시 큰 충격에 얼굴빛이 파랗게 질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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