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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펭귄의 서재

어쩌다 보니 공간도약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전쟁·밀리터리

파란펭귄
작품등록일 :
2020.12.13 14:41
최근연재일 :
2021.03.05 18:15
연재수 :
106 회
조회수 :
19,768
추천수 :
184
글자수 :
390,460

작성
20.12.1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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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19쪽

1장 그래서 홧김에 휴학을 내버렸죠. (1)

DUMMY

“젠장······.”


장거리를 뛰고 난 후에 마시는 커피는 늘 혀를 감싸며 쓴맛을 전했다.

진욱은 설탕을 더 넣었지만, 피로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잔뜩 찡그리며 마지막 모금을 마신 진욱은 휴지통에 일회용 종이컵을 던졌다.

종이컵은 보기 좋게 들어갔지만, 진욱은 살짝 눈썹을 치켜뜰 뿐이었다.


진욱은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확인한 뒤 머리 위의 버튼을 눌렀다.

선체 후방의 사이렌이 눈이 부실만큼 밝은 빛을 뿜으며 등 뒤에서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사이렌 옆을 지나가던 공항 직원 한둘이 깜짝 놀라 진욱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진욱은 사이렌 소리가 좋았다.

특히 왈츠와 같이 일정한 사이렌 특유의 그 박자가 꽤 마음에 들었다.

아무런 변화도, 변덕도 없는 안정된 그 박자가 마음에 들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후방 해치가 열리자 사이렌 소리는 귀신같이 사라졌다.

눈을 뜬 진욱은 화물칸을 통해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자, 쉭쉭 소리를 몸 어딘가에서 내는 거대한 운반 로봇이 해치 앞에서 이미 대기 중이었다.


환한 햇빛이 로봇의 등 뒤를 비추어 실루엣만 보이는 모습은 마치 책에서 보던 모아이 석상과도 같았다.

화물들의 틈새로 힘겹게 나오던 진욱은 무심하게 서 있는 로봇들을 바라보았다.


“옮겨.”


로봇들은 다시금 특유의 쉭쉭 소리를 내면서 입구에 쌓여있던 화물들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앞에 있던 로봇이 상자를 들고 뒤의 로봇에게 건네주었다.


상자를 받은 뒤쪽의 로봇은 때마침 가설된 컨베이어에 화물을 올렸다.


진욱은 그들의 작업을 보며 다시금 표정을 찡그렸다.

아까 마신 커피의 씁쓸함이 입에 남아있어서인지는 몰랐다.


진욱은 팔을 들어 천장에 대었다.

살짝 몸을 굽힌 채 화물에 기대어 나가려던 진욱은 순간 균형을 잃어버렸다.


로봇이 진욱이 지나가는 것보다 먼저 짐을 옮겨버렸기 때문이었다.

비틀거린 진욱은 손에서 흐트러진 서류 뭉치를 똑바로 하면서 로봇을 흘겨보았다.


로봇 역시 진욱의 눈길을 알아차렸는지 진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로 말은 없었다.

진욱은 그냥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진욱은 로봇들을 뒤로한 채 선체를 빠져나왔다.


밖에서 본 선체는 다행히 크게 수리할 곳은 없어 보였다.

스크래치가 군데군데 있었지만, 진욱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함선등록번호 옆에 있는 노란 스크래치를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숙이던 진욱의 어깨를 누군가 툭 쳤다.


“이야, 수고했다. 이번에는 6주였지?”


진욱은 여전히 스크래치를 유심히 보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6주나 갔다 왔으니까 너 이번에 수당 꽤 나오겠는데? 아······ 나도 그냥 지상직 뜰까······ 너 보자, 대충 세어 봐도······.”


기름때 묻은 얼굴로 손가락을 한두 개 접어가며 남자는 혼잣말을 하였다.

허리를 편 진욱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늘의 틈으로 보이는 명찰에 진욱의 눈이 다다랐다.


‘지상관제부 안태환’


태환은 늘 그렇듯 한 쪽만 막고 있는 귀마개와 사시사철 입고 있는 노란색 조끼를 걸친 모습이었다.


진욱은 문득 어릴 적 엄마 무릎에 머리를 기대어 같이 보던 옛날 할리우드 영화가 생각났다.

항공모함 위에서 수신호를 하며 전투기를 출격시키던 해군들의 모습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햇빛을 등지고 있던 태환의 모습이 오늘은 웬일인지 덜 헐렁해 보였다.

하지만 헷갈렸다며 처음부터 진욱의 수당을 다시 계산하는 태환의 모습을 본 진욱은 그 생각을 접었다.


“수속이나 빨리 처리해 줘.”


진욱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어서 자리를 뜨고 싶은 눈치였다. 겨울바람이 그새 더 강해졌다.


쉴 새 없이 떠오르고 내리는 왕복선과 비행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욱이 있는 화물 터미널 구역만 유독 추운 느낌이었다.


탁 트인 활주로에는 생기 없는 로봇들과 왕복선들만 군데군데 있었다.

가족들, 친구들과 작별 인사하는 따뜻한 모습은 반대편 여객 게이트에 있다는 걸 진욱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진욱은 몸이 추운 것이지, 마음이 추운 것은 아니었다.


빨리 일을 끝내고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다.

소매를 정리한 진욱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태환의 품에 밀치듯이 맡겼다.


로봇을 바라보고 있던 태환은 얼떨결에 서류철을 건네받았다.


“아, 이 자식······ 알았어. 아 참, 인사과 부장이 너 오면 와보라고 하면서 아까 찾던데. 너 무슨 일 있냐?”


태환은 서류철을 대충 훑어보다가 부장을 떠올리며 다시 진욱을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으려던 진욱은 그런 태환과 눈이 마주쳤다.


“몰라, 일단 알겠어.”


진욱은 말을 끝내자마자 이어폰을 끼웠다.

곧이어 옷깃을 세우며 큰 숨을 내쉬었다.


빨갛게 추위에 달아오르기 시작한 진욱의 볼이 줄어들며 긴 입김을 만들어냈다.

입김이 채 사라지기 전에 진욱은 몸을 돌려 터미널 안으로 걸어갔다.


진욱은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주하게 하역 작업을 하는 로봇들과 감독하는 공항 직원들 몇몇만 있을 뿐이었다.


오늘은 들어오는 화물선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최근에 경기가 안 좋다는 말이 들려왔지만, 지금의 진욱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다.


실내로 들어서자 따뜻한 기운은 진욱을 감싸면서 진욱의 볼을 어루만졌다.

진욱은 잠깐의 따뜻함을 이용해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그렇다고 종종걸음은 아니었다.


바쁠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갑자기 빠른 걸음을 하는 것도 왠지 이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곧 진욱의 눈앞에 출입국 관리 구역이 보였다.


소총을 든 로봇 셋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진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진욱은 로봇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로봇을 쳐다보다가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진욱은 잘 알고 있었다.

진욱은 똑바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모니터에 빠져 있는 출입국 직원의 주근깨가 보일 정도로 다가선 진욱은 조용히 유리창을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듯 보이는 여직원이 주변을 허겁지겁 정리하며 진욱을 올려다보았다.


“어머, 오랜만이네요.”


진욱은 익숙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품에서 사원증과 면허증을 꺼냈다.

늘 그 자리, 그 주머니에 있었다는 듯 진욱은 보지도 않고 그것들을 꺼내었다.


“사원증이랑 비행면허증······ 아, 잠시만요.”


여직원은 면허증을 대충 훑어보며 동시에 다른 손으로 키보드를 한 자 한 자 누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원증의 바코드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에 대었다.


여직원은 그 기계의 빨간 램프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욱은 그런 여직원의 주근깨를 다시 멍하게 보았다.

한참 조용한 분위기를 깬 것은 여직원이었다.


“화성은 어때요? 이번에 거기 새로 놀이공원 만들었다고 하던데 가보셨어요? 화성에서 제일 크다던데, 가보고 싶다.”


진욱은 여직원의 주근깨에서 움직이고 있는 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 여직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물고기가 뻐끔거리며 숨 쉬듯이 움직이는 입을 보는 건 의외로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아니, 익숙하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화물 컨테이너를 우주 너머로 배송할 때마다, 합성 유리 너머 우주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선체 옆을 스치듯이 지나가는 정기 여객선의 분사구에서 터져 나오는 불꽃, 소행성대에서 서로 부딪치는 소행성, 정거장을 수리하는 로봇들의 용접기와 공간을 찢으며 도약하는 연합군 순양함.


이들 모두 선체 안에서 보면 움직이는 그림일 뿐이었다.

소리 없는 영화, 소리 없는 다큐멘터리였다.


진욱은 조용한 선체에서 그것들의 소리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처음에는 진욱 자신이 가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선체의 스피커로 ‘Sunset on the galaxy’를 틀기도 했다.

언제는 코미디 드라마를 화성까지 가는 일주일 내내 틀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끝은 침묵이었다.

소리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일을 시작하면서 침묵에 너그러워진 것이었다.

분사구 불꽃의 우르릉거리는 소리보다, 불꽃이 만개한 뒤 곧바로 우주의 구석구석으로 흐트러지는 모습이 더 좋았다.


소행성이 부딪치며 부서지는 소리보다, 부서질 때마다 나는 다양한 소리를 상상하는 것이 좋았다.

재잘거리는 말보다, 움직이는 여직원의 입모습이 좋았다.


“다 됐어요.”


진욱은 여직원이 내미는 사원증과 면허증을 받아 그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진욱은 가볍게 여직원과 눈을 마주친 후 출구로 향하였다.


출구의 자동문이 열리자, 진욱의 눈앞에 오랜만에 움직임과 소리가 넘치는 모습이 펼쳐졌다.


쉭쉭 소리를 내는 로봇들이 두 줄씩 짝지은 채 진욱의 앞을 지나쳐갔다.

그 너머론 마치 바깥과 안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햇빛이 벽면 유리를 뚫고 멀리 보이는 벤치들을 비추었다.


벤치에는 출장을 가는 직장인들, 공항 직원들 그리고 청소 로봇과 이별하는 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홀로그램 그래프를 그리며 통화 중이던 사람은 그의 옆에서 청소하는 로봇에게 괜히 화를 내고 있었다.

깊게 모자를 눌러쓴 여자는 앞에 모여 있는 부하직원들에게 열심히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진욱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고 3층으로 향하였다.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안내 방송이 이어폰을 비집고 진욱의 귀로 들어갔다.


복도 정중앙에 줄지어진 광학 광고판들이 진욱이 지나갈 때마다 그를 불렀다.

뭇 남자들의 이상형으로 변한 그 빛줄기들은 진욱에게 끊임없이 지니의 속삭임처럼 광고를 속삭였다.


3층에 도착한 진욱은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에 있던 홀로그램의 안내를 무시하며 바로 발을 좌측으로 돌렸다.

이윽고 문패도 없는 문 앞에 멈춘 진욱은 이어폰을 빼고 가볍게 노크를 하였다.


“들어와.”


안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공기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욱의 앞을 막아섰던 문이 열렸다. 실내는 깔끔하였다. 아니, 단순했다.


전체적으로 하얀 방에는 현대적인 느낌의 곡선형 책상과 간단한 의자 두어 개만이 방을 지키고 있었다.


책상 위도 마찬가지였다.

큰 모니터 두 개만이 책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안 어울리는 배색의 필기도구와 서류철이 몇 개 흩어져 있었지만, 다분히 장식용으로 갖다 놓은 느낌이 강하였다.


모니터 뒤쪽 편에는 익숙한 회사 로고가 일정한 속도로 돌고 있었다.

1층이 내려다보이는 벽에는 뉴스만 주야장천 틀어대는 윈도 스크린으로 도배되어있었다.

스크린에는 알 수 없는 내용과 숫자들이 빈틈없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서서 무언가를 단말기에 적고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단말기를 내려놓은 후 뒤로 돌아 진욱을 바라보았다.


“여기 앉아요.”


진욱은 책상 앞의 소파에 앉으려고 다가갔다.


“잠깐, 옆으로 돌아서 와. 거기는 캐비넷이에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욱이 세 번째 걸음을 내딛자, 바로 옆 바닥에서 캐비넷이 기둥 모양으로 올라왔다.

진욱은 침착하게 놓았던 발을 떼고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니까······ 박진욱 씨 맞죠? 일단 박진욱 대리니까 편하게 얘기할게. 물류과에서 보내준 서류는 받았어.”


말을 하면서 그 남자는 진욱의 맞은편에 앉은 후 자연스럽게 뒤로 몸을 젖혔다.

그가 자리에 앉자 비어있던 책상에서 물방울이 생기더니 이윽고 글자가 되었다.


‘강일&헤클러 상사 인사과 김형식 부장’


진욱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김 부장 역시 자신의 셔츠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고 진욱을 바라보았다.


글자가 빛난 후 사라지자 진욱은 그제야 부장을 바라보았다.

세월과 월급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낸 얼굴이었지만 지쳐 보이진 않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죠?”


진욱은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김 부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계속 진욱을 보았다.


얼마간의 정적 후, 김 부장이 책상에서 손을 움직였다.

사라진 글자가 있던 곳에서 여러 가지 그래프와 글자들 그리고 진욱의 신상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인사기록을 보니 진욱 씨가 그동안 대부분 행성 간 무역을 했더라고. 입사하고 곧바로 금성에서 2년, 달에서 4년 그리고 최근에 화성에서 3년.”


김 부장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읊으면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진욱의 경력과 인사자료들이 차례차례 클로즈업되며 진욱의 방향으로 하나하나 책상 표면에 나타났다.

진욱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궁금한 게, 이쯤 되면 아무리 현장직이라도 대리는 탈출하지 않나? 만년 말단 조종사로 지내면 지겹기도 하고, 승진도 하고 싶으니까 지구에 돌아올 법도 한데 말이야.”


김 부장은 특유의 평온하지만, 살짝 낮은 목소리로 진욱을 향해 물었다.

의례적으로 물어보는 말투였지만 은연중에 개인적인 궁금함이 묻어있었다.


“조용한 곳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지구가 싫은가 봐요?”


김 부장은 의자를 살짝 돌리면서 반문하였다.


“아뇨. 그냥 여기보다 우주가 더 좋은 것뿐입니다.”


진욱은 담담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요?”


김 부장은 짧게 대답한 후, 천천히 몸을 기울여서 진욱을 향했다.


“사실 이 정도 경력이면 한 군데서 자리 잡고 승진 노려봐도 되겠는데요. 학벌도······ 어이구, 가오슝 공대 나왔네. 입사 성적도 우수······.”


말을 흐린 김 부장은 책상에 펼쳐진 자료를 다시 읽었다.

김 부장이 이것저것 훑어보는 동안 진욱은 옷깃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나요?”


김 부장은 눈동자만 진욱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책상에 대고 손을 저었다.


“진욱 씨가 화성에 갔다 온 사이에 회사 사정이 조금 바뀌었어요. 여기 보면······.”


김 부장이 손을 훑자, 진욱에 대한 서류들이 사라지고 검은 글자들이 가득한 문서들이 대신 펼쳐졌다.


“경영상의 효율성 문제에 관한 것도 있고 이사회에서 합의된 내용도 있는데 한 번 읽어봐요.”


진욱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문서를 읽었다. 진욱의 눈이 문서들의 끝으로 향할수록 미세하게 떨렸다.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진욱에게 겨울바람이 옷을 뚫고 간간이 들어오는 그런 불쾌함과 짜증과 같음은 틀림없었다.

진욱은 문서를 다 읽은 후 조용히 김 부장과 눈을 마주쳤다.


“이게 뭐죠?”


김 부장은 예상했다는 듯 살짝 웃음을 띤 표정을 지었다.

전형적인 회피용 웃음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 진욱 씨가 일하는 방식을 조금······ 바꾸어야 한다는 거죠.”


김 부장은 ‘조금’이라는 말에 강조를 주었다.


“그동안 해오던 일반적인 이온추진 방식으로 운송하는 방식을 내년 1월 1일부터 폐지하기로 했어요. 행성 간 무역에서는 이제 공간도약 방식만 쓰기로 한 거죠. 알아보니 그동안 몇 년 정도 사원 교육에 유예 기간까지 줬다는데, 진욱 씨는 여기 보니까······ 계속 거부하셨네요. 제 작년에도 거부, 작년에도 거부.”


진욱의 눈의 떨림은 멈추었지만 굳은 표정은 그대로였다.


“어쨌든, 이제는 회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폐지했으니 몇 주 안에 공간도약 방식 시뮬레이션 훈련에 들어가고 곧 재배치도 받을 겁니다, 진욱 씨. 어차피 입사할 때 했던 거니까 다시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은 없어.”


김 부장은 그렇게 할 말을 하고 정장의 매끈한 소매를 들췄다.

반쯤 가려져 있던 자신의 손목시계가 드러나자 김 부장은 눈을 내려 살짝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사표 내겠습니다.”


진욱은 김 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하였다.

웬만한 사람이면 입 밖으로 내려다가 턱 막히는 사표라는 단어를 진욱은 거리낌 없이 뱉었다.


그러나 즉흥적으로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진욱의 목소리에 변화는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죽음을 맞이하는 담담한 불치병 환자의 마지막 같았다.


“뭐라고요?”


시계를 느긋하게 들여다보던 김 부장은 진욱을 다시 쳐다보았다.

진욱은 양쪽 의자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일어날 채비를 하려고 하였다.


“이해가 안 되네. 입사할 때 보니 조종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계속 현장직이었으니 우주에서 계속 돌아다니는 것도 문제가 안 되잖아요.”


김 부장은 일어서려는 진욱에게 손짓하며 말하였다.


“공간도약 방식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지금처럼 더 못한다면, 그냥 퇴사하겠습니다.”


김 부장은 고민하는 소리를 내었다.


“흐음······.”


그냥 싫다니. 김 부장은 이런 성의 없는 대답에 쏘아붙일 말을 하려다가 입안에서만 삭혔다.


아무리 강일&헤클러 상사가 업계 1위라고 해도, 1급 기체 조종사 자격증을 가진 인재가 회사 내에 그 정도로 흔한 것은 아니었다.


진욱 같은 실력자는 어딜 가든 먹고는 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회사 차원의 배려까지 단칼에 거절할 줄은 예상 못 했다.

그런 생각에 다다른 김 부장은 진욱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김 부장은 동시에 진욱의 일이 어디까지나 물류과의 문제임을 인지하였다.

괜히 자신이 감정이입 해봤자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

진욱이 자신의 부하직원이면 모르겠지만, 이건 늘 있는 인사이동의 업무일 뿐이었다.


“그래 뭐······ 진욱 씨 얘기는 잘 알겠어. 아직 처리해야 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해보죠. 일주일 드릴게요.”


김 부장은 손이 허전했는지, 모니터 옆에 있던 펜을 잡고 손바닥을 툭툭 치며 말하였다.

김 부장이 말을 끝내자, 책상에 떠다니던 서류들이 모이더니 진욱의 단말기로 전송되었다는 알림창이 떴다.


“서류는 방금 단말기로도 보냈으니까, 집에 가서 생각해 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욱은 마저 일어섰다.

그러고 곧바로 김 부장을 뒤로하고, 들어왔던 문으로 향하였다.


김 부장은 진욱이 일어서자 펜을 치는 것을 멈추고 어색하게 소파에 기대었다.

김 부장은 묵묵히 진욱이 나갈 때까지 똑바로 진욱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진욱이 나가자 김 부장은 책상을 펜으로 내리쳤다.

화난 느낌은 아니었지만, 미묘하게 엇박자가 났다.


“싸가지없는 놈, 끝까지 인사 한번 안 하네.”


진욱이 나간 문을 계속 쳐다보던 김 부장은 결심한 듯 책상으로 돌아가 손을 저었다.

김 부장은 모니터에 띄워진 진욱의 인사카드를 보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커서가 인사담당자 의견 항목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작가의말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온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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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12장 죄가 없어지진 않아요. (3) +2 21.02.26 85 0 7쪽
96 12장 죄가 없어지진 않아요. (2) 21.02.25 83 0 8쪽
95 12장 죄가 없어지진 않아요. (1) 21.02.24 77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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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10) 21.02.22 82 0 7쪽
92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9) 21.02.21 110 0 7쪽
91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8) 21.02.21 80 0 7쪽
90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7) +2 21.02.20 97 1 7쪽
89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6) 21.02.20 118 0 8쪽
88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5) 21.02.19 80 0 7쪽
87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4) 21.02.18 88 0 7쪽
86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3) 21.02.17 86 0 7쪽
85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2) +2 21.02.16 114 1 7쪽
84 11장 박사에게 할 말이 많군. (1) 21.02.15 96 0 7쪽
83 10장 본질적인 문제? (11) +2 21.02.14 96 1 7쪽
82 10장 본질적인 문제? (10) 21.02.14 92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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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10장 본질적인 문제? (8) 21.02.13 88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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