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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 님의 서재입니다.

배같은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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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까르
작품등록일 :
2020.01.17 23:48
최근연재일 :
2021.02.27 22:00
연재수 :
8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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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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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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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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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84. 가족 망쳐놓기 下 - 16

DUMMY

시간이 흘러, 나는 민후 형 오피스텔에 들어와 큰방 침대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너머 변기 내리는 소리와 함께 민후 형은 큰방으로 들어와 얼굴을 찡그렸다. 젖은 손을 가볍게 터는 모습에 나는 무안한 표정으로 민후 형과 대면했다.


"죄송해요. 신세만 지게 만들고."


"괜찮아. 일이 잘 해결됐으니 됐지 뭐."


민후 형은 컴퓨터 본체의 전원을 누른 뒤 책상에 앉아 조금씩 손을 풀어갔다. 나는 아직도 메슥거림이 머지지 않아 매사마다 속이 뒤집히는 걸 절제해야만 했다. 컴퓨터 배경화면에 여러 프로그램들이 실행될 즈음 민후 형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걸터앉지 말고 아예 안쪽 벽에 붙어있어. 마스크도 좀 벗고 있고."


"네."


민후 형의 지시에 맞게 벽에 몸을 대자 내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방금 전에 마셨던 소화제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예 눈을 감은 채 양손을 포개 배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흥건히 맺는 땀에 나는 아예 모자도 벗어 마스크 옆에 얹어두었다. 너머로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민후 형, 웹툰 루트 결정한다고..."


"말 안 해도 돼. 이미 결정해서 올렸거든."


"네?"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아직 11시 10분 전이긴 한데, 미련이 없어서. 그냥 예약 연재로 올려버렸어."


"그럼 지금 하시는 작업은 어떤 거죠?"


"에필로그랄까? 그동안 봐준 팬 분들도 있고, 막판에 출판사에 무리한 제안을 걸었던 것도 있으니까 요 정도는 해볼까 싶어서."


"그렇군요."


나는 눈을 떠 민후 형 밖으로 새 나오는 컴퓨터 화면을 살펴보았다.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과 타블렛을 쓰는 걸 봐선 라스트 카드 같은 걸 그리려는 모양이었다. 민후 형의 손놀림에 따라 그림은 스케치에서 완성된 구도를 갖추서 채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민후 형은 타블렛 펜을 손가락 틈으로 굴리며 옷감 부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강연아, 지금 괜찮아?"


"네, 많이 좋아졌어요."


"그러면 옆에 보이는 옷장에서 그, 내 청자켓 좀 꺼내 줄래?"


"네!"


나는 가볍게 몸을 푼 뒤 침대에서 나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 울렁거림은 있었지만 훨씬 나은 상태였다. 그 후 침대 발판 쪽으로 이동해 옷장을 열어보았다. 스테인리스 철봉으로 세팅된 홀더 왼쪽 끝 부분에 플라스틱 옷걸이에 걸린 연청색 청자켓이 걸려 있었다. 나는 조심히 청자켓을 꺼내 창문가 쪽으로 민후 형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이거 맞나요?"


"맞아! 잠깐만 기다려 봐."


민후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건네받은 청자켓을 현 차림새 위에 그대로 걸쳐 입었다. 나는 민후 형에게 옷걸이를 건네받고 다시 옷장으로 가서 있던 자리에 옷걸이를 걸어두었다. 내가 옷장 문을 닫고 뒤돌아볼 즈음, 민후 형은 다시 자리에 앉아 왼팔을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잠시 소매 부분을 주시하나 싶더니 바로 타블렛 펜을 잡아 스케치해두었던 소매 부분을 고친 뒤, 청자켓에 맞는 질감으로 채색을 이어나갔다. 민후 형의 행동 방식에 나는 저번에 봤던 종이 서류 속 일러스트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민후 형은 매번 질감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일단은? 추상적이라도, 부분적인 특징들을 어렴풋이 표현하면 전체적으로 그림이 깔끔하게 나오니까."


"매번 그림에 정성을 쏟으시는군요."


"뭘 그렇게 까지. 됐고, 슬슬 웹툰 확인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죠 참."


나는 휴대폰을 꺼내 '가족 망쳐놓기'의 마지막화 썸네일을 확인했다. 그동안 민후 형은 계속해서 청자켓을 구기며 색감을 살리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나는 스크롤 하나하나를 넘기며 그동안 있던 일들과 마지막화에 담긴 삽화와의 방향성을 확인하려 들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전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끝이라는 문구 뒤로 나는 민후 형에게 눈길을 돌렸다. 민후 형은 내게 눈치를 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내가 구상한 전개 중 전자에 해당돼. 너도 봤다시피 여편네가 워낙 고집이 세고 비겁하잖아. 그래서 망을 친 자가 다시 망을 거둬 사라지는 전개로 가면 어떨까 생각해봤던 거지."


나는 민후 형의 얘기에 맞게 해당된 컷신을 다시 확인해갔다. 주인공이 동생에게 큰 선물을 안긴 뒤 가족과의 미련을 떨치고 이별을 자초하는 방향으로 다음 컷신들이 이어졌다.


"네가 보기엔 어떻게 생각해?"


나는 다시 마지막화를 전체적으로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어머님이 아니라 주인공 동생 중심으로 보면 깔끔하게 줄거리가 짜였다고 생각해요. 제목이 가지는 색깔도 잘 묻어났구요."


"다행이네. 독자들 반응은 어때?"


나는 곧잘 웹툰 바로 아래쪽 툴팁을 눌러 댓글창을 열어보았다.


"좀 난해한 것, 같아요. 작품이 일순간에 뒤집혀서 그런지 여러 유형의 댓글들이 난잡하게 뒤섞이고 있어요."


"그래?"


민후 형은 책상에 양팔을 괴며 무언가를 사색하는 듯 보였다. 그것도 잠시, 민후 형은 고개를 저어 쥐던 타블렛 펜으로 다시 그림을 그려갔다.


"에라 모르겠다. 아마 후자로 스토리를 돌렸으면 지금보다 더 심했을 거니까."


"후자는 어떤 스토리였죠?"


"말도 마. 해피 엔딩에 치중한 나머지 용두사미가 될 뻔했으니까."


민후 형은 그림 그리던 걸 멈추고 몸을 뒤로 젖혀 짧게 기합 소리를 내었다. 그 후 내 쪽으로 컴퓨터 의자를 아예 돌려 눈을 마주쳤다. 상기된 표정에서 잃지 않는 미소가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여편네가 선물을 보고 돌연 기뻐해 가족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었지."


나는 그제야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전개였다면 좀 엉성하게 될 뻔도 했네요."


"그래도 고민이었지. 열린 결말보다는 해피엔딩으로 가는 게 짧게 맺는 웹툰에 좀 더 적합하다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현실에 상이되는 전개를 그리는 게 아무래도 좋을 것 같더라고."


나는 손에 턱을 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민후 형은 푸흡 웃음을 터트리며 타블렛 펜을 이리저리 돌려댔다.


"그거 알아 강연아?"


"네?"


"네가 우리 가족 앞에 나타나면서 계획이 틀어졌었잖아. 아마 그거 없었으면 현실이 후자가 되진 않았을 걸?"


"네?"


나는 민후 형이 뭐라 얘기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후자에 관한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나 되뇌는 순간.


'아...'


내 깨달음에 민후 형은 또다시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나 또한 민후 형과 같이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둘의 웃음은 점점 커져 큰방 이곳저곳을 공명했다.


"그렇게 민후 형과의 거래를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여기까지가 그동안 있던 일들이야."


"참 복잡한 걸."


코스프레 당일, 나와 선유는 스튜디오 의자에 걸터앉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갔다. 선유는 저번과 같은 엘프 궁수 복장을 입은 채로, 나는 얇은 철제 투구까지 찬 흑기사 갑옷을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선유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유나와는 어떻게 됐어?"


"아 그 망할 계집? 진짜 난장판이었지."


나는 철제와 사슬로 뒤덮인 손 부분을 선유 앞에 들어 보였다.


"청소하는 데 3시간, 옷 좀 봐주는 데 3시간, 밥 먹는 데 2시간, 화장 관련해서 3시간. 총 11시간 동안 그 계집 집에서 각종 시중은 다 들었다니까! 죽는 줄 알았어."


선유는 말없이 까르르 웃기 바빴다. 나는 몸을 뒤로 젖히다 철 투구가 벽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가 머리 전체에 울러 펴졌다. 선유가 다가옴에 나는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우리 쪽 회장 계집도 문제라니까. 이러다 여드름 가린 화장 다 무너지겠어."


"조금만 참자. 오늘을 위해 다들 준비 많이 했잖아."


그때 바깥쪽 문을 거세게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선유가 눈치챌 새도 없이, 미로는 문을 닫고 우리 앞으로 재빨리 다가섰다. 미로 또한 저번과 같은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강연 선배! 말 좀 해봐요."


"왜 갑자기?"


"갑자기요? 그건 제가 할 소리예요! 왜, 왜 민아가 저희 아파트로 이사 오는 건데요?"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민아한테 다 들었어요! 선배 그동안 민아네 가족 관련해서 조력자 역할 해왔다면서요. 그럼 이 사태가 뭔지 대충 아실 거 아니에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민아네 집이면 민아네 가족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잖아."


"아, 그게 뭐예요? 가뜩이나 옆 동이라서 매번 봐야 한단 말이에요!"


미로는 양손으로 마법사 모자를 움켜쥔 채 절규할 뿐이었다. 선유는 이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내쪽을 바라보았다.


"강연이 네가 예전에 해준 얘기가 생각나네."


"어떤 거?"


"나미 선배랑 하련이랑 같이 아웃렛 갔을 때 있잖아. 그때 호기심 많은 양이 왜 시대를 거듭해도 생겨나는지 얘기해줬잖아."


이에 나도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바뀌려 하기 때문에 양도 자연스레 바뀌는 방향에 호기심을 가지려 한다,였나?"


"맞아 정확해! 그 상황이 지금 미로 상황 같지 않아?"


나는 다시 미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깐의 텀이 지난 후에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러네. 어떤 누가 미로랑 민아가 같은 아파트에 살 생각을 했을까?"


"아마 민아가 그러지 않았을까?"


"선유 선배!"


미로의 혼란스러운 감정 밖으로 나와 선유는 그저 웃으며 상황을 가볍게 넘어갔다. 잠시 뒤, 스튜디오 뒤쪽 문이 이 열려 그 사이로 1학년 오퍼레이터 담당 여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로랑 선유 선배, 무대 위로 올라올 시간입니다."


선유는 손을 흔들며 알겠다는 사인을 전했다. 나는 선유 옆에 놓인 활을 집어 선유가 다 올라설 즈음에 위로 건네주었다.


"고마워 강연아."


"뒤따라 올라갈게."


선유와 미로가 무대 위로 올라서는 순간, 엄청난 함성이 스튜디오 벽을 강타해 이곳저곳을 공명했다 그중에서도 민아의 샤우팅이 압권이었다. 나는 철 투구 사이로 한번 더 공명이 와 가벼운 두통을 호소했다. MI로를 외치는 미로파부터, 코스프레를 보기 위해 모인 여학생에 교직원 분들까지 그야말로 혼선이 따로 없었다.


"여러분! 사진 플래시는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무대 측에서 불편해합니다!"


레미 여학생 부원들이 사진을 찍지 말아달라는 권고를 수없이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플래시와 소리만 없다면 그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카메라를 숨기는 일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즉, 졸업 사진이 아니더라도 SNS 같은 곳에서 퍼질 예정이란 뜻이었다. 현재 무대에선 선유와 미로, 그리고 내 모자를 거꾸로 쓴 동수가 센터에 자리잡고 있었다. 회장이 되었단 이유 하나 만으로 무대에 한번 발을 들인 것이다. 몇 분뒤, 스튜디오 뒤쪽 문이 열린 뒤 익숙한 표정의 소유자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 이제 가셔야 되는데요?"


"알고 있어. 뒤처리나 잘해주세요."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계단 한칸 한칸을 올라갔다. 그 뒤에선 므훗한 표정으로 내게 부리부리한 시선을 쏘는 하련이 있었다. 나는 뒤도 안보고 스튜디오 뒷문을 통해 무대 위로 올라섰다. 때마침 동수가 나를 보며 과장되게 놀란 티를 내었다.


"이게 누구신가? 이젠 아예 모든 몸을 가리겠다 전교생에게 선전포고하는 걸까?"


나는 별 대꾸없이 무대 센터에 자리를 잡아갔다. 환호성이 터져나올 거란 예상과 달리, 관객들은 일제히 침묵한 채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중앙석에 앉아있던 유나조차 내 모습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꿉꿉하고 더운 곳에서 이 철 투구를 벗어던질 시간이었다. 양손을 통한 기민한 조치로 철 투구는 가볍게 빠져 옆에서 대기하던 동수의 손에 그대로 쥐어주었다. 동시에 내 주변으로 흑발의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조명 빛을 받아 찰랑거렸다. 나는 머리카락을 튕기 듯 뒤로 가볍게 넘기며 다시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내 단적인 시선에 관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 듯 보였다. 무대에 있던 선유와 미로, 동수마저도 침묵한 채 제자리에 얼어붙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내가 이런 이벤트를 준비할 거라 사전에 예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이크를 잡아 몇 번 가볍게 두들겼다. 후후 불며 테스트를 마친 순간 나는 주변을 서성이며 관객들을 둘러보았다. 플랜 B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다들 그렇게 환호해놓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대?"


여성적인 톤과 함께 나는 왼쪽 허리춤에 쥔 검집을 잡고 관객 앞에서 새까만 칼날의 글라디우스를 뽑아 높게 치켜올렸다.


"그 어떤 누가 흑기사가 남자일 꺼라 단언했는가? 내가 지금 이곳에 나타나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거늘."


잠깐의 정적 후, 나는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있던 곳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경건하고 엄숙한 자태 속에서 나는, 초전 박살된 멘탈을 어떻게든 다잡으려 안달이 난 상태였다.


'하련 그 망할 계집! 죽고 싶다 진짜!'


선유와 미로는 이미 스튜디오로 시선을 돌린 뒤였다. 나를 대신하여 목소리를 낸 사람은 하련으로 금주 평일에 내게 여장을 해달라는 제의를 걸어온 참이었다. 나는 단호히 거절하며 피하려 했다. 이에 맞서 하련 그 계집은 유나가 철 투구를 벗겨버리면 정체가 탄로 날 수 있다며 나를 연이어 회유하려 들었다. 내가 계속해서 거절하며 마스크를 쓴 채로 철 투구를 쓰는 순간, 나는 하련의 말에 승복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갑갑하고 딱딱한 철 투구에 마스크가 달라붙어 제대로 호흡할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사라졌던 것이다. 나는 몇 초도 안되어 철 투구를 벗으며 괴로워했고, 하련의 음흉한 표정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선유와 미로의 멋쩍은 시선 사이로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다시 관객을 향해 눈동자를 굴려댔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이었다.


'부끄러워...'


나는 결국 표정을 일그리며 입술을 매섭게 떨기 시작했다. 시선은 숙인 채 몸을 부르르 떤 끝에, 결국 미로의 뒤에 숨어 부끄러운 감정을 감추려 들었다.


"부, 부끄러워..."


이를 놓치지 않는 하련이었다. 외강내유의 성격을 가진 한심한 흑기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잠시 뒤, 관객 쪽에서 여학생들의 비명이 가까이서 들려왔다.


"유나야 괜찮아?"


"유나야!"


나는 듣자마자 다시 자세를 갖춰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선유와 미로도 나를 뒤따라오며 유나가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유나는 몸을 비틀거린 채 휴지를 코에 갖다 대는 중이었다. 미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내게 가까이 붙였다.


"코피, 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 앞 휴지가 바깥쪽으로 빨갛게 물들어 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유나는 다시 자세를 잡고 주변 SMK 계집들의 부축임을 떨쳐냈다. 손에 휴지를 쥔 채 꼼지락대는 것 같더니 다른 쪽 손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 방향을 향해 정확히 겨냥했다.


"이건 못 참지..."


유나의 엄지손가락은 화면 우측에 정확히 고정되어 간격을 맞추며 연속적으로 눌러댔다. 이는 즉...


"다들 사진 찍어!"


"이번 교지 1면 확정이닷!"


"난사!"


순식간에 수많은 휴대폰 카메라들이 무대 쪽을 겨냥하며 우리의 존재를 쉴 새 없이 찍기 시작했다. 교직원 분들의 만류가 이루어졌으나 많은 인파의 촬영을 막아낼 인파가 되질 못했다. 나는 다시 뒷걸음질 치며 공황 상태에 빠진 것만 같았다. 수많은 교직원 분들이 앞을 가릴 동안, 선유와 미로는 내 옆에 붙어 질겁한 표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선유야..."


"선배..."


'다들 똑같구나. 여장한 얼굴이 팔리게 생겼네.'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막바지에 다다른 촬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누군가 실수로 촬영 플래시를 켜 섬광이 터진 순간.


'어?'


플래시가 켜진 짧은 순간, 나는 익숙한 얼굴을 왼쪽 구석 방향에서 잡아낼 수 있었다. 틀림없었다. 은정이 남들의 시선을 피해 강당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시선을 모아 은정을 찾으려 했으나 조명이 꺼진 탓에 더 이상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나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왼쪽 부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대의 막이 저문 뒤, 나와 선유, 미로는 옷도 벗지 못한 채 스튜디오 계단에 걸터앉았다. 눈앞에 아지랑이가 이는 것만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련은 이를 유유히 지켜보며 쾌활한 미소를 지었다.


"무척이나 화려한 신고식이었어! 다들 도와줘서 고마워!"


나는 가발을 머리에서 벗겨내 철 투구 위에 이리저리 쑤셔 넣었다. 하련은 보자마자 놀라더니 내게 철 투구를 뺏어갔다.


"야! 다 반납해야 되는 거야! 함부로 다루지 말아 줄래?"


"이 꼴을 저질러놓고 우리가 기뻐할 줄 알았어? 됐고 좀 나가 있어. 옷 좀 갈아입게."


"칫, 누님한테 상황 설명이나 잘해드려. 괜히 놀라게 만들지 말고."


"뭐, 야!"


이번에도 하련의 잽싼 움직임은 건재해 보였다. 하련은 조심히 스튜디오 앞쪽 문을 열어 강당을 빠져나가려 했다. 이번에는 교직원 분들까지 붙을 정도로 스튜디오 주변 경비가 매우 강력한 상황이었다. 전교생들은 물론, SMK 계집들마저 도움반 선생님의 호출로 나타난 누나 탓에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기 바빴다. 유나는 멋대로 덤비려 하다 이번에는 박치기로 저 멀리 날아가 의자 밭에 고꾸라졌단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철갑을 벗은 뒤 얼굴에다 아세톤 분무기를 뿌려 매트한 화장을 녹여버렸다. 클렌징 티슈로 슥슥 닦아주니 민낯으로 다시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할 수 있었다. 입어둔 검은색 기능성 반팔에 화장품이 묻어 이곳저곳 깨끗이 닦아야만 했다. 선유는 미로의 로브에 묶인 매듭을 풀어주는 중이었다.


"선유 선배, 저 민아하고 어떻게 지내죠? 집들이 초대장도 받은 거 있죠."


"알아서 처신 잘해줘. 그래도 민아는 널 무척이나 좋아하는 거지, 소유하려 집착하는 건 아니잖아."


"규리도 그러진 않았어요. 하, 모르겠다. 2학기부턴 아침 일찍이 원예 당번이라도 서야겠어요."


나도 미로에게 붙어 반대쪽 로브 매듭을 하나둘씩 풀어갔다. 나는 선유와 미로를 번갈아보며 왠지 모를 후련한 감정을 느꼈다.


"1학기 동안 다들 고생 많았어."


선유와 미로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둘 다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강연이 너도 고생 많았어."


"선배가 제일 고생했는 걸요."


우리 셋은 서로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둘의 어깨는 그때 망할 아줌마의 품과는 완전히 다른, 포근함과 아득함으로 내 허한 감정을 채워주었다.


오늘은 종례 뒤에 무대 행사를 진행한 터라, 무대만 대충 정리하고 바로 하굣길에 접어들 수 있었다. 미로와 선유가 승준이도 엮어 PC방을 가자 제안했으나, 좋아하는 게임이 없어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내가 교문 정문에 다다를 터, 왼쪽에서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광중학교 교복이란 걸 확인할 터, 나는 눈을 희번덕 뜨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희?"


"아직 계셨군요."


소희는 숨이 찰 정도로 숨을 헐떡거렸다. 생각해보니 원래 우광중이 마칠 시간이 이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망할 계집들 때문에 내 시간 개념도 조금씩 이상한 쪽으로 변질되는 모양이었다. 소희는 금세 기력을 차리더니 내게 해맑은 웃음을 보였다. 이전보다도 피부 흉터가 제법 아문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오빠 혹시 시간 있으세요?"


"왜?"


"다른 건 아니고, 저희 엄마 아는 분이 제과점 맛집 사장님이세요. 거기서 엄청 맛있는 민트초코 케이크가 생겨서 오빠한테 선물해드리고 싶어서요."


"오, 민트초코야?"


"네. 그 오빠 졸졸 따라다니는 애들 얘기 듣기론, 강연 오빠가 민트초코를 좋아하신다고 들어서요."


"맞아! 하지만 민트초코도 다 같은 민트초코는 아니야. 맛있는 민트초코인지는 내가 직접 먹어봐야 알 수 있지."


"그럼 집으로 오셔서 맛 좀 봐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요즘 민트초코도 못 먹은 차라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벌써부터 민트초코를 입안에 듬뿍 넣을 수 있단 생각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아 맞다!"


소희는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리다 안에서 자그마하게 접힌 하얀색 종이쪽지를 꺼내 들었다.

"이거, 가던 길에 오빠한테 주라고 했어요."


"이걸? 누가?"


"모르겠어요. 같은 교복 입은 애가 이걸 건네주고 저 멀리 가던데요? 오빠에 관해 물어보니까 줬던 것 같아요."


나는 종이쪽지를 건네받아 그 자리에서 재빨리 펴보았다. 잠깐의 정적 후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종이쪽지를 접어 내 교복 바지 주머니에 넣어뒀다.


"무슨 내용이에요?"


"비밀."


나는 다시 바지주머니 쪽을 보며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경 쓰는 것도 이젠 피곤해. 가자!"


"네."


나와 그렇게 교문을 빠져나와 민트초코 케이크를 먹을 순간을 기대했다. 내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진 작은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언니 관련된 일은 잘못했어. 됐지? -조은정-'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드디어!!!


길고 길었던 ‘배같은 동생’ 2부가 막을 내렸습니다. ^^

2020. 05. 02 ~ 2021. 02. 27


생각보다 너무 길어져서 일반 라노벨 2권 분량이 되었군요.

그동안 제 작품을 관심가져준 2000번의 클릭과 10분의 구독자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부족한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벌써 50만 자를 향해 간단 게 믿겨지지 않는 군요.

그러나, 저는 아직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동생’ 카테고리 웹소설 1페이지 진입, 1부~2부 문체 및 스토리 정리/ 일본 사이트 ‘소설가가 되자’에서 정리된 스토리를 번역한 작품 연재하기 등이 있습니다.


이제야 저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이용한 ‘배같은 동생’ 외전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스토리를 배제하고자 강연과 동수 간의 스토리로 주를 이룰 예정입니다.

이 작품은 굉장히 강한 상대가 나올 예정이니 미리 유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는 마무리 인사를 지으며 이 파트는 16부작으로 완필됨을 알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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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같은 동생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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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69. 가족 망쳐놓기 下 - 1 20.12.07 34 1 12쪽
69 68. 가족 망쳐놓기 上 - 8 20.11.30 29 1 11쪽
68 67. 가족 망쳐놓기 上 - 7 20.11.30 23 1 11쪽
67 66. 가족 망쳐놓기 上 - 6 20.11.24 26 1 13쪽
66 65. 가족 망쳐놓기 上 - 5 20.11.17 27 1 12쪽
65 64. 가족 망쳐놓기 上 - 4 20.11.10 29 1 11쪽
64 63. 가족 망쳐놓기 上 - 3 20.11.03 27 1 11쪽
63 62. 가족 망쳐놓기 上 - 2 20.10.27 40 1 11쪽
62 61. 가족 망쳐놓기 上 - 1 20.10.19 46 0 12쪽
61 60. 메마른 기억 - 7 20.09.18 35 0 12쪽
60 59. 메마른 기억 - 6 20.09.08 29 0 12쪽
59 58. 메마른 기억 - 5 20.08.31 29 0 11쪽
58 57. 메마른 기억 - 4 20.08.24 34 1 11쪽
57 56. 메마른 기억 - 3 20.08.19 28 0 11쪽
56 55. 메마른 기억 - 2 20.08.10 28 0 11쪽
55 54. 메마른 기억 - 1 20.08.03 27 0 11쪽
54 53.빛바랜 거울 - 7 20.07.27 35 0 13쪽
53 52. 빛바랜 거울 - 6 20.07.20 35 1 14쪽
52 51. 빛바랜 거울 - 5 +2 20.07.13 38 1 13쪽
51 50. 빛바랜 거울 - 4 20.07.06 37 0 12쪽
50 49. 빛바랜 거울 - 3 20.06.29 36 0 12쪽
49 48. 빛바랜 거울 - 2 20.06.25 36 0 12쪽
48 47. 빛바랜 거울 - 1 20.06.22 35 0 12쪽
47 46. 어긋난 조각 - 6 20.06.15 32 0 11쪽
46 45. 어긋난 조각 - 5 20.06.09 34 0 11쪽
45 44. 어긋난 조각 - 4 20.06.04 39 0 11쪽
44 43. 어긋난 조각 - 3 20.06.03 45 0 12쪽
43 42. 어긋난 조각 - 2 +1 20.05.20 37 2 11쪽
42 41. 어긋난 조각 - 1 20.05.15 31 0 13쪽
41 40. 마땅한 복수? - 5 20.05.13 3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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